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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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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중앙사무총장
한문 任弼時
한국식 독음 임필시
영문 Ren Bishi
출생 1904년 4월 30일 청나라 후난성 샹인현
사망 1950년 10월 27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직업 정치가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공산당의 영수2.3. 중일전쟁 시기2.4. 국공내전 시기2.5. 사망
3. 가족 관계4.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1922년 18세의 나이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공농혁명홍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중국 공산 혁명에 크게 기여해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의 원훈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국공내전 기간에 중병에 걸려 섬북, 베이징, 소련 등지에서 몸조리하다가 1950년 뇌졸중으로 요절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런비스는 1904년 4월 30일 후난성 샹인현의 한 시골 교사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7살 때 아버지가 교사로 일하고 있는 명덕소학교에 입학했고 10살 때인 1914년에 부친을 따라 숙당향 서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1915년, 런비스는 후난성 제1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 고등과에 입학했고, 1918년엔 청사 사립명덕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이듬해 호남 제1연합 현립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던 중 5.4 운동에 가담한 런비스는 마오쩌둥과 친분을 맺었고 마오쩌둥 등 창사 시의 중국 지식인들이 설립한 러시아어 연구회에 가입했다. 마오쩌둥은 그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했으며 런비스가 상하이로 가서 러시아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차비를 건네줬다고 한다.

런비스는 상하이에서 사회주의 청년회에 가입했고 1921년 5월에 류사오치, 샤오진광(蕭勁光), 장광츠(蔣光慈), 차오징화(曹靖華), 오보악(吳葆萼)과 함께 상하이에서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 후 1921년 8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동방대학에서 학습했으며 '브린스키(Бринский)'라는 소련 이름을 사용했다. 1922년, 런비스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취추바이의 뒤를 이어 서양 혁명운동사 강사 및 러시아어 번역가가 되었다. 1924년 7월 24일 대학을 졸업한 런비스는 천옌넨(陳延年)[1], 정차오린(鄭超麟)과 함께 귀국길에 올라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서 1924년 8월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상하이 대학에 가서 러시아어 교수를 맡았으며 1924년 9월 장쑤성 저장구 위원회 위원을 맡아 <중국청년> 및 <서민의 벗> 등의 간행물 편집을 담당했다.

파일:1926任弼时.png
1926년경 런비스.

1925년 1월, 런비스는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해 의장단 일원으로서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을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으로 바꾸는 데 일조했다. 이후 런비스는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뒤이어 3기 1차 집행위원회에서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중앙국 상무위원 및 조직부 주임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5월 6일, 런비스는 청년단 중앙총서기 대리로 임명되었으며 상하이에서 발발한 5.30 운동에 가담했다. 5.30 운동이 흐지부지되자, 런비스는 <상하이 5.30 참극과 중국 청년의 책임>을 집필해 "혁명의 중견 역량은 농민과 노동자이며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의 지도자들 중 농민과 노동자의 비율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청년단 구성원을 확대시켰다.

1925년 7월 21일, 런비스는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중앙국 총서기 및 조직부 주임을 맡았다. 그후 1926년 10월 모스크바로 떠나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을 대표해 제6차 확대회의에 참석했다. 1927년 3월 중국으로 귀환한 그는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우한에서 중국 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를 긴급 소집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우한의 국민당 정부와 협력해 장제스가 이끄는 난징의 국민당과 맞섰다. 그러나 그는 천두슈 공산당 총서기와 결등을 빚었고 왕징웨이가 7월 15일에 국공합작을 완전히 끝내고 공산당 체포령을 내리는 바람에 우한의 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었다. 이에 런비스는 8월 7일 한커우에서 열린 긴급회의에 참석했고 취추바이, 마오쩌둥과 함께 천두슈의 노선에 반대하며 토지 혁명을 주장해 천두슈를 축출하고 당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등극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런비스는 중국 공산당 임시 정치국 위원에 당선되었고 9월 19일 후난성으로 가서 샹난(湘南) 폭동을 기획했다.

2.2. 공산당의 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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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11월 중국 공산당 중앙 소비에트 위원 단체 사진. 왼쪽부터 구줘린(顧作霖), 런비스, 주더, 덩파(鄧發), 샹잉(項英), 마오쩌둥, 왕자샹

1928년 4월, 런비스는 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회의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리웨이한(李維漢), 워덩셴(羅登賢)과 함께 상하이에 잠입했다. 그는 이 시기에 <백색테러에 대비한 조직의 정비와 비밀 공작>, <황색노조에 대한 전략>, <도시, 농촌사업 지침>, <군사사업 대강> 등의 문건 초안을 집필했는데, 그중 군사사업 대강은 최초의 홍군 건설 강령이었다. 그러던 1928년 10월 15일, 런비스는 안후이성 남릉현에서 공산주의 청년단 조직의 집회에 참가했다가 현지 지주들이 조직한 무장 경비대에게 체포되어 교도소에구금되었다. 1928년 말 공산단 중앙위언회에서 선임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출소되어 상하이로 돌아왔지만, 그의 장남이 폐렴으로 요절하는 비극에 직면해야 했다.

1929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를 중국 공산당 장쑤성 위원회 상무위원 및 선전부장에 임명했다. 그해 8월 13일, 런비스는 중국 공산당 강소성 위원회 서기 대리를 맡았으며 <금일신보>, <교육 주간>, <상하이 일간 신문>을 발행했다. 그러나 11월 17일 공산당 조직 기관회의에 참석하던 중 조계당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수차례의 전기 고문을 받았으나 자백하지 않았고, 저우언라이가 그를 위해 선임한 변호사 판첸야(潘震亞)는 법정에서 조계당국의 중국 사법주권 간섭을 통렬히 질책했다. 이에 조계당국은 여론의 압력에 의해 런비스에게 징역 40일이라는 가벼운 형량을 선고했고, 런비스는 12월 25일에 석방되었다.

1930년 4월, 중국 공산당 허베이성 당서기를 지낸 그는 8월 허베이성부와 양쯔강부가 합친 총행동위원회의 위원을 맡았다. 그해 9월 4일, 그는 중국 공상당 우한시 당서기를 맡았지만 리리싼의 창사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중국 공산당이 양쯔강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면서 그 역시 상하이로 돌아갔다.1831년 1월 7일, 런비스는 중국 공산당의 6기 4중전회에 참석해 다시 중앙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2월 13일에 중앙 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어 왕자샹과 함께 홍콩, 광저우를 거쳐 중앙 소비에트 지구로 이동했다. 그해 11월, 장시성 루이진에서 열린 간남회의에 참석한 런비스는 당 건설문제 결의안을 채택하고 마오쩌둥의 경험주의 사상을 비판했다. 이후 중국 소비에트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했으며 11월 7일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한편 중국 공산당 내에선 노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1931년 8월 26일 중국 공산당 중앙이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르는 결의한을 채택했지만 상하이 임시 중앙은 9월에 "명확한 계급 노선과 충분한 군중 업무가 결여되어 있다."며 중앙의 결의안을 비난했다. 이후 중국 공산당 임시 중앙은 상하이에서 국민당 비밀 경찰들의 탄압이 거세지자 장시성 소비이트로 이주했다. 그러나 대립은 오히려 거세졌고 급기야 공산당 중앙은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AB단"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때 런비스는 많은 간부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지만 수천명에 달하는 간부들이 숙청되는 걸 막지 못했다.

1932년 7월, 런비스는 중앙 소비에트 서기 대리를 맡았다. 이 시기 공산당 중앙은 국민당의 제4차 초공작전에 맞서 적극적인 공세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했고 10월 상순에 닝두 회의를 열어 게릴라 전술로 일관하는 마오쩌둥의 군권을 박탈하고 저우언라이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런비스도 닝두회의에 참석해 마오쩌둥을 거세게 비판했다. 그러나 1933년 5월, 런비스는 보구, 왕밍과 대립했다가 중앙국 조직부장에서 해임되고 샹간(湘贛)구 위원회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런비스는 부임 후 샹간 구가 당 중앙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조직 전반이 와해되어 있는 상황을 확인하고 즉시 숙청작업을 중단하고 왕서우다오(王首道), 장계룡(張啟龍) 등의 장군들을 석방했으며 홍군 부대를 확대해 홍6군을 창설해 16,17, 183 사단을 관할했다. 또한 그는 12월에 샹간 군구정치위원을 겸임했다.

1934년 8월, 런비스는 국민혁명군의 제5차 초공작전으로 샹간 일대가 위험해지자 홍6군을 철수시키는 임무를 수행헀다. 그후 10월 24일 구이저우에서 홍3군과 합류했다. 홍3군은 홍2군단으로 개편되었으며 허룽이 군단장을 맡고 런비스는 홍2군단 정치위원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허룽과 런비스는 홍 2군단과 홍6군을 동시에 지휘하게 되었다. 이후 군사위원회는 홍2군단에게 구이저우 동부 지역을 방비하고 홍 6군은 단독으로 서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허룽과 런비스는 의논 끝에 중앙의 지시를 거부하고 힘을 합해 서진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11월, 홍2군단과 홍6군은 후난으로 진격해 상악천(湘鄂川) 소비에트 구역을 설치했고 런비스는 상악천 임시 당서기 겸 군구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1935년 1월,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상악천을 공격하자, 런비스는 거세게 맞섰으나 패전을 거듭하자 철수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그해 11월, 그는 허룽, 관샹잉 등과 함께 후난성 쌍즈현(桑植县)에서 국민혁명군을 일시적으로 격퇴한 뒤 철수했다. 1936년 7월 2일, 허룽 등과 함께 홍2군단과 홍6군을 이끈 런비스는 쓰촨성에 도착해 장궈타오의 홍4군과 합류했다. 홍 2,6군단 및 홍32사단은 홍2방면군으로 결집하고 런비스는 홍2방면군 정치위원이 되어 홍2방면군 정치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후 런비스는 장궈타오와 함께 쓰촨성에서 공산당 근거지를 결성하려 했지만 국민혁명군에게 완패당하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1군이 수립한 산시성 근거지로 도주했다. 1936년 10월 옌안에 도착한 런비스는 홍군 총지휘부 정치위원을 맡았고 펑더화이와 협력해 산시성에 진입한 장쉐량의 봉천군벌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그는 12월에 중국 공산당 혁명 군사위원회 위원을 맡았으며 주석단 위원을 겸임했다.

2.3. 중일전쟁 시기

1936년 12월, 서안 사건이 벌어졌다. 그후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중단하고 국공합작을 재개해 일본의 침략에 공동 대응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런비스와 펑더화이는 1937년 1월에 서안에 가서 양후성, 왕이철(王以哲)과 면담했고 동북군, 국민혁명군 제 17로군 등을의 통일 전선 결성 작업을 수행하며 간부들과 함께 홍군의 개편 문제를 토론했다. 그해 8월 22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전방분회 구성위원으로 임명된 런비스는 9월 초에 주더, 쭤치안(左權), 덩샤오핑 등과 함께 산시성 항일 전선으로 향했다.

1938년 3월, 런비스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모스크바에 가서 코민테른과 교섭했으며 7월에는 왕자샹의 뒤를 이어 코민테른 중국 공산당 대표에 취임했다. 1940년 3월 26일, 런비스는 옌안으로 돌아가 중국 공산당 중앙 서기처의 업무에 참가하여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 청위, 부위를 관활했다. 또한 1941년에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에 참석해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 준비 작업에 가담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중국 공산당 서기장을 역임했다.

1942년, 런비스는 정풍운동에 참가해 영변구 학습위원회를 이끌며 "정병간정(精兵簡政: 군부 정예화와 정치 간소화)"을 지도했다. 그후 1943년 3월 런비스와 마오쩌둥, 류사오치는 중앙서기처를 구성해 중앙조직우원회 구성원으로서 산시성, 진시 일대의 업무를 구체적으로 담당했고 다음달에는 팔로군 서안 사무소를 직접 맡았다. 1944년, 그는 경제 좌담회를 주재해 산시성 경제 건설,금융 무역 및 물가 안정을 이끌었고 5월엔 <몇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마오쩌둥을 비판했던 일로 큰 비판을 받았고 스스로 "나는 그때 정파에 휩쓸려 올바른 길을 보지 못했다."라고 자아비판해야 했다.

2.4. 국공내전 시기

1945년 3월, 런비스는 중국 공산당 7대 주석단 상무위원과 대회사무총장을 지내며 중국 공산당 7기 1중전회 1차 회의를 주재하여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비서관에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중국 공산당 5대 서기 중 한 명이었으며 당내 순위는 마오쩌둥,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에 이은 5위였다. 그해 11월 하순, 런비스는 스탈린이 파견한 의사 밀리코프에게 검사를 받고 병세가 위독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밀리코프는 휴양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런비스는 중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1946년 4월 각 해방구의 책임자들을 모아 토지와 재정, 금융 무역 등의 경제 문제를 논의했고 <해방구 경제 건설과 재정, 금융, 무역의 기본 방침>을 제정하여 각지의 경제를 지도했다. 같은 해 8월 26일, 런비스는 중앙 서기처 회의를 주재해 청년단 창설을 논의했고 11월에는 <민주청년단 창설에 관한 중앙 제의> 초안을 작성했다.

1947년 3월, 런비스는 주더, 류사오치와 함께 중국 공산당 중앙기관의 공작책임자를 맡아 엔안에서 자장현(子長縣)으로 이전했고, 월말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함께 중앙 업무를 주관하고 토지개혁 및 선북 부대의 작전 지휘를 맡았다. 그해 11월, 고혈압이 도지는 바람에 첸자허(錢家河)에서 요양 생활을 보냈고 1948년에 저우언라이와 함께 허베이성 평산현의 서백파에 도착해 주더, 류사오치와 합류해 서백파 회의에 참석했다. 그후 그는 중병인 와중에도 요심(遼瀋) 전역, 화이하이(淮海) 전역, 핑진(平津) 전역 등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1949년 2월, 런비스는 중국 신민주주의 청년단 준비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그해 4월 12일 중앙위원회 명예주석으로 선출된 뒤 옥천산에서 휴양했고 5월 8일에는 혼수 증세를 보여 11월 소련에서 치료를 받은 뒤 12월 모스크바 병원에 임원했다가 4월에 흑해 요양소로 갔다.

2.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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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30일 런비스 장례식에 참석한 마오쩌둥

1950년 6월 17일 6.25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런비스는 런위안팡(任遠芳)과 함께 28일에 귀국해 중국 공산당 7기 3중전회에 참석해 업무 복귀를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허락했지만 하루 4시간 이상은 일할 수 없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후 그는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주년 경축 행사에 참석했으며 10월 22일엔 중공군을 한국전쟁에 투입할 지의 여부를 논의하는 토론에 참석했다. 그리고 3일 뒤인 10월 24일 밤에 집에 돌아온 런비스는 지도를 펼치고 한반도를 살펴보며 밤을 샜다가 동이 뜰 무렵에 현기증을 느끼고 억지로 침상에 올랐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에 마오쩌둥,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급히 달려와 의사를 불러 간호하게 했지만, 런비스는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런비스의 유해는 10월 30일 오전 9시에 마오쩌둥,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펑전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에 실려 베이징시 광장으로 이송되었다. 1951년 7월 18일에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안장되었다. 그후 1951년 8월 전국 각 행정구의 당정국민 각계에서 런비스 추모 행사가 열렸고 예젠잉은 런비스가 "중국 공산당과 인민의 낙타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쉬지도 않고, 즐기지도 않고 묵묵히 전진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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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비스 가족 단체사진

런비스의 부친 임유도(任裕道)의 자는 사실(思室)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시골 교사였다. 그리고 어머니 주이(朱宜)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런비스가 밖에서 공산혁명을 이끄는 동안 집에서 그의 동생을 돌봤다. 임유도와 주이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 딸들이 있었는데, 런비스는 그 중 둘째 아들이었다. 큰형 임대강(任大剛)은 일찍 죽었고, 큰 누이 임배월(任培月)은 남편 진용(秦龍)과 함께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진용은 전기 고문으로 사망했다. 임배월은 이로 인해 정신병에 걸렸고 1948년에 사망했다. 둘째 누이 임배성(任培星)도 공산당에 가담해 상하이에서 공산주의 선전물을 인쇄하는 임무를 맡다가 1936년 페결핵으로 사망했다. 셋째 누이 임배진(任培辰)은 항일전쟁 시기 의병 부대에 가담했고 핑장현의 현장으로서 활약했다.

임유도는 일찍이 창사천의 진씨 가문의 딸과 결혼했지만 진씨가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그녀를 기리기 위해 진씨와 자주 왕래했다. 양가는 임유도의 후처가 아들을 낳으면 진씨 조카딸과 사돈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런비스는 진씨 가문의 여식 진종영(陳琮英)과 유년 시절에 결혼했다. 자유연애를 통해 맺은 결혼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모하며 평생을 해로했다. 2003년 5월 31일, 진종영은 전국부녀연합 제8기 상무위원을 맡았다가 베이징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런비스의 진종영의 장녀 임원지(任遠志)는 군사박물관 관장이었다. 그리고 차녀 임원정(任遠征)은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3기 검찰 감찰실 주임을 역임했다. 삼녀 임원방(任遠芳)은 중국 기계수출입회사에서 근무했으며 아들 임원원(任遠遠)은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정부부 전술정창국 국장, 중국 인민해방군 대령을 역임했다.

4. 참고 문헌


[1] 천두슈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