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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4 18:22:31

5.30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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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 운동 당시 서구 제국주의와 군벌을 성토하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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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五卅運動
영어: May 30 movement

1. 개요2. 배경3. 경과4. 영향5. 창작물6. 참고 문헌

1. 개요

1925년 5월 30일 상하이시에서 영국 경찰이 반일 시위대에 발포하여 13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중국 전역으로 확산된 반제국주의 민중운동.

5.4 운동 이래 중국에서 발생한 최대의 민중 운동이었으며, 그때까지 소규모 조직에 불과했던 중국공산당은 이 운동을 계기로 이 중국 각지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2. 배경

1920년대 중국은 군벌의 난립으로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특히 1924년에 발발한 2차 직봉전쟁은 중국에게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 이 전쟁으로 중국의 여러 주요 도시들이 파괴되었고 농촌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장쭤린우페이푸의 직계군벌을 격파하고 베이징을 장악했지만 베이징 외곽, 특히 양쯔강 이남 일대에는 권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으며 민중도 마적 출신의 만주 군벌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한편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합작을 맺고 광둥성 남부 일대에서 정부를 세우고 북벌의 시기를 노렸다.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사망하자 국민당은 이 틈을 타 주요 도시에 대규모 선전 활동을 개시했다. 한편 공산당도 세력을 키우려 노력했지만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 이에 공산당은 당원 가입 요건을 완화시켜서 더많은 이들을 끌어들이려 애써 1925년 상반기엔 22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공산당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나마 가입한 이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그냥 이름만 올렸을 뿐이었다.

이 때 이들의 선전이 가장 효과를 봤던 곳이 바로 상하이였다. 상하이의 노조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강했고 고학력 지식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당시 노동자들은 상하이 시의회의 아동고용법 개정안에 불만을 품었다. 시의회는 12세 미만 아동의 공장 취업을 금지하려 했지만 많은 노동자 가정에게는 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지식인들은 "모든 출판물에 본명과 출판사의 주소를 기입하라"는 검열법에 반발했다. 1925년 초부터 상하이에서는 산발적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고 당국은 강경 진압으로 응수했다.

3. 경과

1925년 2월 상하이시에 위치한 일본인 소유의 면화 공장에서 일본인 감독관이 여성 노동자들을 학대한 사건 이후 이 공장에서는 50명의 노동자가 해고되고 일본인 감독관들이 퇴근 중 상대적으로 습격을 받아 1명이 사망하거나 가슴에 상처를 입은 아동 노동자의 시신이 발견되는 등 노사 갈등에서 비롯된 폭력 사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이에 공장 노동자들은 "우리는 암소와 말 취급을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을 단행했다.

4월 19일 칭다오시의 방직 공장에 근무하던 노동자 4000명이 노조 결성의 권리와 임금 인상, 노동 환경 개선을 쟁취하기 위해 파업위원회를 설치하고 총파업을 실시했다. 이에 일본인 소유 공장의 노동자들이 대거 호응해 5월 무렵엔 상하이시에서만 22개의 공장이 파업을 단행했다. 일본인 고용주들은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직장폐쇄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5월 14일 상하이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공장 대표와 협상하기 위해 5명의 대표를 선출했지만 이들 전원이 경찰에 체포되자 15일 시위대가 공장 진입을 시도했지만 구사대의 발포로 공산당원 고정홍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 5월 29일에는 칭다오의 방직 공장에서 군경과 일본인 직원들의 집단 발포로 노동자 8명이 사망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당연히 상하이와 칭다오의 노동자들을 격앙케 했으며, 학생들과 지식인들도 이에 호응했다. 칭다오 대학 학생연합 총책임자 뤄룽환은 노동자 지원 운동을 주도했고, 학생들은 파업을 지원할 자금을 모으기 위해 길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기부금을 내줄 것을 호소했다. 또한 "청도 시민"의 편집장 호신지(胡信之)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무장 투쟁을 벌일 것을 호소하는 사설을 실었다.

5월 24일, 대학생들은 고정홍의 장례식을 거행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저항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에 당국은 그들을 체포하고 5월 30일에 재판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다양한 학생 단체들이 상하이 조계지와 재판소 밖에서 대규모 시위를 단행할 목적으로 소집되었다.

5월 30일 수천 명의 노동자, 학생, 시민들이 상하이의 주요 도로들을 점거하고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자 상하이 당국은 진압을 위해 경찰 3천 명을 동원했다. 당시 경찰관들은 대부분 영국인들과 인도인 시크교도들이었으며, 중국인도 소수 있었다. 오후 3시 55분 경찰의 집단 발포와 이후의 폭동적 시위진압으로 13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15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이후 상하이 산업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파업을 지원한 대학들을 폐쇄했다.

이 사건은 중국인들의 서양에 대한 오랜 증오심에 불을 붙였다. 5월 31일, 마로상계연합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대처방안을 논의한 끝에 상점 운영을 중단하고 당국에 맞서기로 결의했다. 또한 상해학생연합회는 각교대표회의를 소집해 6월 1일부터 동맹 휴학 및 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6월 1일부터 상하이의 상인과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단행했고 이 날도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 같은 날 2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상하이노동조합총연맹'을 설립하고 리리싼을 회장으로 선임하며 호응했다. 이에 영국, 일본,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및 여러 열강의 전함들이 상하이에 진주해 시위를 수습하려 했지만 한번 폭발하기 시작한 운동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각지로 확산되었다. 심지어 중국인 경찰들도 당국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시위에 가담했다. 6월 4일 상하이 노동조합, 전국 학생 연맹, 상해 학생 연맹은 상하이 노동조합 총연맹을 창립해 반제국주의 연합 전선을 형성했다.

한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반제국주의 애국운동을 장려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6월 4일 취추바이가 편집한 <열혈일보>를 창설했다. 열혈일보는 당의 지도운동 관련 지침과 정책을 대중에게 전달하고 제국주의 범죄를 폭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6월 5일 중국 공산당은 "제국주의에 의한 잔인한 학살을 폭로한다. 상하이와 중국 전역의 투쟁 운동의 목표는 처벌, 보상, 사과 등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모든 불평등 조약을 철폐하고 제국주의의 모든 특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5.30 운동은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각지에서 약 600~700개의 조직이 결성되었고 1700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베이징, 광저우, 난징, 충칭, 천진, 칭다오, 한커우 등 수십 개의 대도시와 주요 광산 지역에서 수만 명이 시위 및 파업을 벌였다. 또한 홍콩에서도 반영 시위가 발생해 당국과 충돌했다. 6월 10일까지 매일 사상자가 나왔고, 6월 11일에는 한커우에서 영국군 해병대와 시위대의 충돌로 수십 명이 사망하고 3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6월 23일에는 광저우에서 시위대 10만 명이 행진하던 중 영국군, 프랑스군의 기관총 발포로 인해 50여 명이 사망하였는데, 이는 5.30 운동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였다. 이로 인해 광저우와 홍콩에서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였다.

6월 5일 상하이 상공회의소 회장 위챠칭은 더 이상의 혼란은 상하이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것이라며 대표단을 파견해 협상을 벌이고 있으니 정상적으로 영업을 재개하자고 제의했다. 상업연합회도 이를 받아들여 각 상점에 개시를 청했다. 위챠칭은 이 발언의 후폭풍으로 6월 8일 자택에서 폭탄이 폭발하는 등 많은 위협을 받았다.

6월 19일, 상하이 상공회의소는 6월 26일에 시장을 개방한다고 발표했고 영국과 일본은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자유를 인정하고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의했다. 8월 10일 상하이노동조합총연맹은 9가지 조건을 제시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1. 상하이 정부는 공청회의 결정을 무조건 수용한다.
2. 양허권 내에서 출판, 언론, 집회 및 조합의 자유를 인정한다.
3. 양허 중인 중국인은 외부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4. 근로자는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조직하고 노동조합이 근로자를 대표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할 권리가 있음을 인식한다.
5. 모든 근로자는 고용되어야 하며 근로자는 이 파업을 이유로 해고되어서는 안된다.
6. 공장주는 파업 기간 동안 급여의 50%를 지불한다.
7. 임금을 15% 인상한다.
8. 근로자의 권리, 특히 여성과 아동 근로자의 근로 조건을 개선한다.
9.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학생 및 근로자에게 보상한다.

상하이 당국이 이를 수용하면서 상하이 상업연합과 노동연합은 파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중국 각지와 홍콩에서 산발적 시위가 이어졌지만 9월 즈음에 사그라들었다.

4. 영향

5.30 운동은 중국공산당의 세력을 크게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공산당이 5.30 운동을 영도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당시 공산당은 대규모 민중을 동원할 능력이 없었고 주류 세력은 공산당과 별개의 조직을 결성한 노동자, 학생, 상인들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에 공산당원들이 대거 가담한 것은 사실이며 그 중 리리싼, 캉성 등 몇몇은 두각을 드러냈다. 1925년 1월 공산당원은 수백 명에 그쳤으나 7월엔 2500명, 8월에는 3470명으로 증가했다.

반면 국민당의 참여는 매우 간접적이고 취약했다. 당시 국민당 고위층은 쑨원의 서거 이후 당권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5.30 운동을 지원한 국민당 지방당무기구는 대부분 공산당의 통제 하에 있었다. 청년단 상해지부의 보고에 의하면 5.30 시기 학생운동을 지휘한 상하이학생연합회는 명의상으로는 국민당의 지휘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산당의 많은 활동이 국민당의 간판을 걸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5.30 운동은 국민당의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5. 창작물

6. 참고 문헌



[1] 1924년 5월 공산당 상하이 지부 보고에 따르면 상하이에서 공산당에 가담한 당원은 56명이지만 실제 활동하는 이는 47명이며 신당원의 증가율은 매우 저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