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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6-13 13:52:52

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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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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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200908121717302756627116.jpg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한문 彭眞
한국식 독음 팽진
영문 peng zhen
본명 푸마오궁(傅懋恭)
출생 1902년 10월 12일 청나라 산시성 치워현
사망 1997년 4월 26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타이위안 사범학교 졸업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없음(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일전쟁 시기2.3. 국공내전 시기2.4. 중공 수립 초기2.5. 문화대혁명의 시련2.6. 덩샤오핑 시대2.7. 말년
3. 평가4. 가족 관계5.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산시성 공산당의 창설 멤버였으며 중일전쟁 시기 지하조직을 결성해 일본군에 대한 저항 활동을 이끌었다. 또한 1940년대엔 류사오치, 캉성과 함께 정풍운동을 이끌어 마오쩌둥의 독재 권력을 공고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국공내전 시기에 공산군이 베이징에 무혈입성할 수 있도록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에게 직언했다가 실각당했고 홍위병들에게 모진 모욕과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던 그는 덩샤오핑 시대에 정계에 복귀해 공산당 원로로서 활동하다가 1988년 정계를 은퇴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 군사상 주요 위치를 차지한 사람으로서 중공팔대원로(中共八大元老)로 거론된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펑전은 1902년 9월 11일 산시성 치워 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빈농이어서, 펑전은 어렸을 때부터 온 가족과 함께 농사에 전념해야 했다. 1919년, 그는 치워현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타이위안 사범학교에서 재학하던 중에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1923년 겨울, 펑전은 가오쥔위(高君宇), 리육당(李毓棠)으로부터 중국 공산당에 소개되었다. 이후 1924년, 펑전은 산시성에서 첫 공산당 조직을 결성했고 그는 타이위안 지부 당원 및 비서관으로 임명되어 타이위엔 전국대회의 설립을 주도했다.

1925년 1월, 펑전은 산시성 노동조합 설립을 지도했고 2월엔 중국 공산당 산시성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또한 5월엔 '산서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산시성 군벌 옌시산이 실시한 주택 평가세에 반대하여 노동자들이 투쟁 시위를 벌이도록 유도했다. 그러던 중 상하이에서 5.30 운동이 발발하자, 펑전은 "산서 각계의 제국주의에게 참살된 동포를 설치(雪恥)하기 위한 모임"을 창립하고 부회장을 맡았으며 7월부터 8월까지 산시성 일대에 노동조합 설립을 지시했다. 그리고 1926년 3월에서 4월까지, 그는 스자좡시에 있는 원사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27년 8월 중순, 펑전은 중국 공산당 천진시위원회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1월에는 비서관을 지냈다. 이후 1928년 2월에 중국 공산당 지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승진되었고 나중엔 천진 특별 행정구 사무총장 및 비서관을 역임했다. 1929년 2월, 중국 공산당 천진 특별 행정구는 중국 공산당 천진사업소로 바뀌었고 펑전이 비서직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해 6월, 천진 지하조직은 국민당으로 전향한 배신자의 밀고로 국민당 비밀경찰에게 급습당했고 펑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후 감옥에서 몇년간 지내며 죄수들을 상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육시키고 감옥 내 공산조직을 결성하는 등 공산혁명가로서의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다가 1935년에 석방된 그는 천진시 학생연합을 지도하는 중국 공산당 천진실무그룹 의장을 지냈고 중국 공산당 북부국에 의해 천진시위원회를 재건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이후 1936년 4월 옌안에서 천진을 방문한 류사오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북부국을 재구성하고 펑전을 조직 부서장으로 임명했다. 또한 펑전은 공산당 베이징 시정위원회를 재평성해 중국 공산혁명 지하조직을 이끌었다.

2.2. 중일전쟁 시기

파일:Peng_Zhen_in_1938.jpg
1938년 진차지(晉察冀)에서. 왼쪽부터 관샹잉(關向應), 펑전, 녜룽전(聶榮臻)

1937년 1월, 펑전은 '베이징 각계 구국연합회' 설립을 지시했다. 이후 그는 5월 소련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산시성 대표단의 의장을 역임했고 7월에는 중국 공산당 북부국 조직위원장을 지내며 하북 일대 공산당의 지하운동을 이끌었다. 1938년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저항 운동이 본격화된후, 펑전은 중국 동부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저항 운동을 진두지휘했다. 또한 그는 녜룽전과 함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진차지부 장관에 임명되어 진차지 항일기지를 개발하고 당중앙위원회의 전략 정책 및 일본에 대한 저항 운동을 지휘했다.

그러던 1939년 11월 28일, 진시 일대에서 공산당의 팔로군과 국민당의 옌시산 휘하 국민혁명군 간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진시사변) 이때 펑전은 옌시산이 국공합작을 어기고 팔로군을 공격했다고 맹비난하며 국민들이 국민당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1941년 정치국과 마오쩌둥에게 진차지 국경 지역의 공산당 활동 경험과 정치적 동향을 분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마오쩌둥은 그의 보고서를 읽고 펑전이 진정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며 당의 지론대로 진차지를 잘 다스리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파일:Peng_Zhen2.jpg
옌안시절 평전

1942년 9월, 펑전은 옌안 공산당 중앙위원회 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1942년엔 마오쩌둥의 지도에 의거해 류사오치, 캉성과 함께 정풍운동을 이끌었고, 1943년 3월 중앙 정치국회의에 참석해 중앙당 학교 부교장이 되었으며, 1944년 3월 5일에 "역사 문제에 관한 여러개의 결의안(關於若干歷史問題的決議)"과 "당의 헌법 개정에 관한 보고서"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펑전은 당의 역사적 경험을 요약하고 당의 이념을 마오쩌둥의 '올바른 노선'으로 통일하고 마오주의의 위치를 당의 절대적인 이념으로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45년, 펑전은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회에 참석해 자격심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고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9일 제7차 중앙위원회 제1기 본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8월에는 공산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에 참석해 중앙 사무국 사무총장을 겸임했다.

2.3. 국공내전 시기

중일전쟁이 끝난 후, 중국 동북 일대는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소련이 군대를 철수시킨 후 동북지역을 장악하려고 애썼다.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동북 일대에 펑전을 보내 린뱌오와 협조하여 동북 일대를 확고히 장악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1945년 9월,펑전과 천윈, 예젠잉, 우수취안(伍修權)은 비행기를 타고 심양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산해관 공항에 착륙했을 때 활주로를 지나쳐 밀밭으로 미끌어졌고, 펑전은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이에 펑전과 동료들은 열차를 타고 심양으로 향했고 9월 18일에 도착했다. 그들은 곧바로 중국 국민당의 북동부지구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10월 31일, 펑전은 동북인민자치 육군에서 최초의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 3월, 펑전은 동북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창춘시, 하얼빈과 치치하얼을 신속하게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4월 공산군이 3개 도시를 성공적으로 장악했으나 상황이 갑자기 바뀌었다. 국민혁명군의 명장 쑨리런과 요요상(廖耀湘)이 이끄는 새로운 군대가 동북 일대에 도착해 공산군을 상대로 몰아붙인 것이다. 린뱌오와 천윈은 창춘시에서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펑전은 중앙위원회의 지침에 따라 창춘시를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린뱌오는 쓰핑에서 국민혁명군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결국 쑨리런에게 패했고 공산군은 랴오허강을 건너 북쪽으로 퇴각했다.

이후 펑전은 북동부사무국의 부국장과 동북 민주연합의 정치위원으로 재임했지만 군사 지휘는 린뱌오에게 넘겼다. 펑전은 1947년 7월 동북지역을 떠나 허베이성 핑산현의 시바이포에서 열린 토지개혁 회의에 참석했다. 회담이 끝난 후 펑전은 허베이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남겨졌고, 진차지 지역에서 실무위원회 위원으로서 봉사했다. 1948년,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으며, 이후 중앙위원회 조직국장과 정책연구실 국장을 역임했다. 또한 그해 12월 13일에 베이징 시 당위원회 비서관을 역임했으며, 1948년엔 중앙위원회 조직국장과 정책연구국장이 되었다.

1949년 1월, 펑전은 베이징을 완벽하게 확보해 공산군이 베이징에 무혈입성하도록 기여했다. 그는 이 공로로 베이징 시당위원회 비서로 승진했다. 이후 그는 베이징 정치 기관을 재구성하고 문화 및 교육 사업을 개발하고 간부 재배치 등의 일련의 작업을 지휘했다. 그해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그는 중국 인민 정치협의회 총회 첫 회의에 참석하여 정치 협의회 전국위원회와 중앙인민 정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4. 중공 수립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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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천안문에서. 왼쪽부터 마오쩌둥, 펑전, 노로돔 시아누크, 류사오치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펑전은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기념식에 참석했다. 10월 19일, 그는 정부 공의회의 정치 및 법률위원회 부국장을 역임했다. 그해 11월, 그는 베이징시 인민대표대회 자문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정치 및 법률 업무에서 중앙 지도부를 돕기 위해 중앙 정치 및 법률 그룹 의장을 역임했다.

1950년 2월, 펑전은 베이징 노동조합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제7차 공산당중앙위원회 제3기본회의에서 토지개혁 중앙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51년, 펑전은 베이징 시장으로 선출되었고 1966년까지 베이징 시장을 계속 맡았다. 그는 삼반오반운동, 노동협동 조합 결성 등 건국 초기 공산당의 정책 집행에 한 몫을 톡톡히 했다. 1954년 12월, 펑전은 중국 인민정치협의회 전국우이ㅝㄴ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55년에는 당 및 정부 업무를 담당하는 베이징시위원회 제1비서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입법 활동에도 상당히 기여했다. 1956년 7월, 펑전은 "중공 형법과 형사소송법' 초안 작성을 논의하기 위해 공산당중앙법률위원회 첫 회의를 주재했고 5월 15일에서 27일까지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제8차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덩샤오핑과 함께 홍콩과 마카오의 정치적, 법적 회수와 관련된 협상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1961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총노선,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의 실패 요인을 논의했다. 1962년 1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앙업무회의에서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오류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펑전은 "마오 주석은 책임을 져야 하오."라며 류사오치의 주장에 적극 동의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류사오치 등의 공세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다.

1964년 7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은 5인조의 문화혁명 그룹을 결성하기로 결성했다. 펑전은 이 그룹의 리더가 되어 문학, 예술 및 철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공산당중앙위원회의 마오쩌둥의 지침을 작가들에게 인도할 책임이 있었다. 1965년 12월 20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펑전은 전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과 중국 인민정치협의회 정국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펑전은 얼마 안가서 문화대혁명의 광기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만다.

2.5. 문화대혁명의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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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1월, 상하이 문회보의 야오원위안은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이라는 논설을 작성해 베이징 부시장 우한이 제작한 연극 <해서파관>을 맹비난했다. 우한은 "지주 계급 국가를 미화하고 혁명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계급 조화론을 선전한 것"으로 비난받았으며 해서파관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독초로 지목되었다. 펑전은 일개 문예평론가가 베이징 부시장을 공격한 것에 불쾌감을 품었고 베이징 일보사로부터 야오원위안의 논설을 게재해도 될지를 묻는 전화에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당 중앙 기관지 <인민일보>의 중요 사설도 아니니 게재할 필요가 없다."

그는 뒤이어 인민일보를 비롯한 베이징의 여러 신문사들에게 야오원위안의 논설을 싣지 말라고 지시했고 문회보에 전화해 야오원위안의 배후를 캐려고 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그때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이 우한에 대한 비판을 지지하고 있다고 통고하자, 펑전은 11월 28일 당 중앙 선전부와 베이징시 당위원회 책임자들을 모아놓고 게재 금지를 철회했다. 다만 "야오원위안의 논문에 어떤 사연이 있더라도 진리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라며 이를 정치투쟁이 아닌 단순한 학술 논쟁으로 간주하고 야오원위안의 논문의 원문에 생략된 우한의 경칭을 첨가해 '우한 동지'로 쓰게 했다. 또한 평론가 덩튀에게 우한을 옹호하는 글을 베이징 일보에 발표하게 했다.

1965년 2월 3일, 펑전과 5인조는 중앙확대회의를 열고 "당면 학술 토론에 대한 문화혁명 오인소조의 보고 제강"의 초안을 작성해 중앙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펑전은 해서파관 논쟁은 학술 문제일 뿐 정치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주장했다. 류사오치는 즉시 회의를 소집해 보고서를 검토한뒤 펑전의 보고서에 의거해 '2월 제강'을 통과시키기로 결정했다. 이후 펑전은 캉성, 루딩이 등과 함께 우한에 있던 마오쩌둥을 찾아가 2월 제강을 마오쩌둥에게 제출했다. 마오쩌둥이 이를 읽은 뒤 펑전에게 물었다.
"우한이 정말로 반당, 반사회주의자인가?"

캉성이 먼저 대답했다.
"반당, 반사회주의적인 독초입니다."

이에 마오쩌둥이 "물론 누구든 상반된 관점이 있다면 당연히 표현해야겠지."라고 말하자 펑전이 우한을 옹호했다.
"우리는 그 연극에서 제기된 학술 주제를 토론할 때 마땅히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라는 주석의 지시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마오쩌둥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신들이 일을 끝냈으니 나는 더이상 볼 필요가 없겠군. 여러분이 알아서 할 일이요."

펑전은 마오쩌둥이 2월 제강을 승인했다고 판단해 우한의 고서점가에서 맘편하게 쇼핑을 즐겼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2월 제강'을 승인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이를 빌미로 류사오치 일당을 숙청하기로 결심했다. 3월 17일, 마오쩌둥은 항저우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린뱌오, 펑전, 캉성 등과 자치구, 성 중앙국 1서기 등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모았다. 마오쩌둥은 그 자리에서 베이징에 "또다른 국가"가 있으며 펑전이 자산계급의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그리고 3월 27일, 마오쩌둥은 캉성과 장칭을 불러 베이징 시당위원회와 중앙위원회 선전부가 악인을 보호하고 혁명에 반대했으며 해체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지금 베이징 시 위원회의 상황은 '바늘 한개도 들어가지 않고 물 한방울도 스며들지 않는다'는 옛말 그대로다. 그렇기 때문에 해산시켜야 한다.

이후 마오쩌둥은 우한을 반당, 반사회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덩퉈 역시 반동분자라는 극언을 퍼부었다. 저우언라이 역시 캉성으로부터 마오쩌둥의 의사를 전달받자마자 펑전이 "마오쩌둥 사상에 반대하고 주석에게 반기를 들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결국 펑전은 4월말에 가택에 연금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5월 16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고시"를 발표하며 펑전을 비판하면서 "2월 제강"과 5인조의 문화혁명그룹 지도의 폐지를 발표했다. 여기에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의사를 받들어 류사오치 일파로 분류된 이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때 펑전 역시 베이징 시장에서 축출되었다.

5월 24일, 중앙위원회 정치국상무위원회는 펑전, 루딩이, 양상쿤을 "반체제 집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심사할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펑전은 홍위병에게 끌려가 베이징 광장에서 "삼반분자(三反分子)" 라는 플랜카드를 든 채 어린 학생들로부터 머리 끄댕이를 붙잡히고 온갖 모욕과 폭력을 받아야 했다. 그후 그는 자택에 연금되었다가 1975년 5월 19일 고향으로 보내졌으나 그의 자유는 여전히 제한받았다. 그리고 85세의 어머니와 남동생이 잔혹한 고문을 받았고 조카 푸치젠(傅汝正)은 홍위병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2.6. 덩샤오핑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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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2월 28일, 제11회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기본회의가 종료된 후, 펑전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1979년 2월 17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문화대혁명 시기 펑전에게 부과된 모든 혐의와 비방은 허위였다고 선언하며 그를 복귀시킬 것임을 밝혔다. 그리하여 펑전은 2월 17일부터 23일까지 제 5회 전국 인민대표대회의 여섯번째 회의에 참석하였고 전국 인민대표대회 법률위원회의 이사로 임명되어 문화대혁명으로 심각하게 훼손된 법 질서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해 3월부터 6월까지, 그는 <인민법원조직법, 형사소송법>, <중외합작기업법>, <지방인민의회 및 지방인민정부 개정 선거법> 등 여러 법을 주재했다.

1980년 1월 24일, 펑전은 중앙 정치 및 법률위원회의 비서관을 맡았으며 3월 17일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재판 운영위원회의 책임자를 역임했고 '린뱌오, 장칭 반혁명 그룹' 재판의 판결을 맡았다. 이후 8월 30일에서 9월 10일까지, 펑전은 헌법위원회의 개정위원회 부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82년 2월부터 11월까지 헌법 초안 작성에 동참했다.

1982년 11월 26일, 펑전은 중화인민공화국 초안보고서를 작성했고 1983년 2월 4일에 중앙위원회는 펑전의 보고서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여 사회 질서와 법률 체계의 기초로 삼았다. 그후 펑전은 6월 6일부터 21일까지 제6차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첫번째 회의에 참석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설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87년 '정당 민주주의 회의'에서, 펑전은 중국 중앙위원회 총서기 후야오방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데 앞장섰고, 결국 후야오방이 사임하게 만들었다. 그후 그는 1987년 10월 25일부터 11월 1일까지 제 13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회에 참석해 총회 상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2.7. 말년

1988년, 그는 고령을 이유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혁명 원로로서 존경받았다. 그러다가 1997년 4월 26일에 베이징에서 사망하니, 향년 95세였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남은 재는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묻혔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중국 인민정치협의회 전국위원회, 중앙 군사위원회는 펑전을 찬양하는 사망 기사를 발표했다.
그는 위대한 프롤레티라아 혁명가이자 정치인이었고 뛰어난 국가 활동가였으며, 사회주의 법률 시스템의 주요 창시자이자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중국인의 해방과 새로운 중국의 탄생을 위해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위한 끈기있는 투쟁을 벌여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가치를 창출했다.

3. 평가

펑전의 긍정적 평가는 주로 베이징 건설과 중국 법률 시스템 복원을 거론한다. 펑전은 지식인들을 용인하는 정책과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문학과 예술계에 널리 환영받았다. 그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우한 등 지식인들을 보호하려다가 가혹한 탄압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용서해 국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문화대혁명에서 어머니와 조카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홍위병들이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에게 사과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 책임은 너희들에게 있지 않다. 나는 젊은이들과 한번씩 껴안고 싶다."

마오쩌둥의 역사적 평가에 대해, 펑전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 숭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것이라면서, 문화대혁명의 책임은 중공의 책임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중공의 결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법적 제약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펑전에 대한 비판은 주로 덩샤오핑이 형성한 '중공 8대 원로' 체제 유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8대 원로의 후예들이 중국 정치 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에, 펑전은 몇몇 학자들에게 중국의 정치 체계를 경직시키는 데 일조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4. 가족 관계

펑전과 장결청(張潔清)은 1935년 펑전이 감옥에서 풀려나 일시적으로 베이징에 머물렀을 때 만났다. 두 사람은 펑전이 옌안으로 돌아갈 때까지 교류하면서 서로에게 서서히 애정을 품었다. 그러던 1939년 장결청이 옌안으로 가서 펑전과 재회했고, 두사람은 그해에 결혼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두 사람은 홍위병들에게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끝내 살아남았다. 장결청은 펑전이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생존했다가 2015년 5월 26일에 10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두 부부에겐 총 3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 그리고 1명의 수양딸이 있었다. 장녀 푸얀(傅彥, 1940~)은 베이징 푸리 그룹의 회장이었고 중국, 유럽 및 미국 수출입 공사 및 중국, 유럽, 미국 수입품 및 수출 공사 총책임자를 역임했다. 그리고 장자 푸루이(傅銳, 1940~)는 전 중국 국가원자력 공사 부국장이며, 두번째 아들 푸양(傅洋, 1942~)은 중국 변호사협회의 부회장이자 법률 사무소의 이사이다. 또한 세번째 아들 푸량(傅亮)은 요트와 골프장 등 레저분야 사업가로서 활약했으나 1997년부터 2000년 사이에 버진아일랜드에 최소한 5개의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조세를 회피해온 사실이 발각되어 구설수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수양딸 류조란(劉朝蘭)은 펑전의 동료였던 류이순(劉以純)의 유일한 딸이었다. 류이순은 진시사변 당시 엔시산에 의해 살해당했고, 펑전과 그의 아내 장결청은 류조란을 수양딸로 삼았다. 이후 류조란은 작가로서 활동했다.

5.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