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1:46:09

갑자사화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4대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1. 개요2. 내용3. 배경
3.1. 피 묻은 적삼 야사
4. 불길한 징조5. 복수의 시작
5.1. 논란?
6. 무자비한 숙청7. 결과8. 기타9. 미디어에서
9.1. 한명회9.2. 왕과 비9.3. 대장금9.4. 왕의 남자9.5. 왕과 나9.6. JTBC 인수대비9.7. 간신

1. 개요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군 10)에 조선 국왕 연산군의 친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되어 많은 선비가 숙청된 사건이다.

2. 내용

사림파가 화를 입었다는 뜻의 사화라는 명칭처럼 사림의 피해야 당연히 있었지만, 훈구파도 무사하지는 못해서, 윤필상, 이세좌, 이극균, 성준 등 화를 당한 사람들이 많고, 부관참시를 당한 한명회, 한치형, 정창손, 심회 등도 역시 훈구파이다.

즉, 갑자사화는 연산군 특유의 폭력성과 잔인성을 드러내며 사림, 훈구 가릴 것 없이 신하들을 싹 쓸어버린 숙청으로, 연산군 기획, 각본, 주연으로 벌인 친위 쿠데타의 결정체라 할 법한 사건이다. 아울러 갑자사화가 일어난 뒤로 연산군의 타락이 가속되었다.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왕이 사치나 방탕함을 크게 내보이진 않았으며, 소극적으로 나서긴 했지만, 신하들도 왕이 비행을 저지른다 싶으면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무오사화삼사왕권 견제 기능이 약화된 상태에서 갑자사화까지 겹치자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사라졌고, 신하들은 왕의 막장정치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왕은 권력에 취해 더욱 폭주하였고, 급격히 타락했다. 결국 거침없이 사치, 방탕, 독재적인 행보를 이어갔던 연산군 본인도 중종반정으로 인해 비참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갑자사화 때 숙청당한 훈구 대신들은 계유정난으로 인해 일어났던 단종의 폐위, 그리고 단종의 비참한 죽음에 일조했던 자들이기도 했다. 성공한 쿠데타를 했을 뿐, 왕실을 능멸한 이들이라 할 수 있는데, 연산군의 왕권 극대화 작업의 마무리였던 갑자사화에 휘말려 숙청을 당했으니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종 입장에선 사후에나마 한을 풀게 된 셈이라 할까. 만약 그 후에 연산군이 타락하지 않고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면, 변수에 따라서는 훈구 대신 숙청으로 인한 훈구파 몰락이라는 상황에 힘입어 단종의 복권이 (연산군 사후의 일이라는 건 변함 없지만)[1] 실제 역사보다 앞당겨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3. 배경

대다수 사람들은 이 사건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어머니가 어쩌다 죽게 됐는지 알게 된 왕이 폭주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알고 있으며, 이는 왕과 비 같은 유명 사극의 영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왕은 이미 재위 초반부터 생모가 어쩌다 죽게 됐는지 알고 있었기에, 이를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라는 분석이 있다.

연산군이 일단 아들로서 어머니의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무오사화로 대간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부왕 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왕권을 추구해왔던 연산군은 대간들이 약해져 이제 쓸모가 사라진 훈구 대신들을 슬슬 토사구팽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반면, 무오사화를 통해 "아니 되옵니다"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대간들을 억누르는데 성공한 왕이 독선적인 행보로 일관하며 사치와 방탕 등을 일삼자, 처음에는 왕과 함께 대간들을 손봐주는 일에 동참했던 훈구파도 이건 좀 심하다 싶었는지[2] 대간들과 연합 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에 왕이 생모가 쫓겨나고 사사된 일을 명분으로 삼아 나머지 대간들과 훈구 대신들을 모두 숙청해버린 일이 바로 이 갑자사화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일단 왕이 자신의 친모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갑자사화 한참 전인 즉위 직후다. 왕은 명나라에 보내기 위해 부왕의 행장[3]을 짓다가 폐비의 아버지인 윤기견의 기록을 보고 "여기에 판봉상시사 윤기견(尹起畎)이란 자가 누구냐? 영돈녕 윤호(尹壕)[4]의 이름을 '기견'이라 잘못 쓴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는데[5] 신하들이 그 사람은 폐비의 아버지라고 하자 왕은 자세한 정황을 보고받게 되었고, 실록에서는 그날 왕이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출처1-1] 임금의 건강을 그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왕조 사회에서 왕이 밥을 안 먹었다는 건 절대 가벼운 일이라 할 수 없다. 현대에도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 기밀로 취급될 만큼 중요한데, 왕조 국가의 국왕이 끼니를 거른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들로서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상세히 듣게 된 연산군 입장에서도 밥이 입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자기 어머니가 어떻게 죽게 됐는지 알게 된 왕은 일단 몇 년간은 폐비와 관련한 시를 지어 바치게 하고[7] 묘지 이장이나 제사 등 친아들이 할만한 몇 가지 조치들만 취하고 반대자도 크게 책망하지 않고 설득하는 등 복수극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8] 다만 폐비의 사약을 들고 간 이세좌를 시켜 윤씨지묘 복구를 하게 하는 등 몇몇 조짐을 드러내긴 했다.

하여튼 왕이 어머니가 죽게 된 경위 등을 듣자마자 폭주해서 급작스럽게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이는 윤씨를 폐비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움직였던 사람이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이라는 사실과 폐비와 관련된 부왕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왕은 윤씨를 폐비해야 하는 사유로 "곶감과 비상을 같이 두더라, 사람 해치는 법을 적은 책을 소중히 간직하더라,[9] 날 보면 인상이 험악한 것은 물론이고 내 발자취를 찾아서 없애버린다고 하더라." 같은 자신의 체험담을 근거로 삼았다.

막장까지 치달은 상황에서도 연산군이 딱히 부왕에게 반감을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부왕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이 즉위하자마자 부왕이 아끼던 사슴을 쏴죽였다는 것은 실록에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야사일 뿐이다.[10]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어머니가 죽은 것은 분명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 사유가 아버지를 해하려 들었던데다, 수가 틀리면 연산군 본인도 왕세자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는 역적 행위이고, 심지어 그것을 아버지가 직접 인증했다면 기분은 더러울지 몰라도 마구잡이식 보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어려웠을 것이다.

3.1. 피 묻은 적삼 야사

연산군일기에서 갑자사화의 배경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피 묻은 적삼이다. 보통 연산군이 등장하는 사극을 보면, 왕이 자신의 외할머니 신씨를 통해 받은 폐비의 피 묻은 적삼을 보고 분노해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월탄 박종화의 장편 역사소설 <금삼의 피>에 등장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현재까지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대중 매체에서 그리는 연산군의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형성된 것이다.

사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연산군일기에 없는 내용으로 민간에 떠돌던 야사이다. 좀 더 정확히는 연려실기술에서 기묘록을 인용한 내용으로 더 자세히 서술하면 폐비가 사사되면서 흘린 피가 묻은 적삼을 자신의 어머니인 신씨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려달라고 했고, 인수대왕대비(소혜왕후) 한씨가 죽자 신씨는 궁궐 나인들을 통해서 폐비의 죽음과 적삼을 알렸으며 자순대비를 친어머니로 알던 왕은 슬퍼한 뒤 시정기를 찾아서 대신들과 관련자를 죽였다고 쓰여져 있다.

여기서 보면 알겠지만 실록과는 모순된 기록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폐비의 죽음으로 인하여 일어난 갑자사화 때 대왕대비는 살아있었고, 실록에는 왕이 즉위한 지 몇 달 만에 폐비의 일을 알았다고 서술하고 있으며,[출처1-1] 실제로 갑자사화 이전에도 폐비의 제사나 무덤 이장을 여러 번 시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산군일기에는 왕이 외할머니를 만난 기록이 없다. 임사홍만 만났을 뿐이다. 그리고 이 임사홍 접촉 자체도 신빙성이 부족한 게 임사홍은 후술하겠지만 갑자사화 때 이극균과의 친분이 걸려서 죽을 뻔한 사람이다.

야사에 불과한 피 묻은 적삼은 이렇듯 신뢰할 수는 없는 이야기지만, 그 극적인 효과 때문에 조선 시대에는 널리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엇보다도 이 설이 히트를 친 데에는, 박종화의 역사 소설 《금삼의 피》에 등장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묘사가 상당히 임팩트가 있는지, 드라마 《장녹수》, 《왕과 나》 등 현재까지 사극에서 써먹고 있다. 그 외에도 《왕의 남자》 등에서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혹은, 실록이랑 맞지 않는 점이 걸리기 때문에 폐비가 죽은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피 묻은 적삼과 함께 진상이 훨씬 더 끔찍했음을 알고 폭발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4. 불길한 징조

이렇듯 극적인 야사와는 별개로 왕에게 뭔가 응어리진 것이 수 년간 묵혀져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다 1503년(연산군 9) 음력 9월 11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양로연이 열렸고, 왕은 연회에 참석해서 신하들에게 술을 받고 답례주를 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조 판서 이세좌가 왕의 답례주를 마시다 실수로 반을 흘려 왕의 옷을 적셔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궁으로[12] 돌아간 왕은 즉시 승지들을 불러서 이 사실을 말하고는 이세좌를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이세좌는 자신이 실수로 술을 흘린 거라고 해명했지만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4일 뒤인 15일에 이세좌를 파직시켜 버렸다. 이 파직에 윤필상 등 대신들이 그날 이세좌가 자신이 술을 못하는데 오늘 왕의 답주는 다 마셨다고 언급한 증언을 들어가며 단순한 실수였다고 이세좌를 변호했지만, 왕은 18일에는 정승들에게, 19일에는 대간들에게 이세좌 건을 질책하더니 다음 날인 20일에는 이세좌를 유배형에 처했는데, 처음에는 전라남도 무안이었다가 이틀 뒤에 함경도 온성으로 보냈다. 현대처럼 도로가 정비된 것도 아니고 빠른 교통 수단은 더더욱 없었던 시대에 이세좌로 하여금 한반도의 최남단과 최북단을 오고 가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신들은 당혹해하며 불안감에 휩싸였는데, 이세좌는 20여 년 전 폐비가 마실 사약을 들고가서 전달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달 뒤인 음력 11월 20일에 창경궁에서 대왕대비와 대비가 왕에게 잔치를 베풀어줬는데, 이 자리에서 왕이 자기가 입던 옷과 신발을 신하들에게 나눠주는 술주정을 부리다가 성준의 외손자이던 참의 한형윤을 이조참판으로 승진시켜주는 깜짝 인사를 단행했다[13]. 다음 날 신하들이 감사와 그날 있었던 신하들의 술주정을 사과드리러 왔을 때 왕은 이세좌의 경우와 달리, 오히려 자신이 술자리에서 만취한 일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이 잔치에서 약속했던 선물과 신하들의 승진을 번복하지 않음으로서 신하들을 달랬다.[14]

그리고 넉 달 뒤인 1504년 음력 1월 11일 왕은 이세좌도 풀어주었고 다시 두 달 뒤인 음력 3월 3일 이세좌가 한양으로 올라와서 감사를 표시하자 왕은 이세좌에게 술을 올려주며 "이것은 네가 전일 기울여 쏟은 것이다."라는 농담까지 건네며 화가 다 풀린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에 대신들은 왕이 단순히 홧김에 심술을 부린 것으로 해석하여 안심했지만...

5. 복수의 시작

1504년 음력 3월 11일, 간택령이 떨어졌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홍귀달에게도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홍귀달은 이를 거부하면서 들여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해명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걸 본 왕이 분노한다. 그런데 왕은 갑자기 "이것들이 오냐오냐하니까 감히 내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네? 이게 다 그때 이세좌에게 제대로 벌을 안 줬기 때문이야!!"라고 하면서 뜬금없이 이세좌를 물고 늘어져 이세좌를 유배 보내고 그 아들과 사위들까지 모조리 곤장을 친 후 유배 보냈다.

그리고 음력 3월 20일 밤 왕은 자신의 친어머니인 폐비를 모함했다는 이유로 부왕후궁귀인 정씨귀인 엄씨를 끌고 와서, 창경궁에서 떡이 되도록 두들겨팬다. 이것도 모자라서 정 귀인의 아들이며 자신의 이복 남동생안양군봉안군을 잡아오게 시키는데, 왕은 이들이 창경궁으로 오자 주변인들을 모조리 내보냈다. 그리고 두 형제에게 정 귀인과 엄 귀인을 가리키며 죄가 매우 큰 여자들이니 몽둥이로 때리라고 시킨다. 즉 자식들더러 자기 어머니를 때리라 시킨 것이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지금 왕이 때리라고 시킨 여자가 누군지 알려줄까봐 미리 자리를 옮기게 한 듯하다. 안양군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때렸으나 봉안군은 상황을 눈치채고 끝내 몽둥이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본 왕이 사람을 시켜 계속 매질을 하도록 지시해서 결국 두 후궁 모두 그날 사망하고 말았다.

사실 이 내용이 상당히 뒤죽박죽인데, 당시 실록 내용을 보면 왕은 두 형제를 옥에 가두었다가, 다음에는 장 80대를 치고 유배하라고 전교했다가, 다시 둘을 창경궁으로 잡아 오게 했다. 그리고 둘은 삼경(밤 11시 ~ 새벽 1시)이 되어서야 궁 밖으로 나온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을 모두 물리쳤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이후에 왕의 관련 행동이 시간을 무시하고 이어지는데 이것은 실록 편찬 시기에 정리되어서 추가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후술할 행적으로 보아, 왕이 절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고, 때문에 실제로 왕이 명령 자체를 감정적으로 뒤죽박죽 지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록청에서 정리하고 정리해서 저 정도로 맥락을 맞춘 것일 정도로 그날 밤 왕은 정상이 아니었다.

하여튼 그렇게 둘을 죽인 왕은 계모 자순대비의 침소를 찾아가 침소 앞에서 칼을 뽑아들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쳤다. 이런 공포 분위기에 궁녀들은 모두 도망치고, 대비는 겁에 질려 나올 생각을 못했다. 중전 신씨(거창군부인)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왕을 붙잡고 울며 말렸고 왕은 결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15] 그 후 왕은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대왕대비전으로 끌고 간 후 할머니에게 억지로 술을 올리게 했고, 대왕대비는 병중이었는데도 억지로 술을 받았다. 왕은 다시 술을 마신 대왕대비에게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냐고 협박하자 대왕대비는 경황이 없어, 베 두 필을 줬다. 이어 왕은 대왕대비에게 어째서 자기 어머니를 죽였냐는 등의 매우 불경한 언사를 내뱉으며 할머니를 위협했다고 한다.

당시에 대왕대비는 장례를 미리 준비할 정도로 위독한 상태였는데, 손자의 폭력적인 행동과 폭언의 충격 때문인지 대왕대비는 불과 한 달 후인 음력 4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이때 대왕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서 대왕대비가 충격을 받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이건 실록 어디에도 없는 야사다. 연려실기술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실록에서는 단지 "불손한 말이 많았다"라고만 표현하고 있다. 이 '불손한 말'이 말 그대로 욕을 쏟아내며 모독한 것인지, 아니면 기본적인 예의 지킨 채 폐비 사건을 언급하며 할머니를 공격한 것인지는 조금 불분명하다. 그러나 전자는 물론 후자라고 해도, 왕이 대왕대비의 침전에 쳐들어가서 깽판을 친 것 자체만으로도 당시 조선 왕실에선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그 뒤에 3경(23시)에 안양군 형제를 창덕궁에서 내보냈고, 왕은 내수사(내관)들을 시켜 두 후궁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젓갈을 담가서 산과 들에 뿌려버리게 하고 일주일 뒤인 3월 27일에 폐서인시켜 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왕의 협박에 어머니를 때린 안양군에게 '명령대로' 제 어머니를 잘 때렸다는 이유로 말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날부터 연산군의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후 안양군 형제는 1주일 뒤인 3월 27일 어머니가 폐서인될 때 연좌되어서 안양군은 제천, 봉안군은 이천으로 귀양을 갔고, 1년 뒤인 연산 11년 음력 4월 25일에 외딴 섬으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결국 두 달 만인 연산 11년(1505년) 음력 6월 15일 어머니의 투기한 죄에 연좌되어 두 사람 다 사사되었다.[16]

5.1. 논란?

연산군 옹호파들은 후궁들을 때려죽인 건 야사라고 하거나, 혹은 이런 차이 때문에 사실 둘은 자살했고 살해된 것은 조작이라는 설을 주장하는데, 사실 살해 장면도 생생하게 실록에 나온다.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 신분과 명예를 박탈하는 건 조선시대에 자주 있는 일이었다. 이 케이스는 사형을 내린 것도 아니고 고문치사에 가까운 일이니까 사망 후 신분 박탈이 일어나는 건 모순은 아닌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영조 때의 조태구, 유봉휘 등은 경종 때 죽은 사람들인데 영조 31년(1755)이 되어서야 역적으로 몰려 추죄되었고 이광좌도 죽은 지 20년 가까이 돼서야 직첩이 거둬졌다. 선조 때 죽은 정개청의 사당은 숙종 때까지 허물어졌다가 세워졌다가를 반복했고 윤선도, 윤증고종 시기까지 역적으로 몰렸다가 유현 자격이 박탈되었다 말았다 등을 반복했다.

다만 이런 경우는 정치적 입장의 문제로, 이런 사례의 절대 다수는 죽은 다음에 세월이 흐르면서 생전의 평가가 달라지고, 평가하는 세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생긴다. 일주일 정도 차이를 두고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왕의 의사가 바뀌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서 문제의 두 사람이 죽은 것은 3월 20일이고, 서인으로 직첩이 떨어진 것은 3월 26일이다. 고문치사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이 처리는 반역죄 수준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그 사망한 사람이 후궁 직첩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 그냥 어쩌다가 일주일 정도 늦어진 거 아닌가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조선 왕실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택도 없는 소리다.

무엇보다 이 시기 왕의 행적을 보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시기의 왕은 그야말로 미쳐 날뛰었다. 이세좌과 홍귀달을 처벌하라고 하지 않은 사람들을 다 잡아오게 했고, 대간들이 이세좌와 홍귀달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치죄했다. 그리고 안양군 형제는 이미 곤장을 맞고 유배를 떠난 뒤였다. 이런 상황에서 후궁의 직첩을 거두라는 이야기는 왕이 하지 않아도 당시 관료들이 했어야 했다. 왕이 나중에 이걸 빌미로 왜 직첩을 거두라 하지 않았냐며 죽이려고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문이 이 사건에 의문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실록을 자세히 보면, 3월 23일 폐비의 능호를 정하는 것을 논하는 기사에 이미 왕이 "그때의 일(윤씨 폐비 및 사사)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일찍이 듣건대 그렇게 한(폐비를 모함한) 자들이 있다고 하니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백년안에 처치 못하면 내가 뼈를 가루로 내도 못잊을 거다.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선왕의 후궁으로 상을 지내야 하는가? 그 소생들이 상복을 입게 해야하는가? 강등해야 하는가?"라고 묻고, 다음 기사에서 승지들이 "죄가 있으면 살았어도 내쳐서 후궁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데, 죽었다고 후궁의 예로 장사지낼 수 없고, 아들들도 서인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어야 합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3월 25일에는 왕이 부왕은 윤씨를 폐비해서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옆에서 이간질해서 그런 것이니 폐비 복위 교서에 참소한 자들이 죄인이라고 다시 지어올리라고 지시하고, 같은날 폐비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복위시키는 교서를 내리는 기사에서도 그 일을 얽어만든 사람이 아직 선왕의 후궁 반열에 있으니 곧 죄주고,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서인으로 삼을 것이라는 대목이 있어서 꾸준히 폐서인 절차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후궁이 죽고 6일이 지나서 서인으로 폐한 것은 일이 처리된 결과가 그렇게 소요된 것이고,[17] 실질적으로는 2일 만에 이미 왕은 두 사람의 상제와 폐비의 복위 교서를 통해 두 후궁을 폐서인하라고 꾸준히 압박을 가했고 대신들도 눈치껏 따른 것이다.

6. 무자비한 숙청

폐비의 복위를 시작으로 왕은 당시 제헌왕후의 폐출에 동의한 신하들을 모두 찾아내라는 어명을 내리고 그들을 모두 사사시켰다. 먼저 제헌왕후에게 사약을 전달한 이세좌와 폐비에 동의한 윤필상에게 자살을 명했다.[18] 이세좌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왕은 그가 평상시처럼 평안한 모습으로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태도가 건방지다며 분노했다. 윤필상은 임금의 명을 듣고,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왕은 역시 더더욱 분노했다. 그래서 이들을 단순히 죽이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해당 문단의 마지막 글을 참조.

뒤이어 이미 사망한 남효온,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어세겸, 심회, 이파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지고 한치형은 무려 부관능지를 당했다. 또한 제헌왕후에게 사약을 들고간 이세좌가 광주 이씨라는 이유로 이극균 등 광주 이씨들도 상당수 쓸려나갔다.[19]

이 중 이극균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사이의 기간에서 좌의정을 한 3인방[20] 중 하나로, 역시 폐비론에 힘을 쓰지 못한 것과 좌의정을 하면서 자기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그런데 죽으면서 "신은 젊었을 때부터 변방에서 일했으며, 나라의 크고 작은 일에도 전심전력을 다하여 섬겨왔습니다. 그러기에, 신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죽을 죄는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를 보고받은 왕이 분노한 건 당연지사. 왕은 이극균의 8촌 이내와 그를 찾아뵈었던 무사들을 모조리 변방으로 내쳐버렸고 그들이 변방으로 내쳐진 후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이었다. 연산군 특유의 잔혹한 성정 때문에 후환을 남길 수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대신 성준도 폐비와 관련된 익명서를 바쳤다는 게 발각되어 목이 날아갔고 집안이 박살났다. 당시 성준의 나이는 68세에다가 병이 있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기에 대궐 문 밖까지 업고 왔는데 이를 보고받은 왕이 대궐 안에서까지 업고 올 수 없다고 명령했으나, 그 전에 내린 명령 탓에[21] 옥졸 5명이서 끌고 와야 했다.

이후로도 피의 숙청은 계속되어 왕에게 밉보였던 이들이 모두 별별 이유로 목이 달아나고 사사당했으며, 이미 죽은 대신들의 재산은 몰수되고 남은 가족들도 대부분 사사당하는 피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더불어 죽은 대신들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도 처벌받아 이장곤, 이윤검 등이 처벌받았고 이극균과의 친분이 있다 하여 유자광임사홍(?!)도 참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둘은 왕의 명으로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귀양길을 정말로 떠날 뻔했지만[22] 그냥 왕이 명령을 거두고 넘어갔다.

궁중에서는 국문받는 이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여기에 이세좌 등 이미 벌을 받고 자진하거나 사사된 이들의 무덤도 다시 파헤쳐 능지하거나, 아예 뼛가루로 갈아버린 다음 바람에 날려버렸다고 한다. 특히 왕이 '갑자 6간신'이라 명한 이세좌, 윤필상, 성준, 이극균, 한치형, 남효온의 집은 모두 철거한 다음 그 자리에 물을 채워 연못으로 만들었다.

7. 결과

역사저널 그날과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이라는 책에 따르면 무오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은 약 51명이었고 그 중 6명만 처형됐지만, 갑자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은 무오사화 때보다 약 4배가 넘는 239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122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관참시, 부관능지를 당했다고 한다. 갑자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죽거나 사후 처형을 당한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한 머릿수는 어디까지나 역사상 기록에 남은 사람들을 기준으로 센 숫자이다. 기록에 남지 않은, 말하자면 연좌제에 따라 싸그리 엮여서 처벌을 받은 사람들까지 일일이 기록에 남진 않았기에 그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처벌 받은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의 숫자는 아마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최대 추정치로는 무려 3,000명(!)이 넘어간다는 설도 있다.

이 갑자사화 때는 사림파보다 훈구파들이 더욱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죽은 사람의 머릿수로만 따지면 삼사를 주도한 사림파가 더 많긴 한데 질적인 피해로 따지면 훈구파들이 입은 타격이 더 컸다. 갑자사화 후반기에 무오사화의 생존자들을 죄다 죽이라고 해서 사림의 희생이 커졌고 훈구 대신들이 전부 왕에 의해 사사당하고 가문도 멸문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말 사육신 사건 때보다도 훨씬 더 처참하고 잔혹했으며 농담이 아니고 8촌까지 싸그리 말살당한 집안도 있다.

이렇게 유례가 없는 피바람에 그동안 줄기차게 "아니 되옵니다"만 외쳐왔던 삼사는 물론이고 소극적으로나마 왕에게 자기 절제를 당부했던 훈구 대신들도 왕에게 완전히 제압을 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이 무슨 일을 하던 감히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냥 "지당하옵니다" 이외의 말은 꺼내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고, 마침내 연산군은 사림파와 훈구파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전무후무한 절대 권력을 거머쥐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왕이 그 절대 권력을 쥐게 되자 해야 될 나랏일은 안 하고 사치와 향락만 일삼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본인이 해야할 업무는 내팽개치고 그냥 놀아제끼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내정은 피폐해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연산군 본인도 중종반정이라는 파멸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앞서 내용에 말했듯이 지나치게 잔혹한 처벌들이 시행되면서 사건의 참혹성을 증가시켰으며, 갑자사화를 통해 성종의 재위 기간에 형성되었던 신진 사림들이 수난을 당하면서 이들의 정치 및 학문적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자연현상을 토대로 임금에게 간언하는 재이론이 큰 타격을 받았다. 조선에서 재이 현상은 임금이 자신의 정치를 되돌아보게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로 작동했는데,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왕은 자신과 재이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했고, 신하들이 자신에게 재이의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처벌했다. 그 결과 연산군 대에는 각종 자연현상의 보고가 급격히 줄었고 정치적 책임에 대한 논의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 둘러싼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8. 기타

갑자사화 후 폐비론에 반대한 임사홍이 중용되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임사홍을 갑자사화의 실질적 주동자라고 여기기도 했으나, 이극균과의 친분으로 처벌 위기에 처하는 등 여러가지 정황을 보았을 때 갑자사화의 주동자는 연산군이며 임사홍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이극균과 연좌되어 죽을 뻔한 사람 중 하나였다. 여하튼 그는 그렇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이 찍혀 결국 중종반정 때 살해당했다.

무오사화 이전까지는 후한 평도 들으며, 이후에도 괜찮은 정치 활동을 했었던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완전히 폭군으로 돌변해서 매우 난잡한 정치를 펼쳤다.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절대 권력을 손에 넣고 비뚤어졌다는 평이 대세이나 일부 동정론 및 재해석도 잔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의 폭정을 절대로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그런 동정론을 펼치기엔 왕이 너무 막나간 것도 사실이다.

갑자사화와 이후의 숙청 때 화를 면한 인물 중 허종과 허침 형제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인 윤씨의 폐비 논의가 있을 때, 두 형제는 누이의 충고를 듣고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서 논의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후 갑자사화 때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야사이다. 실제로는 두 형제는 참석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아예 폐비 자체에 반대했었다. 다만 폐비를 최종 결정할 때는 운좋게(?) 두 형제의 할머니의 장례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다.

청계천에는 두 형제가 말에서 떨어진 장소라는 종침교가 있었다고 한다. 이름은 형제의 이름에서 따온 것. 형제 중 형 허종은 아예 연산군이 즉위했을 무렵인 1494년에 이미 사망했다. 허침은 사화에 휘말리지 않고 벼슬살이를 계속 하다가 1505년에 사망했다. 실록에 있는 허침의 졸기에는 '늘 임금의 음황(淫荒)하고 정사가 문란하되 바로잡아 간하지 못함을 근심하더니, 드디어 고질이 되어 병이 위독해졌으되 약을 들지 않고 빨리 죽고 싶을 뿐이라고 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상황에 대해 허침은 심적으로 상당히 괴로워하고, 사관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은 이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 것을 표현한 듯하다.

명나라의 강남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뒤 표해록을 집필한 최부도 이 때 목숨을 잃었다. 최부는 김종직에게 사사하였고 이 때문에 김종직 일파로 몰려서 무오사화 때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유배를 갔다가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라는 왕의 명령에 참형을 당했다.

무오사화 때와 달리 뒷처리가 꽤 무난하게 끝났다. 사림들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세조정통성 논란 때문에 사안이 복잡해진 무오사화와 달리 갑자사화는 조선의 훈구 공신세력들까지도 폐비 사사에 연관되어 있어서 함께 피해를 본 사건이기 때문.

그 원인이야 통설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연산군이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한 발단이 된 사건이라 한국사 강사들 사이에서는 갑자기 일어났다고 하여 갑자사화라는 식으로 암기하게 하기도 한다.

9. 미디어에서

앞의 무오사화에 비해 규모가 더 크고 출생의 비밀, 고부간의 갈등 등 막장 드라마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산군 시절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무오사화는 종종 짤리거나 비중이 축소되는 경우가 있지만 갑자사화는 무조건 중요하고 비중 있게 다룬다. 게다가 갑자사화 이후 왕이 본격적인 폭군이 되기 때문에 연산군 시대 사극에서 가장 중요한 엑기스를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9.1. 한명회

병석에 누워있던 대왕대비가 술상을 들고 처들어온 연산군을 진정시키려고 해명하자 왕의 패드립에 결국 분노해 쉬지 않고 나무라다 왕의 포효와 동시에 소반 킬 당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9.2. 왕과 비

상당히 잔인하게 나온다. 일단 후궁들의 가체를 직접 잡고 고문장으로 끌고 간다.[23] 그 다음 혹독하게 고문을 하는데 주리틀기와 단근질은 기본, 엄씨는 무서워서 떨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정씨는 오히려 왕을 도발하는 바람에 빡친 왕이 휘두른 갈퀴에 얼굴을 맞아 그 얼굴이 찢겨 살점이 너덜너덜해졌다. 잔혹한 모습에 이를 지켜보던 내관들도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려 하자 연산군은 "어느 놈이 고개를 돌리느냐? 두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보아두어라! 내 어머니가 당하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소리친다.

뒤늦게 입궐해서 알게 된 대신들은 폐비의 망령이 되살아났다는 유자광의 말까지 들으며 불안해한다. 상황을 보다 못한 임사홍이 차라리 곱게 죽이거나 아니면 그만 침소로 드시고 날이 밝으면 다시 국문을 하라고 조언해도 오히려 연산군은 "불쌍합니까?"라고 말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다음 두 귀인들의 얼굴에 자루를 씌워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게 한 다음에 봉안군과 안양군을 불러다가 몽둥이를 건네주고 역적들이니 때려죽이라고 하자 안양군은 시키는대로 귀인 정씨를 때려죽였고, 봉안군은 상황을 파악한 다음 때리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그 뒤에 안양군과 봉안군을 끌고 가 대왕대비전에서 깽판을 친다. 대왕대비가 상당히 위엄 있게 나와서 앉아서 왕을 엄하게 나무라고 이에 왕이 거친 말을 퍼부으면서 패륜적인 말을 내뱉던 중 궁녀들이 울어대자 궁녀들을 죽이겠다고 칼을 뽑았고 이에 대왕대비가 일어나서 나부터 죽이라고 외치며 맞장섰다. 그러자 차마 할머니라서 죽이지는 못하고 손으로 세게 밀쳐 넘어뜨렸다. 그리고 내레이션으로 야사에서는 발로 차고, 머리로 받은 것으로 적혀 있음을 언급했다. 그리고 깽판치고 나온 뒤에 아직 숨이 붙어있는 엄씨를 보고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그년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젓갈을 만든 뒤에 까마귀밥으로 던져줄 것이라고 외친 뒤 그 자리에서 엄씨를 베었다.

9.3. 대장금

폐비를 사사하기 위해 사약을 들고 가는 무리들 중에서 속해 있던 서장금의 아버지 서천수는 20년 후 장금이와 마실을 가다가 갑자사화에 연관이 된 군관 출신이라는 게 밝혀지고 사람들에게 끌려가고 장금이 어머니까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이후 장금이는 강덕구의 집에 신세를 지다가 궁에 들어가 생각시가 되고 궁녀가 된다.

9.4. 왕의 남자

위의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 사건이 약간 각색되어 등장했다. 경극을 공연하는 과정에서 공길이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숨지는 황후, 즉 왕의 친모인 폐비와 매우 비슷한 역을 실감나게 연기하자, 감정에 북받친 연산군이 분에 못이겨 후궁들을 직접 칼로 살해했으며 대왕대비는 그 충격으로 쇼크사했다.

9.5. 왕과 나

두 귀인을 죽일 때의 묘사가 실록과 다르다. 이 작품에서는 엄씨는 자식이 없고, 봉안군과 안양군은 모두 정씨의 아들로 나온다. 먼저 왕이 익명서를 빌미로 봉안군과 안양군을 고문하고 그 이후 삭탈관직하여 유배를 보낸다. 봉안군과 안양군 두 사람은 실제로는 갑자사화 기준으로 20세가 넘은 성인이었지만 작품에서는 어린 소년으로 등장한다.

정씨가 연회장에 평복 차림으로 나타나서 차라리 자신을 죽이고 두 왕자를 풀어달라고 하자 정말로 사약을 강제로 먹여서 살해한다. 이후 처소에 있던 엄씨에게 쳐들어가 직접 철퇴로 때려죽인다. 이 일로 화가 단단히 난 대왕대비가 장 숙원의 문안 인사를 거절하는 모욕을 주고, 앙심을 품은 장 숙원은 대왕대비의 측근 상궁들이 폐비와 연관되었다고 말해서 왕이 직접 상궁들을 잡으러 대왕대비전에 뛰쳐 들어간다.

이를 막는 대왕대비를 왕이 밀쳐내자 그러고도 용상을 오래 지킬 수 있겠냐고 꾸짖고, 왕은 자신은 용상을 오래 지킬 것이니 대왕대비에게도 오래 장수해야 자신이 원수를 갚는 모습을 보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때마침 정현왕후가 현장에서 이 모습을 보고 빡쳐서 당장 할머니인 대왕대비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혼내겠다고 말하자 왕은 화를 내는 대신 눈물을 흘리면서 "대비마마가 저를 귀하게 키워주셨으나, 왜 진작에 회초리로 때리며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저는 진성대군이 참으로 부럽습니다."라고 말하고, 정현왕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연산군 역의 정태우한명회왕과 비에서 단종 역을 맡았기 때문에, 단종이 연산군으로 환생하여 갑자사화로 정난공신들에게 복수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9.6. JTBC 인수대비

왕이 이복동생들을 끌고 대왕대비의 거처로 와서 행패를 부리자, 대왕대비를 모시던 상궁들이 차라리 자신들을 먼저 죽여달라며 울부짖는다. 그러자 더 화가 난 왕은 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이렇게 울었냐며 호위 무사의 칼을 뺏어다가 상궁들을 죽이려 하고, 이를 대왕대비가 자기부터 죽이라며 직접 막아선다. 결국 왕은 강제로 대왕대비를 밀쳐내고, 자리에 있던 월산대군의 부인인 승평부대부인 박씨가 정말로 불효자가 되려하냐며 울부짖자 간신히 진정하고, 뛰쳐나가서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엄씨를 죽인다. 위의 왕과 비의 묘사와 유사하다.[24]

9.7. 간신

왕이 갑자사화를 일으킨 뒤부터 중종반정으로 쫓겨나기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로, 첫 도입부에 판소리 형식으로 잠깐 언급을 하고 영화를 시작한다. 이때 후궁들을 철퇴로 후려치는 장면과 노년의 대왕대비를 거의 걷어차는 수준으로 들이받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이 나와 상당히 을씨년스럽다. 폐비의 어머니 신씨로부터 임사홍, 임숭재 부자가 폐비의 피묻은 적삼을 받고 연산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고 한다.

영화 중반에 한 가지 반전이 드러났는데, 임사홍이 받은 피묻은 적삼은 사실 폐비의 것이 아니었다. 폐비는 자신이 죽고 난 후, 궁궐에 엄청난 피바람이 불 것을 걱정하여 자신의 어머니에게 부탁해 유품들을 모두 태워버리게 했다.

그리고 폐비의 어머니도 임사홍에게 폐비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임사홍은 자신 때문에 음독자살한 자신의 아내가 남긴 피 묻은 적삼을 폐비의 것으로 속여 왕에게 건네 갑자사화의 불을 당겼고 그 덕에 권력의 중심부로 돌아왔다. 여기서 또다시 반전이 있는데 사실 연산군도 이 피 묻은 적삼이 어머니의 것이 아닌 임사홍이 가짜로 속인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그냥 넘어간 것이다.


[1] 연산군 본인도 무오사화 문서의 내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종을 복권시키는 것 자체를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2] 갑자사화 이후만큼은 아니지만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은 점점 씀씀이가 많아졌다.[3]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4] 왕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의 모친이자 자신의 계모인 자순왕대비(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5] 만약 폐비와 자순대비의 성이 달랐으면 더 이상하게 생각했을텐데 하필 같은 성씨였고,(본관은 다르다. 전자는 함안이고 후자는 파평) 폐비의 아버지 윤기견은 계유정난 때부터 활약한 정치인이라 맨 처음엔 오기라고 생각했다.[출처1-1] 연산군일기, 연산 1년 3월 16일.[7]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주제가 "정실부인을 모함하여 죽게 하였을 때 목숨을 아깝게 여겨 방관하는게 옳은가 아니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것에서 폐비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8]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대신들도 최대한 맞춰주며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는 데 반대하지 않았으나 대간들은 부왕이 생전에 폐비의 무덤을 '윤씨지묘(尹氏之墓)'라 부르게 하며 그 이상 높이지 말라고 했던 걸 들어 반대했다.[9] 대비가 이를 취하여 지금까지도 있다고 언급하며 물증이 있다는 것을 밝힌다.[10] 이는 추정상 연산군일기 마지막에 왕을 폐위하는 부분에서 부왕이 죽은 후 슬퍼하는 기색없이 순록을 잡아먹었다고 나오는데 이것이 와전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출처1-1] [12] 이때는 경복궁이 정궁(본채)이었고, 창덕궁은 이궁(별채)의 역할을 했다.[13]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옷과 신발을 나눠주는 것이 깜작 승진에 비해 별 의미가 없어보일 수 있지만, 왕조사회에서 왕의 물건을, 그것도 직접 착용하고 있는 것을 내려준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의미이다. 신분과 상징의 의미가 크게 축소된 오늘날조차, 사장이 직원을 사장실로 불러서 사장 자리에 앉히고 계약용 만년필도 써 보라고 한다면 놀라거나 긴장하지 않을 직원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진지한 의미나 효력은 없는, 단순한 장난이나 비공식적 암시 정도일 뿐이지만, 왕조사회에서는 그 자체로 법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가지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14] 이때 이 자리에 있던 성준과 이극균은 감동하여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15] 연산군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중전 신씨뿐이었다. 연산군은 그녀를 볼 때마다 하던 만행을 멈췄다고 한다.[16] 즉, 앞서 말을 선물한 것도 실상은 (강제로) 생모를 때려죽여 패륜을 저질러야 했던 안양군에 대한 왕의 패륜적 조롱인 셈이다.[17] 20일 밤에 사태가 벌어졌고 23일에 강등을 논했으니.[18] 사실 윤필상은 폐비 때도 사사 때도 한명회정창손과 다르게 부왕에게 대의를 좇아 결단을 내려야 된다고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제헌왕후의 계집종 삼월이를 추국해서 각종 비행들을 밝혀낸 것도 윤필상이다. 왕명을 따라 사약을 들고 갔을 뿐인 이세좌와는 다른 경우.[19] 실제로 이세좌의 아들들이 모두 사형당한다. 이준경은 그 중 하나인 이수정의 아들. 같은 광주 이씨인 이극돈은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전 해에 사망해서 화를 피할 수 있었으나 중종반정 이후엔 오히려 무오사화의 주범이라며 시호를 박탈당했다.[20] 나머지 둘은 한치형과 성준. 한치형과 성준은 영의정의 자리에도 올랐다.[21] 이는 그 전에 조지서란 사람이 국문을 받다가 죽은 일 때문인데, 몸이 비대해서 결박당하자 숨이 찼고 그 상태에서 형장 3대를 맞았는데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렇다 보니 왕은 이렇게 되는 걸 막기 위해 살려서 끌고 오라고 한 것.[22] 갑자사화 때 귀양을 간 권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대개 죽음뿐이었다. 대부분 얼마 뒤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23] 후궁들도 사전에 이를 대비해 대왕대비전에 머물고 있던 중전과 대비를 방패로 삼아 숨어있었다. 문제는 정작 왕은 그조차 개의치 않고 두 왕비마저 무시한 채 힘으로 뒤에 있던 후궁들을 끌고 갔다.[24] 이 작품의 작가는 왕과 비의 작가와 동일한 정하연이고, 대왕대비 역 배우도 왕과 비와 똑같은 채시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