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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3:40:06

정현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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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의 성렬 존호는 대왕대비 시절에 바쳐진 것이므로 왕대비 틀에서는 표기하지 않음.
2. 인성왕후는 인순왕후와 동서지간이었기에 선조조에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재위함.
3. 효의왕후는 생전에 존호를 사양하였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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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 貞顯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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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 · 중종조 왕대비
자순왕대비 | 慈順王大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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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선릉정현왕후.jpg
선릉 정현왕후 능침
출생 1462년 7월 30일(음력 6월 25일)
조선 충청도 청주목 신창현 관아
(現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사망 1530년 9월 23일(음력 8월 22일)
(향년 68세)
조선 한성부 경복궁 동궁 정침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능묘 선릉(宣陵)
재위기간 조선 숙의
1473년 7월 17일 ~ 1480년 12월 18일
조선 왕비
1480년 12월 18일 ~ 1495년 1월 30일
조선 왕대비
1495년 2월 3일 ~ 1530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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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파평 윤씨
창년(昌年)[1]
부모 부친 영원부원군 윤호
(鈴原府院君 尹壕, 1424 ~ 1496)
모친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
(延安府夫人 潭陽 田氏, 1421 ~ 1500)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녀
배우자 성종
자녀 1남 1녀 (1남 3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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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 순숙공주(順淑公主, 1478 ~ 1488)
차녀 - 공주(1485 ~ 1486) 요절
장남 - 중종(中宗, 1488 ~ 1544)[2]
3녀 - 공주(1490 ~ 1490) 요절
종교 유교 (성리학)
봉작 숙의(淑儀) → 왕비(王妃)
→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
전호 효경전(孝敬殿)
존호 자순화혜(慈順和惠)
휘호 소의흠숙(昭懿欽淑)
시호 정현왕후(貞顯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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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숙의 시절2.2. 왕비 시절2.3. 왕대비 시절
3. 기타4. 가계5. 대중매체에서6.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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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9대 국왕 성종의 3번째 왕비이자 계비로서,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모후이다. 또한 조선의 역대 왕비후궁 출신으로 중전에 올라[3] 왕대비가 된 단 두 사람 중 하나이다.[4] 왕권이 약했던 초반 중종을 지탱하고, 생모를 잃은 세자 시절 인종(조선)의 가장 큰 뒷 배경이 됐다. 생애 마지막 십 여 년은 며느리 문정왕후와 파워게임을 벌이는 기염을 토했다.

2. 생애

2.1. 숙의 시절

영원부원군 윤호와 부부인 전씨의 딸로 태어났다. 윤호는 좌명공신 윤곤의 손자로, 윤곤은 한명회에게 고모부가 되고, 정희왕후의 5촌 당숙이다.[5] 이러한 배경으로 간택후궁으로 뽑혀 입궁했다. 그러나 중전 윤씨가 폐서인된 후 1480년(성종 11년), 새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종의 많은 후궁들 중에서 정현왕후만한 명문가 출신이 없었고, 당시엔 딸 하나를 낳아 생산능력도 입증했으며 중종은 태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6] 새 왕비 후보로 1순위나 다름없었다. 왕비로 책봉됐을 당시 정현왕후의 나이는 19살이었다.

2.2. 왕비 시절

성종계비가 되어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을 친아들 보는 것처럼 친히 돌보았다. 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된 후에야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비 윤씨임을 알았다고 한다.

1488년(성종 19년), 진성대군을 낳았다.

2.3. 왕대비 시절

연산군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당시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왕대비전 앞까지 쳐들어와 밖으로 나오라고 칼을 들고 소리를 질러댔다. 정현왕후는 두려워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만 있었다.

정현왕후가 후궁인 숙의였을 당시 폐비 윤씨와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시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의 먼 친척임을 제외하면 자녀로는 딸 순숙공주밖에 없었고, 또한 폐비 윤씨폐출될 당시 18살, 왕비로 책봉될 당시 19살, 폐비사사될 당시 21살이었는데 영향력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아니면 그냥 어머니의 자리를 대체한 사람에 대한 화풀이였을 수도 있다. 이때 말고는 연산군이 자순대비를 해하려 한 기록이 없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일 수 있다. 실제로 이날 연산군은 이랬다저랬다 하며 행동이 오락가락한다. 예를 들어 이세좌와 그 친인척들에 관련해서도 유배를 명령했다가 갑자기 도로 불러들여 장을 쳐서 다시 유배보내게 하는 등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인다.

다행히 중전 신씨가 뒤쫓아 나와 간곡히 말려서 연산군이 물러났다.

사실 평소 연산군은 자순대비에게 잘해 주었다. 갑자사화 이전에도 자순대비의 부탁을 받아 한양내에 있는 봉은사에 전답을 시주하였고,[7] 자순대비의 시중을 드는 사람을 칭찬하기도 했다.[8] 갑자사화 대비전에 많은 예물을 보냈다는 기록이 실록에 여러 번 실려 있으며 '자순화혜왕대비'라는 존호도 올렸다.[9] 1505년(연산군 11년), 5월 5일 올린 잔칫상은 밀가루가 40여 석이나 들었고 채화를 꽂고 금은으로 꾸며서 정교함과 화려함을 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국가가 덕을 쌓은 지 백년에 깊고 두터운 은택이 민심을 흡족하게 하여, 만세토록 뽑히지 않을 기초를 마련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크게 임금이 지켜야 할 도리를 잃어 민심이 흩어진 것이 마치 도탄에 떨어진 듯하다.
대소 신료가 모두 종사(宗社)를 중히 여겨 폐립(廢立)의 일로 와서 아뢰기를, ‘진성 대군(晉城大君) 이역(李懌)은 일찍부터 인덕(仁德)이 있어 민심이 쏠리고 있으니, 모두 추대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니, 어리석은 이를 폐하고 밝은 이를 세우는 것은 고금(古今)에 통용되는 의리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진성을 사저(私邸)에서 맞아다가 대위(大位)에 나아가게 하고 전왕은 폐하여 교동(喬桐)에 안치하게 하노라.
백성의 목숨이 끊어지려다가 다시 이어지고, 종사가 위태로울 뻔하다가 다시 평안하여지니, 국가의 경사스러움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크랴?
그러므로 이에 교시를 내리노니, 마땅히 잘 알지어다."
중종의 즉위를 승인하는 교서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아들 진성대군왕위에 옹립되자 "진성대군이 아직 어려 부족한 점이 많은데 어찌 나라를 이끌 수 있겠소"라며 체면상 한 번 튕겼다가 "경들의 뜻이 그렇다면 내 따르리다.[10]" 하며 마지못해 승인하는 듯 어보(御寶)를 찍었다.

새 임금왕위에 올랐지만 대왕대비로 승격되지 않고 왕대비였다. 정현왕후가 중종할머니가 아닌 어머니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연산군의 비였던 신씨폐위되어 왕대비 자리에 새로 오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며느리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보위에 올랐을 때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왕대비가 되어, 문정왕후명종의 모후임에도 불구하고 대왕대비로 승격되었다.

중종 시절에는 왕후가 여러 번 바뀌는 바람에 문정왕후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내명부의 명목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큰어른이었고, 연산군 시절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연산군일기를 보면 생일마다 선물만 받는 뒷방 늙은이의 모습인데, 중종실록을 보면 승정원에서 알아서 정현왕후에게 문안인사를 올리고 정치적 조언을 듣는 상황이 자주 언급된다. 심지어 본인이 죽었을 때 아들 중종과 손자 인종은 기력이 약하니 무조건 유교식 FM대로 하지 말고 상황 봐서 적당히 조절하라고# 미리 조언을 주기도 했다.[11] 참고로 이건 별세하기 8년 전 이야기. 승하 10년 전부터 지병인 천식과 담질환(심장질환)으로 오랫동안 시달렸다.

1527년(중종 22년), 작서의 변 때는 경빈 박씨의 장녀 혜순옹주(惠順翁主)의 여종들을 조사해서 일부를 내쫓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세자였던 인종저주한 범인으로 "경빈 박씨가 유력한 용의자이니 조사해야 한다"는 요지로 글을 써서 아들 중종에게 보낸 적이 있다.

1530년(중종 25년), 69세 나이에 천식과 노환으로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다.

3. 기타

4. 가계

5. 대중매체에서

정현왕후가 살아온 시대는 조선 왕실사의 격동기였다. 시어머니가 인수대비, 의붓아들이 연산군, 며느리가 문정왕후니 말 다했다. 그래서 주연으로는 안 나오더라도 조연으로는 꾸준히 나온다. 대체로 온화한 성품이라 폐비 윤씨인수대비, 문정왕후 같은 강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에 비해 병풍이 되기 쉬워 보이지만, 어린 연산군에게 생모가 폐비 윤씨인 걸 숨기고 정현왕후가 어머니인 거로 한다거나, 중종반정을 추인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조용하게라도 존재감은 드러낸다. 연산군과의 관계는 정현왕후의 성품을 살리기 위해 나름대로 연산군을 아끼는 모습으로 나온다.

특이한 점은, 사극에서는 한번도 젊은 시절과 노년 시절이 같이 나온 적이 없단 거다. 연산군대와 중종대가 분위기상 하도 따로 노는 시대라, 정현왕후의 삶은 항상 반토막으로 나온다. 성종~연산대 사극을 보다가 중종대 사극을 보면 "저 사람이 저 사람이야?"라고 생각될 정도. 앞서 말했듯이 젊은 시절에는 후궁이었고 노년 시절에는 왕대비였기 때문에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가 더욱 어렵다. 실제로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연산군일기에서 기록된 정현왕후는 왕실에서 연산군의 선물만 받는 뒷방 늙은이에 가까운데, 중종반정 이후에는 중종도 갈팡질팡하는 국가 정책에 대해 대신들이 조언을 받으러 대비전을 가끔 찾아오는 기록이 종종 있다.

왕대비 시절을 묘사하는 대중매체에서는 보통 정현왕후보다는 자순대비의 호칭으로 등장한다.
파일:설중매 정현왕후.png 파일:풍란 정현왕후.png
《설중매》의 정현왕후 《풍란》의 정현왕후
파일:조광조 자순대비.png
《조광조》의 정현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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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비》의 정현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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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의 정현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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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 (극 초반) 대비 (극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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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의 정현왕후
파일:역적 정현왕후.png
《역적》의 정현왕후
파일:7일의 왕비 자순대비.png
《7일의 왕비》의 정현왕후

6. 참고 문서


[1] 《중종실록》 -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 윤씨(尹氏)는 파주인(坡州人)이다. 아버지 윤호(尹壕)가 신창(新昌) 현감으로 있을 때인 1522년 6월 무자일에 그 고을 관아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창(昌)자를 가지고 창년(昌年)이라고 이름을 지었었다.[2] 작호는 진성대군(晉城大君).[3] 조선의 역대 왕비후궁 출신 왕비는 세자의 후궁이었다가 세자빈이 된 후에 사망해서 이후 왕비로 추존된 문종현덕왕후, 세자의 후궁이었다가 즉위 후 왕비가 된 예종안순왕후, 성종폐비 윤씨, 정현왕후, 중종장경왕후, 숙종희빈 장씨가 있다.[4] 나머지 1명은 예종의 세자 시절 후궁이었다가 왕비, 왕대비까지 오른 안순왕후 한씨. 다만 안순왕후는 부군 예종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왕대비가 되었다. 그리고 왕대비가 된 후 사망할 때까지 시어머니형님에게 서열이 밀렸고, 아들 제안대군은 어렸던 바람에 시조카 성종에게 왕위가 옮겨간 반면, 정현왕후는 성종의 왕비들 중 가장 마지막에 왕비가 되었지만 15년 동안 왕비 자리에 있었다. (공혜왕후는 4년, 폐비 윤씨는 3년간 왕비 생활을 했다.) 중종반정으로 친아들이 왕이 되었을뿐더러 연산군 재위 후반~중종 시절까지 왕실의 가장 큰어른이었다.[5] 즉, 윤호는 정희왕후의 7촌 조카이다.[6] 중종을 빨리 낳았다면 서자가 적자로 바뀌는 상황이라 질서가 깨졌으므로 왕비가 못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숙종 때에는 후궁 시절 먼저 아들을 낳고 뒤에 왕비에 오른 희빈 장씨가 있지만 희빈 장씨 소생 왕자 외에는 아들이 없었고 이미 원자로 책봉되어 차기 왕위계승자가 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로 인해 경종이 적자냐 서자냐를 두고 정통성이 애매해져서 복잡해질 뻔 했으나, 희빈 장씨왕비 자리에서 폐위된 뒤 후궁 신분으로 죽으면서 추후 경종노론계 신하들에 의해 서자로 기록된다.[7] 연산 7년(1501) 3월 17일.[8] 연산 9년(1503) 7월 14일.[9] 연산 11년(1505) 8월 26일.[10] 여인천하에서 이 대사가 그대로 나왔다. 다만 여기서는 진심으로 연산군의 폐위를 슬퍼하였다.[11] 태종세종대왕보고 본인 상중에는 고기(육류)를 먹으라고 조언한 것과 비슷한 맥락.[12] 을사년 11월에 9달 만에 공주(公主)가 출생하므로 궁중(宮中)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 3월 기사에 대군(大君) 【곧 금상(今上)임.】 이 출생하였고 경술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중략) - 《중종 25년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13]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새로 낳은 공주가 비록 허무하기는 하나 어제 죽었으니, 내일의 조하(朝賀)는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17년 2월 14일 경인 3번째기사[14] 을사년 11월에 9달 만에 공주(公主)가 출생하므로 궁중(宮中)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 3월 기사에 대군(大君) 【곧 금상(今上)임.】 이 출생하였고 경술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중략) - 《중종 25년(1530)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15] 《성종대왕묘지문》에서 정현왕후의 소생으로는 아들 중종만 언급되는 걸 보면, 1494년(성종 25년) 12월 이전에는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16] 이 때 며느리 문정왕후는 배우 김혜자가 연기했는데 최명길(1962년생)이 김혜자(1941년생)의 딸뻘인데도 시어머니 역할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최명길과 김혜자 둘 다 원로배우이지만 당시에는 최명길이 김혜자와 달리 20대 젊은 여배우라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캐스팅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2020년대에 비해 중장년 이상 연령대 배우의 수가 적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17] 이미지가 변한 가장 큰 이유는 이전 사극에서는 죄다 후궁~왕비 시절이었지만 <여인천하>에서는 왕대비 시절이기 때문. 그래서 여기서는 자순대비라는 칭호로만 나온다.[18] 경빈이 복성군에게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한다며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라고 준 것이었다. 문제는 갑자사화의 발단이 바로 성종 시절 폐비 윤씨의 토한 피가 묻은 손수건인데다 당시의 피해자 중에 정현왕후도 있다는 것.[19] 실제로 작서의 변 때 아예 대놓고 용의자 1순위를 경빈으로 지목한 적이 있다.[20] 해설에 따르면 실제 역사에서 무려 19차례나 경빈의 사사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21] 아들 중종역할 맡은 임호와 전원일기에서 남매로 출연했다. 단, 엄유신은 김회장의 큰 딸로 나왔지만, 임호는 김회장의 업둥이로 나왔다.[22] 명나라 사신에게 겁탈당한 노 상궁 수하의 나인이 낳은 어린 궁녀(그녀의 생모였던 나인은 결국 궁녀의 법도에 따라 노 상궁이 직접 자진하게끔 하였고 그 어린 궁녀는 노 상궁이 어미라고 생각하게 하고 에서 키우게 한 것)가 노 상궁이 연로하여 궁을 떠나게 되자 마지막으로 만둣국을 올리고 싶어서 장금의 진가루를 훔친 것. 장금은 이 사연을 알고 차마 진가루를 돌려달라고 말하지 못한다.[23] 배후에는 중종의 정치 개혁에 반발하는 오겸호 일파의 농간이 있었다.[24] 이진은 이 드라마에서 연산군을 연기한 배우 정태우와는 <논스톱3>에서 커플로 나왔다.[25] 폐비 윤씨는 '윤소화'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등장했다.[26] 그래서 연산군도 정현왕후에게 대들 때 "왜 나를 박대하느냐"라고 화내지 않고 반대로 "나를 비록 아껴주기는 했지만 내가 잘못할 때 회초리를 때리고 꾸짖어 주었으면 했다."는 식으로 섭섭해한다.[27] MBC 아나운서 출신.[28]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정현왕후의 며느리 경빈 박씨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