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07:44:58

의녀

파일:external/www.kook-hyang.com/14015000_10000046LT.jpg

1. 개요2. 탄생3. 조직4. 교육
4.1. 초학의(初學醫)4.2. 간병의(看病醫)4.3. 내의녀(內醫女)
5. 임무6. 신분과 가정생활7. 대중문화 속 이미지

[clearfix]

1. 개요

의녀()는 조선 시대에, 간단한 의술을 익혀 내의원혜민서에서 심부름을 하던 여자이다. 신분천민이고 대개 관비 출신이다.

뒤에 차차 기생과 같이 대우되어 의기(醫)라고도 불렸다. 연산군이 이들을 기생으로 쓴 것 때문에 약방기생이라는 멸칭이 붙은 게 사실이나, 나중에는 관기가 될 자원이거나 기생이 의녀로 뽑히는 경우가 많아진다. 단순한 관비들은 글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당시 한의학은 동양철학적인 사상이 어느 정도 관여하므로 성리학을 공부한 기생들이 일반 관비들 보다 접근하기 더 쉬웠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간호사간호조무사, 약국에서 약사를 보좌하는 여자 아르바이트생이라고 보면 된다.

2. 탄생

조선 이전 신라, 고려에서도 궁에서 일하는 궁녀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만 의녀에 해당하는 계층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으며, 최초의 기록은 태종 6년 3월 16일, 제생원 지사 허도가 태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나타난다.
부인들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여 치료하게 하면 부끄러워서 병을 숨기다가 사망에 이르곤 하니, 여자아이들을 골라 의술을 가르쳐서 부인을 치료하게 하소서.
태종은 이 말을 듣고 옳게 받아들여서, 관비(官婢)들 중에 어린 여자아이 10명을 뽑아 제생원에서 의술을 배워 여자들을 치료하도록 했다.

초반에는 뽑은 10명 중 5명만이 제대로 된 의원 노릇을 할 수 있었지만, 의녀들의 수요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추가 인원을 선발했고, 상당한 수의 의녀들이 양성된다.

3. 조직

경국대전에는 3년에 1번씩 의녀를 뽑았고, 그 수는 15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중 실력이 출중한 70명은 내의원에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각 지방의 의원에 소속되었다.

내의원 의녀들 중에서는 일부만 궁궐에서 근무하고, 대부분은 등청ㆍ퇴청을 했다. 또한 의녀는 궁녀들과는 달리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궁궐 안에서 사는 내의녀들은, 궁녀는 아니지만 궁녀와 비슷한 처지였다.

조선의 의료기관으로는 제생원(濟生院), 혜민서(惠民署), 전의감(典醫監), 내의원(內醫院), 활인서(活人署) 등 여러 기관들이 있었는데, 제생원은 세조혜민국에 합병되어 혜민서가 되었다. 일반 서민의 질병을 치료하고 구호사업에도 관여하는 곳이다. 혜민서에는 약 31명의 의녀가 근무했다.

전의감은 혜민서의 상급 기관으로, 궁중에서 쓰는 의약을 공급하고, 의학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내의원은 왕실을 전담하는 치료 기관이다. 내의원에는 18명의 의녀가 근무했다.

활인서는 도성 내의 병자나 오갈 데 없는 사람을 치료하고 무료로 먹이고 입혀주었다. 고려의 동ㆍ서 대비원에서 시작되었으며, 대비원이라는 이름이 불교에서 왔다고 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일환으로 태종 대에 동ㆍ서 활인원으로 개치되었다. 동활인원은 동소문(혜화문) 밖에, 서활인원은 서소문(소의문) 밖에 있었다. 세조 대에 동ㆍ서 활인원은 활인서로 통합되었고, 임진왜란 시기에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만들어졌다.

4. 교육

초기에는 제생원에서 맡았으나, 세조 이후 제생원이 사라지면서 전의감과 혜민서에서 나눠서 의녀들을 교육시켰다. 문신 출신인 2명의 교수와 의원 출신인 훈도들이 의녀들을 교육했다.

4.1. 초학의(初學醫)

의녀로 뽑힌 여자아이들은 우선 초학의라 하여 3년 동안 공부한다. 천자문, 효경, 정속편 등의 책으로 글을 배우고, 다양한 의학서들과 요즘의 수학인 『산서(算書)』를 배운다. 한의학 서적이 인체나 약재의 경우 길이와 무게를 언급하기 때문. 또한 탕약을 만들 때 도량형과 사칙연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중앙으로 보내지는 의녀들은, 먼저 지방에서 글을 깨우치고 중앙으로 올라갔다.

초학의 기간 동안에는 봉급은 나오지 않지만, 의녀의 집안에는 봉족(奉足)이 주어지게 된다. 봉족은 군역을 대신해서 나랏일을 보는 집안에 가서 일을 해주는 국역으로, 봉족으로 충당된 사람은 배치된 집안에 가서 일을 도와줘야 하므로 이것은 곧 경제적 혜택과 같은 것이다.

초학의 기간 동안에는 매월 상순에 책을 강독하고, 중순에는 진맥에 대한 교육을 하고, 하순에 혈의 위치를 교육받는다. 연말에는 제조가 과목들을 총체적으로 강의한 다음, 1년 동안 강의에서 나온 점수를 계산하여 성적에 따라 조치한다.

불합격이 많아 성적이 낮은 사람에게는 주어진 봉족을 빼앗는다. 첫 해에는 1명을 빼앗고, 둘째 해에는 2명을 빼앗는다. 셋째 해에도 불통이 개선되지 않으면 낙제를 당해 쫓겨나서 원래 신분인 관비로 돌려보내진다. 빈 자리는 다른 관비 중에서 1명을 선택하여 채운다.

또 초학의 기간 동안에 3달 이내에 3번 불합격 점수를 받으면 혜민서의 다모(茶母) 일을 하게 만든다. 다모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공부를 게을리해서 성적이 안 좋으면, 역시 관비로 강등시킨다.

4.2. 간병의(看病醫)

초학의 기간 3년이 지나면 간병의가 된다. 이 기간 동안에는 간병을 하면서 의원을 보조하고 병에 대해서 익힌다.

간병의 기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빨리 특정 분야를 익혀 뛰어난 의술을 보이면 내의로 발탁된다. 40살이 될 때까지 간병의로 남아있을 수 있는데, 40살이 되어도 전문 분야를 개발하지 못하면 역시 관비 신세로 강등된다.

간병의 중에서는 성적이 뛰어난 4명만 뽑아서 그녀들에게만 급료를 준다.

4.3. 내의녀(內醫女)

간병의 중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사람 2명을 선택하여 내의녀로 임명한다. 내의녀가 되면 비로소 월급이 나온다. 또한 계절에 1번씩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체아직(遞兒職)에 임명될 수 있다.

체아직은 특별한 경우에 녹봉을 주기 위해 만든 관직으로, 정해진 녹봉은 없고 1년에 4차례 근무 성과에 따라 녹봉이 주어지고 직책은 보장되지 않는다. 의녀는 체아직만 받을 수 있도록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다. 무반직 중 하급직이나 기술 관료나 훈도들도 체아직으로 되어 있다.

체아직에는 전체아와 반체아가 있는데, 전체아는 자리가 1년 동안 보장되고 반체아는 6개월 단위로 근무해서 연장 여부를 결정한다.

내의녀 중에 뛰어난 의녀는 임금을 보살피는 어의녀(御醫女)로 삼는다. 남다른 총애를 받았던 의녀로는 중종 시절의 어의녀 장금이 있다. 하지만 사실 장금과 같은 경우는 모든 의녀를 통틀어 봐도 희귀한 사례이다.

조선 후기 들어선 내의녀의 인원수는 22명이었고, 그중 특출난 10명은 차비대령의녀(差備待令醫女)라 명명했으며, 이들은 오로지 왕실의 일원들만을 진료했다.[1] 그리고 그 중 가장 특출한 의녀는 행수의녀(行首醫女)라 칭하였다.

5. 임무

기본 임무는 간병이다. 부인병에 대해서는 의원으로서 진맥, 시침하고 임산부의 조산원 노릇을 맡았다. 그러나 처방은 의원을 통해서 해야 하며, 직접 처방을 지시할 수는 없었다. 의녀는 부인병에 한해서만 일정 정도 의원으로 활동하고, 대개는 병자를 간호하는 일을 맡았다.

의녀들은 범죄 수사에도 동원되었다. 유교 이념에 따라 남녀 유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부인들의 방에는 포졸들이 들어가기 어려웠으므로[2] 의녀들이 파견되어 여경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여성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여성의 몸을 수색하고, 임신 여부를 판단하기도 했다. 사형당할 여자 죄수가 임신을 했으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궁녀들이 죄를 지었을 때 형조포도청의 명을 받고 그녀들을 체포하는 것도 의녀들의 몫이었으며, 갇힌 궁녀에게 음식을 갖다주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여 보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죄지은 사람이 궁녀가 아닌 비자(婢子)라면, 의녀들이 시중들지는 않았다.

궁녀 말고도 후궁이나 어린 왕자를 잡아들이는 일도 맡았다. 광해군 시절에 영창대군을 끌어낸 것도 의녀들이 했다.(…)

그 밖에 잡다한 일도 맡았다. 왕비의 능을 옮기거나 조성할 때, 남자들이 왕비의 능에 시위할 수 없으니 왕비나 후궁의 무덤을 지키는 일도 의녀의 몫이었고, 왕이 궁궐 바깥에 거둥할 때 횃불을 드는 일도 했고, 후궁이 죽으면 누군가 그 제문(祭文)을 읽어야 하는데 제문을 읽는 것도 의녀의 몫이었다.

연산군 시절에는 혜민서의 의녀들을 동원하여 기생처럼 술을 따르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는데, 이후로도 의녀를 여악(女樂)으로 데려다가 쓰는 일이 잦아서 약방기생이라는 별칭, 멸칭이 붙기도 했다.

그러다가 1510년(중종 5년) 이후로는 의녀를 연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법률로써 수차에 걸쳐 금지하고, 의료의 본업에 돌아가도록 단속하였으나, 한번 흐려졌던 풍기는 시정되지 않고 여전히 연회에 동원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고, 나중에 현대식 간호사가 생기는 개화기에도 조선에서 간호사 직업에 종사하기 꺼리는 풍토가 이어지는 데 영향을 주었다.[3]

6. 신분과 가정생활

궁녀들과는 달리, 의녀들은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의녀들도 관비 신분이었으며, 의녀들은 보통 관비보다도 더 천시되었기 때문에[4], 결혼생활이 쉽게 되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남성과의 접촉이 잦은 의녀들을 관기 못지않은 추잡한 여자(…)로 취급했고, 결혼하기 전에 정조를 더럽힌 경우도 많이 있었다. 아비 없는 자식을 키우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결혼을 여러 차례 하기도 했으며, 결혼생활을 하던 중에도 구박받거나 버림받는 일이 많았다. 즉, 멀쩡한 양인 여성들이 스스로 의녀가 되는 드라마 <허준>의 내용은 완벽한 허구다. 하물며 양반가 여식이 의녀가 되는 드라마 마의는 그냥 판타지라고 보면 된다.

그나마 의녀들에게 가장 괜찮은 결말은 양반의 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의녀를 첩으로 삼을 때는 의녀 대신 여종을 1명 바쳐서 관비로 넣고, 대신 의녀는 양인 신분이 된다. 자식도 서출이기는 하지만 양인으로서 살 수 있게 된다.[5]

또한 조선 초기 경국대전에 따르면 의녀는 창기와 한 데로 묶여 천출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성종조 말부터 의기(醫妓)라 불리며, 연회의 흥을 돋기 위한 기악이나 가무를 익혀야 했다. 국가적인 대사뿐만 아니라 권세가들의 사적인 잔치에도 동원되어야 했을 정도. 사실 내의원의 의원들과는 달리 의녀들은 당초 출신 신분이 관비였으니, 취급이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중종조 초에 의녀가 연회에 동원되는 것을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조실록에 이를 지적하는 기록이 남아있듯이 그러한 풍토는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6]

다만 영조 때 편찬 된 조선후기 속대전에서 의녀의 과목과 계급을 세분화하는 등 점차 의료인으로서 인정하는 분위기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 대중문화 속 이미지

드라마 허준, 대장금으로 크게 알려졌다. 그렇지만 의녀가 주로 등장하는 게 퓨전사극인 걸 감안하더라도, 실제 의녀의 모습과 상당히 다르게 나온다. 천한 신분이라는 것이 축소되거나 극중에서 반영되지 않고, 마치 현대의 의사 같은 전문직으로서 대우받는 것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장금에선 수시로 대감들에게 천시받고, 궁녀들에게도 종노릇을 강요받는 장면이 나온다. <대장금>에서는 장금이가 유황오리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관비로 내쳐졌다가 어떻게든 궁에 복귀하기 위해 의녀가 된 것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의녀의 지위는 관비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으로 어느정도는 고증에 맞게 그려졌다.[7]

참고로 드라마 속의 의상은 의녀 옷차림에 대한 정보가 전해진 게 드물어서 창작으로 만든 것이다. 단 현대의 간호사 캡처럼 의녀들이 머리에 쓰는 사각형 판 형태의 모자 '가리마'는 실제로 의녀가 착용한 것이 옛 그림에 남아 있다.

점프2에서 명낭희가 된 역사인물 중 하나[8]로, 여기선 그냥 흔한 의녀1이다. 여기서 죽을병에 걸린 아이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다가 죽게 만들었지만, 아이의 아버지의 선처로 무사히 풀러났다.

[1] 나머지는 궁인들을 전담하거나 이들을 보좌한다.[2] 물론 지금도 여성의 몸(신체)은 여경이 조사하지만, 이때는 이성이 살았던 방조차 들어가길 꺼렸다는 것이다.[3] 지금도 나이 드신 어른들이나 병원 생태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간호사의사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갖는다.[4] 조선에서는 의료인이라는 직업이 오늘날과 같은 명예를 얻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는 일이 모두 비위생적이고 고된 3D 업종이기 때문에 높은 신분인 자들은 기피했기 때문. 조선뿐 아니라 전근대 사회에서는 의료인의 신분은 낮은 편이었다. 그나마 의사들은 그럭저럭 대우가 나쁘지 않았지만, 서양에서도 간호사는 근대 시기만 해도 지위가 낮고 천대받는 직업이었으며, 의녀나 간호사 모두 남자들과 접촉이 잦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기준으로는 추잡한 여자라는 오명까지 써야 했다.[5] 이를 '대구속신'이라고 하는데, 주로 서얼 중에서도 얼자ㆍ얼녀들이 노비 취급을 받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노비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재산을 모은 공노비의 경우는 이렇게 면천하기도 했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혹은 월매가 이렇게 면천한 사례라는 해석도 있다.[6] 창가(娼家)와 기방(妓房)이 문득 분주하게 출입하는 장소가 되었고, 침비(針婢)와 의녀(醫女)들이 각기 풍류(風流)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영조실록 권47, 영조 14년 12월 21일 기해)[7] 대신에 <대장금>에서는 궁녀의 지위가 비현실적으로 높게 그려졌다는 고증오류가 있다. 특히 궁녀가 요리를 하는 부분이 대표적인 고증오류로, 실제로 궁에서 요리는 숙수라고 부르는 남자 요리사들이 했다.[8] 다른 1명은 선화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