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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00:40:52

공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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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 恭惠王后
파일:파주_삼릉_순릉_능침(항공) 문화재청.jpg
순릉 능침
출생 1456년 11월 17일(음력 10월 11일)
조선 한성부 동부 연화방 한명회 사저[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연건동)
사망 1474년 5월 9일(음력 4월 15일)
(향년 17세)
조선 한성부 창덕궁 구현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순릉(順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470년 1월 10일 ~ 1474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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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청주 한씨
송이(松伊)
부모 부친 상당부원군 한명회
(上黨府院君 韓明澮, 1415 ~ 1487)
모친 황려부부인 여흥 민씨
(黃驪府夫人 驪興 閔氏, ? ~ 1479)
형제자매 1남 4녀 중 4녀[2]
배우자 성종
봉작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
전호 소경전(昭敬殿)
휘호 휘의신숙(徽懿愼肅)
시호 공혜왕후(恭惠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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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계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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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1번째 왕비(王妃).

2. 생애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막내딸로 1456년(세조 2년), 한성부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언니들 중 바로 위의 언니가 예종의 첫번째 왕비인 장순왕후 한씨이다.

1467년(세조 13년) 1월 12일, 세조의 둘째 손자이자 의경세자수빈 한씨의 차남인, 1살 연하의 잘산군(乽山君)[3]과 혼인했다. 혼인 후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으로 불리다 1469년(세조 15년), 잘산군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인수대비는 며느리들에게 무척 엄격한 시어머니였는데, 한씨에게 중국현모양처들에 관한 이야기인 《열녀전》을 읽게 하는 등 성리학 윤리에 따라 철저하고 엄하게 교육했다.

한씨가 자식을 두지 못하자 성종후궁을 들였는데, 한씨는 싫어하는 내색 없이 그녀들에게 옷을 준비해서 내리고 그 뒤에도 패물 등을 선물했다.

한씨는 1473년(성종 4년) 음력 7월에 병으로 친정[4]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성종은 하루 걸러 처가에 들러 한씨의 상태를 살폈다. 이후 회복하여 궁궐로 돌아왔으나, 이 해 12월에 이 다시 도지고 말았다.

이 낫지 않을 것을 예감한 한씨 본인의 요청으로 1474년(성종 5년), 음력 3월에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으로 처소를 옮겼고, 성종과 삼대비[5]가 날마다 구현전으로 가 그녀를 직접 보살폈다. 친정 부모인 한명회와 부인 민씨도 입궐해 병을 돌보았지만 차도가 없었고, 한씨는 죽기에 앞서 부모가 며칠째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밥을 먹도록 명했다. 1474년(성종 5년) 4월 15일, 17세의 젊은 나이로 훙서[6](薨逝)하였다. 성종과의 사이에 후사는 없었다.[7]

성종은 공경(恭敬)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을 공(恭)이라' 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惠)라' 하여 공혜왕후(恭惠王后)라는 시호를 올렸으며, 능호는 순혼(順魂)[8], 전호는 소경전(昭敬殿)으로 정하였다. 연산군의 재위기때인 연산군 4년(1498년)에는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존호가 더해지기도 했다.

종묘 정전(正殿)에 공혜왕후의 신위가 성종과 함께 나란히 모셔져 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파주삼릉[9] 내에 위치한 순릉(順陵)이다.

3. 가계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6. 참고 문서


[1]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의 연화방이거나 황해도 송화 일대의 연화방 둘 중 하나이다. 한명회가 계유정난 직전에 개경 경덕궁직을 맡았다가 계유정난 이후 한양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공혜왕후가 한명회의 막내딸이자 세조 즉위 이후 출생했으니 종로의 연화방일 것이라 추측된다.[2] 바로 위 언니가 장순왕후이다.[3] 성종의 잠저 시절 봉호이다.[4] 친정아버지가 있는 한명회의 집[5] 三大妃,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6] 임금이나 후비(后妃) 따위의 왕공귀인(王公貴人)들의 죽음[7] 여담으로 조선왕실에 왕비로 시집간 청주 한씨 여인들중에서 유일하게 아들은 물론 딸조차 못 낳았다. 다만 현대 관점에서 보면 공혜왕후가 17살에 빨리 임신하는게 무리인걸 감안하면 티 내지 결점이라고 할 순 없다.[8] 나중에 순릉이 되었다[9] 언니인 장순왕후공릉(恭陵)도 이 곳에 있다.[10] 공혜왕후 한씨 ← 한명회 ← 한기 ← 한상질 → 근순택주 한씨 → 윤산삼 → 윤호 → 정현왕후 윤씨[11] 소문난 칠공주의 땡칠이로 유명한 그 신지수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