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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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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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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王室 | House of 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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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御旗)
관향 <colbgcolor=#fff,#191919>전라북도 전주시
창업군주 태조 이성계
중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주요인물 역대 조선 국왕, 의경세자,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 소현세자, 효장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 전계대원군, 흥선대원군


1. 태조


태조는 꽤 자식복이 많은 편이다. 장남 진안대군 이방우는 음서로 벼슬할 능력이 있고, 차남 정종 이방과는 무인의 기질을 타고나 태조를 따라다니며 활약했다. 그리고, 속도 썩였지만 결론적으론 가장 많이 효도했다고 볼 수 있는 5남 태종 이방원은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1.1. 목조

1.2. 익조

1.3. 도조

1.4. 환조

2. 정종


15남 8녀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자녀를 두었으나, 정작 정실인 정안왕후와는 자녀를 두지 못했다. 금슬이 좋았다고 해서 왕비가 불임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금슬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후궁들에게서 엄청 많은 자녀들이 탄생했다.(...) 이 점이 동생 방원에게 큰 장점으로 받아들여져[38] 사실상 장자라는 점[39]과 더불어 정종의 즉위에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성빈 지씨에게서 2남, 숙의 지씨에선 3남, 숙의 기씨로부턴 4남, 숙의 문, 윤, 이씨로부턴 각각 1, 4, 3남을 득남했다. 한 명의 아들도 빠짐없이 자손을 많이 두며 왕위에 오르지 못한 정종의 가계는 번성했다.[40] 그외 특이점은 중종반정을 일으킨 3훈 중 한 명인 성희안이 10남 덕천군의 손자, 즉 정종의 증손자라는 것.

3. 태종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가족 관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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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종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세종(조선)/가족 관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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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종


현생 후손이 없다.

6. 단종

7. 세조

8. 예종

9. 성종

손자: 정양군(正陽君) 회(誨)
손자: 은양군(恩陽君) 량(諒)

9.1. 덕종

10. 연산군

11. 중종

12. 인종


세자 자리에 오래 있었음에도 자식이 없다.

13. 명종


33세에 사망했지만, 재위가 23년이었음에도 별다른 자식을 두지 못했다. 그나마 있던 순회세자도 13세에 요절.

14. 선조


선조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다 인성이 안 좋거나 역모에 연루되어 있다.

15. 광해군

16. 인조

16.1. 원종

17. 효종

18. 현종

19. 숙종

20. 경종

21. 영조

21.1. 진종

21.2. 장조

22. 정조

23. 순조


자식복이 없는 수준을 넘어서 처참하다. 순조가 1834년에 죽었는데, 아들은 물론이고 딸까지 5명이나 순조 생전에 죽었다. 심지어 막내 덕온공주도 순조 생전에 죽지 않았을 뿐,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149] 자식 1명만 죽어도 부모된 입장으로서 피가 말리는 기분인데, 순조 입장에서는 그걸 5번이나(그것도 말년에 연달아서) 겪어야 했으니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1832년에 애지중지하던 두 딸마저 요절해버리자 '왕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마저도 세상을 등진 데에는 자식들의 연속된 요절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23.1. 문조(익종)

24. 헌종

25. 철종


그나마 오래 산 영혜옹주를 제외하면 다들 갓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 박영효의 후손들이 있지만 영혜옹주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아닌 첩에게서 태어난 후손들이다.

26. 고종,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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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의왕후 소생들은 당시엔 '대군'이라는 칭호가 없어서 그냥 군(君)으로만 호칭했다. 대군이라는 작위는 태종 시기에 등장한 작위이므로 정종과 태종은 실제 대군이 된 적은 없었다. 나머지는 후세에 추증받은 것이다.[2] 지간성군사(知杆城郡)이자 증찬성(贈贊成事)인 최인두의 딸[3] 진안대군의 차남 이덕근에게 입양.[4] 공양왕의 동생인 왕우의 딸이다.[5] 세종소헌왕후의 오남으로 1436년 봉사손이 되었다.[6] 여말선초의 무장이자 친최영파, 그리고 공양왕 시기엔 우왕과 연루되 죽은 변안열의 딸이다.[폐출] 내시 이만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이만은 참수되고 유씨는 페출.[8] 심효생이 아버지이다. 심효생은 정도전파이자, 1차 왕자의 난태종에게 죽은 사람이다.[9] 출생 기록만 남겨져있고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아 요절한 것으로 보인다.[10] 세종의 6남인데, 단종 복위 역모에 연루되어 순흥부로 유배된 뒤 부사 이보흠을 반협박으로 봉기를 일으키려다 이보흠의 밀고로 죽었다.[11] 금성대군의 역모 후 파양이 된 뒤 세조가 자신의 이복동생인 밀성군의 차남인 춘성군을 봉사손으로 삼았다.[156][12] 태상왕이 된 이후에 정식 봉작되는 바람에 후궁으로 분류되었다.[13] 김해의 관기 출신으로 이름은 칠점선이다. 외모가 출중해서 태조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14] 임금과 세자가 일어나 춤추니, 태상왕이 총애하는 기생 무협아(巫峽兒)를 불러 내어 잔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임금이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세자가 단(段) 1필을 하사하고, 지극히 즐기다가 파하였다. - 《정종실록》, 정종 2년 8월 21일 계축 3번째기사[15] 완창대군의 양자.[16] 중종반정의 3훈 중 한 명인 그 사람이다.[17] 정여창에게 출가했다.[18] 효도 효(孝)자가 돌림자.[명선대부] [명선대부] [창선대부] [광휘대부] [23] 승헌대부[명선대부] [25] 정종의 7남 수도군의 차남이다.[26] 수도군의 3남인 풍산부정의 차남[27] 수도군의 11대손.[28] 진남군의 4남.[29] 이름이 효자(孝慈)인데, 당연하지만 효자는 아들 자를 쓴다. 장택군 이효자는 사랑 자. 이 사랑 자를 써도 뭐 효자란 뜻은 딱히 변하지 않는다.[30] 놀랍게도 그 연산군의 燕山이다![31] 경상북도 예천군 다인현의 옛 이름인 仁陽을 쓰고 있다. 조선의 체제에 외왕내제가 섞여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32] 당연히 곡성군의 곡성은 아니다. 다만, 금손(金孫)은 손자할 때 그 손을 쓴다.[33] 11남인 임성군의 양자.[34] 광해군의 이름과 똑같지만, 한자가 무엇인지 모른다.[35] 율곡 이이와 동명이인이다. 다만 율곡 이이는 귀고리 珥, 봉성군 이이는 무리 侇를 쓴다.[양자] [37] 선조는 해 다닐 연이란 안 쓰이는 한자를 쓰고, 금산군은 연희궁의 넓을 衍을 쓴다.[38] 위 태조의 가계를 보면 알겠지만 죽은 첫째형 진안대군을 제외하고도 익안대군회안대군은 적자가 있다.[39] 진안대군이 죽은 뒤 사실상 장자이다. 즉 장자가 죽은 뒤 차자가 가통을 이어받은, 체이부정이 되는 것. 조선 초에는 이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았고. 제사 예법도 꽤 널널한 편이었으나 이 점 때문에 200년 뒤엔 예송논쟁이 발발한다.[40] 왕실의 자손이 귀해져 강화도에 있는 죄인의 아들을 데려오고, 17촌을 왕위에 앉히는 조선 후기를 생각하면...[41] 동궁의 딸이 죽었다. 권 승휘(權承徽)의 몸에서 낳았는데 (중략) "나이가 1살이 차지 못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무덤을 지키오리까.''(후략) -《세종 15년 3월 3일 병진 1번째기사》[42] 요절한 다른 왕녀들은 사망나이가 정확히 적혀있어 태어난 년도를 알 수 있는 반면, 권씨의 큰 딸은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1살이 차지 못했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1433년 1월~3월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즉, 태어난 해에 죽은 것[43] 승휘 홍씨(承徽洪氏)의 딸이 죽으니, 나이 4살이었다. -《세종 26년 12월 4일 기유 1번째기사》[44] (중략) 왕세자빈 권씨는 증 의정부 좌의정 전(專)의 딸인데, 원손과 평창 군주를 낳고 일찍 졸(卒)하였고, 사칙 양씨는 딸 하나를 낳았고, 궁인 장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고, 정씨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중략) -《세종 28년 6월 6일 임인 2번째기사》[45] 문종의 요절한 왕녀들은 전부 죽었을 때의 기록이 있는 반면, 요절한 왕자들은 생몰년 기록 자체가 없다.[46] (중략) 왕세자빈 권씨는 증 의정부 좌의정 전(專)의 딸인데, 원손과 평창 군주를 낳고 일찍 졸(卒)하였고, 사칙 양씨는 딸 하나를 낳았고, 궁인 장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고, 정씨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중략) -《세종 28년 6월 6일 임인 2번째기사》[47] 왕녀가 졸(卒)하였다. 나이는 2세인데 궁인 양씨(宮人楊氏)의 소출이었다. -《문종 1년 8월 12일 정축 1번째기사》[48] 야사〈금계필담〉에서는 세조의 장녀를 의령공주로, 그 이름을 이세희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존재가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따라서 실존여부 자체가 확인이 불가능하다. 다만 실록의 세종 28년(1446년) 기록에 "수양대군은 윤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고 있다" 라고 한 부분이 있다. 세종실록의 기록으로 보면 1446년 세조의 슬하에는 의경세자와 이름 미상의 딸, 의숙공주만이 있었고, 예종은 출생 전이었다.[49] 2경(更)에 아지(阿只) 가 졸(卒)하니, 예조(禮曹)에서 상장(喪葬)의 의식(儀式)을 의논하여서 아뢰었다. 아지(阿只)는 곧 후궁(後宮) 박소용(朴昭容)이 낳은 아들의 이름인데, 2경(更)에 졸(卒)하니, 나이가 5세였다. - 《세조실록》, 세조 9년 11월 24일 무인 1번째기사[50] 봉작은 생전엔 부수와 정에 이르렀다고 하나, 출처가 없다.[51] 선원보략수정의궤(璿源譜略修正儀軌) 1874년 판에 언급.[52] 고종 때 추증.[53] 왕자(王子)가 졸(卒)하였는데,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소생이었다. - 《성종실록》, 성종 10년 6월 12일 정유 3번째기사[54] (중략) 을사년(1485년) 11월에 9달 만에 공주가 출생하므로 궁중이 깜짝 놀랐었고 (중략) - 《중종실록》, 중종 25년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55]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새로 낳은 공주가 비록 허무하기는 하나 어제 죽었으니, 내일의 조하(朝賀)는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17년 2월 14일 경인 3번째기사[56] (중략) 경술년(1490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중략) - 《중종실록》, 중종 25년 8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57] 성종 때에는 숙원이었다가 중중 때 숙용, 숙의를 거치면서 고종 때 빈으로 추증되었다.[58] 남흔의 아들 남섭원에게 하가하는데 남섭원은 경순옹주의 부마인 남치원과 사촌간이다.[59] 숙원 김씨(金氏)가 3남 3녀를 탄생하였는데, 휘숙 옹주(徽淑翁主)는 풍원위(豐原尉) 임숭재(任崇載)에게 하가하였고, 경숙 옹주(敬淑翁主)는 아직 하가하지 아니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 《성종대왕묘지문》[60] (중략) 숙용(淑容) 정씨(鄭氏)는 2남 1녀를 낳았고 (중략) - 《성종실록》성종 14년 6월 12일 계유 1번째기사[61] 막내 정혜옹주는 성종 21년(1490년)에 태어났다.[62] 익양군의 아들의 6남.[63] 익양군의 차남.[64] 은천군에게 출계[65] 견성군의 차남[66] (중략) 숙의(淑儀) 김씨(金氏)는 1녀를 낳았고 (중략) - 《성종실록》성종 14년 6월 12일 계유 1번째기사[67] 세종의 장인 심온의 동생 심정의 손녀, 세종비 소헌왕후의 당질녀[68] 경순옹주는 남경의 아들 남치운에게 하가하는데 남치원은 휘정옹주의 부군인 남섭원과 사촌간이다.[69] 세종의 왕자 수춘군(심순로의 장인)의 외손녀, 세종의 장인 영의정 심온 - 영의정 심회 - 병조참의 심인 - 고성군수 심순로의 딸[70] 숙원 권씨(權氏)가 1남 1녀를 탄생하였는데, 모두 어리다. - 《성종대왕묘지문》[71] 왕자(王子) 이효신(李孝信)이 졸(卒)하였다. 태어난 지 겨우 다섯 달이므로, 3일만에 장사하고 관곽(棺槨)을 쓰지 말고 제사에 흰 떡을 쓰고 1백일 만에 그치라고 명하였다. - 《성종실록》 55권, 성종 6년(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5월 20일 무진 4번째기사[72] 연산군이 성종의 맏이인것으로 보아 연산군보다 더 일찍 태어난 이효신 역시 폐비 윤씨의 아들일 것으로 추측된다.[73] 숙신 옹주(淑愼翁主)가 졸(卒)하였다. 임금의 딸인데 나이가 어려서 출가하지 않았었다. - 《성종실록》, 성종 18년 8월 20일 정해 5번째기사[74] 숙신옹주(淑愼翁主)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12세이다. 임금이 나이가 어린 것 때문에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염습(斂襲)하고 빈소(殯所)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20년 11월 8일 임술 5번째기사[75] (중략) 숙의(淑儀) 김씨(金氏)는 1녀를 낳았고, 엄씨(嚴氏)도 1녀를 낳았고, 숙용(淑容) 정씨(鄭氏)는 2남 1녀를 낳았고, 숙원(淑媛) 홍씨(洪氏)는 3남 1녀를 낳았고, 궁인(宮人) 하씨(河氏)는 1남을 낳았고, 김씨(金氏)는 1녀를 낳았고, 심씨(沈氏)도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중략) - 《성종실록》성종 14년 6월 12일 계유 1번째기사[76] 1483년 6월 12일 이전에 태어난 성종의 옹주들은 혜숙옹주(숙의 홍씨 소생), 숙신옹주(생모 미상 소생), 휘숙옹주(명빈 김씨 소생/당시 궁인 김씨), 공신옹주(귀인 엄씨 소생), 경순옹주(숙용 심씨 소생) 이 5명인데 실록의 기록과 대조해보면 숙의 김씨와 숙용 정씨(훗날 귀인 정씨)만 남으므로 숙신옹주의 생모는 이 두 후궁 중 한명으로 추측된다.[77] 성화 22년(1486년) 12월 초6일 해시에 태어난 왕자 견석의 태실을 성화 23년(1487년) 4월 초7일 조성 - 《울진삼달리태실》[78] 이복동생인 덕흥대원군의 3남인 그 선조다. 이후 당연 파양.[79] 해안군의 아들.[80] 선조의 아들.[81] 선조의 아들이고 둘다 귀인 김씨 소생이며 공교롭게도 둘 다 요절했다.[82] 명종비 인순왕후의 남동생 심충겸의 부인[83] 선조의 부친[84] 하릉군의 양자로 감.[85] 기자헌의 부인.[86] 상술했던 하원군의 아들[87] 명종에게 입적.[온양] [동래] [계축옥사] 계축옥사.[91] 양자로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다.[92] 임해군의 옥사[93] 경창군의 차남.[94] 인조의 부친.[허균] 허균의 옥사.[96] 덕흥대원군의 손자인 익성군의 삼남이다.[97] 인성군의 차남이다.[대북] 대북 역모 외 많은 역모 연루.[99] 상술한 순화군의 양장남[100] 능풍군의 양자로 갔다.[101] 흥안군의 양자[102] 능풍군 이명에게 양자로 갔다.[103] 서손[104] 서손이다.[105] 낭선군에게 양자로 갔다.[106] 서손.[107] 서손[108] 서손[109] 임해군에게 출계.[110] 신성군에게 출계.[111] 심의겸의 고손 심약하의 부인[이괄의난] 이괄의 난.[113] 이 시대 태생 치고 꽤 장수한 편이다. 그 효령대군보다 5살 더 살았으니. 병자호란이 발발한 연도에 태어나 오촌 소현세자의 죽음과 효종의 즉위와 대동법 시행, 예송논쟁을 바왔다. 또한 종질 숙종 환국, 노론-소론 갈등과 무려 육촌인 경종-영조의 갈등, 그리고 영조의 즉위까지 본 후에도 7년을 더 살았다. 더 쉽게 말하자면 사촌의 재위 기간 때부터 사촌의 내손자 즉위 기간에 사망한 것이다.[사사] 1632년 사사됨.[115] 정탁의 잡저인 피난행록의 기록에 1592년 5월 12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184A_0050_020_0080_2014_002_XML[116] 박승종의 손녀[117] 이름 미상의 후궁소생.[118] 선조실록 168권, 선조 36년 11월 11일 계해 4번째 기사에 마마(천연두)에 걸려 요절했다고 나온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11011_004[119] 변개똥, 변아무개 등으로 불렸다. 그녀는 광해군 재위 말년에 반정의 움직임, 기미가 보여 상소가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변상궁이 광해군을 아첨(설득)해 능양군을 주축으로 해서 김자점, 김류 등이 이끄는 반정군이 잘 들어오게 해주게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반정군은 광해군의 궁인이라며 오히려 도와준 궁인 변상궁을 처형(참수)시킨다.[120] 양자로 갔으나, 후손이 없어서 또 양자를 들였다.[121] 은신군에게 입적.[122] 완은군에게 입적.[사사] 효종 2년인 1651년 폐서인된 뒤 사사.[양자] [추존] [신경희] 신경희의 옥사에 연루되어 자결.[127] 효종이 즉위하고 7년만에야 숙원으로 봉작, 현종 때 숙용, 숙의, 귀인을 거쳐 숙종 때 빈이 되었다.[128] 승정원일기 354책 (탈초본 18책) 숙종 19년 10월 10일 경진 13/18 기사[129] 승정원일기 18책 (탈초본 354책) 숙종 19년 12월 13일 임오 7/11 기사[130] 새로 탄생한 왕자(王子)가 졸(卒)하였다. 《숙종실록 32권, 숙종 24년 7월 10일 임오 1번째기사》[131] 밀풍군의 차남으로,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었다 파양.[132] 항렬로 보면 은신군은 영조의 손자기에 연령군의 손자뻘이여서 양자인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해야 했다. 그런데 봉사손으로 삼는다고만 했다. 비록 연령군의 봉사손이 됐다해서 자동으로 낙천군의 양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정식 입적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은신군을 사도세자의 아들로 봐서 남연군의 자손들이 종친 대우를 받고 왕이 될 수 있었다. 다만, 현재 은신군의 자손들은 연령군 - 낙천군 - 은신군으로 이어오는 계보를 확립하여 자신들을 연령군의 후손으로 인식하고 있다.[133] 세자빈 시절 요절하여 경종이 왕위에 올라 왕비로 추존[134] 큰아버지 진종에게 출계.[135] 풍계군의 서장남.[136] 중종 서7남 덕흥대원군의 12대손.[137] 은전군에게 출계.[경창군] 선조 서9남 경창군의 10대손.[139] 큰아버지 흥녕군에게 출계.[경창군] 선조 서9남 경창군의 10대손.[141] 세종 적5남 광평대군의 17대손.[142] 문조에게 출계.[143] 인조 적3남 인평대군의 9대손.[144] 이완용의 이복 형.[파양] [146] 원종 적2남 능원대군의 8대손.[147] 선조 서9남 경창군의 9대손.[148] 상계군에게 출계[149] 다르게 말하면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입장에서는 본인의 자녀들이 모두 본인보다 먼저 죽었다는 것도 의미한다. 심지어 장손인 헌종도 먼저 죽었다...[150] 신시(申時)에 원자가 창덕궁 대조전에서 탄생하였다. -《철종실록》10권, 철종 9년 10월 17일 기미 1번째기사[151] 진시(辰時)에 원자가 졸서하였다. -《철종실록》11권, 철종 10년 4월 23일 계해 1번째기사[152] 아들을 낳은 궁인 박씨를 귀인으로 봉작하게 하다. -《철종실록》6권, 철종 5년 7월 10일 정미 1번째기사[153] 궁인 조씨가 아들을 낳았다. -《철종실록》11권, 철종 10년 10월 13일 기유 1번째기사[154] 인시(寅時)에 귀인 조씨가 아들을 낳았다. -《철종실록》 13권, 철종 12년 1월 15일 갑진 1번째기사[155] 미시에 궁인 이씨가 남아를 낳았다. -《철종실록》 14권, 철종 13년 윤8월 8일 무자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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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항렬상으론 의안대군이 빨리 죽어서 그렇지 증손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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