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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0:56:55

단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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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의 정비
단경왕후 | 端敬王后
파일:양주_온릉_능침 문화재청.jpg
온릉 능침
출생 1487년 2월 16일(음력 1월 14일)
사망 1558년 1월 6일
(음력 1557년 12월 7일) (향년 70세)
능묘 온릉(溫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506년 9월 28일 ~ 1506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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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거창 신씨
부모 부친 익창부원군 신수근[1][2]
(益昌府院君 愼守勤, 1450 ~ 1506)
모친 청원부부인 한은광[3][4]
(淸原府夫人 韓銀光, 1447 ~?)
형제자매 4남 3녀 중 차녀
배우자 중종
자녀 없음
종교 유교 (성리학)
휘호 공소순열(恭昭順烈)
시호 단경왕후(端敬王后)
}}}}}}}}} ||
1. 소개2. 생애
2.1. 연산군 시절2.2. 중종반정 이후2.3. 폐비가 아니라 강제이혼 당하다2.4. 복위 논란2.5. 죽음 이후
3. 기타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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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중종이 즉위 전 대군 시절 처음 혼인한 정실부인이자 첫 왕비로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원부부인 청주 한씨의 딸이다.[5]

중종반정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현명했다고 전해진다. 남편 중종과의 부부 관계도 <국조기사>에 따르면 좋았다고 하지만 두 사람은 중종반정 이후 생으로 이별하게 된다.

친할아버지 신승선세종의 4남 임영대군사위이자 연산군장인이었으며 아버지 신수근좌의정에다 연산군처남이었다. 작은아버지 둘은 모두 형조 판서를 역임했고 작은어머니(둘째 작은아버지 신수영의 부인)는 예종의 비 안순왕후의 여동생이다. 고모는 다름 아닌 연산군의 정비인 폐비 신씨. 이런 관계를 통해 남편이었던 중종의 고조부와 단경왕후의 외고조부는 세종대왕으로 공통조상이 같기에 중종과 단경왕후는 8촌 관계이다. 외가쪽으로 가면 외조부인 한충인[6]은 시할머니 인수대비의 사촌 오빠이며 외조모 김씨는 태종의 차녀 경정공주의 외손녀이다. 시가인 조선 왕실쪽으로는 시할머니는 인수대비이며 시아버지는 성종이고 시어머니는 정현왕후였으며 연산군은 시아주버님이자 고모부였다.

한마디로 친가 외가를 통틀어 일가 친척이 죄다 왕실의 후손이거나 인척관계를 맺은 당대 최고 명문가의 여식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무색하게도 중종반정에 휘말려 친정 가족은 몰살당하고 고모와 고종사촌들[7]과 함께 폐서인이 되었다.

2. 생애

2.1. 연산군 시절

연산군의 재위 시절인 1499년(연산군 5년) 13살 때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에게 시집갔다. 신씨가 진성대군보다 1살 연상이였고 대군의 정실부인을 뜻하는 부부인(府夫人)에 봉해졌다.[8]

시아주버님 연산군의 정비인 중전 신씨는 신씨의 고모였으니 중전 신씨와 단경왕후 신씨는 고모-조카 사이이자 동서지간이 된다.

1506년(연산군 12년) 9월, 중종반정 당일 반정군이 먼저 진성대군을 호위하려고 집을 에워싸자 진성대군은 자신을 죽일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자결하려 했다. 이때, 부인 신씨는 “군사의 말머리가 이 궁(진성대군의 자택)을 향해 있으면 우리 부부는 죽어야 하지만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다면 공자(진성대군)를 호위하려는 뜻일 것”이라며 남편을 말렸고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니 과연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었다. 이에 진성대군은 문을 벌쩍 열고 무사들을 맞이했다. 만일 중종반정 당일 신씨의 만류가 없었다면 진성대군은 지레 자결하고 말았을 것이다.

2.2. 중종반정 이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진성대군이 왕이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신씨(단경왕후)도 중전이 되었으나, 고모연산군의 비이고, 하필 아버지 신수근이 폐주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터라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반정세력의 요구에 따라 고작 7일 만에 폐출당하고 만다.[9] 이때 고작 19살.

『중종실록』 1528년(중종 23년) 1월 29일의, “어의동(於義洞) 폐비 신씨[10]의 집 수직 군사를 단지 4명만 정했는데, 매우 부족하여 근일 도둑이 출입한 일이 있었다. 이에 중종은 6명으로 늘려 지키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연려실기술』의 “매양 모화관(慕華館)에서 명나라 조사(詔使)를 영접할 때에는 꼭 말을 보내 먹이게 하니, 부인(단경왕후)은 직접 흰죽을 쑤어 손수 들어서 말을 먹여 보냈다고 한다.”는 기록에서 서로를 위했던 두 사람의 애틋한 모습을 만나볼 수가 있다.

상당수 역사가들은 "단경왕후는 단 하루도 왕비였던 적이 없으며 추존왕비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낸다. 실제로도 정식으로 왕비가 되려면 책봉식을 치러야 하는데,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당일 바로 남편 중종과 강제 별거되었다. 7일이란 기간은 단경왕후가 왕비로 지낸 시간이 아니라, 중종이 아내를 내치지 않으려고 버틴 시간이라 봐야 한다.[11]

2.3. 폐비가 아니라 강제이혼 당하다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대업(大業)을 이루고자 해서였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친딸이 대궐 안에 있습니다. 만약 (그를) 왕비(宮壼)로 삼는다면 민심이 불안해지고, 민심이 불안해지면 종묘사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12] (사사로운) 은정(恩情)을 끊고 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그러나 조강지처(糟糠之妻)인데 어찌하랴?"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신 등도 이미 요량하였지만,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로 볼 때 어쩌겠습니까? 머뭇거리지 마시고 쾌히 결단하소서."라고 말하며 을 압박했고, 결국 전교하기를, 종묘사직이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의 뜻을 따라 밖으로 내치겠다.”하였다.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9일 을유 2번째기사
중종반정으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남편 중종과는 강제 이혼당하는 등, 중종반정의 최대 피해자로 전락했다.

많은 사람들이 단경왕후 신씨가 중종이 왕으로 옹립되었으니 당연히 왕비로 책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7일의 왕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완벽한 고증의 오류이자 역사의 왜곡이다.

신씨는 중종반정 당시 폐주 연산군의 정비이자 자신의 고모인 폐비 신씨가 폐출됨에 따라 당시 내명부의 수장이자 시어머니인 자순왕대비로부터 중궁에 책봉한다는 교명도 없었고[13], 부군인 중종으로부터 왕비에 책봉한다는 교지도 못받은 상태에서 중종의 조강지처 자격으로 경복궁 내에 머물고 있었던 것뿐이다.

이는 후대인 선조가 등극하기 전 하성군 시절 흠경각에 머물고 있었던 것을 보면 신씨가 경복궁에 머물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바가 없다.

즉, 신씨는 왕비로서 단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고 부부인(대군의 정실)이자 사대부 부인 자격 상태에서 반정세력의 강압으로 강제 이혼당한 것일 뿐이다.

2.4. 복위 논란

삼훈[14]은 (중종을) 추대한 공이 비록 크나, 왕비를 위협하여 폐한 죄는 만세(萬世)에 벗어나기 어렵다. 만약 삼훈을 저승에서 일으켜 이 상소[15]를 보이고 물으면, 또한 반드시 목을 움츠리고 부끄러워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대간이 모두 무식한 사람이라서 권민수와 이행의 말만을 믿고 바람에 쏠리듯 좇았으니, 애석하다.[16]
- 중종실록 중종 10년 8월 11일 기사에서의 사관의 논평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은 후 사망하자 중종 재위기인 1515년(중종 10년) 8월 8일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등이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리는 등 일부 대신들의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중종이 태클을 걸었다.

이때는 단경왕후의 폐출을 주장했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유자광 등이 모두 죽은 뒤라서 중종의 의지만 있었다면 신씨의 복위가 시기상 가능했지만, 장경왕후 윤씨가 세자를 낳고 죽은 바람에, 만약 신씨가 복위되어 아들을 낳을 경우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에게서 얻은 아들을 적장자로 봐야 하느냐, 아니면 후처인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중종첫 번째 아들을 적장자로 봐야 하느냐는 후계 논란의 씨앗이 불거질 수 있는 큰 문제가 된다.. 복이 지지리 없었다

이 일이 있고 14년 뒤인 1529년(중종 24년) 9월 13일에는 충청남도 부여에 사는 김식이라는 인물이 중종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내용을 보면 "신씨를 폐한 죄목은 무엇입니까? 공자는 얼룩소의 새끼라도 빛깔이 붉고 뿔이 똑바로 났으면 버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신씨의 덕은 얼룩소만도 못하단 말씀입니까?"라며 중종이 신씨에게 보여주었던 태도에 대해 패기 넘치게 항의하는 대목이 있다. 이 상소를 읽어 본 중종은 "입밖에 낼 수 없는 말들이 많아 지극히 경악스럽다. 평상시라면 처벌하겠으나, (내가) 구언[17]을 해달라고 해서 한 말이니까 처벌하면 신하들이 바른 말을 못할 것이다"라며, 격분했지만 김식을 극형으로 처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 나중에 대간들도 김식의 상소에 대하여 처벌하기를 주청했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어찌됐든, 결국 단경왕후 신씨의 생전 복위는 물거품이 되었다. 신씨는 친정의 사가에 거처하면서 독수공방하다가 중종이 죽은 지 13년이 지난 명종 재위기인 1557년(명종 12년)에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신씨의 사인은 아마 낙상 후유증인 듯하다. 조선 시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장수한 셈인데, 20대에 폐비되어 거처 밖을 함부로 나가지도 못하고 반세기를 혼자 독수공방하듯이 살았음을 생각하면, 장수한들 별로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친정이 빵빵했다면 또 모르지만, 역적이 되어 풍비박산나고 본인은 중종의 잠저시절 조강지처였던 탓에 목숨만 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불행한 인생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안타까움을 샀던지, 중종의 뒤를 이은 두 들이 단경왕후를 자주 챙겨줬다는 기록이 있다. [18]

2.5. 죽음 이후

그 뒤로 계속 폐비 신씨로 불리다가[19] 신씨가 죽은 지 200년이 다된 훗날의 영조 때에 사후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고, 휘호를 공소순열(恭昭純烈)이라고 올리고, 양주 장흥에 있던 신씨의 무덤 역시 이때 온릉(溫陵)으로 정식 승격되어 새로 왕비의 격식에 맞게 다시 조성되었다. 온릉의 경우에는 교통도 좋지 않고[20], 주변에 군사 시설이 있는 관계로 쭉 비공개 능역으로 지정되어 왔다. 그러다 2019년 11월에 공개 능역으로 전환되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신씨가 죽은 뒤 182년이 지난 후인 1739년(영조 15년)에 유생 김태남이 영조에게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헌데 영조는 예전부터 마음속으로 신씨를 복위시키기로 결심한 상태였던 모양이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김태남의 상소가 올라오기 전에 신하들에게 신씨 복위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몇몇 신하들이 "처음부터 책봉하지 않았고 사제(私第)에 나가 있었으니 복위를 논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 그대로 두고 다시 묻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조실록을 집필한 사관들은 "이 당시 이미 의 의지는 결정돼 있었다"고 적었고, "얼마 안 있어 신씨가 복위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장안에 퍼졌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때마침 김태남이 영조의 속마음을 그대로 담은 상소문을 올리자, 영조는 기뻐하면서 "얼른 이 문제에 관한 조정의 의견을 모으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영조 15년 3월 11일 기사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1739년(영조 15년)에 복권되었고, 영의정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영조는 신수근의 충성심을 포은 정몽주에 비교하였다.

3. 기타

4. 대중매체


[1]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외손자.[2] 연산군거창군부인의 오빠.[3] 태종의 차녀 경정공주의 외증손녀.[4] 경정공주김중엄의 처 조씨 → 한충인의 처 김씨 → 청원부부인 한은광[5] 신수근에게 초취 부인이 있었는데 권람의 딸이었다. 이를 통해 신수근남이와도 동서지간이었다.[6] 한영정의 손자이고 한전의 아들이다. 즉, 한확의 조카이자 인수대비의 친사촌.[7] 고모 폐비 신씨와 고모부 연산군의 자녀들.[8] 보통 조선의 부부인은 군호(郡號)가 앞에 붙는데 신씨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본관인 거창군과 관계가 있는 칭호였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9] 참고로 야사에서는 박원종 등 반정세력이 그를 회유할 때 "그대 누이와 딸(단경왕후 신씨) 중에 누가 더 중요합니까?"라고 묻자 신수근은 "세자가 총명하니 믿어봅시다."라고 대답해, 반정세력은 신수근이 자신들과 함께 반정 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신수근을 가차없이 죽였다고 한다.[10] 원문은 단경왕후가 아니라 폐비 신씨라고 적혀있다. 단경왕후는 영조 때 올려진 시호이므로 중종 대에 단경왕후라고 기록되어 있을 수는 없다.[11] 원래 조강지처를 내치는 것 자체가 유교문화권에서는 금기사항이다. 원칙대로라면 반정공신들이 중종에게 단경왕후의 폐비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겠지만, 아버지 신수근이 살해당하고 고모인 신씨마저 폐위당하면서 친정 전체가 역적으로 간주되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단경왕후가 훗날 복원된 이유도 중종의 첫번째 아내이자 조강지처라는 큰 명분 때문이었다.[12] 왕조의 정당성마저 의심받을 수 있다는 뜻[13] 중종실록, 중종 1년 9월 3일, 중궁책봉을 마련하다. "중궁 책봉에 관한 일은 아직 대비의 분부가 없으시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속히 마련하여 아뢰라" 하였다.[14] 三勳. 중종반정을 이끌었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의 반정 공신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15]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 신씨의 복위를 주청하며 올린 상소를 뜻한다.[16] 대간들이 박상과 김정의 주장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들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사헌 권민수와 이행에게 휩쓸리듯 동조한 것을 비판하는 글로 보인다.[17] 나라에 재앙이 있을 때, 혹은 국정에 필요할 경우, 임금의 정치의 잘잘못에 대하여 널리 신하로부터 비판의 말을 구하던 일.[18] 문정왕후도 묵인했을 듯 하다. 사실 문정왕후는 냉혹하다고만은 볼 순 없는 게, 인종비도 끝까지 문제삼지 않았고 윤임의 아버지 윤여필은 장경왕후의 부친이니 살려준 적도 있다. 어차피 왕의 모후인 문정왕후한테 폐비에다 자식도 없고 집안은 박살나고 독수공방 중인 단경왕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상대였다.[19] 당대 기록에선 단경왕후도 고모 거창군부인 신씨처럼 '폐비 신씨'라고 불렸기 때문에 헷갈리기 쉽다. 차이가 있긴 했는데, 고모와 달리 단경왕후는 '성+비'로 된 명칭인 신비(愼妃)로도 호칭하는 경우가 많은 편.[20] 교외선 장흥역, 온릉역이 있지만 영업중지 상태. 인근의 신흥유원지 역시 버스와 도로교통에 의존하고 있다.[21] 왕이나 왕비가 몸이 편찮으거나 병의 차도가 없을 때 쾌유를 위해 스님들을 궁으로 부르는 사례들이 꽤 있었다.[22] 특히 신씨는 중종이 12살 때 혼인한 첫 부인이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사춘기를 넘어 청년기까지 함께 해온 사이였다.[23] 신씨의 폐출 이후 들인 장경왕후가 자녀 없이 죽었으면 모르겠지만 장경왕후는 원자였던 인종을 남기고 사망한지라 잘못하면 후계 구도가 꼬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24] 중종은 세종의 차남인 세조의 후손이고 단경왕후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후손이다.[25] 태종의 차녀이자 세종의 둘째 누나인 경정공주의 후손이다.[26] 모계쪽은 오직 딸에서 딸로 이어져왔는데 경정공주의 딸 조씨, 조씨의 딸 김씨, 김씨의 딸 한은광(청원부부인), 한은광의 딸이 단경왕후다.[27] 중종은 한영정의 장남 한확의 후손이고 단경왕후는 한영정의 차남 한전의 후손이다.[28] 극 초반에 단경왕후의 폐비를 강권하는 반정군에게 극렬히 반대했으며 반정군에 의해 단경왕후가 끌려나갈 때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