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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세종의 왕자 임영대군 | 臨瀛大君 | |||
임영대군묘 전경 | |||
출생 | 1420년 1월 29일 | ||
조선 한성부 경복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
사망 | 1469년 2월 11일 (향년 49세) | ||
묘소 |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 ||
재위기간 | 조선 임영대군 | ||
1428년 7월 28일 ~ 1469년 2월 1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구(璆) | ||
부모 | 부왕 세종 모친 소헌왕후 | ||
형제자매 | 부왕 기준 18남 4녀 중 4남 모후 기준 8남 2녀 중 4남 | ||
배우자 | |||
자녀 |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자 | 헌지(獻之) | ||
군호 | 임영대군(臨瀛大君)[1] | ||
시호 | 정간공(貞簡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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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4남이며[2] 전주 이씨 임영대군파의 파시조이다.2. 생애
평소 성격이 꾸밈이 없고, 검소했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아버지 세종에게 칭찬을 많이 들었다. 또한 둘째형인 수양대군과 같이 무예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경회루에서 승마 시범을 보이기도 했으며, 문종의 요청으로 화차를 제작하기도 했다.세종 10년 6월에 임영대군에 봉해졌으며 세종 12년 5월에 진평대군, 안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했다. 원래 남지의 딸인 남씨와 혼인하였으나 실록에 따르면, "나이가 12세가 넘었는데 아직 오줌을 싸고, 안정(眼精)이 바르지 못하여 혀가 심히 짧고, 행동이 놀라고 미친 듯한 모습"이 있어서 조사를 해보니 원래 '미친병'이 있던 것이 드러나 황희가 이혼을 강력히 주창했고, 세종 15년 윤8월에 새로 간택을 하여 최승녕의 딸과 재혼했다.
그렇지만 여자를 밝히는 데 흠이 있어 세종 20년 4월에 악공 이생의 딸인 기녀를 첩으로 들였다가 허후가 첩을 들이는 것도 좋지 않은데 왜 하필 창기를 첩으로 들이냐고 비판하였고, 이에 세종은 임영대군은 학문을 원래 좋아하지도 않고 자손을 늘일 필요도 있으며, 왕가에서 기첩을 많이 들이니 괜찮지 않냐고 두둔했다. 허후가 집요하게 창기를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자 세종은 이미 허락해놓고 다시 내쫓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하지만 임영대군의 여색은 끊이지 않아 세종 21년 5월에 내자시 여종 막비와 간통을 하였으며, 막비가 중궁 시녀로 들어가자 거기까지 쫓아가서 또 간통하였다. 그리고 인수부 시녀 금질지와도 또 간통하다가 세종에게 들켜서 세종이 황희, 허조와 의논하여 임영대군의 직첩을 뺏고 먼 지방에 안치하게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세종 23년 8월에 여자들을 남장시켜 광화문을 통해서 몰래 들이려다가 들켜서 직첩과 과전을 빼앗겼다.
아버지인 세종이 총통 제작을 맡겨 동생인 금성대군과 함께 군기감에서 일하며 총통과 화차를 제작했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맏형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기도 했다.
문종 사후에는 계유정난에 동참하면서까지 세조를 두둔했고 그가 죽을 때까지 보좌했다. 묘는 경기도 의왕시 백운호수 인근 모락산에 있다.
3. 가족 관계
- 조부 : 태종(太宗, 1367 ~ 1422)
- 조모 :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 ~ 1420)
- 부 : 세종(世宗, 1397 ~ 1450)
- 모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 ~ 1446) - 청천부원군 심온(靑川府院君 沈溫)의 딸
- 정부인 : 군부인 의령 남씨(郡夫人 宜寧 南氏) - 좌의정 남지(右議政 南智)의 딸, 조카 의춘군[3]의 부인과 자매, 영의정 남재(南在)의 증손녀
- 계부인 : 제안부부인 전주 최씨[4](齊安府夫人 全州 崔氏) - 봉례 증 우의정 최승녕[5](奉禮 贈 右議政 崔承寧)의 딸
- 장남 : 오산군 이주(烏山君 李澍)
- 며느리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좌찬성 성임(左贊成 成任)의 딸
- 며느리(첩) : 성씨 미상
- 손자 : 창평수 이근(昌平守 李瑾)
- 손자 : 희제정 이호(狶蹄正 李瑚)
- 손자 : 적천수 이련(赤川守 李璉)
- 손자 : 홍양수 이완(洪陽守 李玩)
- 손자 : 덕안도정 이진(德安都正 李珍)
- 손자 : 엄천수 이거(嚴川守 李琚, 1477 ~ ?)
- 손자 : 온천수 이진(溫川守 李璡)
- 차남 : 구성군 이준(龜城君 李浚, 1441 ~ 1479)
- 3남 : 정양군 이순(定陽君 李淳, 1442 ~ 1492)
- 며느리 : 풍천군부인 진주 강씨(豊川郡夫人 晉州 姜氏) - 감사 강자평(監司 姜子平)의 장녀
- 손자 : 봉산군 이돈(鳳山君 李敦)
- 손자 : 유산도정 이민(幽山都正 李敏)
- 손자 : 황원정 이빙(黃原正 李{甹+攵})
- 손자 : 덕림군 이자 (德林君 李孜)
- 손녀 : 변성(邊成)의 처
- 며느리(첩) : 성씨 미상
- 손자 : 의산수 이창(宜山守 李敞)
- 손자 : 영성수 이경(寧城守 李敬)
- 4남 : 팔계군 이정(八溪君 李淨) - 숙부 함녕군의 양손자로 출계
- 5남 : 환성군 이징(歡城君 李澄)
- 며느리 : 동래 정씨(東萊 鄭氏) - 현감 정유지(縣監 鄭有智)의 딸
- 손녀 : 증 판서 서평군 한숙창(贈 判書 西平君 韓 叔昌, 1479 ~ 1537)의 처
- 장녀 : 중모현주(中牟縣主, 1435 ~ ?)
- 차녀 : 청하현주(淸河縣主)
- 사위 : 형조참판 안우건(刑曹參判 安友謇)
- 계부인 : 부부인 안동 안씨(府夫人 安東 安氏)
- 6남 : 영양군 이함(英陽君 李涵)
- 며느리 : 평산 신씨(平山申氏) - 현감 증 참판 신윤범(縣監 贈 㕘判 申允範)의 딸
- 며느리(첩) : 성씨 미상
- 손자 : 장련부수 이종손(長連副守 李終孫, 1485 ~ ?)
- 손자 : 오성도정 이신손(烏城都正 李神孫, 1497 ~ 1590)
- 손자 : 해구군 이현손(海口君 李賢孫, 1498 ~ ?)
- 손자 : 청화군 이준손(淸化君 李俊孫, 1501 ~ 1568)
- 손자 : 능성령 이말손(綾城令 李末孫)
- 손녀 : 민수건(閔守騫)의 처
- 며느리 : 청주 한씨(淸州 韓氏) - 참봉 한복(叅奉 韓福)의 딸
- 7남 : 단계부정 이인(丹溪副正 李潾, 1460 ~ 1521)
- 며느리 : 영월 엄씨(寧越 嚴氏) - 엄산수(嚴山壽)의 딸이자 성종의 후궁인 귀인 엄씨의 언니
- 손자 : 일선수 이엽(一善守 李曄)
- 손자 : 하양수 이오(河陽守 李晤, 1498 ~ 1559)
- 손자 : 신성수 이희(信城壽 李曦)
- 손녀 : 김태암(金泰巖)의 처
- 손녀 : 권변(權忭)의 처
- 손녀 : 안수장(安壽長)의 처
- 손녀 : 최세문(崔世文)의 처
- 8남 : 윤산군 이탁(輪山君 李濯, 1462 ~ 1487)
- 며느리 : 평산 신씨(平山申氏) - 선마 신석녕(洗馬 申錫寧)의 딸
- 손자 : 팔거군 이근(八莒君 李根, 1480 ~ 1550)
- 손자 : 원성수 이춘(原城守 李春)
- 며느리(첩) : 성씨 미상
- 손자 : 가덕부수 이식(加德副守 李植)
- 손자 : 설산부수 이계(雪山副守 李桂, 1496 ~ 1544)
- 손자 : 청계령 이림(淸溪令 李林)
- 손자 : 익주군 이지(益州君 李枝, 1491 ~ ?년 10월 20일)
- 손자 : 신성군 이매(新城君 李梅, 1495 ~ 1579)
- 손녀 : 이세정(李世禎)의 처
- 9남 : 옥천군 이옥(玉泉君 李沃)
- 며느리 : 남양 홍씨(南陽 洪氏) - 현감 홍강(縣監 洪剛)의 딸
- 손자 : 봉림수 이수인(鳳林守 李守仁, 1489 ~ 1523)
- 손자 : 청성수 이수화(淸城守 李守和)
- 손자 : 흥인수 이수례(興仁守 李守禮)
- 손자 : 운림수 이수지(雲林守 李守智)
- 손녀 : 직장 안세직(直長 安世直)의 처
- 며느리(첩) : 성씨 미상
- 손자 : 청운령 이수신(靑雲令 李守信, 1513 ~ ?)
- 3녀 : 참봉 김풍공(㕘奉 金豊公)에게 출가
- 외손자 : 첨지 김응신(僉知 金應辰)
- 외손자 : 현령 김응현(縣令 金應賢)
- 4녀 : 전윤식(田允植)에게 출가
- 5녀 : 현감 권형(縣監 權衡)에게 출가
- 외손녀 : 하계운(河繼雲)의 처
- 외손자 : 권일(權軼)
- 외손자 : 권식(權軾)
- 외손자 : 권로(權輅)
- 6녀 : 민영(閔瑛)에게 출가
- 외손자 : 민여익(閔汝翼)
- 외손자 : 민여백(閔汝伯)
- 외손자 : 민여광(閔汝匡
- 7녀 : 김맹손(金孟孫)에게 출가
- 외손녀 : 이세형(李世亨)의 처
- 외손자 : 김장(金璋)
- 첩부인 : 금강매(錦江梅) - 악공의 딸
3.1. 가족과 후손
- 큰형인 문종처럼 첫째 부인과 사별하지 않았는데도 재혼을 한 경험이 있다. 막내동생인 영응대군도 마찬가지. 첫 번째 부인인 남씨는 개국공신 남재의 손자인 남지의 딸이나, 정신질환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1433년(세종 15년) 6월 14일에 세종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 등을 불러 "임영대군의 아내 남씨는 나이가 12세가 넘었는데, 아직 오줌을 싸고 눈빛이 바르지 못한 데다가 혀가 심히 짧고 행동이 놀라고 미친 듯한 모습이기에 내쳐야 되겠다."라는 뜻을 밝혔다.
- 슬하에 아들을 많이 두어서 사후에 후손들이 번창했다. 두 번째 부인 전주 최씨와의 사이에서 5남 2녀를 두었고, 세 번째 아내 안동 안씨와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두었다. 이 중 한 명이 훗날 이시애의 난에서 활약하여 20대에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까지 오르는 구성군이다. 큰딸 중모현주 이씨는 거창부원군 신승선과 혼인하여 3남 4녀를 낳았다. 이중 막내딸이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이고, 장남 신수근의 딸이 폐출당한 중종의 첫 왕비 단경왕후이다. 즉, 폐비 신씨는 임영대군의 외손녀이고, 단경왕후는 임영대군의 진외증손녀이다. 그러므로 연산군과 폐비 신씨는 혈연상으로 세종을 공통 조상으로 한 7촌 고모 - 조카 뻘이며, 중종과 단경왕후는 8촌 남매 뻘이다.
- 서숙부 함녕군 이인(諴寧君 李䄄)의 외아들 덕성군 이민(德城君 李敏)에게 아들이 없어 임영대군의 4남 팔계군 이정(八溪君 李淨)이 덕성군의 양아들로 입적했고, 팔계군도 아들을 두지 못해 임영대군의 3남 정양군의 3남인 황원정 이부(黃原正 李敷)가 팔계군의 양자가 되었다. 이후 황원정의 후손들은 번성했고, 양자 입적도 그 안에서만 이루어졌기에 현재 전주 이씨 함녕군파는 실제로는 전부 임영대군의 후손들이다.
- 만약 조선 왕실에서 동시대 유럽 마냥 서얼의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면, 명종이 죽은 후 다음 왕위를 임영대군의 적손이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다. 명종의 승하로 세조의 적손 계열이 완전히 끊겼기 때문이다. 명종의 아버지인 중종은 적자가 인종, 명종 둘 뿐인데, 인종은 자식이 없었고, 명종은 요절한 외아들 순회세자를 두었을 뿐이었다. 중종의 아버지인 성종의 적자는 (중종 제외 시) 연산군 뿐인데, 폐위당한 왕인지라 계승권도 없고, 자식들은 중종 즉위 후에 다 죽었다.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의 적자는 (성종 제외 시) 월산대군 한 명 뿐이며, 월산대군은 서자만 낳았고, 적자없이 죽었다.[6] 의경세자의 아버지 세조는 적자를 (의경세자 제외 시) 예종만 두었다. 예종은 적자 2명을 낳았는데, 장남 인성대군은 아기 때 요절했고, 차남 제안대군은 세종의 7남 평원대군의 봉사손이 되었으며, 후사없이 죽었다. 그렇다면, 결국 세조 위인 세종 적자들의 적손들 중에서 골라야 하는데, 세종의 장남 문종과 3남 안평대군의 대를 세조가 끊어버렸기 때문에 4남 임영대군의 적손 계열이 가장 순위가 높은 것. 1900년(광무 4년)에 제작한 《선원속보》에 따르면, 임영대군의 장남 오산군은 서자만 두었고, 차남 구성군은 후사가 없었으며,[7] 3남 정양군의 장남 봉산군과 차남 유산도정 역시 서자만 있었기 때문에 만약 《선원속보》의 내용이 정확하다면, 정양군의 3남 덕림군(원래는 4남인데, 3남인 형 팔계군이 함녕군파로 출계하여 덕림군이 3남이 되었다.)의 가계에서 왕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덕림군과 그의 후손들은 계속 적자를 낳았기 때문이다.[8] 이렇게 됐다면, 덕림군의 장손 이근(李瑾, 1552~1592)이 하성군을 대신하여 조선의 제14대 국왕으로 즉위했을 것이다.[9]
4. 대중매체에서
[1] 봉호는 강원도 강릉의 별칭인 '임영(臨瀛)'에서 따왔다.[2] 문종과 세조, 안평대군의 친동생이고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의 친형이며 단종, 덕종, 예종의 숙부이다.[3] 안평대군의 장남[4] 광평대군의 처인 영가부부인과 내외종 4촌간이고, 함녕군의 부인과 경안공주의 며느리와 금성대군의 부인의 조카[5] 최사강(崔士康)의 아들[6] 월산대군은 성종이 즉위한 후, 지나칠 정도로 처신을 조심하게 하여 왕위 계승과 관련한 분란의 여지를 일절 남기지 않았다. 그러한 처세의 일환으로 일부러 적자 대신 서자만 둔 것.[7] 구성군은 죄인으로 죽었고, 한참 뒤인 숙종 때에야 복권받았기 때문에 명종이 죽은 직후에는 죄인 신분이었다. 그래서 설령 적자가 있었어도 그의 후손들은 고려 대상이 못 되었을 것. 훗날 광평대군(임영대군의 동생)의 손자 회원군이 양자로 들어갔지만, 둘 다 죽은지 한참 후인 1872년(고종 9년)에 이루어진 입계였다.[8] 이 때문에 임영대군파의 종손은 가계상 장자(적자든 서자든 관계없이)가 아니라 순수하게 적자 소생 장자로 삼는다. 참고로 임영대군파의 14대 종손 이사묵은 성종의 서자 익양군 가계에서 입적한 사람인데, 그의 할아버지 이현식은 원래 임영대군파 8대 종손 이흡의 현손으로, 익양군파로 입양간 것이기 때문에, 이사묵은 혈연 상으로도 임영대군의 후손이 맞다.[9] 이근이 명종과 같은 항렬이나,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보다 1살 어리므로, 명종의 양자로 갔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말이 안 된다. 나이와 상관없이 양자 입적과 같은 문제는 철저하게 항렬로만 따지는 것이 원칙이다. 차라리 이근이 중종의 양자로 들어가 대통을 계승하고, 이근의 아버지 진천군 이옥정(晉川君 李玉貞, 1513~1583)이 대원군 작위를 받아, 진천대원군으로 승격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10] 가계: 임영대군 → 정양군 → 덕림군 → 전주 이씨(성순와 혼인) → 창녕 성씨(박간와 혼인) → 반남 박씨(윤승길와 혼인) → 해평 윤씨(인성군와 혼인) → 모든 인성군파[11] 가계: 임영대군 → 중모현주 → 신수근 → 신홍필 → 신영이 → 노춘복 → 신예옥 → 민회빈 강씨(소현세자와 혼인) → 경안군 → 모든 소현세자파[12] 임영대군 → 정양군 → 덕림군 → 전주 이씨(성순와 혼인) → 창녕 성씨(박간와 혼인) → 반남 박씨(풍산군 이종린와 혼인, 덕양군의 적장남) → 덕양군파의 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