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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종 · 태종조 추존 왕태후 신의왕태후 | 神懿王太后 |
제릉 전경 | |||
출생 | 1337년 10월 6일(음력 9월 4일) | ||
원 쌍성총관부 화령부 (現 함경남도 금야군) | |||
사망 | 1391년 11월 25일(음력 9월 23일) (향년 55세) | ||
고려 동계 함흥부 귀주동 이성계 사저 (現 함경남도 함흥시 함흥본궁) | |||
능묘 | 제릉(齊陵)[1] | ||
재위기간 | 고려 원신택주 | ||
1364년 2월 ~ 1391년 11월 25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청주 한씨[2] | |
부모 | 부친 안천부원군 한경 (安川府院君 韓卿, ? ~ ?) 모친 삼한국대부인 삭녕 신씨 (三韓國大夫人 朔寧 申氏, ? ~ ?) | ||
형제자매 | 5남 2녀 중 장녀 | ||
배우자 | 태조 고황제 | ||
자녀 | |||
종교 | 불교 | ||
봉작 | 원신택주(元信宅主) → 절비(節妃) → 왕태후(王太后) | ||
전호 | 문소전(文昭殿) | ||
휘호 | 승인순성(承仁順聖) | ||
시호 | 조선: 신의왕후(神懿王后) →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 → 신의왕후(神懿王后) 대한제국: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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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조강지처이자 정비. 진안대군 이방우, 제2대 정종 이방과, 익안대군 이방의, 회안대군 이방간, 제3대 태종 이방원, 덕안대군 이방연, 경신공주, 경선공주의 어머니다.배우자인 태조와 더불어 조선 왕조의 건국시조이며, 혈통상으로 정종부터 순종까지 26명의 왕은 물론, 오늘날 전주 이씨 대다수가 신의왕후의 직계후손이다.
2. 생애
1337년 9월 고려 동북면 영흥(永興) 풍류산 아래 금리(琴理)에서 아버지 한경(韓卿)과 어머니 삭녕 신씨(朔寧 申氏)의 딸로 태어났다.한씨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뒷산에는 오색 영롱한 구름이 감돌았다 하여 풍류산(風流山)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훗날 신의왕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1824년에 태어난 마을에 기념비를 세웠다.[5]
1351년에 이성계와 혼인하여 6남 2녀를 낳았다.
1364년 이성계는 고종 사촌인 삼선(三善)과 삼개(三介)가 난을 일으키자[6]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봉익대부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에 오르며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받자 부인 한씨도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해졌다.
한씨는 이성계가 전쟁터를 누비는 동안 고향 집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며 내조하였다. 이성계는 개경에서 명문 거족 강윤성 딸인 강씨를 경처(京妻)로 맞이하였고, 한씨는 이성계의 향처(鄕妻)로서 동북면에 거주하며 집안의 대소사를 살폈다.
1388년에 위화도 회군 때에는 포천 재벽동에 머물다가 아들 이방원의 인솔하에 식구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을 갔다[7]
1391년 8월 무렵 병을 앓기 시작하여 9월 23일에 사망하였다.[8]
능은 개성특별시 개풍군 대련리에 위치한 제릉(齊陵)이다.
- 사후
조선 건국 전에 사망하여,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조선의 첫 왕비가 되었다. 1398년에 정종이 즉위하여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하였으며[9], 태종이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로 추상하였다.[10]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 8월 8일 을유 2번째기사로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에게 양위하려 하자, 꿈에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683년에 송시열이 '태종이 한씨에게 올린 왕태후의 작위가 예법에 어긋난다'고 상소하여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개책되었다.[11]
1899년 대한제국 고종에 의해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되었다.[12]
3. 가족 관계
- 친정
- 아버지 :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
- 어머니 : 삼한국대부인 신씨(三韓國大夫人 申氏)
- 시가
- 태조(조선)/가족 관계 참조 바람.
4. 기타
- 비록 생전에는 큰 대우를 못 받았을 수도 있으나, 태조 이후 모든 조선의 왕들이 그녀의 자손인 걸 보면 최후의 승리자는 신덕왕후가 아니라 신의왕후일 것이다. 신덕왕후의 경우 후처이면서 왕비가 된 어정쩡한 위치와 장자도 아닌데다 막내로 어리기까지 한 친자 이방석을 세자로 옹립하면서 무리한 욕심을 부리다가,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의 어그로를 대차게 끌어서 결국 1차 왕자의 난의 명분을 적극 제공했기 때문.[13] 이 1차 왕자의 난에서 신덕왕후는 무안대군 등 자신의 두 아들과 사위(흥안군 이제)까지 살해당하면서 완전히 대가 끊기고 말았다. 게다가 사후 그녀를 미워한 태종에 의해 도성 밖으로 묘지가 옮겨진 이후 석물들이 광통교 다리가 되어 거꾸로 파묻히고, 묘지도 후궁격으로 격하되어 이장되었다가 현종 대에서야 겨우 왕비의 예로 복권되었다.
- 그녀의 사후에 아들 태종이 양녕대군에게 양위를 시도했을 때 당연히 신하들이 결사코 반대하여 교착 상태에 놓일 무렵, 태종의 꿈에 밤마다 신의왕후가 나타나 울며 “네가 나를 굶기려 하느냐?”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야사가 아니라 공식 기록이다. 이를 들은 이숙번은 “어린 세자에게 무리하게 보위(寶位)를 물려주어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진다면 모후께서 저승에서 굶는게 당연하다”고 해몽하였고, 이후 마침내 태종이 수긍하고 옥새를 상서사에 갖다놓음으로써 열흘 동안의 양위 소동이 끝나게 된다. 죽어서도 양녕대군이 왕이 되는 사태를 막은 크나큰 공을 세운 셈.[14]
- 신의왕후의 집안인 청주 한씨 집안의 조선 왕비들은 대대로 거의 아들을 낳았다.[15] 특히 인조의 왕비 인열왕후 한씨는 조선 중•후기 왕비 중 가장 많은 아들을 낳았으면서 신의왕후 본인과 똑같이 6명이나 낳았다.
5. 대중매체에서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한영숙[16]이 연기했다. 극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정도로 처음 출연할 때부터 병으로 골골대더니 몇 화 안가 사망한다.[17] 자신의 뛰어난 아들들에 대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이들에 대한 화합을 강조하며 아이들의 관점을 잘 알고 핵심을 찌르는 말을 자주 한다.[18] 이후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에 성공하고 정종이 등극한 후 강녕전에 걸려있던 신덕왕후의 초상을 떼 버리고[19] 신의왕후의 초상을 새로 거는데 이 때 정종의 명으로 새로 그린 초상화로 잠깐 얼굴을 비춘다.[20]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언급은 되지만 등장하지 않는데 제37화에서 죽었을 때 장례 정도만 나온다.[21] 이방우가 거지꼴로 돌아다니다가 어머니 장례식 보고 들어온건 덤. 나오는 아들들이 5명이 아니라 6명이다.[22] 스토리 전개가 빠르다 보니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은 최대한 생략하는 편. 신의왕후 한씨 역시 등장해봐야 딱히 비중이 크지도 않을 것이고 엮일만한 스토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23]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예수정이 연기했다. 그간 스킵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23년만에 사극에 재등장했다. 신의왕후(태종 이방원) 항목 참조.
[1]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이 현재 북한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2009년 6월, 남편 태조 이성계의 무덤이 있는 동구릉을 포함하여 남한 내의 모든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지만, 제릉은 북한에 있어 아들 정종부부가 있는 후릉과 더불어 아쉽게도 등재가 안되었다. 그래서 기신일(돌아가신 날을 기리고 제사지내는 일)이 되면 남편이 있는 동구릉 내 건원릉의 정자각에서 제향한다. 링크[2]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禮賓尹公派) 5세.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본관을 안변(安邊)으로 하고 있었다. 족보에 따르면 예빈윤공(禮賓尹公) 한연(韓連) — 안원군(安原君) 한유(韓裕) —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정승 한규인(韓珪仁) — 5남 안천부원군 한경(韓卿) — 장녀 신의왕후로 가계가 이어진다.[3] 봉호는 영안군(永安君).[4] 봉호는 정안군(靖安君).[5] 순조실록 27권, 순조 24년(1824년 청 도광(道光) 4년) 10월 19일 (무인)[6] 1364년 음력 1월 여진족인 삼선과 삼개 등이 여진족을 이끌고 함주(咸州)를 점렴한 사건으로 이성계의 반격으로 격퇴됨.[7] 태조실록 1권, 총서 89번째기사[8] 《승인순성 신의왕후 신도비명》[9]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11월 11일[10]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9월 6일 (신해)[11] 숙종실록 14권, 숙종 9년(1683년 청 강희(康熙) 22년) 6월 12일 (계미)[12]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12월 7일 (양력)[13] 그녀가 살아만 있었어도 신의왕후 소생들이 함부로 하기 힘들었겠지만 그녀는 나이 40에 일찍 죽었다.[14] 물론 태종의 당시 양위 시도 자체는 충녕대군 때와 달리 태종도 아직 젊고 세자도 어려서 명백한 무리수였으므로 태종의 정치적 양위쇼로 보는 견해가 주류이다.[15] 사실 거의라기보다도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들을 낳았다. 그 공혜왕후조차 충분히 낳을수 있는 나이임에도 요절한것을 감안하면 청주 한씨 집안이 유독 아들을 잘 낳는 기운을 타고난게 아닌가 싶을 정도.[16]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엄 상궁 역.[17] 이성계는 경처인 신덕왕후의 질투나 시샘 등으로 인해서 자주 보러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임종 직전에 뒤늦게 다가와서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고생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만을 표했음에도 와줘서 고맙다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였다.[18]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드러내지는 않았는지, 이방우가 당시 이방원과 사이가 안 좋았기에 사이좋게 지내라는 어머니의 말에 모르실 줄 알았는데 다 알고 계셨군요 라며 말하며 머쓱해했다. 아이들이 더 반발하거나 그럴까 굳이 내색하지는 않은 듯 하다.[19] 정종과 같이 정사에 관하여 논의하던 와중에 아버지가 신덕왕후 사후에 제작한 초상화를 보고서는 분기탱천하여 대뜸 잡아다가 던져버린다.[20] 이 때 동생인 이방원과 같이 초상화를 보는데 이전에 신덕왕후의 초상화를 내팽개칠 때와는 180도 달라진 활짝 웃는 얼굴을 보여준다.[21] 이성계가 장례로 고향에 갔던 이 때 정도전은 정몽주의 탄핵을 받았다.[22] 실제로 정안대군 이방원 밑에 덕안대군 이방연(李芳衍)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조선 건국 전에 죽었고 관련 사료가 거의 없다. 1385년(고려 우왕 11) 을축방(乙丑榜) 문과에 동진사 14위로 급제한 뒤 성균박사(成均博士)를 지냈다는 것 정도만이 대표적으로 알려진 내용. 따라서 비중이 없으며 기록이 별로 없어 사극에서 등장이 거의 없다.[23] 물론 실제로는 신의왕후의 이른 사망이 왕자의 난의 주요 원인도 되었던만큼 중요하지 않다기보단 드라마에 표현하기에는 어려웠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2021년의 태종 이방원은 신의왕후에 대한 비중과 중요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녀의 죽음까지[24] 보여줌으로써 신의왕후의 이른 죽음이 왕자의 난을 비롯한 이방원의 행보에 영향을 끼친것으로 간접적으로 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