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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6:51:43

이성계(용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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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의 '개국 10주년'은 물론 1403년을 말하는 게 아니다

1. 개요2. 작중 행적
2.1. 조선 건국 이전2.2. 조선 건국 이후 ~ 조사의의 난2.3. 조사의의 난 이후2.4. 최후
3. 캐릭터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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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의 초반부와 중반부의 주인공이자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 배우는 김무생.

2. 작중 행적

2.1. 조선 건국 이전

역사 속에서 최영이 주도한 제2차 요동 정벌을 위해 위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모습으로 첫 등장했고, 이후 우왕의 진군을 재촉하는 어명을 받고도 이를 전달한 내시 부사 김완을 잡아들이고는, 위화도 회군을 진행한다. 결국 최영을 제거한 후 정권을 장악하고 결국엔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조선을 건국하였다. 위화도 회군 직후 최영을 체포할 때 등 작중 초반엔 어느 정도 고뇌하는 모습도 보이지만[1][2] 처음부터 단호하게 새 왕조 창업의 야심을 품은 인물로서 등장하며 권력을 잡고 개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왕을 겁박하는 권신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준다.[3]

참모이자 지우인 정도전에게는 자상하고 따뜻한 면을 보여주는 대인배형 정치가이며 심지어 정적이 되어버린 정몽주조차 자신의 위험을 감수한 계략을 써가며 포섭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4] 후처인 신덕왕후 강씨를 매우 총애하다보니 그 소생의 자식들도 매우 총애하지만 본처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에게는 다소 엄하게 대하는 면이 있었는데[5] 이런 태조의 태도로 인해 신의왕후 소생 자식들에게 반감을 산다.[6] 특히 장성한 형들을 내치고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정한 것이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 결정타가 되었고, 이는 뒷날 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된다.

2.2. 조선 건국 이후 ~ 조사의의 난

즉위 이후로 옛 고려의 인사들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포용력을 보이고, 정도전이 두문동의 유자들을 학살한 일을 알았을 땐 격노하기도 했다. 다만 왕씨 몰살 사건의 경우에는 사실상 왕씨들의 집단 말살을 용인하는 냉혹한 면도 보였으나[7] 직후 왕건이 나타나 자신의 후손들을 몰살시킨 이성계에게 후대까지 복수하겠다는 꿈을 꾸게 되자 괴로워한다. 한편으로는 정도전에게 곱사춤을 추게 하고[8] 술자리에서 대신들이 죄다 취해서 바닥에 널부러져 자는 가운데 정도전에게 나라를 부탁하는 모습도 보인다.

신덕왕후의 사후 상심이 커져 노구의 몸으로 직접 장지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등 무리하다가 병상에 눕게 되었고,[9] 이것이 이방원파와 정도전파의 대결의 신호탄이 되고 만다. 이방원의 반란 당시엔 점차 몸을 회복해가는 단계였으나 끝끝내 이방원의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경순공주를 제외한 신덕왕후 소생의 자식들과 사위 이제, 결정적으로 대업을 함께한 동지 정도전을 잃게 되어 비탄에 잠기게 된다.

결국 절망 끝에 둘째 아들 이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게 되고[10], 그나마 남은 경순공주마저 속세에 뜻을 잃고 출가하게 되자 더욱 절망하게 된다. 이후 왕자의 난을 주도한 이방원이 찾아오자 맹렬히 분노하며 "네 이놈! 이 살인 백정같은 놈아! 너도 인간이냐?! 세자 자리가 무엇이라고 피를 나눈 아우들을 도륙을 해? 네가 그러고도 나를 찾아올 수 있느냐?!" "피치 못해? 뚫어진 입이라고 말은 그럴싸하게 하는구나, 이 못된 놈! 금수 같은 놈!"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문안을 온 이방원의 머리에 벼루를 집어던져서 이방원을 정의구현 하고 "어검! 내 어검을 가져 오너라!"라며 격노한다.

참고로 이 장면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방원이 찾아올 당시 태조는 경순공주의 출가를 직접 참관하고 막 돌아온 상태였고, 이때 경순공주는 아버지인 태조에게 자신의 삭발을 맡겨(정확히는 긴 머리의 첫단을 자르고 뒤로 물러나지만) 결국 태조가 이 청을 들어주는 등 참으로 암담한 기분에 놓인 상황이였다.[11]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고 동지고 죄다 죽여버린 골육상쟁의 당사자인 이방원이 찾아와서 양위는 안 되니, 아우들을 죽인 것은 모두가 사직과 왕실을 위해서는 피치 못할 일이었다느니 하며 속을 뒤집어 놓으니 그 다음은 안 봐도 비디오.

하지만 여기서 이방원은 벼루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아[12][13]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행동에 끝가지 정당성을 호소하며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한다. 김무생 유동근의 두 사람의 불꽃튀는 연기 대결이 일품인 장면. 여기서 이방원의 대사를[14] 통해 작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전성기의 이성계가 불패의 용장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15]

이후 이방원의 아내 민씨가 다과를 만들어오자 발로 걷어 차버리고, "다시는 내 앞에 띄지 말라."고 일갈한 뒤 가버린다든지[16] 이방원의 명을 받은 조카 이천우(이원계의 아들)가 이성계의 출타를 막자 그 자리에서 뺨을 때리거나,[17] 이방원이방석의 복수를 하려는 일당들에게 습격당해 중태에 빠진 틈[18]을 타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냐면서 정종에게 이방원을 도모하도록 부추긴다든지 하는 장면들이 있다. 이 과정에서 방간의 난 때 의동생 이지란이 방원에게 협력한 사실을 알고 분노하지만, 이지란 또한 그것이 이성계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책하다가 이별의 편지를 남기고 그의 곁을 떠나자 더욱 상심하게 된다.

그 뒤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자 격하게 반발하고, 즉위할 기미까지 보이자 거부의 뜻을 보이고 무학대사가 있던 절에 머무르다가 끝내 이방원의 즉위 소식을 접하고는 이제까지 뒷전에 물러난 채 고집을 부리던 것과는 다르게 본격적으로 이방원 타도를 실행하고자 금강산을 거쳐 자신의 고향인 동북면으로 이동한다. 도중에 전부터 이방원파 타도를 위해 암약해오며 세력을 키우던 조사의와 만나고, 서로 손을 잡아 조사의가 구축한 반이방원 세력의 수장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렇게 이방원 타도를 위한 물밑 준비가 갖춰져가는 가운데 태종이 보내는 차사들을 처음에 온 박석명만 살려 보내주고 나머지는 죄다 죽여 버리며 격렬한 거부감을 표시한다.[19] 어미 소와 송아지를 끌고 소장수 행세를 하며 찾아온 박순만큼은 오랫동안 자신을 모신 그조차 방원의 명을 받아 차사로 왔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부모 자식의 정을 내세운 그의 설득으로 마음이 살짝 흔들려 그냥 쫓아내 버렸으나, 이성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우려한 조사의가 보낸 자객들에 의해 얼마 못 가 살해당한다.[20] 끝내는 조사의와 함께 난을 일으키고, 태종이 친정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발견하는 즉시 참해버리라 명한다.

2.3. 조사의의 난 이후

그러나 조사의의 군대가 관군에게 크게 진 이후, 이숙번 등에게 함흥이 장악당한 채 분노를 곱씹다가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개경으로 돌아오게 된다. 미리 준비를 하여 마지막으로 이방원을 활로 쏴 죽이려 하였고 역시 술자리에서 이방원이 자신에게 잔을 올리는 즉시 철퇴로 내리치려 하였으나 모두 하륜의 기지로 실패한다. 하륜이 불상사가 생길 걸 대비해 태조을 맞는 자리에 큰 기둥을 세워놔 태종이 화살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었으며,[21] 술자리에선 태조가 태종에게 "임금이 따라 주는 술 한 잔 받고 싶다"며 소매 속으로 손을 넣는 걸 보고 위험하다 느껴 아들이긴 해도 왕인 태종이 직접 술을 올리는 건 예법이 맞지 않다며 내관을 시켜 술을 올려야 한다고 했다.[22] 이때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수랏상을 철퇴로 내려치고[23][24] 철퇴를 쥔 채 분노에 몸을 떨다가 "천운이로고... 하늘이 시킨 일이로구나. 이제 더는 어찌할 수가 없구나... 과인이 이리 하여도 막지 못하는 것을 어느 누가 막으랴..."라며 탄식하는[25] 태조의 모습과 이를 보고 동요하거나 피하시라며 고함을 지르는 신료들에게 "닥쳐라!" 라며 일갈하는 태종의 모습은 참으로 명장면.. 그 전까지의 연이은 설득들로 마음이 흔들린 것도 있어서인지 모든 걸 체념하고 이방원에게 술을 따라 주면서 그를 왕으로 인정한다.[26] "이 술은 아들에게 주는 술이 아니라 이 나라 임금에게 주는 술"이라면서.[27]

이 시점에서 이성계는 단순히 감정싸움이나 정치적 대립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현실과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번과 이방석이 살해당했고, 이방간은 괜히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귀양갔다. 자신이 물려준 왕이었던 정종 이방과는 이미 자신의 왕위를 이방원에게 내주었고, 조사의의 난 시점에서 태종을 대신해 왕이 될 아들이 이젠 남아 있지 않았다.[28] 과정이야 어쨌든 이방원은 왕의 그릇에 적합한 인물로서 위태롭던 왕권을 굳건히 다졌으니 자신이 계속 이방원과 반목한다면 조선이라는 국가가 급속히 멸망할 수 있었으니까. 이방원 역시 그렇게나 피를 보며 왕위에 오른 이유가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고 안정시키기 위해서였으니 직접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나 조선이라는 국가의 보존이 중요하다는 이해관계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환궁한 시점에선 국가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양보한 셈이지, 아직 아버지로서는 아들을 완전히 용서하진 않은 셈이다.

이후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절에서 주로 기거하다가 환궁하고 한참 후에, 아들과 화해한다. 이것이 용의 눈물에서도 레전드로 손꼽히는 장면 중 하나인 용의 춤(?)이다. 태종이 곤룡포를 입고 태조 앞에서 눈물 콧물을 쏟으며 "아바마마, 소자를 보시옵소서! 소자가 아주 춤을 잘 추옵니다!"하며 춤사위를 펼치자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던 태조도 "주사아앙!! 그만하시구려, 그만!!!" 하며 태종을 만류하고 이제 모든 지나간 원망 다 치우고 손자들 재롱이나 보며 살겠노라며 사실상 태종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선언하는데 두 연기 거장의 감정선 폭발이 아주 진국인 장면이다. 춤을 추기 전에 태종은 태조의 앙상해진 다리를 주무르며 "많이 야위셨다"고 하는데, 한때 너무나 강력한 벽으로 존재했던 태조의 힘없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 자신이 했던 행위가 얼마나 그를 가슴 아프게 했는지 뉘우치고 사죄의 의미로 국왕의 체면 따위 벗어던지고 어린아이처럼 춤을 춘다. 춤을 마친 태종이 어린아이처럼 태조에게 기어가 안겨 오열하고, 그 태종을 말없이 토닥여주며 역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눈물 없이 보기 힘든 장면이다.[29]

이후엔 자신과 기질이 비슷한 세자 양녕을 총애하며 손자에게 옛 무장 시절의 이야기 들려주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양위파동을 일어난 후 신하들이 태조를 찾아와서 하소연 하자 늙고 힘없는 내가 무슨 힘이 있겠냐고 하면서도 아비로써 말을 해보겠다 하며 태종을 불러 타이르며 내 벌주를 받으라며 장난섞인 말로 주안상을 대접하기도 했다. 아들 태종과 며느리 원경 왕후, 그리고 민씨 형제들의 갈등을 알게 되고, 이로 인해 시끄러워 질 것이라 태종에게 미리 얘기를 듣지만 딱히 자신이 뭘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라 묵과하고 양녕을 걱정한다.[30] 이즈음에 이르러서는 신덕 왕후, 이지란, 정도전, 무학 대사 등 가까운 사람들이 다 먼저 떠나버려 외로움에 사무친 노년을 보여준다. 때문에 성석린 같은 국초부터 함께한 구신 등이 일이 있어 방문하면 공무 차 온 것임을 알면서도 굉장히 반긴다.

2.4. 최후

1408년 손자들인 효령대군충녕대군이 혼인하는 날에 쓰러지고 이후 노환으로 인해 아들 태종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31] 악화일로로 치달아 죽음을 앞두게 된다.

임종 직전 꿈에서 각별한 사이였던 무학 대사, 정도전, 이지란, 신덕왕후와 일찍 떠난 두 아들 방번과 방석, 딸 경순공주, 사위 이제가 그를 맞이하자 놀라면서도 반가워한다. 하지만 곧이어 최영, 우왕, 창왕, 공양왕 등을 비롯해 자신에 의해 원통하게 죽은 이들도 나타나 원망을 퍼붓자[32] 소스라치게 놀란다.[33] 꿈에서 깨어난 후 자신이 걸어온 길이 한때 미워하던 태종과 똑같다는 걸 느꼈는지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담담히 알리며 아들 태종과 원경왕후 내외에게 더 이상 피를 보지 말라고, 그 업이 다 돌아오게 되는 것이며 자신처럼 피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는다.

그가 눈을 감자 태종이 그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으며 태조의 길고 길었던 삶은 126회에서 막을 내린다. 바로 다음 회차인 127회의 절반 분량에는 왕실의 일원들과 대신들이 태조의 상을 치르며 흐느끼는 모습[34]과 그의 묫자리를 찾고 안치하는 모습 및 태조에 대한 평가를 다룬 해설이 길게 나온다.

3. 캐릭터 평가

용의 눈물의 완성도와 더불어 김무생의 연기력에 힘입어 유동근의 이성계가 나타날 때까지 근 20년간 이성계하면 김무생이 떠오르게 하는 코드로 자리 잡게 된다. 물론 지금까지도 김무생의 이성계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고. 사실 김무생은 1983년에도 조선왕조 오백년에서 이성계 역을 맡아왔기 때문에 유동근이 이성계 역을 맡기까지 30년 넘게 김무생의 이미지가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던 것.[35][36] 특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금도 생생한 것이 김무생의 그 굵고도 카랑카랑한 발성으로, 감정에 따라 때때로 터져나오는 쇳소리는 그야말로 피터지는 분노가 무엇인지를 그대로 소리로 옮겨놓은 수준이며, 반대로 차분한 톤으로 말할때 역시 선굵은 발성으로 백전노장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최고권력자의 연륜을 가감없이 만끽할 수 있었다. 김무생 이성계의 후계자로 공인받아가는 유동근 이성계 역시 유동근의 강렬한 발성이 한 몫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만큼 이성계라는 캐릭터는 완벽히 표현하기 위해 소화해야 하는 감정연기의 폭이 매우 넓다는 점을 알 수 있다.[37]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 이방원에 대해 고집불통인 모습을 보인다는 시청자들도 있다. 사실 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저지른 짓들을 보면 정상적인 반응이긴 한데, 막상 방원이 이성계 앞에선 상당히 저자세로 공손하게 나오고 그에게 인정받는 것을 결코 서두르려 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이쪽은 당연히 용서 못 한다로 정리되는 반응 일변도이기 때문에 이방원에게 감정이입하는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답답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 그러나 중장년층 세대는 오히려 이성계에게 감정이입을 했으며 젊은 시청자들 중에서도 아들과 사위를 잃고 통곡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 같았던 모습에 동감하는 비율이 상당했다. 아무리 잘못했다고, 죄를 달게 받을 것이라고 용서를 구하지만 귀여워하던 막내 아들들을 죽이고 딸을 청상과부로 만들고, 딸은 아예 비구니가 되어 남은 평생을 보냈다. 그래서 저런 짓들을 한 패륜아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면서 이러한 이성계의 노여움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 편. 애초에 이방원이 굽히는 것이 당연하지 답답한게 아니다. 124화에서 양녕이 사신단을 이끌고 명으로 떠나기전 이성계를 찾아가 문안을 여쭈는데 궐밖에 나가 술마셨다 혼난 이야기를 하다 똑같이 궐밖 나다니며 말썽을 피우던 방석과 방번을 떠올렸으나 양녕 앞이라 말을 삼키는데, 나이들어 너무나 쇠약해진 모습과 맞물려 정말 슬퍼 보인다.

그러나 임종 직전의 꿈에 나타난 원혼들의 모습은 아들 이방원으로 인한 숱한 마음의 상처 속에서 말년을 보낸 이성계 또한 그렇게 원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통렬한 각인이라 볼 수 있다. 마지막에 태종 이방원에게 남긴 유언을 보면 마지막 순간 스스로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된 듯. 자신처럼 피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그의 유언은 자신 이상으로 피비린내 나는 길을 걷고 있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안타까움이 담긴 마지막 연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용의 눈물조사의의 난을 끝으로 막을 내릴 예정이었기에 본래 이방원과 함께 2대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었으나 용의 눈물이 인기에 힘입어 조선 태종의 치세와 죽음까지 방영이 연장되자 조사의의 죽음 이후로는 뒷전으로 밀려난 느낌. 이로 인해 용의 눈물 후반부 진 주인공은 이방원이 된다. 다만 이성계가 일방적인 페이크 주인공이 아니라 삼국지 연의의 유비와 제갈량처럼 유비가 이야기 전반부의 주인공이고, 그의 사후 제갈량이 후반부 주인공이 된 개념과 닮은 부분이 존재.

용의 눈물 특유의 하이 퀄리티와 분량 속에서 김무생의 연기력에 힘입어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세월에 걸친 다양한 감정 묘사와 변화가 잘 묘사된 덕분에,[38] 현재에 이르러서는 상술한 이방원을 향해 보였던 끝없던 분노와 증오에도 불구하고 타 사극에 등장한 여러 이성계 캐릭터들과 비교해 여러 의미로 가장 이방원의 아버지다운 캐릭터로 자리잡게 되었다.[39]

왕권에 대해서도 훗날 나오는 작품들에선 신하들이 주도적으로 행하면서 마치 바지사장인 느낌을 벗어날 수 없지만[40], 작중에서 나오는 태조는 한양 천도, 요동 정벌 등 핵심적인 부분에선 태조가 전부 관여하고 있으며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스스로가 거절하며, 정도전의 의견이라도 자신의 권위와 그 의사를 짓누르는 부분이 있다 싶으면 그것에 대해 분명한 제재를 가한다.[41] 왕권을 행하는 모습도 자주 보이는만큼 공신들을 통제할 수 있는 강인한 모습도 자주 보인다.

4. 기타



[1] 사료에도 나와있지만 회상으로 북벌을 고집하는 최영에게 간곡히 사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했던 이야기들이 짧게 나온다.[2] 여기서도 최영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로서 사불가론을 회상하던 도중 마지막 부분에 단순한 회상이었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정말로 큰 소리로 대감!하고 외치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이윽고 뭔가 더 울분에 찬듯한 목소리로 말을 독려하며 달려나가는데 위화도 회군 당시의 이성계의 절박함과 최영에 대한 믿음과 안타까움을 보여줬던 장면.[3] 당장 1화의 위화도 회군 신에서 새 왕조를 열 기회라며 결심을 다잡는 장면이 있고 이후 공양왕을 옹립할 때는 왕이 되기 싫다며 애원하는 공양왕을 직접 찾아가 반쯤 협박해서 왕위에 앉게 하고 정몽주 사후 동맹을 위해 찾아온 공양왕에게 나 없어도 잘하지 않았냐며 비꼰다.[4] 역사적 사실인 낙마 사건을 이성계가 정몽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꾸민 일로 각색하였다. 역사적 사실의 훌륭한 재해석의 사례 중 하나라 할 만하다. 또 후대의 작품인 정도전만큼은 아니어도 이 작품에서도 정몽주를 절실하게 원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이방원이 멋대로 정몽주를 처단하자 노발대발하며 칼을 빼드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5] 그래도 이방원을 불러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네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라는 얘기 정도는 했다.[6] 한씨의 경우에는 그냥 와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정도의 대인배였지만, 어머니를 아끼는 이방원은 안타까워 했고, 정종 또한 즉위 이후에 신하들에게 말하길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데 있어서 약간의 소홀함이 있으셨다고 인정을 하기도 했다.[7] 민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불과한 원흉이 왕씨들로 인식을 해서 암묵적 동의를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8] 실록에는 옷을 벗겨서 춤을 추게 했다는데 방송 심의 때문인지 드라마에서는 등에 바가지를 넣고 꼽추를 흉내내는 정도로 순화되었다. 대신 나레이션으로 실록에는 이러이러하다고 되어있다고 보충설명을 한다. 어차피 명색이 유자들이니 정말 홀딱 벗겼다는 수준은 아니고 그냥 속옷만 입고 춤추는 정도였을 것이다.[9] 실록에 기록된 무인정사 당시 태조의 건강이 나빴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태종 세력에서 조작했다는 주장과 태조의 나이를 생각하면 진짜 건강이 나빴을거라는 주장이 대립.[10] 이때 눈물을 흘리면서 "저놈들 마음대로 세자 자리도 이 옥좌도 다 가져가라 하라..."라며 한탄한다.[11] 이 장면 촬영 장소는 실제 사찰인 순천 선암사에서 진행했으며, 선암사 스님들이 엑스트라로 나왔다. 경순공주를 연기한 김나우는 실제로 불자였고, 삭발도 진짜로 했다. 김나우의 부모님까지 촬영을 참관하였다.[12] 같은 이환경 작가가 집필한 태조 왕건에서도 능애가 아버지으로부터 한 번씩 벼루를 맞는 장면이 나온다.[13] 벼루 문서에도 나왔지만 문방구에서 파는 플라스틱 벼루가 아닌 진짜 벼루는 제대로 던지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흉기가 된다. 소현세자가 인조가 던진 벼루에 맞아서 죽었다는 야사도 있을 정도. 그리고 늙었고 병치례를 한 차례 한 직후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당대 최고의 무인이었던 이성계가 작정하고 던진 벼루의 위력은 엄청났을 거다.[14] "소자가 저지른 죄는 천추에 씻을 길이 없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아버님, 양위만큼은 하지 마시옵소서. 아버님을 하늘로 알고 있는 자식이옵니다. 아버님이 누구시옵니까? 이 나라를 창업하시고 대 요동정벌을 호령하셨으며 외적을 물리치신 분이시옵니다. 산천초목도 아버님의 위명 앞에는 고개를 숙이거늘 감히 정도전 따위가 왕권을 희롱하는 모습을 소자는 묵과할 수 없었사옵니다." 중간에 문맥, 문법이 다소 맞지 않는 단어나 문장이 있는 것도 이방원 자신이 아버지가 던진 벼루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면서 정신이 거의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정말 의식을 부여잡고 쥐어짜내서 말하는 상황임을 감안하고 보면 더욱 리얼하게 와닿는다.[15] 참고로 이 장면은 나중에 정도전에서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에게 이성계가 머리에 물건을 던지는 장면으로 오마주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유동근이 이 장면에서는 맞는 입장이었는데 여기서는 던지는 입장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또한 용의 눈물과 정도전 모두 유동근과 안재모가 부자지간 역으로 나온다는 점이 재밌다.[16] 이 때 민씨는 시아버지의 박대를 견디지 못하고 분함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며 찬합을 다시 내던진다. 여담으로 이 장면에서 배꼽 정도 높이로 손에 든 약식 찬합을 이성계가 그 자리에서 높이차기로 걷어차버리는데 하늘 높이 붕 뜬 찬합이 나뒹굴지도 않고 그대로 바닥에 착지한다(...) 지금은 저작권 문제로 삭제되었으나 한때 유튜브에 돌아다니던, 이 장면을 따온 영상의 제목이 동양무술의 정수를 보이는 이성계였을 정도.[17] 그러나 실록에서 이성계는 이천우에게 제지당하긴 커녕 오만곳을 자기 맘대로 돌아다녔다. 사실 여기서도 어설프게 이성계를 막으려는 이천우를 신나게 갈구고 나서, 마침 지나가던 정종의 허가를 받고 출타한다. 얻어맞고 불쌍한 표정으로 정종 쪽을 바라보는 이천우가 안쓰러워보일 정도.[18] 실제로는 내부의 적을 가려내기 위한 위장이었다.[19] 정확히 말하면 박순 다음에 마지막으로 차사로 갔던 성석린도 살았다. 다만 성석린이 갔을 때는 조사의 세력이 막 거병하기 직전으로 함흥 본궁에 반란군이 득실거리던 시점이라 겁에 질린 성석린은 스스로 차사임을 부정한 채, 제대로 말도 못 꺼내고 돌아와야 했다. 이때 성석린은 이성계에게서 어떻게든 의심을 풀고 빠져나와야했기에 거짓말을 하면서도 '제 말이 거짓이면 제 자손은 장님이 될 겁니다.'라고 둘러댔는데 공교롭게도 이후 성식린의 자손 중 진짜 맹인이 생겼다.[20] 중간에 몸이 심하게 아파져 인근 민가에서 머무느라 귀로가 지체되었고 결국 강가에서 자객들에게 따라잡혀 살해되었다. 이상의 함흥차사 관련 내용들은 모두 야사의 이야기들로, 성석린은 함주에 간 적이 없고 박순은 함주에 가서 반란군 장수들을 설득하다가 조사의에게 죽었다.[21] 하륜이 반드시 아름드리 나무로만 골라 기둥을 만들라 하자 아버지를 성대하게 맞이하고 싶던 태종도 그건 좀 과하지 않나 하며 갸웃거렸는데 하륜은 이왕 태상왕께서 돌아오시는 자리인데 화끈하게 지르라며 부추긴다.[22] 종묘에서 열성조에게 임금이 제사를 드릴 때도 술을 따라 올리는 것은 집사가 맡아서 거행하고 임금은 그냥 절만 올릴 뿐이므로 태상왕이라 해도 임금이 직접 술을 올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였다.[23] 철퇴로 내리칠 때도 술잔을 건네주던 내관이 막아보려고 붙잡지만 과거 용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지 한 팔로 밀어 내치는 용력을 보여준다.[24] 이 과정에서 철퇴에 부딪힌 안주 모형이 무학대사 역을 맡은 박병호 배우의 아랫 입술을 맞추는 아찔한 장면 또한 카메라에 담겼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약간은 위험해 보였다.[25] 연려실기술 태조조 고사본말에 실린 야사를 각색한 것이다.[26] 옥새를 건내는 시점부터 태종에 대한 호칭이, '방원이'로부터 '주상'으로 바뀌어 겉으로나마 왕 대접을 하고 존칭을 하게 된다.[27] 원작인 세종대왕에서는 태종의 캐릭터가 그냥 야망 is 이방원, 이방원 is 야망이라 할만한 수준이라 아버지에 대한 효심은 거의 묘사되지 않고 대립각을 묘사하는 데 집중되어 있으며 훗날 여러가지 비위맞추기도 그냥 환심사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나온다. 이 장면도 모든 최후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태조가 옛다 이게 네가 원하는거 아니냐 하며 옥새를 내던지자 이방원이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인데 뭔가 얼떨떨한 나머지 덜덜 떨며 주울 뿐이며 화해의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28] 그나마 익안군 방의가 있었다만, 이미 이 시점에서 중병을 앓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방의는 2차 왕자의 난 이전부터 방간에게도 말했듯이, 왕권에 욕심없이 적당히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어했다. 그러니 그야말로, 이성계에겐 방원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29] 태조 역을 맡았던 김무생은 용의 눈물 종방연을 기념한 특집방송에서, 태조가 자신의 앞에서 춤을 추다 감정이 복받쳐 오열하며 안기는 태종의 등을 쓸어주는 그 장면에 대해 자신에게 울며 사죄하는 자식을 부모로써 어떻게 받아줄 것인가를 연출이나 작가도 제시해 주지 않았고 해당 장면에서 별다른 대사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엎드려 우는 태종의 등을 쓸어주는 것도 그 순간에 이렇게 해야겠다가 아니라 그냥 저절로 손이 나가서 그렇게 했다고, "역시 사상이고 이런 걸 다 떠나서 '피'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아울러 김무생은 태조 이성계가 보기에 태종 이방원은 태조 자신의 장점 뿐 아니라 단점까지 그대로 빼닮은 아들이었고 아들의 행동에서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을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아서 필요 이상으로 멀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고 감상을 밝힌 바 있다.[30] 이복 동생이 민무구, 민무질의 탄핵을 주도했다.[31] 정종과 태종이 함께 아버지의 쾌유를 빌며 수계식을 하는데 보통 절에서 재가신도들에게 하는 것처럼 불 붙은 향으로 지지거나 승려들이 하는 것처럼 뜸 같은걸로 지지는 게 아니라 아예 팔에 굵직한 심지를 놓고 태우는 수준이다. 게다가 심지가 다 타 없어지자 다시 올리라고 하면서 세번은 넘에 팔등에 심지를 올리고 태운다. 이 때 고통을 참는 태종의 표정이 압권.[32] 최영은 오히려 반가운 듯이 호탕하게 웃어대지만 우왕은 삿대질을 하며 "이놈! 이 고얀놈!"이라 일갈하고, 창왕은 조용히 독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고 공양왕은 "어서 오시오, 대감. 고려를 죽인 이 원수!"라고 소리친다.[33] 해당 꿈에서 이들과 함께 먼저 떠난 신의왕후나 진안대군(이방우), 익안대군(이방의)는 안 나온다. 또한, 작중에서 사망 장면이 나오지 않은 경순공주는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기 직전 해인 1407년에 사망했고, 은둔한 암자에서 좌선한 상태로 합장을 한 모습으로 사망한 이지란은 1402년, 후반부 시작할 즈음 사찰 전각에서 열반한 무학대사는 1405년이었다. 한편 꿈 속에서 맨 마지막에 등장한 정몽주는 이성계를 반기지도 원망하지도 않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있었다. 생전 둘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고 이성계는 그를 흠모했지만 정몽주로서는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킨 고려의 원수였다는 점을 표현한 걸로 보인다.[34] 한편 이중에 원경왕후는 태조를 그렇게 우대하면서 민제는 사실상 등한시하는 모습에 불만을 느끼며, 양녕대군은 평생 싸우다가 이제서야 제대로 대우해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면서 회의감을 느끼고 빈소에서도 곡을 하지 않는다.[35] 사실 용의 눈물에 나오던 이때 당시 김무생의 실제 나이는 54살이었다.[36] 유동근 본인 스스로도 이성계 역을 맡을 때 사투리를 쓰는 변방의 장수 이성계라는 특징이 있었기에 김무생 씨와 다른 이성계를 할 수 있었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만약 똑같은 표준어였다면 스스로도 자신을 비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김무생 씨의 연기력에 30년이 넘어서도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37] 그 주변의 신료들은 설령 정도전에서처럼 주인공급이라 해도 주로 정치적 선택과 대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가정사의 비중은 낮지만(정도전의 정도전도 가정사는 고작 정진의 출사 정도에 그쳤다.), 태조는 왕이다. 그의 정치행보에서 가정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며 그 가정사도 처절한 비극으로 흘러가니 당연히 감정연기의 요구레벨이 동시기 다른 인물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을수밖에 없다.[38] 야사와 고려 왕실 그리고 그가 상대했던 모든 적들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인물들에 대해서까지 감정 묘사가 세밀히 드러나며,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가졌던지에 대한 설명은 물론 그러면서도 드러나는 자신의 야욕이 겹친 긴 시간동안 세밀하게 드러나니 이성계에 대한 감정은 물론이고, 거기다가 김무생의 연기력이 더해지니 역사적 관점에서도 이러한 연유로 벌어진다는 정당성과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고 빠져들 수 있게 만들었다.[39] 용의 눈물 이후 등장한 여말선초를 다룬 드라마들은 그 퀄리티와 별개로 분량상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 즉위와 이성계의 임종까지 일관되게 그려내지 못한 탓에 방원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가 명확하게 그린 작품이 없었다. 그나마 2021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태종 이방원에서는 양녕대군의 비행&단식 투쟁 때문에 술을 마시다 취한 이방원이성계를 찾아와 용서를 빈 것을 계기로 서로 화해하는 것으로 오랜만에 그 결말을 그렸지만, 이성계의 임종 직전에 가서야 겨우 이뤄진 데다가 그런 화해에 이르기까지 이 둘의 감정의 골은 1차 왕자의 난이 터지기 전부터 용의 눈물을 비롯한 여러 여말선초 사극들과 비교해서도 답이 없어 보일 정도로 깊었다.[40] 드라마 정도전, 태종 이방원 등 그 권위를 행사하는 모습에 대해서 한번씩 나오긴 하지만, 대다수는 신하들이 자신들의 상소를 올린 다음에 그걸 수행하거나, 정도전의 계획을 따라 행하는 모습이 대다수라 정도전에선 아예 자기 입으로 내가 왕이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할 정도다. 물론 어디까지나 드라마속의 창작일뿐 실제 이성계는 왕권이 튼튼한 왕이었으며 세자 책봉, 한양 천도 등 다른 일들을 자신의 뜻대로 밀어붙힌 인물이다.[41] 대표적으로는 무학대사를 왕사로 올려둔 것에 대해 정도전이 숭유억불의 사상을 벌써 무시하는 것이냐며 아예 쫓아내라고 말을 하는데, 그에 대해서 왕사는 자신의 또 다른 민심을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하다며 그렇게 제재만을 가하려고 하는 것이냐고 말하자 정도전이 물러설 정도. 또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강력히 밀어붙이자 조준 같은 중신들까지도 마땅찮앙하니 조금 천천히 하자고 제지하고, 이에 정도전이 다소 답답해하는 장면도 있다.[42] 본래 용의 눈물은 조사의의 난을 끝으로 용의 눈물이 끝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