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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태조의 황녀 경순공주 | 慶順公主 |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태조의 왕녀 경순공주 | 慶順公主 | |||
출생 | 1370년대 추정 | ||
사망 | 1407년 9월 17일[1] (향년 미상) | ||
조선 한성부 정업원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산3번지) | |||
묘소 | 미상 | ||
재위기간 | 조선 경순궁주 | ||
1392년 8월 25일 ~ 1407년 9월 17일[2]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부모 | 부황 태조 고황제 모후 신덕고황후 | ||
형제자매 | 부황 기준 8남 5녀 중 장녀 모후 기준 2남 1녀 중 장녀 | ||
배우자 | 흥안군 이제 (興安君 李濟, 1365 ~ 1398) | ||
종교 | 불교 | ||
봉호 | 경순궁주(慶順宮主) → 경순공주(慶順公主) | ||
별호 | 경순궁주(敬順宮主)[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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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창업군주 태조 이성계와 그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딸. 또한 조선의 초대 왕세자 의안대군의 동복 누나이다.2. 생애
2.1. 조선 건국 전
고려 말 무장이었던 아버지 이성계와 그의 경처(京妻)인 어머니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이후 고려 후기의 문신 이조년의 증손자이자 권신 이인임의 조카인 이제와 결혼하였다.
2.2. 조선 건국 후
1392년에 아버지 이성계가 새 나라 조선을 건국하고 초대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동시에 어머니도 왕비가 되어 현비(顯妃)에 봉작되었고, 본인 또한 왕과 왕비의 적녀가 되어 ‘경순궁주(敬順宮主)’의 봉호를 받았다. 또한 그녀의 남편 이제는 왕의 사위가 되어 부마로서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다.2.3. 1차 왕자의 난 발발
음력 1398년(태조 7) 8월 26일,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한다. 이 사건으로 경순공주는 이복오빠인 이방원측에 의해 남편, 첫째 남동생, 둘째 남동생을 잃는다.[4]한순간에 남편과 동생들을 잃은 경순공주는 슬픔에 잠겼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신덕왕후의 자식인 그녀마저 이방원의 함정에 걸릴까 봐 안타까워 한 아버지에 의해 비구니가 되어 출가한다.[5][6]
2.4. 쓸쓸한 말년
그 이후 정업원[7]에 머물었다.[8]몇 년 후, 1407년(태종 7) 9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사망하자 이복오빠 태종과 정종은 조문을 갔다. 또한 정종과 태종은 애도의 의미로 며칠 동안 철선(고기를 끊음)했다고 한다. 이는 조선 초기 때까지만 해도 불교식 장례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기 애호가로 유명한 세종도 정종이 붕어했을 때만큼은 며칠간 철선을 했고, 태종이 임종에서 금상 세종에게 철선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2.5. 사후
생전 부부 사이에 자녀가 없어서 남편의 조카인 이윤(李潤)이 대를 이었다. 훗날 조카 세종이 그녀의 남편 이제의 신원을 회복시켜줬다.3. 기타
3.1. 이성계의 첫째 딸인가 셋째 딸인가
태조의 딸들은 전부 생년이 알려져 있지 않아 정확한 차서(次序)를 알 수 없다.예전에는 신의왕후의 소생인 경신공주와 경선공주에 이은 적3녀로 추정했었고, 《선원록》에도 그렇게 적혀있었다.
하지만 1387년(고려 우왕 13년)에 지어진 《이자춘신도비문》에 따르면, 경순공주는 대호군(大護軍) 이제와 결혼했다고 쓰여 있는데 신의왕후의 두 딸은 아직 어리다고 쓰여 있다.
또한 태조실록에도 위화도 회군 당시(1388년) 신의왕후의 두 딸과 신덕왕후의 두 아들은 어렸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 1393년에도 경순공주는 이제와 혼인했는데 경신 • 경선공주는 어리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9]으로 보아 태조의 세 적녀들 중 적장녀이자 태조의 다섯 딸 중 장녀로 추정된다.[10]
판삼사공(判三司公)의 전부인(前夫人)은 밀직 부사로 치사한 한공(韓公) 휘 경(卿)의 딸인데,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해졌다.
(중략)
방원(芳遠)은 통직랑(通直郞) 예의정랑 지제교이고, 방연(芳衍)은 종사랑(從仕郞) 성균 박사이며, 딸 둘은 모두 어리다. 후부인(後夫人)은 판삼사사 강공(康公) 휘 윤성(允成)의 딸인데, 부인이 낳은 아들로는 고공 좌랑인 방번(芳蕃)과 군기 녹사인 방석(芳碩)이 있으며, 딸은 대호군(大護軍) 이제(李濟)에게 출가하였다.
1387년(고려 우왕 13년), 《이자춘신도비문》#
(중략)
방원(芳遠)은 통직랑(通直郞) 예의정랑 지제교이고, 방연(芳衍)은 종사랑(從仕郞) 성균 박사이며, 딸 둘은 모두 어리다. 후부인(後夫人)은 판삼사사 강공(康公) 휘 윤성(允成)의 딸인데, 부인이 낳은 아들로는 고공 좌랑인 방번(芳蕃)과 군기 녹사인 방석(芳碩)이 있으며, 딸은 대호군(大護軍) 이제(李濟)에게 출가하였다.
1387년(고려 우왕 13년), 《이자춘신도비문》#
고려인의 평균 결혼 연령은 남자 20.7세, 여자 16.3세였는데[11][12] 경순공주가 1387년을 기준으로 16세에 혼인을 했다면 1372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4. 가족 관계
- 조부: 환조 이자춘(桓祖 李子春, 1315~1360)
- 조모: 의혜왕후 최씨(懿惠王后 崔氏, 생몰년 미상)
- 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
- 외조부: 상산부원군 강윤성(象山府院君 康允成, ?~1358)
- 외조모: 진산부부인 진주 강씨(晉山府夫人 晉州 姜氏, 생몰년 미상)
- 시부: 이인립(李仁立, 1333~1387)
- 시모: 혜령옹주(惠寧翁主)
- 남편: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 ?~1398)
- 양자: 이윤(李潤) - 시동생 이발(李潑)의 아들
5. 대중매체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김나우가 연기했다. 총명하고 다부진 여성으로 신덕왕후의 3자녀 중 가장 왕족답다. 방번은 지극히 평범한 10대 청소년에 불과하고 방석도 세자빈이 내시와 간통하다가 자결한 사건을 겪은 뒤 일탈을 일삼아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은 신덕왕후의 속을 까맣게 태우는데, 그럴 때마다 나서서 세자를 꾸짖고 바른 길을 가도록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시고, 완전히 벌어져 버린 이복 오라버니들과의 관계를 걱정하기도 하며 공주로서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13] 하지만 무인정사로 인해 동생들과 남편을 하루 아침에 잃는 비극을 목도하고 불가에 귀의하게 되며, 뒷날 궐을 나와 순행 중이던 이성계가 그녀가 수행 중인 절에 들러 만나게 되지만 묵언 수행 중이라 그리운 아버지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장면은 용의 눈물의 명장면 중 하나다. 그 뒤로는 무학과 같이 다니는 모습이 두어 차례 그려지다가, 이성계가 임종 직전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무학대사, 이지란, 정도전, 고려 왕실, 최영, 정몽주 등)의 환영을 볼 때 같이 등장하는 것을 끝으로 완전히 퇴장한다.[14]불교에 입문할 때 이성계가 손수 머리를 잘라주며 삭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진짜로 삭발했다. 장소도 실제 사찰인 순천 선암사이고 선암사 스님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이는 해당 에피소드가 방영된 56화 끝부분에 자막으로 선암사 스님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나온다. 김나우 본인도 불교 신자였고 친부모까지 촬영 장면을 참관하러 와 감회가 남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작중에선 이 다음에 바로 유명한 '벼루 투척' 장면이 나온다. 이성계가 딸을 직접 삭발해 주고 참담한 심경으로 궁으로 돌아오니, 그 원수인 방원이 문안인사랍시고 찾아와서 도저히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벼루를 던진 것.
정도전(드라마)에서는 고주연이 분했으며, 출연 장면은 이제와 혼인할 때와 어머니인 신덕왕후가 승하할 때 딱 두 번이다.
〈태종 이방원〉에서는 최다혜가 연기하며, <다큐멘터리 3일〉에서 배우 인터뷰를 통해 실제로 삭발을 감행할 예정이라고 하였고, 결국 18회차 방송에서 실제로 삭발하였다.
5.1. 삭발 연기
여러 드라마에서 경순공주 역을 맡은 배우들은 정도전에 나왔던 고주연을 제외하고 모두 실제로 삭발을 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추동궁마마에서
용의 눈물에서
태종 이방원에서
[1] 음력 태종 7년 8월 7일[2] 음력 태조 1년 8월 7일 ~ 태종 7년 8월 7일[3] 정종실록 2권, 정종 1년 9월 10일 정축 6번째기사[4] 이때 경순공주는 참으로 잔인한 선택을 해야 했는데 남편인 이제에게 이방원의 일파에 가담하면 반드시 살 것이라 했지만 이제는 이방석의 매부인 이상 살아남긴 틀렸다 봤는지 아내의 말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가문들을 적으로 돌렸고 이런 무리수를 가능케한 어머니 신덕왕후는 이미 사망해서 보호막도 사라진데다, 이방원의 역량과 성품을 생각하면 난이 벌어진 이상 어차피 자신의 막내동생은 살아남긴 틀렸다고 보고 남편만이라도 살려보려고 한 듯하다. 경순공주의 생각은 무리가 아닌 게 그녀의 이종사촌인 신씨(즉, 신덕왕후의 조카)는 신덕왕후의 면전에서 이방원을 편들었고, 신씨의 오빠로 경순공주의 또 다른 이종사촌인 신극례는 아예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측에게 가담했다. 이처럼 신덕왕후의 인척들조차 이방석을 가차없이 버리고 이방원을 편들었으니 왕가와 친척들 모두에게 고립된 경순공주가 친동생을 배신하라고 할 정도로 남편을 살리기 위해 절박해진 것도 당연했다.[5] 이후 이방석의 처이자 자신의 올케인 현빈 심씨도 정업원에 비구니가 되어 들어온다.[6] 참으로 얄궃은 일이 전임 왕조의 국왕이자 경순공주의 아버지 이성계의 전 주군이었던 공민왕의 제2비였던 혜비 이씨도 이 당시 비구니로 정업원에 있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왕씨마저 학살한 이성계의 집안에서 벌어진 골육상잔을 보면서 뭔 생각을 했을지는...[7] 주로 남편을 잃은 왕실 여인들이 기거했던 사찰이다.[8]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적극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펼쳐 사찰들을 폐쇄할 때도 정업원만은 예외로 했던 것, 신하들이 정업원의 예산이 사치스러운 것을 일컬어 폐쇄를 주장했음에도 끝까지 정업원을 유지시킨 것을 미루어 볼 때 그곳에 누이가 있으니 해하면 안되는 태종의 죄책감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태종은 적극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펴기는 했지만 왕실과 관련된 사찰의 경우에는 유순한 정책을 취했다. 경순공주와 청룡사 말고도 아버지인 태조가 자주 찾았던 회암사의 경우에는 신하들이 폐쇄하라고 화내도 아버지가 거기서 벌이는 불사에 대해서는 하게끔 놔뒀다. 실제 본인도 원경왕후가 위독할 때 회암사에서 승려들을 불러 불사를 지낸적이 있고. 사실 불교뿐만 아니라 태종은 본인의 정치적 이상에 걸림돌이 되지 않거나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는 상대에게는 관대한 태도를 보인 편이었다. 다만 본인이 기본적으로 불교를 싫어하는지라 누가 불사를 하던 말던 신경을 안 쓰는 것과는 달리 재위 기간 내내 꾸준히 억불정책을 폈다.[9] 태조실록 총서[10] 경신공주, 경선공주, 숙신옹주는 경순공주보다 나이가 적은게 확실하고 의령옹주만 남게 되는데, 의령옹주의 남편인 계천위 이등이 1379년 생이라 의령옹주 역시 남편과 비슷한 나이대라면 경순공주가 언니가 된다.[11] 김용선, (고려 금석문 연구)[12] 당시 고려인이었던 이성계는 17살, 신의왕후는 15살, 이방원은 16살, 원경왕후는 18살에 혼인하였다.[13] 어머니인 신덕왕후에게 이복 오라버니들도 엄연히 왕실의 일원인만큼 방번, 방석형제들 못지않게 잘 챙겨줘야한다고 조언하지만 이미 이들과 사이가 험악해질대로 험악해진 신덕왕후는 이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 왕자들더러 그들은 왕실의 일원이 될 자격조차 없다고 분노를 표한다.[15] 이러한 대인배스러운 성격덕분인지 신덕왕후와 그 소생들을 누구보다 적대시했던 이방원도 경순공주에게만큼은 나름 여동생으로서 예우를 해주는 걸로 묘사된다.[14] 어머니 신덕왕후와 친동생들(방번, 방석), 남편과 함께 등장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경순공주가 이성계보다 1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15] 사실 신덕왕후도 중요성을 모른건 아니어서 이방원을 제외한 나머지 한씨 왕자들을 따로 불러 챙겨주기도 했지만 이방원이 전설의 노루 투척을 시전하자 결국 험악해져버린걸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