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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2 12:37:11

덕안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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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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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gold> 조선 태조의 왕자
덕안대군 | 德安大君
이름 방연(芳衍)
군호 문안군(文安君)1409년(태종 9)
덕안대군(德安大君)1872년(고종 9)
본관 전주(全州)
부왕 태조 고황제
모후 신의고황후 한씨(神懿高皇后 韓氏)
부인 없음[1]
자녀 없음
생몰기간 1370년대 초중반[2] ~ 1388년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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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초기의 왕족. 태종 이방원의 형제들 중 유일한 동복 동생이다.

2. 생애

이성계신의왕후 한씨의 사이에서 여섯째 아들이다. 1385년(고려 우왕 11) 을축방(乙丑榜) 문과에 동진사 14위로 급제한 뒤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었는데, 바로 위의 형 이방원처럼 과거에 합격한 뛰어난 인재였던 듯하다. 이성계는 이방원이 문과에 급제한 것에 이어 이방연까지 급제하였으니 엄청나게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전후로 사망했다.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국역되지 않은 명의 사료에 적혀있어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방연은 위화도 회군 때 우왕에게 잡혀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명태조실록 권193 홍무 21(1388)년 8월 13일 기사를 보면 왕이 노하여 성계의 자식을 죽였다는(王怒殺成桂之子) 서술이 등장한다.# 여기에 해당할 수 있는 인물은 이방연뿐이다.

이성계를 재촉하기 위해 우왕이 머무르던 평양에 인질로 있던 이방우이방과는 탈출에 성공했고, 개경에 머무르던 이방원도 남은 가족들을 챙겨 동북면으로 피신했으나 방연은 탈출에 실패하고 분노한 우왕에게 화풀이 대상으로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조선 측에서는 이에 대해 언급도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명사의 기록은 직접 고려에 상황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고려 천호 진경의 증언을 적은 것이고, 천호직 특성상 중앙의 사정을 제대로 알기도 어려우니 우왕이 이방우를 비롯한 이성계의 식솔들을 죽이려 든 것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다. 고로 이미 위화도 회군 이전 시기에 병이나 사고로 요절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러모로 조선측 기록은 죽음의 시기가 위화도회군 즈음이라는 분명한 정황이 있으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방연이 질병이나 사고로 요절했다면 오히려 사망원인을 분명히 기록했을 것이다. 나이로 보면 혼인을 했을 연령대인데, 숙종 때 완성된 왕실족보인《선원계보기략》[3]에는 혼인을 하지 못했다고 언급된다. 기록이 없어 추측할 뿐이지만, 우왕이 반역죄로 이방연과 이방연의 처자와 사로잡을 수 있는 이방연 처가를 몰살시켰다면 이후 역사기록이 명확히 이해될 수 있다. 이성계는 우왕창왕을 죽이고 난 후 그들이 공민왕의 아들과 손자가 아닌 신돈의 자식과 손자라고 주장하고 기록했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역성혁명에서도 지독한 사례에 속한다. 어쩌면 이방연의 죽음이 그 실마리일 수 있다. 역적은 일가를 몰살하고 그 목을 베어 저자거리에 내거는 것이 기본 조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런 셈.

1392년 아버지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는 이미 죽은 상태여서 봉호를 내리지 않았으나 이후 특이하게도 고려 초기의 관위 원윤(元尹)에 추증되었다. 1409년 형 이방원에 의해 문안군(文安君)에 추증되었고 1872년 고종에 의해 '덕안대군(德安大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영종정경(領宗正卿)에도 추증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위화도 회군으로 급박한 정세속에 우왕에게 붙잡혀 처형되었을 수도 있다는 기록은 자식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 거사를 도모한 이성계의 냉혹함을 강조하든, 이성계 내지 전주 이씨 가문이 왕씨 왕실에게 품은 악감정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쓰든, 자식 잃고도 침착한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하려는 형제들을 대비시켜 부자 갈등을 불러오는 데 써먹든 드라마적인 장치로 충분히 활용 가능하지만 하필 그 기록이 국역이 되지 않은 명태조실록이라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사극에서도 여지껏 등장한 작품이 하나도 없고, 아울러서 셋째형 이방의보다도 존재감이 낮다. 방의는 비중은 낮더라도 그나마 직접적으로 등장한 작품도 여럿 되는데 말이다.

파일:신의왕후의 아들, 딸들.jpg

[1] 선원보략에 의하면 장가를 가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2] 1387년에 지어진 이자춘신도비에서 신의왕후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혼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복누이 경순공주보다도 어린 것으로 보인다.[3] 이전에도 선원록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소실되어 숙종 때 내용을 복구하며 오류를 고치고 보완한 족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