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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 원종 | 충렬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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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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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107권 | 108권 | |||||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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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 ||||||
<rowcolor=#670000,#fedc89> 110권 | 111권 | |||||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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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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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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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신돈 辛旽 | |
작위 | 진평후 (眞平侯) |
봉호 | 취성부원군 (鷲城府院君)[1] |
법명 | 편조(遍照)[2] |
본관 | 영산(靈山)[3] |
성 | 신(辛) |
이름 | 돈(旽)[4] |
자 | 요공 (耀空) |
호 | 청한거사 (淸閑居士)[5] |
아들 | 신우 (辛禑)(?)[6] |
가족 | 아버지 또는 이복형 신예, 숙부 또는 이복 형제 신순, 신귀, 이복 형수 또는 숙모 강씨(강윤성의 딸이자 신덕왕후의 누이), 이부동생 강을성[7] |
생몰연도 | ? ~ 1371년 8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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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천하니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할 때 반개혁 세력이 두려워 일을 그르칠까 무섭다고 하자 그에 대한 당사자의 반응.
고려의 승려 출신 정치인.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할 때 반개혁 세력이 두려워 일을 그르칠까 무섭다고 하자 그에 대한 당사자의 반응.
제31대 공민왕이 개혁 정치를 위해 등용한 인물로 개혁자라는 평가와 요승(妖僧)이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개혁자라고 보는 쪽에서는 강제로 노비가 된 평민들을 노비에서 해방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정책을 폈던 점을 강조하는 반면, 요승이라는 근거로는 과도한 권력 욕심, 최악의 처신, 불교 축제와 제사를 열기 위해 자주 일으킨 백성 수탈, 정도가 심한 부녀자 희롱과 겁탈 등이 제기되고 있다.
그를 등용했던 공민왕과 여러모로 유사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2. 생애
2.1. 정치 입문 이전
영산현(靈山縣)[8]에서 태어났다. 《고려사》에서는 신돈의 법명, 출신지, 어머니의 신분만 적고 아버지에 대해 적지 않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고려사》에는 없지만 영산 신씨(靈山 辛氏)의 신예(辛裔)라는 인물이 신돈의 아버지 또는 형이라는 설이 있다.[9]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10] 옥천사(玉川寺)의 노비였는데 어린 나이로 출가를 하여 승려가 되었다. 승려가 되고 공민왕과 만나기 이전까지 뭘하고 살았는지는 《고려사》에 기록이 없다. 다만 고려 말의 학자 이달충이 신돈을 비판하는 시를 지은 바가 있는데 그 시의 각주에 매골승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매골승'은 '시신을 매장하는 일을 하는 승려'라는 뜻이므로, 신분이 미천한 신돈이 남들이 꺼리는 일로 생계를 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명덕태후 홍씨가 신돈을 공민왕에게 소개했다.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꿈에서 자객을 만났는데 웬 승려가 나타나 자객을 없애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원명[11]의 소개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꿈 속에서 본 승려와 행색이 비슷하여 마침내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국대장공주 승하 뒤 공민왕이 정치에 뜻을 잃자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이때 그는 법명인 '변조'(遍照)를 버리고 환속하여 신돈으로 개명했다.[12]
현존하는 기록에는 신돈이 어떻게 공민왕과 만났는지 설명이 매우 부실하다. 《고려사》나 야사에서는 단순히 신돈이 요승이라 공민왕을 미혹했다는 식으로 나오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일단 미천한 신분인 그가 임금에게 소개될 정도였다면 뭔가 그가 세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혼란한 고려 말기에 민중들 사이에서 불교 운동을 일으켰고, 상당한 추종 세력을 거느렸던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사의 기록에 착안해서 신돈이 공민왕 시해 음모를 포착해 김원명을 통해 이를 고변했고, 공민왕과는 이를 계기로 만나게 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환속을 한 뒤에는 육식을 상당히 즐겨한 모양이다. 승려 시절에는 삐쩍 마른 몸에 눈빛이 형형해서 범상치 않은 사람 취급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을 볼 때 그의 육식은 영양실조를 고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다만 아직 불교의 영향력이 커서 채식 위주 식사가 보편적이었던 당시 고려에서는 이런 신돈의 식습관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보였던 듯하다.[13] 혹은 이 역시 티베트 밀교적인 신돈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일 수도 있다.[14] 희한하게도 사냥개를 무서워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항간에는 신돈의 본모습이 구미호가 아닐까 하는 소문이 돌아 그의 이미지 악화에 더욱 일조했다.
2.2. 정치 입문 이후
<colbgcolor=#000><colcolor=#fff> 신돈의 역대 관직 | |
호칭 | 사부(師傅), 첨의(僉議), 영상(領相) |
문산계 품계 |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15] |
공신호 |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
직위 |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16] 판사(判事)[17] |
<colbgcolor=#000><colcolor=#fff> 신돈의 외국 관직 | ||
호칭 | <colbgcolor=#000><colcolor=#fff> 원 | 권왕(權王) |
명 | 상국(相國) | |
원 문산계 품계 | 영록대부(榮祿大夫) | |
원 직위 |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
공민왕을 알현한 계기가 어찌되었든, 왕의 신임을 받게 된 신돈은 1365년 12월, '고려 개혁'의 핵심 인사로서 등용된다.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받은 직후의 직책이 어마어마하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18][19][20]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21]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22] 겸(兼)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23]"
로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길다.[24] 그야말로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셈이었다.집권 초창기에는 노비를 풀어주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등 신속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치면서 백성들에게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전민변정도감이 바로 그것으로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설치한 기관이었다. 신돈 본인이 기득권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득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권문세족과 부원배들을 포함한 조정의 부패한 세력들도 몰아냈다. 승려 출신이라서 훗날 신진사대부들에게 엄청 까였지만, 사실 신돈이 권문세족 등 기득권의 입지를 흔들고자 등용한 것이 신진사대부였으며, 처음에는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신돈은 불가 출신이었지만 공자는 천하만세의 스승이라고 극찬했으며 고려의 관학인 성균관도 부활시켜 신진사대부의 세력 강화에도 크게 공헌했다. 신돈이 신진사대부들과 척을 지게 된 것은 신돈 자신이 신진사대부의 핵심 인사들을 숙청하고 난 이후였다.
그러나 신돈은 이런 '무명의 개혁가'를 담당하기에는 부패하고 탐욕하여 점차 신망을 잃었다. 대쪽같이 빈틈을 전혀 주지 않아도 수많은 적과 모함을 만들어내는 입지인데 신돈은 왕의 신임을 믿고 스스로 부정부패와 축재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점점 신돈의 정치에 불만을 품는 세력이 등장했는데 우선 신돈 자신이 키워낸 신진사대부 세력이 가장 먼저 그를 불신했다. 신돈은 정도전의 스승이자 좌주인 유숙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그를 죽였는데, 유숙은 본래 정사에 대해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돈은 그가 지은 시를 볼 때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하여 그를 죽였다. 유숙은 고려 말 학식이 매우 뛰어나 이제현, 홍언박, 이색 등과 더불어 공민왕 시절 손꼽히던 대학자였고, 고려 말에 초기 신진사대부의 주축이었다. 유숙의 죽음으로 인해 정도전을 비롯해 많은 백성들이 슬퍼하였고, 이로 인해 문생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분노를 샀으며 정도전의 경우는 신돈을 가장 먼저 비판했다.
무관 측 핵심 인사였던 최영마저도 그를 싫어했으며[25] 사실상 신돈 자신과 이춘부 같은 소수의 파당 빼고는 모두가 적이었다. 신돈 본인은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갑자기 출세한 것이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안 그러면 자신이 밀려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애초에 적을 많이 만들 수밖에 없는 위치였는데 신돈은 본인 스스로가 부패했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표적이 되었다.
2.3. 사망
선부의랑(選部議郞) 이인(李韌)이 신돈(辛旽)이 반역을 모의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이에 성과 이름을 숨겨 한림거사(寒林居士)라고 칭한 뒤 글을 적어서 밤에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던졌다. 김속명이 이를 아뢰자 왕은 신돈의 일당인 기현(奇顯)·최사원(崔思遠)·정구한(鄭龜漢)·진윤검(陳允儉)·기중수(奇仲修) 등을 체포하여 주살할 것을 명하였다.
왕은 성품이 의심이 많고 잔인하여 비록 심복이 되는 대신(大臣)이더라도 그 권세가 왕성해지면 반드시 꺼리다가 처형하였다. 신돈은 스스로 권세가 매우 극에 달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왕이 그를 꺼릴 것을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반역을 도모하게 되었다. 왕이 헌릉(憲陵)과 경릉(景陵) 2개의 능묘를 배알할 때 신돈은 그 일당을 나누어 파견하여 길가에 매복시킨 뒤 큰일을 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왕이 궁으로 돌아오자, 신돈은 그 일당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약속대로 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그 일당이 말하기를, “상(上)의 의식에 참여한 호위병이 매우 성대한 것을 보고 차마 범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신돈은 화를 내고 또한 욕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실로 겁쟁이에 나약하고 쓸모없는 자들이다.”라고 하였으며, 이로부터 밤낮으로 모여 공모하면서 다시 날을 잡아 일을 치르기로 하였다.
당시에 관직을 구하는 자들이 모두 신돈에게 붙자, 이인은 신돈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흉악한 모의를 갖추어 알고는 몰래 장부에 그들을 기록하였으며, 일이 임박하자 갖추어서 변란을 아뢰고 곧 미복(微服) 차림으로 도망갔다. 왕은 처음에 이인이 무고하여 꾸몄다고 의심하여 그를 믿지 않았으나, 신돈 일당을 체포해서 국문하자 모두 증명이 되었으므로 마침내 신돈을 수원(水原)에 유배 보내었다. 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익재(益齋)가 일찍이 신돈은 바른 사람이 아니므로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이라고 하였다. 선견지명을 따라갈 수가 없겠구나.”라고 하였다. 또한 근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이르러 시중드는 여종을 총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놀라게 하지 말고 그를 잘 보호하여라.”라고 하였다. 아들은 바로 모니노(牟尼奴)이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20년(1371) 7월 -반란을 도모한 신돈을 유배보내다-
왕은 성품이 의심이 많고 잔인하여 비록 심복이 되는 대신(大臣)이더라도 그 권세가 왕성해지면 반드시 꺼리다가 처형하였다. 신돈은 스스로 권세가 매우 극에 달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왕이 그를 꺼릴 것을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반역을 도모하게 되었다. 왕이 헌릉(憲陵)과 경릉(景陵) 2개의 능묘를 배알할 때 신돈은 그 일당을 나누어 파견하여 길가에 매복시킨 뒤 큰일을 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왕이 궁으로 돌아오자, 신돈은 그 일당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약속대로 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그 일당이 말하기를, “상(上)의 의식에 참여한 호위병이 매우 성대한 것을 보고 차마 범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신돈은 화를 내고 또한 욕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실로 겁쟁이에 나약하고 쓸모없는 자들이다.”라고 하였으며, 이로부터 밤낮으로 모여 공모하면서 다시 날을 잡아 일을 치르기로 하였다.
당시에 관직을 구하는 자들이 모두 신돈에게 붙자, 이인은 신돈의 문객(門客)이 되었다가 흉악한 모의를 갖추어 알고는 몰래 장부에 그들을 기록하였으며, 일이 임박하자 갖추어서 변란을 아뢰고 곧 미복(微服) 차림으로 도망갔다. 왕은 처음에 이인이 무고하여 꾸몄다고 의심하여 그를 믿지 않았으나, 신돈 일당을 체포해서 국문하자 모두 증명이 되었으므로 마침내 신돈을 수원(水原)에 유배 보내었다. 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익재(益齋)가 일찍이 신돈은 바른 사람이 아니므로 반드시 후환을 끼칠 것이라고 하였다. 선견지명을 따라갈 수가 없겠구나.”라고 하였다. 또한 근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이르러 시중드는 여종을 총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놀라게 하지 말고 그를 잘 보호하여라.”라고 하였다. 아들은 바로 모니노(牟尼奴)이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20년(1371) 7월 -반란을 도모한 신돈을 유배보내다-
결국 신돈은 공민왕에게 숙청당하기 전에 왕을 시해하여 선수를 치려다가 자신의 밑에서 문객으로 지내던 선부의랑 이인의 고발로 실각당했으며, 역모죄로 유배를 떠났다. 이후 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지 5년이 채 안된 1371년, 수원에서 처형당했다. 사실 일련의 사태에는 왕을 제거하려 했던 반역 행위도 심각했지만 축재와 부정부패도 문제가 많았다는 견해가 다수다.
신돈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의 지도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흠결과 약점을 너무나 많이 노출했다. 무엇보다 왕의 총애로 권력을 얻게 된 이상 자신의 입지가 좁다는 것을 인지하고 왕의 의중을 파악하며 안심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명백한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신돈도 이를 처음부터 경계했는지 첫 만남 때
"대왕께서는 참언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여 절대로 죄 주지 않겠다는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리라."
라는 맹세문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할 때 신돈이 스스로 맹세를 어겼다고 직접 그에게 언급했다.처음에 왕이 신돈·이춘부(李春富) 등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박에게 맹서(盟書)를 주면서 신돈에게 보여주어 죄를 헤아리게 하며 말하기를,
"네가 전에, 부녀자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그 기운을 이끌어다 기를 기르는 것일 뿐,[26] 절대 사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자식까지 낳았다고 하니 이런 것이 맹세문에 있었더냐? 도성 안에 저택을 일곱 채나 지었으니 이런 것도 맹세문에 적었던가? 이러한 작태가 몇 건에 이르니 죄상을 다 따진 뒤에 이 맹세문은 불에 태워 버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고려사》 <반역 열전> -신돈-
"네가 전에, 부녀자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그 기운을 이끌어다 기를 기르는 것일 뿐,[26] 절대 사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자식까지 낳았다고 하니 이런 것이 맹세문에 있었더냐? 도성 안에 저택을 일곱 채나 지었으니 이런 것도 맹세문에 적었던가? 이러한 작태가 몇 건에 이르니 죄상을 다 따진 뒤에 이 맹세문은 불에 태워 버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고려사》 <반역 열전> -신돈-
《고려사》의 기록을 따르자면 공민왕은 신돈의 부녀자 간통과 축재에 큰 배신감을 느낀 듯하며, 이로 인해 숙청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돈이 처형되고 나서 공민왕도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측근들인 자제위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다. 신돈의 좌절된 개혁은 사실상 고려 왕조 최후의 개혁 시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민왕이 시해당한 이후 정권을 잡은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일파는 즉시 신돈 일당의 죄를 사면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구악을 능가하는 신악으로 전락하며 가뜩이나 망조가 짙던 고려를 더욱 심연의 구렁텅이로 빠뜨려버렸다. 다만 신돈이 성균관에서 지원한 신진사대부 중 급진파 일원들은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기가 아끼는 여종이었던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쳤고 반야에게서 '모니노'[27]가 태어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는 의미로 '신우'와 '신창'이라고 부르며 《고려사》 <반역 열전>에 넣었다.[28] 우왕은 조선 건국의 정당화를 위하여 계속 매도될 수밖에 없었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조선 500년 내내 '신우'라고 불렀다. 조선이 망해 우왕과 창왕이 왕씨냐 신씨냐 논의가 자유로워진 현대에는 혈통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29] 이성계 일파의 모함으로 여겨지고 있다.
3. 기타
- 일제강점기까지도 신돈은 제정 러시아의 그리고리 라스푸틴마냥 정력의 상징쯤으로 취급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이다. 작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관계한 여인의 수효에 대하여..(중략)..스무 서너 살에 벌써 200명은 넘으리라는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서른 살 때는 벌써 괴승 신돈이를 멀리 눈 아래로 굽어 보았을 것입니다."
- 공민왕이 내린 작위는 '진평후'(眞平侯)인데 작호가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과 똑같다. 이후 다시 내린 봉호는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으로 봉지 '취성'(鷲城)은 현 대한민국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이다.
- 전래에 따르면 봉황은 왕을 상징하는 영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신돈은 봉황이 오동도의 무성한 오동나무 숲에서 무리지어 살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새로운 임금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섬 안의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버려 당시까지 전해오던 '오동도의 명성'을 지워버렸다. 신돈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전라도 출신의 전주 이씨인 이성계에 의해 망하고 말았으니 결국엔 오동나무가 없는 오동도가 된지 오래되었다.
4. 대중매체
- 1983년 KBS 드라마 <개국>에서는 배우 백찬기[30]가 연기했다. 백찬기 배우의 저음의 나직한 목소리 속에서 왠지 신비스럽고... 다소 괴기한 분위기의 신돈상이 연출되었다. 1회에서부터 등장하며 개국 드라마 속에서 계속 머리를 기른 상태이다. 어떤 역사 학습 만화에서는 신돈이 말 그대로 머리를 깎은 스님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지만, 고려사 신돈 열전에는 신돈을 싫어하고 꺼렸던 이승경, 정세운 사망 이후 머리를 길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돈이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부모와 헤어진 한 소녀를 구해 돌보게 되고 그 소녀가 성장하여 반야인 것으로 연출되었다. 신돈은 노국대장공주를 환생시킨다고 공민왕에게 이야기하고 반야와 합방하도록 한다.
신돈에 대한 사건들은 고려사 열전에 있는 기록에 의거하여 묘사되었고 신돈이 여색을 밝히는 면도 소개되었다. 그리고 신돈은 최영을 죽이려고 했지만, 공민왕의 강력한 반대로 계림윤 좌천에 그쳤다. 역사대로 사심관 임명 문제로 공민왕과 틈이 벌어지고...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 유배된 후에 처형된다. 후일 이방원의 표현에 의하면 고려 조정은 '신돈의 망령이 떠도는 터전' 으로 묘사된다.
- 맹꽁이 서당에선 부정적인 요소는 어디로 가고, 그저 공민왕이 간신들과 기득권 세력의 끈질긴 모함과 중상모략을 이겨내지 못해 의심하다가 역모죄로 처형당한 것으로 나온다. 더군다나 그저 이용만 당하다 버려진 비운의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나레이션이 나오는 등 신돈이 아무리 공이 있다고 해도 권력의 맛을 보게 되자 타락해버렸다고 묘사한 Why? 한국사 편과 너무도 대조된다.
- 2005년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배우 손창민이 연기했다. 신돈 짤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 개국 드라마에서처럼 시종 머리를 기른 상태이다. 심지어 도중에는 수염까지 기른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몰락이 다가온 시기, 마지막으로 공민왕을 알현하기 위해 나서기 직전 깨끗하게 면도를 한 모습으로 궁궐로 향한다. MBC 신돈 드라마에서는 신돈은 역모를 꾸미지 않았고, 신돈과 동지이자 부하인 원현이 자기 멋대로 공민왕을 시해하려 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신돈은 궁궐에서 칼에 찔러 살해된 후, 원현에 의해 그 시신이 집으로 옮겨진다. 이후 신돈의 반대파들은 신돈의 시신마져도 저자에 내다 걸기 위해 신돈의 집으로 쳐들어오지만 원현은 신돈의 시신을 다비(화장)한다.
신돈이 공민왕을 만나기 전 구해주었던 한 여인의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커서 반야로 등장한다. 노국대장공주 역을 맡은 서지혜 배우가 노국공주, 반야 1인 2역을 연기했다. 공민왕은 신돈의 집에서, 죽은 노국공주와 너무도 닯은 반야와 만나 사랑을 나누고 반야는 아들 우를 낳는다. 하지만 공민왕은 반야를 외면하고, 신돈 사후 반야를 물에 빠뜨려 죽이게 명한다(실제 역사에서는 우왕 초기 이인임 등에 의해 반야가 수장된 것으로 기록된다)
마지막 회에서 대궐 정전 앞에서 공민왕은 어린 아들 우의 손을 잡고 고려의 역사에 대해 자상하게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공민왕과 가까운 사이였던 조일신, 김용, 정세운, 노국대장공주, 신돈 등이 나타나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는 연출이 이어지고..... 역사대로 공민왕 시해로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1] '취성(鷲城)'은 본관인 경상도 영산(현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등 남부)의 별호이다.[2] 본래 불교적 맥락에서는 '변조'라고 음독해야 한다. 비로자나불의 이칭인 '변조금강'이 어원이다.[3] 초당공파 11세.[4] 《고려사》에는 '신돈'이라는 이름이 호와 함께 공민왕이 내려 줬다고 한다. 하지만 일설엔 신돈이 본명이라고도 한다.[5] 공민왕이 내려준 호.[6] 현재 우왕은 개성 왕씨라는 것이 주류 의견이다.[7] 신예가 신돈의 아버지라는 설을 채택할 경우, 신예의 동년배 친구라는 강군보가 그의 생부임이 유력하다. 또한 숙모인 강씨와도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8] 현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일대[9] 아버지로 보는 의견은 신돈이 받은 공신호인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이 본래 신예의 것이었다는 점에 기인하며, 형으로 보는 의견은 신예의 동생 신순의 딸이 지익겸의 처가 되었는데, 신돈의 이부동생 강을성의 처가 지익겸의 아버지 지윤의 첩이 되었다는 점에 근거한다.[10] 현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일대[11] 신돈을 처음 소개한 김원명은 이후 신돈의 뒤통수를 치려다 발각되어 숙청당했다.[12] '돈'(旽)이라는 이름은 환속할 때 공민왕이 준 이름이지만(출처 《고려사》 <신돈 열전>) 원래 출가하기 전의 속명이라는 설도 있다.[13] 유교국가였던 후대의 조선에서는 승려였다가 환속한 사람이 고기를 먹는 게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고려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승려이든 불교 평신도이든 유학자이든 간에 채식주의자가 많았다.[14] 티베트 불교는 육식을 허용한다. 단, '육식진언'이라 하여 '옴 아비라 케짜라 훔' 혹은 '옴 아비라 훔 케짜라 뭄 스와하'라는 진언을 7번 읊은 뒤 고기에 숨결을 1번 불고 먹는다. 이렇게 하면 육식의 허물이 없어지고 그 축생은 좋은 곳에 천도된다고 하며 신돈 역시 동물 천도를 명목으로 이런 방식으로 육식을 즐겨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밀교 수행을 위해서 일부러 이랬을 수도 있는데, 5육(소고기, 개고기, 코끼리 고기, 말고기, 인육)과 5감로(침, 소변, 대변, 피, 정액)를 섭취하는 과격한 수행법이 밀교에 존재한다.[15] 현대로 치면 총리급, 최소 부총리급의 품계로 문하시중이나 상장군 중에서도 공이 큰 사람들이 받은 품계다. 최충헌, 안향, 정몽주, 심덕부, 구존유(능성 구씨의 시조), 이천(서림 이씨), 홍자번 등이 받았다. 벼슬의 명칭 변동에 대해서는 산계 참고.[16] 이상 직위는 공민왕이 내려준 것이다.[17]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나서 자칭한 직위.[18] 관직 중 최고의 관직으로 본래 공석으로 남겨놓는 명예직이다. '영+도첨의사사+사', 즉 도첨의사사의 영사이자 최고 수장이라는 의미이다. 줄여서 영도첨의라고도 부른다.[19] 다만 신돈이 영도첨의사사사가 되었을 시기에는 기관의 이름이 도첨의'사사'가 아닌 도첨의'부'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기에 왜 영도첨의'부사'가 아닌 영도첨의'사사사'로 기록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고려사에 제대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도첨의부에서 문하부로 넘어가는 시기에 잠시 도첨의사사라는 이름으로 관제 개편을 겪었으며 딱 그 시기에 신돈이 도첨의사사의 수장에 임명되어 영도첨의'부사'가 아닌 영도첨의'사사사'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0] 당시 고려는 표면적으로 원 간섭기에서 벗어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제대로 된 관제를 확립하지 못했고 문종 시기의 천자국 관제로 복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향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제일 하위의 관제인 '사사', 중간 관제인 '부', 제일 상위의 관제이자 천자국 관제인 '성'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개편을 반복했고, 관직명 또한 밥 먹듯이 바뀌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당장 이성계만 하더라도 공민왕 말기에 '지문하성사' 관직을 제수받았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문하성은 엄연히 천자국의 관제이기에 고려사에 당시 기관명이 '문하부'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배치된다. 만약 고려사 기록대로 문하성이 아닌 문하부였다면 이성계도 지문하성사가 아닌 '지문하부사'로 기록되었어야 하는 것이 맞다. 결국 이는 고려사 편찬자들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할만큼의 숱한 관제 개편이 고려 말기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21] 국방부장관 격.[22] 불교 국가인 고려를 포함한 종교계 모든 일을 관장하는 자리.[23] 점이나 제사같은 것을 주관하고 날씨 등에 따라 농업 등을 관리하는 자리. 오늘날의 기상청장과는 달리 왕실의 제사까지 관여하는 일종의 사제 역할을 겸한다.[24] 한국사에 등장하는 엄청 긴 이름으로는 견훤이 즉위 전에 사용한 도독명과 최충헌의 관직명(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 고종 황제 존호(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 등이 있다.[25] 결국 신돈은 아예 공민왕 앞에서 최영을 트집 잡아 귀양보내고 만다. 물론 신돈의 사사 이후 최영은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26] 탄트라 밀교(특히 좌도밀교)의 수행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 기록을 참고했는지 신돈(드라마)에서도 신돈이 티베트로 가서 수행하는 장면이나 금강령을 흔드는 장면 등을 넣기도 했다.[27] 훗날의 우왕[28] 이런 점에서 중국의 여불위와 비교되기도 했다.[29] 신돈, 우왕, 창왕은 반역자로 취급받아 무덤도 남아 있지 않다. 무덤이라도 있다면 유골을 통해서 유전자 감식이라도 해볼 수 있다.[30] 정준하로 오해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