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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공민왕의 제4비 정비 안씨 | 定妃 安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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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50년대 추정 | ||
고려 양광도 광주목 죽주 (現 경기도 안성시) | |||
사망 | 1428년 6월 26일[1] (향년 미상) | ||
조선 의화궁주 사저 (現 위치 미상)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고려 정비 | ||
1367년 1월 7일 ~ 1389년 | |||
고려 왕대비 | |||
1389년 ~ 1392년 8월 25일 | |||
조선 의화궁주 | |||
1392년 8월 25일 ~ 1428년 6월 2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 죽산 안씨 | |
부모 | 부친 - 죽성군 안극인 (竹城君 安克人, ? ~ ?) 모친 - 가리 이씨(嘉利 李氏) | ||
배우자 | 공민왕 | ||
종교 | 불교 | ||
관저 | 연덕궁(延德宮), 경신전(敬愼殿) | ||
봉작 | 정비(定妃) → 의화궁주(義和宮主) | ||
존호 |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 (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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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31대 왕 공민왕의 제4비.[2] 그리고 고려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왕비다.보통 정비 아니면 왕대비 안씨(王大妃 安氏)로 불린다. 존호는 공양왕 때 받은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3] 약칭으로 왕대비 안씨.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이라면 잠깐으로라도 꼭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대부분 조선 건국 이후로는 왕실과 거리가 먼 삶을 살면서 조정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이방원보다 6년이나 더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 생애
2.1. 공민왕 시기
문정공 죽성군 안극인(竹城君 安克人)의 딸로 태어나서 1366년에 공민왕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비극적인 일생의 시작이었다.당시에 동지밀직(同知密直)이었던 아버지 안극인이 노국대장공주의 영전 공사의 중지를 공민왕에게 건의한 일로 인해 아버지 안극인은 파직되고 정비 안씨는 궁에서 쫓겨나게 되나 얼마 뒤 다시 입궁하게 된다.
재입궁 뒤에 공민왕은 정비 안씨에게 강제로 자제위의 청년들과 성관계를 맺기를 강요하는 등의 비행을 일삼았으나 그녀는 머리를 풀고 목을 매려고 하자 공민왕이 물러났다고 한다.
2.2. 우왕 ~ 고려 멸망 시기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된 후, 살아있는 공민왕의 비 중에서 정비에 관한 것이 가장 자세하게 기록이 남아 있다. 2비인 혜비와 5비인 신비는 비구니가 되었기에 기록이 적고, 3비인 익비는 어째서인지 혜비보다도 기록이 없다. 익비와 신비는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단, 익비의 경우 공민왕의 강요로 홍륜과 동침하여 딸을 하나 낳았는데, 우왕 때 공민왕을 시해한 홍륜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므로 역적의 아이라며 이유로 그 딸이 사형에 처해졌다는 기록과, 공양왕 때 익비가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딸인 경화궁주를 익비의 친정에서 양육했기 때문에 토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비 안씨에 대한 기록 중 좋은 일은 별로 없다. 우왕이 즉위하자, 우왕은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 하며 늘 희롱하였다고 한다.
우왕이 어느 날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는데 정비가 조카, 정확히는 남동생인 판서 안숙로(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로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의지할 사람이 없는 천애고아였던 우왕이 의붓어머니인 정비 안씨에게 모성애를 갈구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우왕을 강화도로 유배시키자 정비는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우왕을 폐위하는 교서와 조민수와 이색의 주청을 받아들여 창왕을 즉위시키는 교서를 선포했다. 하지만 창왕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389년에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킬 것을 강요하자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키는 내용의 교서를 다시금 선포한다.
이후 정식으로 왕대비가 되어 존호도 받았지만, 1392년 배극렴 등 이성계의 일파가 공양왕의 폐위와 새 왕조의 창업을 윤허하는 교서를 강요하며 정비 안씨를 협박하자 모든 실권을 상실한 그녀는 할 수 없이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즉위 교서를 선포하고 어보를 이성계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됐다.
그런데 고려사 열전에는 익비 한씨가 창왕과 공양왕의 옹립교서를 내렸고 정비는 이성계에 대한 옹립교서만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고려사 세가에서 정비가 창왕, 공양왕, 이성계에 대한 옹립교서를 모두 내렸다는 기록과 대치되는 부분인데, 고려사 같은 기전체 역사서에서는 세가가 중심이고 열전은 일종의 부록 같은 것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세가의 기록을 인정하는 편.
2.3. 조선 건국 이후
그녀는 조선 개국 이후, 의화궁주(義和宮主)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대우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안씨의 어머니가 태조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안씨의 집에 직접 행차하여 연회를 즐겼으며 태종은 안씨에게 술을 하사하고 세종은 박포의 집을 안씨에게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왕실의 보살핌을 받았다.특히 그녀는 강등 이후 술을 가까이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태종실록에도 그녀의 음주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4] 고려 멸망 이후에 슬픔과 죄책감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여생을 술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조선 건국 후 36년 뒤인 1428년 6월 26일(세종 10년 5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5] 태조가 죽은 지 20년, 태종이 죽은지 6년이 지난 뒤다. 죽기 직전에는 박포의 집을 내려주었으며, 세종은 부의로 쌀과 콩 각각 100석을 보냈다.
참고로 친정의 종손(소위 조카손자)가 정의공주의 남편 안맹담이다. 즉 안맹담에게 그녀는 대고모(고모할머니)가 된다.[6]
6일 후에 예조는 “옛 제도를 상고하여 보니, 위나라 명제(明帝) 대에 한나라 헌제의 황후 조씨가 훙(薨)하니 장사에 사용한 수레와 옷과 예의 의식을 다 한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였으며, 당나라의 태종(太宗) 때에 수나라 양제의 후 소씨(蕭氏)가 돌아가니 조서를 내려 황후의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의화궁주의 장사는 청컨대 옛 제도에 따라 왕비의 예를 쓰고, 그의 거복(車服)과 예의는 전조의 제도에 좇게 하소서”라고 보고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고려 왕비로서 장사된 것이다. 다만 어디에 묻혀있는지는 기록에 없다.
3. 평가
왕비가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폐출되는가 하면 다시 궁궐에 돌아와서는 강간 미수에 아들뻘인 우왕에게 희롱을 당하고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으며, 왕의 폐위 교서를 3번이나 내리고 결국 자신이 속했던 고려 왕실의 문을 닫는 역할까지 하면서 술로 여생을 보내면서 거진 폐인처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종 대까지 생존하면서 평균 수명이 짧았던 그 시대 인물 치고는 팔순 안팎까지 장수한 여인. 하지만 여말선초에 이성계나 정도전, 정몽주 등을 필두로 워낙에 포스 있는 인물들이 많은지라 주목받지는 못하는 편.4. 여담
우스개로 최후의 승리자 소리가 나온다. 강압에 의해 그런 것이지만 어쨌든 자기 손으로 임금을 3명이나 날렸고 시댁인 왕씨 왕실까지 날린 셈이 되었다. 자신을 겁박해 폐위를 종용하러 왔던 사람들이 모조리 죽고 난 뒤까지 혼자 살아남았다. 당연히 조선 초기의 (이방원이 주도한) 온갖 골육상잔도 다 본 셈이다. 조선에서 살면서 또 태조, 정종, 태종 임금 3명이 죽는 것을 지켜보며 세종 때까지 살아남으니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놓고보면 우스개로 숨어있는 최후의 승자라 할 만 하다. 공민왕부터 세종까지 8명의 임금을 보았다. 어찌보면 당대(여말선초)의 굵직한 일들을 다 체감한 역사의 산증인격 인물.조선왕조실록에도 그녀에게 술을 내려준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상에는 그녀에게 보낸 술을 단순한 술이 아닌 '약주'라고 적고 있는데, 실제론 인식처럼 술독에 빠져 산 것이 아니라 술을 적당히 복용해서 건강을 유지했었을 가능성도 있다.[7] 조선 왕조는 그래도 그녀의 장례를 왕비의 예로 치러 주었다.
5. 대중 매체에서
- 개국에서는 유가영이 연기했다.
- 용의 눈물에서는 실제 역사에서의 연령대와는 다르게 당시 78세였던 원로 배우인 한은진[9]이 이 역을 맡았다.[10] 실제 정비 안씨는 1366년에 왕비가 되었으므로 당시 관습대로 15세 전후, 조금 더 높게 잡아서 20대 초반에 공민왕에게 시집왔다고 해도[11], 용의 눈물 도입부인 우왕~공양왕 시점의 나이는 40대였을 것이다.[12] 게다가 실제 정비 안씨는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도 무려 36년이나 더 살았는데 80이 가까운 노인이었을 리가 없다. 유약한 것으로 묘사되는 우왕이나 창왕을 대신하여 왕실을 지키려고 애쓰나 결국 역사는 역사인지라 이성계에게 옥새를 사실상 빼앗기고 말았으며, 9화에서 고려가 망하고 궁을 떠나기 직전 신덕왕후와 마주치는 모습으로 퇴장한다. 이 때 '새로 오신 중전이시구랴. 도둑질해서 들어앉은 지존의 자리는 어떠하신가?' 라고 비꼬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했으니 자기 눈에도 가시가 박힐 거라는 저주를 퍼붓는데, '저~주가 있을지어다! 저~주가!' 라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 인상적. 그리고 실제로 세종대까지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퍼부은 저주가 실현되는 것까지 다 보았을 것이다.
- 정도전에서는 김민주가 맡았으며, 자세한 사항은 정비 안씨(정도전) 참고. 여기선 앞서 말한 나이 고증을 비교적 잘 맞춘 편이다.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김지현이 연기했다.
- 태종 이방원에서는 중견배우 김보미가 맡았다. 여기서는 나이 고증이 잘못됐다고 볼수 있는데 1388년 위화도 회군 시 그녀의 나이는 많아야 40대 초반이었다. 실제 역사에 비해 과하게 나이든 배우를 캐스팅한 고증 오류로 볼수 있다. 허나 김보미씨가 나이에 비해 동안이라....
[1] 음력 세종 10년 5월 14일[2] 고려 시대에는 조선 시대와는 달리 국왕이 여러 왕비를 두었다. 고려 중기부터 후궁에게 현비, 숙비 등의 칭호가 붙었다. 공민왕의 경우 노국대장공주 이외의 비들은 후궁으로 들인 것에 가까웠지만 당시 정실 부인과 후궁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아서 정비는 계속 왕실의 어른으로 남았다.[3] 간혹 정숙왕대비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워낙 이런 경우가 적어서 일반적인 호칭으로 쓰인 명칭인지 불명.[4] 이명덕(李明德)에게 하교하기를, “의화궁주(義和宮主)가 늙고 병이 있어서 약주(藥酒)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묵은 술을 쓰지 말고 새 술을 바치도록 하라.”하였다. 궁주(宮主)는 전조(前朝) 현릉(玄陵)의 정비(定妃) 안씨(安氏)였다. -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36권 18년 8월 6일 7번째 기사. 날마다 술 1병씩을 의화궁주(義和宮主) 안씨(安氏)에게 내려 주었으니, 곧 전조(前朝)의 공민왕의 정비(定妃)다. -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29권 15년 5월 25일 4번째 기사.[5] 공민왕의 비로 간택되었을 때의 연령을 15~20세 정도로 추정하면 사망 당시의 나이는 77~82세이다.[6] 정비 안씨의 남동생인 안숙로의 손자가 안맹담이다. 안숙로-안망지-안맹담[7] 날마다 약주 한 병씩 보냈다는데 매일 한 병씩 마셨다면 말술까지는 아니더라도 적게 마신 편은 아니다. 약주라니 알콜 도수가 낮았다면 이해가 가는 정도의 양. 이를 볼 때 비탄에 빠져 산 거랑 별개로 건강 관리는 나름 잘 한 걸로 보인다(…)[8] 여인천하의 엄 상궁으로 유명하며 용의 눈물에서 이성계의 첫 정실부인인 신의왕후를 연기했다.[9] (생몰연도: 1918 ~ 2003) 일제강점기인 1937년부터 연기 활동을 시작한 원로 중의 원로이다.[10] 13년 전 사극인 추동궁 마마의 같은 배역인 한영숙보다 33세나 많다.[11] 다만 당대 관습상 20대였을 가능성은 낮다. 당시에 20세를 넘긴 사람은 혼례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노처녀였다.[12] 본작에서 고려 왕조는 전반적으로 유약하고 노쇠한 모습으로 단순화되어 묘사된다. 구 시대의 노쇠한 왕조의 높은 어르신이라는 이미지를 위해서 원로배우를 캐스팅 하였을 수도 있다.[13] 전 프로게이머 서지수의 여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