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후궁 [[틀:고려의 후궁/의종 ~ 공양왕|{{{#!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3F6864;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5AA58, #B6D592 20%, #B6D592 80%, #85AA58); color: #3F6864;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 |
<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고려 충렬왕의 궁인 궁인 시무비 | 宮人 柴無比 궁인 시씨 | 宮人 柴氏 | |
출생 | 미상 |
사망 | 1297년 8월 16일 (향년 미상) |
성씨 | 태인 시씨 |
휘 | 무비(無比) |
별호 | 백야단(伯也丹) |
부모 | 미상 |
부군 | 충렬왕 |
자녀 | 없음 |
직위 | 궁인(宮人) |
작호 | 미상 |
[clearfix]
1. 개요
고려 제25대 국왕 충렬왕의 궁인.2. 생애
궁인 무비는 태산군사람인 시씨의 딸로, 간택되어 입궁한 뒤 충렬왕이 도라산에 행차할 때 그녀를 반드시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이 궁녀 주변에 붙는 이들이 많아졌다. 당시 세자, 즉 나중의 충선왕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부왕 충렬왕에게 모후 제국대장공주의 병이 이 여자에게 있다고 아버지 충렬왕에게 따지며 국문하자고 했으나 아버지는 장례가 끝난 뒤에 하자며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충렬왕의 총애가 커지면서 무비의 주변에 붙은 사람들은 도처에서 포악한 행위를 일삼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자 원은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충렬왕 23년(1297년) 음력 6월 상을 치르기 위해 원나라에서 고려로 귀국하여, 제국대장공주의 병사가 후궁의 투기 때문이라며 이를 조사할 것을 건의하였다.
충렬왕은 상중이기 때문에 기다릴 것을 명하였으나, 세자 원은 측근에게 명하여 무비와 그 일당인 환관 최세연, 도성기, 전숙, 방종저, 중랑장 김근, 궁인 백야진 등을 체포하여, 무비가 무당을 시켜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한 일을 문초하였다. 결국 저주에 가담한 무녀와 승려가 자백을 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다. 충렬왕 23년(1297년) 음력 7월, 무비와 최세연, 도성기, 전숙, 방종저, 김근, 백야진은 참수되었고 일당 40명이 유배되었다.
세자 원은 무비를 죽인 뒤 충렬왕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진사 최문(崔文)에게 시집갔다가 과부가 된 김양감의 딸을 왕에게 바쳤다.[1]
충렬왕 23년(1297년) 음력 10월, 세자는 원나라로 돌아갔는데, 충렬왕은 결국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도록 허락할 것을 원나라에 요청하였다. 마침내 세자는 이듬해 정월에 귀국하여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충선왕이다.
3. 가족관계
- 배우자 / 남편
- 남편 : 충렬왕 왕거(王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