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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고려 충렬왕의 후궁 반주 | 盤珠 | |
생몰년 | 미상 |
본관 | 미상 |
휘 | 반주(盤珠) |
부모 | 미상 |
부군 | 충렬왕 |
자녀 | 슬하 1남 강양군 소군 왕서(江陽君 小君 王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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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25대 국왕 충렬왕의 후궁.2. 생애
반주는 충렬왕의 첫 여자로 과거 충렬왕이 왕태손이 되었을 때 김준이 최의의 시비인 그녀를 바쳤는데, 반주가 총애를 받아 서장자인 왕서(王湑)를 낳았다. 이는 당시 제1비였었던 정화궁주가 입궁하기 전에 일이며 증조부 고종과 조부 원종이 모두 생존해 있을 때 태어났다.훗날 충렬왕이 즉위한 후 충렬왕의 제1왕후인 제국대장공주도 그를 특별히 아껴 궁중에 출입하게 하고 그를 왕소군(王小君)이라 불렀다.
그는 나중에 중랑장에 임명되었는데 왕을 이어 숙위하고자 하여 강수형에게 뇌물을 주고 청탁하였다. 강수형이 승상 안톤[安童]의 말이라며 사칭하며 고하기를, “왕서에게 툴루게[禿魯花]를 인솔하고 대원에 입조하라.”라고 하였다.
이 사건 이후 충렬왕 2년(1276) 왕이 왕서가 교만방자하다고 여겨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게 하였다.
반주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며 그녀가 최의의 시비라는 태생적 출신 탓에 왕자를 낳았음에도 후비의 책봉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