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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4 23:33:15

현비 안씨


고려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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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태조 ~ 예종 · 의종 ~ 공양왕
왕자 : 국조 ~ 숙종 · 예종 ~ 공양왕
왕녀 : 태조 ~ 인종 · 의종 ~ 공양왕
※ 봉작을 받았거나 이름이 알려진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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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고려 우왕의 제9비
현비 안씨 | 賢妃 安氏
출생 미상
고려 양광도 죽주 안숙로의 사저
(現 경기도 안성시)
사망 1389년 이후 (향년 미상)
고려 개경 사저 추정
(現 경기도 개성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고려 현비
1388년 2월 ~ 1388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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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6D592><colcolor=#3F6864> 본관 죽주 안씨
부모 부친 - 지밀직사사 안숙로
(知密直司事 安叔老, ? ~ 1394)
모친 - 정부인 창원 황씨
(貞夫人 昌原 黃氏, ? ~ ?)
형제 형제 - 안망지(安望之)
형제 - 안경지(安敬之)
친인척 고모 - 정비 안씨
배우자 우왕
자녀 없음
관저 미상
작호 현비(賢妃)
}}}}}}}}} ||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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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32대 국왕 우왕의 제9비.

2. 생애

고려 말 우왕의 총애를 받은 구비삼옹주 중 한명이다. 지밀직사사를 지낸 안숙로의 딸이자 공민왕 제4비 정비 안씨의 조카이다. 본관은 죽주이다.

우왕이 즉위한 후 이미 여러 왕비들을 거느리고 있음에도 불순한 목적으로 왕대비의 처소에 자주 드나들이를 하였는데 이때 《고려사》기록에서는 나이가 젊고 아름다우며 농염하였으므로, 우왕이 매번 희롱하며 말하기를,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을 것인가?”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우왕은 매일 왕대비의 처소에 들렀는데 때로는 하루에 두 세 번 가기도 하고 때로는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갔는데도 들어가지 못하니 자못 바깥에 나쁜 소리가 있었다고 한다.[1]

우왕이 늘 가던데로 왕대비의 처소에 갔으나 왕대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못하였으므로 만나지 않았다. 대신에 왕대비가 동생인 판서 안숙로(判書 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로 삼으니 그녀가 바로 현비 안씨(賢妃 安氏)이다.

그러나 세간에서 사람들이 수군대기를 왕대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가리고자 한다.”라고 하니 당시 왕실의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졌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왕대비의 조카 안씨가 1388년(우왕 14년) 음력 2월, 왕비의 책봉을 받았으며 화순옹주명순옹주도 같이 책봉을 받았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왕비에 책봉된지 채 반년도 안 되어 1388년(우왕 14년) 음력 6월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즉위하면서 창왕의 모후인 근비 이씨와 함께 폐출과 출궁을 당하지 않고 남아 계속 궁궐에서 살았는데 이는 왕대비의 비호였다고 한다.[2][3]

이후 현비의 생애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으며 우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그 이후를 추정해보면 남은 여생을 고모인 왕대비와 같이 의지하며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4]

한편 우왕은 신돈의 자식으로 취급되어 의 〈세가〉에 오르지 못하고〈열전〉반역 편에 수록되었고, 우왕의 왕비들은[구비삼옹주] 아예 수록되지 않았다.

3. 가족관계


[1] 세간에서 왕대비 사이에 좋지않은 소문이 돌았다고 나와있는 기록이다.[2] 나머지 우왕의 후비들은 모두 폐출 후 사가로 쫓겨났다.[3] 영비 최씨명순옹주는 우왕을 따라나섰다.[4] 본디 고려는 후사를 잇지 못한 선왕의 왕비들은 출궁하여 궁원을 받아 살았고 왕비들끼리 모여 같이 산 전례도 있다.[구비삼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