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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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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예종의 제2왕후
순덕왕후 | 順德王后
고려 인종의 모후
문경왕태후 | 文敬王太后
출생 음력 1094년[1] 3월 28일
이자겸의 사저
사망 음력 1118년 9월 5일 (향년 24세)
고려 개경 개성부 연덕궁
(現 경기도 개성시)
능묘 수릉(綏陵)
재위기간 고려 제2왕후 - 연덕궁주
1114년 12월 1일 ~ 1118년 9월 5일 (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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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인주 이씨[2]
부모 부친 한양공 이자겸
(漢陽公 李資謙, ~ 1126)
모친 변한국대부인 해주 최씨[3]
(卞韓國大夫人 海州 崔氏)
형제자매
7남 4녀 중 차녀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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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의(李公儀)
이지언(李之彦)
이지보(李之甫)
이지윤(李之允)
이지원(李之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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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창원주[7]
배우자 예종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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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인종(仁宗, 1109 ~ 1146)
장녀 - 승덕공주(承德公主)
차녀 - 흥경공주(興慶公主, ? ~ 1176)
작호 연덕궁주(延德宮主)
관저 연덕궁(延德宮)
시호 순덕왕후(順德王后)
→ 자정문경왕태후(慈靖文敬王太后)
}}}}}}}}} ||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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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종의 제2비.

인종 공효대왕의 어머니. 시호는 예종 文효대왕과 文 자 돌림이다.

2. 생애

예종은 경화왕후 사망 이후 같은 인천 이씨 가문의 순덕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첫 시호는 '순덕왕후'이며, 아들인 인종이 즉위 이후, 예종의 시호인 '문효대왕'의 시호를 따라 '문경왕태후'로 시호를 고쳤다. 인종의 모후이기도 해 '태'(太)를 더한 것이다.

야사에 의하면 인천 이씨 집안 여자들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순덕왕후도 그러했다고 한다. 《고려사》 종실열전 기록에 의하면 순덕왕후는 성격이 매우 넓고 부드러웠으며 굉장히 똑똑했다고 한다. 증조부 이자연도 매우 박학한 당대의 중신이었고, 친부 이자겸도 영악하여 많은 정적을 이기고 조정을 장악했다. 부녀가 모두 명철했던 셈이다. 하나 더하자면 송나라 사절로 온 서긍(徐兢)이 쓴 고려 견문록인 고려도경에서 이자겸에 대해 이르기를 풍채가 맑고 온화했다 하니 순덕왕후가 아버지 외모를 물려받았다면 인상도 좋고 참한 미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서긍은 왕후의 아들인 인종도 외모나 풍기는 기운 등에 대해서 어머니나 외할아버지와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순덕왕후와 예종의 결혼은 이자겸의 권위를 크게 높혔다. 하지만 예종은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자겸은 권세를 떨치지 못하고 가만히 숙이고 있어야 했다.

순덕왕후는 1108년에 혼인 후 입궁하여 연덕궁을 하사받아 1109년에 연덕궁주에 봉해졌다. 하지만 순덕왕후는 연덕궁이 아닌 자신의 친정 집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인종이다. 예종은 조서를 내려 축하했고, 연덕궁주도 표문을 올려 감사했다. 이후 1114년 12월 1일에 예종의 왕비로 봉해져 정식 왕후가 된다. 1115년 3월 28일에는 연덕궁주(延德宮主)의 생일이라 내전(內殿)에서 곡연(曲宴)을 베풀었다.

아들 인종이 7살일 때 훙서(薨逝)하였으며 예종은 그녀에게 "순덕왕후"라는 시호를 추숭하였다. 순덕왕후가 죽자 예종은 크게 슬퍼하였고, 신하들과 간관들이 나서서 안된다고 말렸는데도 신봉문(神鳳門)[8]까지 나가서 손수 조제를 올리고 영구 행렬을 보냈다.

심지어 예종이 혼당(魂堂)으로 가 절을 하자 간관(諫官)들이 강력히 만류하였다. 이에 예종은 "조제(祖祭)의 예식은 송나라 임금도 한 적 있다. 나는 그 일을 본받은 것 뿐이다! 그리고 혼당 한번 간다고 무슨 큰일이 나는가?" 하고는 기어코 하고 싶은대로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도 왕권 강화의 한 상징으로 본다. 다만 이렇게 왕권은 강화해 놓고 후대가 약하면 외척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는데, 후계 왕조인 조선 시대 정조와도 이미지가 유사하다. 정조도 예종처럼 강력한 군주여서 본인 대에는 괜찮았지만 아들인 순조 때부터는 외척으로 인해 나라가 엉망이 된다. 이 둘은 이것말고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본인의 후계자가 너무 어릴 때 사망해 왕권을 제대로 이양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순덕왕후가 죽고 2년 뒤, 예종은 원찰을 옮기니 안화사로 옮기는 이후 안화사는 순덕왕후의 원찰이 된다. 아들 인종이 등극하자 남편과 文 자 돌림인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 시호를 추존하였고 후 자정(慈靖)의 시호를 추가로 올렸다.
(중략) 이 당(堂)에 오르니 이자겸과 그 처가 손뼉을 치고 땅을 두드리면서 대성통곡하며 말하기를, “황후께서 입궁하면서부터 태자를 낳기를 원하였으며 주상께서 탄생하심에 미쳐서 하늘에 만수무강을 빌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천지와 귀신들도 우리의 지극한 정성을 아는데 뜻밖에 오늘 도리어 역적들을 믿고 골육을 해치려 하였다니요.”라고 하였다. 왕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뿐 말을 못하였다.
王升堂, 資謙與其妻拍手拊地, 大哭曰, “自皇后入宮, 願生太子, 及聖人誕生, 祈天永命, 無所不至. 天地鬼神, 鑒吾至誠, 不圖今日反信賊臣欲害骨肉.” 王羞赧無言.
고려사』 권127, 열전 권제40 반역(叛逆), 이자겸, 내시 김찬 등이 이자겸의 제거를 모의하였으나 이자겸과 척준경이 궁궐을 불태우다
《고려사》 반역열전 이자겸 편을 보면 이자겸이 문경태후를 황후(皇后)라고 불렀다.

3. 가족관계

당대 최강의 외척 대가문인 인천 이씨의 가문의 일원으로, 아버지는 조선국공 이자겸이다.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최씨로 해주 최씨 최충의 증손녀이며, 최사추의 둘째 딸이다. 순덕왕후는 7명의 남자형제와 3명의 여자형제가 있었다. 여동생 둘은 나중에 자신의 아들인 인종과 혼인한다. 인종 시기에 순덕왕후의 형제들은 모두가 조정에서 한자리씩 차지했다.

4. 기타

인천광역시의 지명을 정하게 된 인물이다. 원래 인천시는 경원군이었는데, 인종이 어머니의 고향을 높히기 위해 인주(仁州)로 바꿨고, 이후 조선시대 태종 대에 주(州) 명칭을 가진 지역이 많다하여 다수를 천(川)으로 변경시킨 것이 지금의 인천이 되었다.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인 왕후들 중 유일하게 고려사에 생일(음력 3월 28일)이 알려졌고, 사후의 일이지만 황후(皇后)로 불린 일도 기록되어 있다.


[1] 고려사에 생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종의 조명(詔命)에 의해 박경인이 쓴 애도문인 동문선 제28권 '순덕왕후애책'에 의하면 순덕왕후는 15살, 정확히는 '계년(筓年)'에 6촌간인 예종과 혼인했다고 한다. 이는 예종은 이자연의 외증손자이고, 문경태후는 이자연의 증손녀이기 때문이다.[2] 현재는 인천 이씨. 예전에는 경원 이씨, 인주 이씨 라고도 불렀다. 인천의 과거 지명이 경원(慶源), 인주(仁州)였기 때문이다.[3] 최사추의 차녀[4] 헌화사 승려[5] 평산 박씨(平山 博氏) 박경인의 아들 박효렴(朴孝廉)의 부인[6] 인종의 제1비이자 폐비[7] 인종의 제2비이자 폐비[8] 본궐의 세번째 대문으로 앞에 넓은 광장이 있었고 본궐의 대문 중 가장 크고 화려했다. 이중루로 윗층은 신봉루(神鳳樓)라 해 왕이 사면령을 내리는 것과 같은 상징적인 조치를 행할 때 이용되었던 곳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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