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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7-11 05:37:26

류승


1. 개요2. 생애3. 고려사 류승 열전4. 가족 관계

1. 개요

1248년 류경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字)는 희원(希元)이고 '정신(貞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여러 아들들을 두어 그 후손들이 문화 류씨 지후사공파, 좌상공파, 정숙공파, 충경공파 등으로 이어졌다.

2. 생애

무신정권 시기 임연이 정권을 잡은 후 1269년(원종 10) 4월 임자일 평장사 류경이 흑산도로 귀양가고, 류경의 아들인 행수(行首) 류승과 시랑 주열, 장군 김정 등도 섬에 귀양갔다. 그 후 류승은 1287년(충렬왕 13) 2월 경신일에 좌부승지, 1291년 9월 을미일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판삼사사(判三司事) 한희유(韓希愈)와 함께 강화의 진(鎭)에 머무르면서 병란으로 피해를 입은 고을의 조세를 감면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1292년 윤6월 신해일에 최유엄과 함께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임명되고 1294년 7월 병자일에 직사관(直史館) 권한공(權漢功)과 함께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파견되어 원 황제의 생일을 축하했다.1295년 1월 기사일에 지밀직사사에 임명되고 이후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에 이르렀으며 1298년 5월 임자일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류승은 오랫동안 합문(閤門)에 있었다. 합문은 조회(朝會)•의례(儀禮) 등 국가 의식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당시 당시 예문(禮文)이 산실(散失)되고 없었기에 류승이 '신의(新儀)'를 편찬하였는데 그 내용이 아주 상세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대로 본받아서 사용했다.
류승은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여 관직에 있으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기생들과 좋아하여 노는 일도 없었다. 또한 돈이나 이익이 생기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으며 탄환(彈丸-둥근 알맹이를 퉁기는 일)을 잘 하여 한 번 퉁기면 반드시 명중하였다고 전한다.

3. 고려사 류승 열전

류경의 아들은 류승(陞)이다. 류승의 자(字)는 희원(希元)인데 관직이 첨의 참리에 이르렀고 행동 거지가 예의에 맞아 볼 만한 점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합문(閤門)에 있었는데 당시 예문(禮文)이 산실되고 없었기에 류승이 신의(新儀)를 편찬하였는데 그 내용이 아주 상세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대로 본받아서 쓰게 되었다.
류승은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여 관직에 있으면서도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으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기생들과 좋아하여 노는 일도 없었고 돈이나 이익이 생기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는 탄환(彈丸-둥근 알맹이를 퉁기는 놀음)을 잘 하여 한 번 퉁기면 반드시 명중하였다. 일찍이 손님이 와서 앉아 있는데 멀리서 여인이 버지기(盆)를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사람에게 맞으면 상할 것이고 그릇에 맞으면 깨어질 것이니 환(丸)을 버지기 속에 떨어지게만 하겠다'라고 하고 환을 퉁기니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충렬왕 24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51세요 시호는 정신(貞愼)이다. 류인명(柳仁明), 류인전(柳仁全), 류인화(柳仁和), 류인기(柳仁琦) 등의 아들들을 두었다. 류인명은 중문사(中門使)로 되었고 류인기는 문화군(文化君)의 봉작을 받았다. 류인화는 후일 이름을 류돈(柳墩)으로 고쳤다.

4. 가족 관계

* 부인 : 남양 홍씨 홍진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