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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white><tablebgcolor=#fff,#1f2023> 파일:문화부 심볼.svg이달의 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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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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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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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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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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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응 혜심 혼원 희랑 }}}}}}}}}

파일:지눌국사.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 출생 1158년
경기 동주 (現 황해북도 서흥군 자인면)
사망 1210년 4월 22일 (음력 3월 27일)
법명지눌(知訥)
목우자(牧牛子)
시호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탑호감로(甘露)
성씨정(鄭)
아버지정광우(鄭光遇)

1. 소개2. 생애3. 책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

[clearfix]

1. 소개

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離地求起, 無有是處也.
사람이 땅바닥에서 넘어졌으면 땅바닥을 짚어야 일어설 수 있지, 땅바닥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1]
고려승려. 속성은 정씨(鄭氏), 호는 목우자(牧牛者)[2],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3]

종래의 9산 선문조계종에 통합하는 등 교종을 중심으로 교선일치를 시도한 의천천태종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한 인물. 의천의 천태종이 실패로 끝난데 반해 지눌의 법통은 현재 한국 불교에서 조계종이 주류로 자리잡을 정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결사 운동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 생애

동주(洞州)[4]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국학의 학정을 지낸 정광우(鄭光遇)이다.

의종 19년(1165년)에 출가하여 종휘의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명종 12년(1182년)에 승과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포기하고 개경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여했다. 창평 청원사에서 6조 혜능의 《단경》을 읽고 대각한 뒤에도 수도에 더욱 정진했다. 명종 15년(1185년)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독하고 선교종을 통합해야 할 필요성을 깨우쳤다.

명종 18년(1188년), 공산[5]거조사[6]에 머물면서 세속화되어 가던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정혜결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으며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3년 동안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해 적극적 보살행의 현실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신종 3년(1200년), 송광산 길상사(현재의 송광사)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해 깨달음 이후 남아있는 무명을 수행으로 사그라뜨리자는 돈오점수(頓悟漸修)[7]와 이론학습과 참선을 함께 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를 주장하고 "선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로써 용(用)을 삼아야 한다." 하고 말해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지눌의 사상에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8]
파일:송광사 전 보조국사 가사 국립중앙박물관1 수정2.jpg
희종이 하사한 가사[9]
희종은 즉위하자 송광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현 송광사)라 고쳐 제방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를 내렸다. 이에 대해서는 이 시기 무신정권이 기존의 귀족 중심 교종[10]을 밀어내고 선종 위주의 조계종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는 해석도 많다. 이후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해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입적하니 을 세워 탑호를 감로라 하고 국사에 추증하였다. 지눌의 뒤는 유불일치설로 유명한 혜심이 이었다.

3.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파일:attachment/지눌/지눌.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6. 관련 문서



[1] 지눌이 불교계 정화를 위한 수선결사를 일으키면서 작성한 권수정혜결사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 잘못해서 미혹에 빠지는 것도,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는 것도 결국 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넘어졌다고 땅을 욕할 것이 아니라 땅을 짚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속담을 빌어 불교계 개혁과 쇄신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2] 키우는 사람이라는 뜻. 조선 시대의 지방관들을 '목민관'이라고 불렀던 것이나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의 '목'과 같은 한자이다. 목민(牧民)은 백성을 돌본다는 뜻. 선종에서는 자기 마음의 본성을 찾는 과정을 목동이 잃었던 소를 찾는 것에 빗대서 심우도(心牛圖)라는 10개 장면으로 이루어진 그림으로 설명한다. 에 가면 대웅전 같은 건물 외벽에 그려진 소 끌고 가는 목동의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이 그림이 바로 심우도이다.[3] 그래서 보통 '보조국사'라고 많이 부른다.[4] 현재의 황해도 서흥[5] 현재의 대구시 팔공산[6]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군에 있으며 신라 시대에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경내의 영산전우왕 1년(1375년)에 세워졌는데 국내에 딱 4개 남은 고려시대 목조 건축으로 유명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소속 은해사의 말사로 거조암(庵)이라고도 불린다.#[7] 단박에 깨달아서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것. 현대 한국의 승려 성철은 '깨달음 뒤에도 수행이 필요하다면 그게 어떻게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논리로 지눌을 비판했다.(돈오돈수) 지눌은 돈오점수라는 수행방식을 갓난아이로 비유해 설명했다. 인간은 태어남으로써 이미 생명을 얻었지만, 단순히 태어남만으로 끝내지 않고 부모가 기르고 자신이 먹고 자고 배우며 성장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찬가지로 깨달았다고 해서 수행을 그만둘 수는 없다는 논리.[8] 이 말에는 선종 중심의 뜻이 드러난다는 주장도 있다. '말씀'과 '마음'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본질에 가까울지는 예상이 가능하지 않은가.[9] 1951년 6.25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가로 약 105cm이고 세로 약 280cm이다.[10] 교종 중에 법상종문벌귀족들이 신봉했던 종파이다. 때문에 왕들은 천태종을 중심으로 법상종을 통합하려 했고 무신정권은 선종을 중심으로 법상종과 천태종을 포함한 교종까지 통합하려 시도했다.[11] 고려 충렬왕 때 승려로 생몰년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