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2016년 한국갤럽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봄' 하면 생각나는 노래'를 선정. | ||||||||
<rowcolor=#fff>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버스커 버스커 | 이정선 | 홍난파 | 로이킴 | 홍난파 | |||||
벚꽃 엔딩 | 봄 | 봄처녀 | 봄봄봄 | 고향의 봄 | |||||
<rowcolor=#fff>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10CM | 백설희 | 동요 | 신중현 | 이은하 | |||||
봄이 좋냐?? | 봄날은 간다 | 봄나들이 | 봄비 | 봄비 | |||||
같이 보기: 여름 노래, 가을 노래, 겨울 노래 |
1990년 수록 버전. |
오연준이 부른 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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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인 1926년 이원수 시인이 발표한 한국어 동시. 그리고 여기에 곡조를 붙여 유명해진 한국의 전설적인 서정동요.동요는 이일래(본명 이부근)작곡 버전과 홍난파 작곡 버전 두 종류가 있다. 이일래 버전은 홍난파 버전과 달리 조금 더 음정이 늘어지고 곡조가 미묘하게 다르지만, 이 중에서 세간에 알려진 버전은 홍난파 버전. 일본어 버전도 있다.
심금을 울리는 가사와 절대 잊을 수 없는 곡조로 인해 특히 실향민이나 재외동포들 사이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아래에 설명한 예시처럼 행사에서 애국가처럼 제창되는 경우까지 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일본식 운율인 7·5조가 사용되어 일본인들에게도 친숙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비슷한 7·5조 노래로 '학교'과 '섬집 아기'가 있다. 1절에서 '차린'을 '차리인'으로 늘려 발음하는 이유도 7·5조의 운율을 살리기 위함이다.
첫 소절인 '나의 살던 고향은'은 현대 국어 화자가 보기에는 문법적으로 다소 어색하다. 현대 국어 기준으로 어색하지 않은 한국어 표현은 '내가 살던 고향은'인데, 일제강점기에 쓰인 가사이다 보니 일본어에서 주격 조사 'が'가 종속절의 조사로 쓰일 때 'の'로 변화하는 문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통사적으로는 후행하는 명사를 꾸며주는 속격이지만 의미상 주어의 역할을 하는, 이른바 주어적 속격은 중세 국어에도 존재한 바 있었으므로,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다.[1]
가사는 서정적이지만 곡조는 섬집 아기처럼 우울한 느낌이 드는데, 어두컴컴한 곳에서 혼자 듣다 보면 좀 무서워진다. 하지만 묘하게 착착 감기는 곡이라 초딩때 배우는 노래인데도 성인이 되어 잊어버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원수는 이 동요를 중학시절인 10대에 지었는데, 그 1절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이다.
이 노래의 배경이 되는 곳은 당시 이원수가 살고 있던 창원군.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창원은 옛 마산시 등에 비하면 시골에 가까웠다. 당시 이원수가 살고 있었고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소답동 일대는 더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바로 옆 동네인 명곡동만 하더라도 199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래서 창원 팔용동 남산에는 '고향의 봄 도서관'에 이원수 문학관이 있다. 그러나 이원수가 노래한 '꽃피는 산골'은 도서관이 있는 곳과는 반대쪽인, 현재 창원역 뒤에 있는 천주산이다. 이 곳의 진달래는 산 사면을 따라 울긋불긋 피어올라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보니 역시 봄에 진달래 피는 걸로 유명한 금강산에 빗대어 창원지역에서는 나이든 어르신들이 천주산이란 본명보다 제2금강산이란 이명을 더 친숙하게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원수의 출생지인 양산시에서는, 이 곡을 지을 당시 살던 곳은 창원이지만 노래에서 묘사한 지역은 양산이라면서 역시 시비(詩碑)를 세웠지만 빼도박도 못하는 역사왜곡이다. 이원수가 양산에서 살았던 기간은 고작 1년도 되지 않았으며 본인 스스로 양산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으며 자신의 고향은 창원이며, '고향의 봄'의 배경 또한 창원 소답동이라고 밝혔다.# 양산에서도 저자가 직접 밝힌 사실이라 할말이 없는 모양인지 한때 고향의 봄 관광사업을 적극 추진하려 했다가 이제는 거의 사장되다시피한 상태이다.#
또한 '울긋불긋 꽃대궐'이란 구절에서 보듯 이 동네에는 의창도 있었고, 지역 유지 부잣집도 여럿 있었는데 그 중 남아있는 것이 등록문화재 200호 창원 소답동 김종영 생가가 있다.
2011년 초 이원수가 고향의 봄을 쓴 곳이 확인되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71번지라고 한다. ‘고향의 봄’ 탄생지는 마산 오동동 71번지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인 영구람보에서는 엔딩곡으로 등장한다. 그 당시에 슬프게 불렸다.영구람보 엔딩장면
그리고 예전에 고교야구 대회에 재일교포 야구단이 초청받아 참가했었는데 경기에서 재일교포 팀이 승리할 경우 한국의 여러 고교팀이 각자 학교의 교가를 트는 것과 달리 이 고향의 봄을 틀었다.[2]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코리아나의 손에 손 잡고 공연과 폐식통고가 끝난 뒤 폐식곡으로 개회식 출연자들이 그라운드에 모여 박수를 치며 부른 노래다.
영창피아노의 1992년 광고에서 빈 소년 합창단이 이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광고가 광고인 만큼 해당 동영상의 댓글도 밑의 교도소 드립처럼 영창 드립이 많다.
이 노래를 기념하여 경상남도 양산시에 고향의봄로가 있으며,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공원[3]에는 고향의 봄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홍난파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출신 이어서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행정복지센터 앞에도 고향의 봄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만주어 버전도 있다. #
일본 소학교(한국의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이 노래가 실리기도 했다.#
꼬마버스 타요 5기 <첼로의 주인> 회차에서 이 노래가 다뤄졌다.
2. 가사
2.1. 한국어 원 가사
고향의 봄 이원수 작사・홍난파 작곡 1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절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2.2. 일본어 번역 가사 1
이 영상과 이 영상, 이 문서에는 아래 가사로 옮겨져 있다.故郷の春 作詞 李元壽・作曲 洪蘭坡・訳詞 笠木透 1절 私の故郷 花の村 モモの花 アンズの花 山ツツジ いろとりどりの 花もよう 遊んだあの日が なつかしい 2절 私の故郷 鳥の村 緑の野原に 風吹けば 川辺の柳も おどり出す 遊んだあの日が なつかしい |
2.3. 일본어 번역 가사 2
이 영상과 이 포스팅에는 아래 가사로 옮겨져 있다.故郷の春 作詞 李元壽・作曲 洪蘭坡 1절 我が生まれた故郷 花咲く 山里 桃の花 あんずの花 赤ちゃん つつじ 色とりどり鮮やかな 花の宮殿[4] その中で 戯れた時が 懐かしい 2절 花の里 鳥の里 我が故郷 青い草[5] 南から 風が吹けば 川の ほとりの 柳が 踊り躍る[6] その中で 遊んだ時が 懐かしい |
3. 우표
1985년부터 1993년까지 발행된 음악 시리즈의 제1집으로 1985년 9월10일, 동요인 '나뭇잎 배'와 같이 발행되었고, 액면가는 70원.4. 패러디
4.1. 교도소 버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970년대 전후부터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로 개작한 노래가 유행했다. 기사초등학생 등 유소년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그 시대를 풍미한 범죄자를 풍자하는 의미를 담아 불렀다. 1990년대라면 신창원이라든지, 심지어 전두환이나 노태우까지도 풍자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에 맞춰서 청송교도소나 부산교도소, 안양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으로 매칭하여 불렀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 시작된 장난이지만 무한도전 강변북로 가요제 특집 당시 노홍철이 이 가사를 언급하기도 했다.
지역마다 인근 교정시설의 이름을 넣어서 부르기도 했다. '인천교도소'라는 정체불명의 교정시설도 등장했는데, 실은 '인천구치소'이다. 인천구치소는 과거에 '인천소년교도소'로서 소년범을 수용하기도 해서 잘못 전해져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아이들이 교도소와 구치소의 차이를 알았을 리가 없었으니... 대구광역시에서는 '화원교도소'로,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는 '성동구치소'로 바꿔서 불렀다.
지역마다 가사는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하게 XX교도소에 수감됐던 죄수가 꽁보리밥 먹다가 10년만에 출소 혹은 탈옥을 해서 집에 와보니 아내는 집 팔아먹고 도망갔다는 내용이다. 대개 다음과 같은 가사로 불렸다. 물론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개 밥에 된장국도 맛만 좋더라 감옥살이 10년하고 집에 와보니 마누라가 집 팔아먹고 도망갔더라 |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먹는 것은 꽁보리밥에 멸치 세마리 10년만에 탈옥해서 집에 왔더니 마누라는 집팔아 먹고 도망갔대요 |
나의 살던 고향은 화원교도소(마산교도소) 눈만뜨면 꽁보리밥에 김치 깍두기 10년만에 탈옥해서 집에 와보니 마누라는 집 팔아먹고 토끼뿓더라[7] |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꽁보리밥에 된장국이 일품이라네 10년만에 탈옥해서 집에 와보니 여편네는 집 팔아먹고 도망갔대요 |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꽁보리밥에 된장국은 맛이 없구나 10년만에 탈출해서 집에 갔더니 여편네는 집 팔아먹고 도망갔구나 |
나의 살던 고향은 부산교도소 날만 새면 꽁보리밥에 김치 깍두기 집에 오니 아이들은 고아원가고 여편네는 집 팔아먹고 도망갔대요 |
나의 살던 고향은 광주교도소 눈만뜨면 꽁보리밥에 빳다 열두대 한대 두대 세대 네대 아이구 엉덩이야 신신파스 붙일 때가 그립습니다[8] |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 꽁보리밥에 된장국이 그립습니다 교도생활 10년에 집에 와보니 여편네는 집 팔아먹고 날랐습니다[9] |
나의 살던 고향은 인천[10]교도소 아침밥은 꽁보리밥에 김치 한조각 10년만에 탈옥해서 집에 와보니 마누라는 집 팔아먹고 바람핍니다 |
혹은 2번째 행이 썩은 밥에 개구리 반찬 그립습니다로 치환되는 경우가 있다.
4.2. 신약성경 버전
가톨릭에서 신약성경의 제목들로 개사한 버전이 있다.마태오 마르코 루카요한 복음서 네권 사도로마 코린토 갈라티아 에페소 필리피 콜~로새 테살로니카 티모테오 티토 필레몬 히브리 야고보 베드로 요한유다 묵시록 |
개신교에서는 일본 철도창가를 번안한 성경목록가라는 성가를 주로 사용했다.
5. 만주어 고향의 봄
만주어 관련 유튜버가 작사후 노래한 만주어판 고향의 봄도 있다.
[1] 비슷한 용례가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이다.[2]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에서 자세히 묘사된다.[3] 고향의 봄을 썼던 오동동 자취방 뒷산이면서 이원수 선생의 모교인 마산용마고등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4] 직역하면 '알록달록 선명한 꽃 궁전'. 한국어 가사와 다르다.[5] '파란 풀'로 번역되었으며 일본어로 '들'은 '野原(のはら)'. 박자를 맞추기 위해 조금 바꾼 듯하다.[6] 직역하면 '냇가의 수양버들이 춤추고 춤추네'. '춤추는 동네'라는 명사 서술어가 동사 서술어로 번역되었다.[7] 대구/마산 지역에서 구전되던 가사[8] 광주광역시 버전은 유일하게 아내가 나오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9] 서울 북부에서 구전되던 가사. 1970년대엔 서울교도소였고, 전두환이 잡혀갈 때 안양교도소라고도 했다.[10] 안양시 인근 일부 지역에서 구전되던 가사였음에도 안양교도소로 불리는 경우는 드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