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2년(중종 17년) ~ 1556년(명종 11년)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인. 기행 가사 문학의 창시자.2. 생애
1522년(중종 17년) 전라도 장흥에 있는 사자산 아래의 기산(岐山) 마을에서 아버지 백세인(白世仁)과 어머니 광산 김씨[1]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이었다. 천생 자질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며 행실이 올바른 성품이었다.어려서는 태어난 곳의 ‘봉명재(鳳鳴齋)’라는 서당에서 수업을 하였고, 후에 시산(詩山, 지금의 태인)에 있던 이항(李恒)에게 가서 공부하였다. 이 무렵에 신잠(申潛)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철학을 논하였다. 그 후에는 김인후(金麟厚)·이이(李珥)·기대승(奇大升)·임억령(林億齡)·정철(鄭澈)·양응정(梁應鼎)·최경창(崔慶昌) 등과 같은 당시의 대문장가들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처음에는 벼슬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어 성리학 연구와 시 창작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결국 28세 때인 1549년(명종 4년)에 과장에 나아가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31세 때인 1552년(명종 7년)의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홍문관 정자로 임명되고, 1553년(명종 8년) 시부회(時賦會)에서 전국의 기라성 같은 대가들을 제치고 '동지부(冬至賦)'라는 작품으로 장원을 차지하였다. 이때 명종에게서 선시십권(選詩十卷)을 상으로 받았는데, 이 ’선시십권‘은 기봉의 장흥 생가에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 그 후 순수한 학문 연구 기관이라고도 말하는 호당(湖堂)에 뽑혀 순수하게 학문만 공부할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34세 때인 1555년(명종 10년) 봄에는 평안도 평사가 되어 평안도로 내려가 일하게 되었다. 그때 관서지방의 절경과 생활상·자연풍물 등을 읊은 기행가사(紀行歌辭)인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이듬해인 1556년(명종 11년) 가을에 병이 들어 벼슬을 내놓고, 귀성하는 도중 음력 8월 전라도 부안에서 35세의 나이로 객사하였다. 1808년(순조 8) 기양사(岐陽祠)에 배향되었다. 스승인 일재 이항은 그의 부음을 듣고, "대유는 재주와 덕이 그 짝을 보기 드물었는데 능히 크게 펴지 못하니 애석하구나."하고 애통해 하였다.
저서로 『기봉집』이 있다. 1987년 11월 전국가비동호인회에서 묘가 있는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운치(雲峙)에 가비(歌碑)를 세웠다. 사진 참조#1 사진 참조#2 2004년 6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3. 관서별곡
그가 1555년에 지은 「관서별곡」은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지은 작품으로 기행가사의 효시가 된다. 은일가사(隱逸歌辭)→유배가사(流配歌辭)→기행가사(紀行歌辭)→내방가사(內房歌辭) 등등으로 맥을 잇는 ‘가사문단’에서 그 위상이 특별하다. 조선조 이후 모든 기행문학의 모체로까지 전해진다.관서 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실 제
행상을 다사리니 칼 하나 뿐이로다
연소문 내달아 모화고개 넘어드니
귀심이 빠르거니 고향을 사념하랴.
평안도평사의 벼슬을 제수 받고, 관서지방을 향해 출발하는 것부터 부임지를 순시하기까지의 기행 노정을 운치 있게 그려냈다. 8단락 172구 1156자로 돼 있다. 기산별곡과 향산별곡으로 양분될 수 있고, 다르게는 서사(序詞)-관서평사의 명을 받음, 본사(本詞)-평사 부임과정과 관서지방 경치, 말사(末詞)-임금님과 어버이에 대한 상념 으로 크게 3분 할 수 있다.행상을 다사리니 칼 하나 뿐이로다
연소문 내달아 모화고개 넘어드니
귀심이 빠르거니 고향을 사념하랴.
단순한 노정과 있었던 사실만을 건조하게 기록한 게 아니라, 대상에 자신의 정서를 심고, 경(景)에다 정(情)을 접합시켰다. 단순히 풍류를 얘기하고 여행 다닌 자랑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추가시키고 문학성을 진화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1580년에 나온 정철의 「관동별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관동별곡」은 구성, 표현, 어귀배열 등에서 「관서별곡」과 매우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서쪽 시냇가에 얼음과 눈이 깨끗해 있고
사흘 밤을 서로 그렇게만 보냈다오
혜초가 심어진 두둑에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오동나무 강가에 봉황이 훼훼하는 소리 들린다오 (중략).
시인이 친구를 보내면서 영중으로 가는 상황을 운중으로 가는 것으로 비유하여 표현한 대목이다. 높은 시적 감각이 표현되어 있다. 임금에 대한 아부 및 정치적 야욕으로 가득찬 「관동별곡」과 비교해볼 때, 문장이 훨씬 더 고결하고 단아한 것을 볼 수 있다.사흘 밤을 서로 그렇게만 보냈다오
혜초가 심어진 두둑에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오동나무 강가에 봉황이 훼훼하는 소리 들린다오 (중략).
어쨌든 이렇게 「관서별곡」과 「관동별곡」이 연달아 나오면서 호남, 특히 전라남도 지방은 조선조 시가문학의 '선도지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호남의 문학은 처음 백광홍과 정철 등의 양반계급에서 비롯되었지만, 점차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서민층의 판소리문학이 크게 꽃피었다.
4. 가족관계
아우 백광안(白光顔)과 백광훈(白光勳) 및 종제(從弟) 백광성(白光城)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 특히 친동생 백광훈은 ‘옥봉집’에 500여수가 넘는 시 등을 지어 남겼다.그의 집안은 오늘날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해미 백씨 집안이다.[2] ‘남도 먹물부자 집안’으로 통한다. 그가 태어났던 장흥땅은 백광홍을 비롯한 수원 백씨 4형제를 배출한 이후에도 조선시대 내내 수많은 문장가가 거기서 나와 장흥가단(長興歌團)을 이루었다. 근래에는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등이 장흥에서 배출되어 장흥은 오늘날 ‘남도 최대 문인촌’이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