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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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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창
李梅窓| Yi Maechang
파일:이매창 영정.jpg
이매창 영정[1]
출생 1573년 ?월 ?일
(선조 6년, 음력 1573년 ?월 ?일)
조선 전라도 부안현
(現 전라북도 부안군)
사망 1610년 ?월 ?일
(광해군 2년, 음력 1610년 ?월 ?일)
(향년 37세, 37년 ?개월 ?일 / 13514일)
조선 전라도 부안현 봉래산
(現 전라북도 부안군 관음봉)[2]
병사 (요절)
묘소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567
학력 한문학 수학
전주부 교방 교습[3][출처]
직업 기녀, 시인, 음악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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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혹은 고부(古阜)로 추정[출처]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향금(香今)
천향(天香)
매창(梅窓), 계생(桂生), 계생(癸生), 계랑(桂娘), 계랑(癸娘)
종교 유교 (성리학)
붕당 없음
작품 매창집(梅窓集)》
부모 부 : 이양종 (李陽從, ? - ?)
모: 부안현 관비 (? - ?)
배우자 없음
자녀 없음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 개요2. 생애3. 문인들과의 교류4. 작품 세계

[clearfix]

1. 개요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매창은 조선 선조 때의 부안(扶安) 기생이다.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호는 매창(梅窓)이다. 계유년에 태어나서, 계생(桂生·癸生), 계랑(桂娘·癸娘) 등으로도 불린다. <화원악보>에 시조 1수가 전한다. 신사임당의 장녀이자 율곡 이이의 누이인 이매창과는 동명이인이다.

문집을 간행한 허균의 책임이든, 본인 재능이 과장된 것이든 전해지는 시에 표절 논란이 있는 허난설헌이나 실존은 했으되 실체가 불분명한 황진이와 달리 이쪽은 보다 남은게 분명하다.

1573년 전북 부안현의 아전 이양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나, 1610년 사망했다.

평생토록 노래를 잘 하여, 지은 시 수백 편이 그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녀가 죽은 후 서서히 잊혀지고 사라져가자, 그것을 안타까워했던 부안의 아전들이, 1668년, 그녀가 남긴 시 58수를 구해 매창집을 간행하여, 지금도 이매창의 시가 전해진다.

전북 부안에는 2015년 이매창의 묘역을 중심으로, 넓이 7400평 규모의 매창 사랑의 테마 공원이 만들어졌다.[7][8]

2017년 4월에, 이매창의 영정이 제작되기도 했다.#[9]

2. 생애

이매창은 1573년 전북 부안현의 아전 이양종과 관비의 딸로 태어났다. 매창이 기생으로 살아간 것으로 보아 매창의 어머니는 부안현에 소속된 관비(官婢)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한테 글을 배워 한시에 뛰어났으며 가무도 잘했는데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관아에 속한 기생은 ‘기안(妓案: 관기 명부)’에 올라 관리를 받았다. 그녀들의 이름은 호방(戶房)에서 출석을 점검할 때 부르기 편하도록 지어졌는데, 매창은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ㆍ계생(桂生)ㆍ계랑(癸娘)ㆍ계랑(桂娘)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매창은 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스스로 ‘매창(梅窓)’이라고 자호(自號)했다.

1592년, 20살 무렵,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1545~1636)과 만나 사랑을 나누고, 평생의 연인이 된다. 유희경은 이매창보다 스물여덟 살이나 연상인데다가 천민 출신인데, 당시에 이미 명성이 높았던 이매창이 신분이 높지 않았던 유희경에게 강하게 끌렸던 것은 둘 다 시에 능해, 시로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인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중인 신분을 가진 시인들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여기에는 천민 출신 시인 백대붕(白大鵬)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유희경과 백대붕은 함께 시를 잘 짓기로 소문이 퍼져 ‘유백(劉白)’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매창도 이들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유희경이 부안을 찾아와 이매창을 처음 만났을 때, 이매창은 상대방이 서울의 시객(詩客)이라는 말을 듣고, “유희경과 백대붕(白大鵬) 가운데 누구신지요?” 라고 물었다고 한다. 유희경과 백대붕의 이름이 먼 지역까지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후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와 교산 허균(蛟山 許筠)등과도 깊게 사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607년 왜란 때의 공으로 양반이 된 63세의 유희경을 다시 만난다. 하지만, 그도 잠깐. 유희경은 가족이 있는 한양으로 다시 떠났다.

유희경도 많은 시를 통해서 이매창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남겼지만, 현실적으로 당시 한양과 전북 부안은 너무 멀었다.

그리고 3년 후, 광해군 2년(1610) 여름 이매창은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파일:이매창 묘.jpg
이매창의 묘[10]
그녀의 시신은 부안읍 오리현(五里峴) 매창뜸에 그녀의 유언대로 그녀가 아끼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매창이 죽은지 45년만인 1655년에 묘비가 세워졌고, 1668년에 부안의 아전들이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당시까지도 전해졌던 그녀의 한시 54편을 모아 1668년에 개암사(開岩寺)에서 매창집(梅窓集)을 간행하였다.

1983년, 이매창의 묘는 지방기념물 제65호의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 묘역을 중심으로 매창공원이 만들어졌다.

2015년에는 이매창의 묘역을 중심으로, 넓이 7400평 규모의 매창 사랑의 테마 공원으로 확장되었다.

3. 문인들과의 교류

이매창은 1600년을 전후하여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다른 사람들의 문헌에도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허균(許筠, 1569~1618)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대 최고의 시 비평가였던 허균은 매창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였고, 이에 많은 문인들이 매창을 찾아 시를 주고받으려 하였다. 시를 주고받은 것으로 확인된 인물들로는 권필ㆍ심광세ㆍ임서ㆍ한준겸 등이 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난 것은 1601년 7월이었다. 허균이 전운판관(轉運判官)이 되어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로 내려가던 중, 비가 많이 내려 부안에 머물게 되었고, 이곳에서 허균은 매창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상황이 허균의 문집에 남아 있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11]

허균은 매창의 외모를 ‘불양(不揚)’이라고 설명했다. 즉, 생김새가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나 허균은 재주와 정감이 있는 매창과 대화하면서 그 매력에 빠졌고, 종일토록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많은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이매창의 재주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한양에서 일부러 이매창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매창의 재주는 이미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유희경이 이매창과 처음 만난 시기인 1592년에도, 이매창이 유희경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유희경 역시 이매창의 재주를 들어 알고 있었다고 한다. 허균을 통하여, 그 만남의 폭이 더 넓어진 것이다.)

허균과의 10년간에 걸친 교류가 있었던 만큼, 이매창은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의 글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4. 작품 세계

이매창은 평생 부안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많은 사람을 만나기는 했지만, 거의 모든 경우, 다른 문인들이 이매창의 이름을 듣고 그녀를 찾아온 것이지, 그녀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갔다는 기록은 없다.[12] 이런 그녀의 삶은 그녀의 수많은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 그녀의 시의 주된 정서는 "그리움"이다.

현재 매창집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시에는, 잠깐 만났던 유희경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시들이 대부분이다.

이매창보다 다소 앞선 시대를 살았던 황진이의 시에는, 세상을 조롱하며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고,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지만, 그에 반해, 이매창의 시는 다분히 수동적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간절히 드러내고 있다.

閨中怨 규중에서 서럽다.

瓊苑梨花杜宇啼 예쁜 정원 배꽃에 두견새 우는데,
滿庭蟾影更凄凄 뜰에 가득한 달그림자 더욱 처량하네.
相思欲夢還無寐 꿈속에서 만나려도 도리어 잠이 오질 않아
起倚梅窓聽五鷄 일어나 매화 핀 창가에 기대니 새벽닭이 우네.

竹阮春深曙色遲 대숲엔 봄이 깊어 새벽빛이 더딘데,
小庭人寂落花飛 뜨락엔 인적 없이 꽃잎만 흩날리네.
瑤箏彈罷江南曲 좋은 쟁(箏)과 거문고로 강남곡을 마치고
萬斛愁懷一片詩 수많은 근심을 한 편의 시(詩)로 품었네.


[1] 김호석 화백의 2017년작 영정으로, 전라북도 부안군에 소장되어 있다.[2] 1609년 9월 허균이 이매창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안 봉래산의 가을이 한창 물익었겠다"고 말한다. 이매창이 사망하기 직전에는 부안의 봉래산 혹은 관음봉에서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전주부 교방에서 기녀 수업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출처] 이매창 평전, 저자 김준형[5] 거문고를 자주 악기로 썼으며 죽었을 때 무덤에 거문고와 함께 묻었다.[출처] 이매창 평전, 저자 김준형[7] 매창공원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공원명이 여자의 이름이다.[8] 매창의 묘제는 매년 음력 4월 5일에 부풍율회 회원들에 의하여 지내지고 있다.[9] 영정을 보면, 빼어난 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이는 이매창과 교류했던 허균의 글을 참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허균은 이매창에 대해, "생긴 건 별로지만, 글솜씨는 뛰어나다..." 라는 내용의 글을 남긴 적이 있다.[10] 전라북도 부안군에 위치한 묘이다.[11] 허균, "성소부부고"[12] 공식적으로 이매창의 신분이 관청에 속한 기생이니만큼, 원칙적으로 거주지역을 벗어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