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white><tablebgcolor=#fff,#1f2023> | 이달의 문화인물 (1998-2005)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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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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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강정일당 | 8월 이규보 | 9월 나철 | 10월 이승휴 | 11월 효명세자 | 12월 최북 | |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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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沆 (1567년 - 1618년)
1. 개요
조선 중기의 학자, 의병장. 전쟁 도중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조선 성리학을 전한 인물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이다.2. 초기 생애
1567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강항의 고조 할아버지가 조선 초의 명신 강희맹이다.1588년 진사시에 급제한뒤 임진왜란의 전란 중이던 159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4년 승정원의 가주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1597년 공조 좌랑을 거쳐 형조 좌랑을 지냈다.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 영광으로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강항은 참판 이광정의 휘하에 배속되어 군량 수송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남원 전투에 휘말리게 된다. 원균의 뻘짓(칠천량 해전)으로 벌어진 남원성 전투는 남원성이 함락되어 저항하던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지는 파국을 맞았고 강항은 겨우 고향으로 도망쳤다.
영광으로 도망쳐온 강항은 일본군을 막아내기 위해 고향 사람들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지만, 남원성을 함락시킨 후, 전라도 일대를 휘젓고 다닌 일본군의 기세가 막강한데다 불과 100여명 밖에 되지 않는 숫자로 일본군을 맞선다는 것도 무리한 일이라 결국 강항의 의병은 흩어지고 만다.
3. 일본 생활
이후 강항은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의 진영으로 가려고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1597년 9월 23일 그만 일본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명량 해전이 끝난지 불과 며칠 밖에 안된 시점이었다. 일본군은 강항이 평민이 아니라 고위 문관급 인물임을 확인하고 일본으로 압송하게 된다.이때 강항의 몇몇 가족들은 일본군에게 붙들려 일본으로 끌려가는 길에 목숨을 잃었다.[1] 심지어 일본군은 강항의 8살난 어린 조카가 갈증에 시달린 끝에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와 설사를 하자 '너 같은 것에 줄 약은 없다'면서 바다에 집어 던져서 살해하기까지 했다. 강항은 이런 피눈물 나는 상황을 보고는 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이 가로막아 실패하게 된다.
결국 강항과 남은 가족들은 쓰시마와 오키를 거쳐 이요의 오즈성(오늘날의 에히메현 오즈시)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지내다가 1598년에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해 오즈에서 오사카를 거쳐 교토 후시미성으로 옮겨졌다.
이렇듯 생고생을 했지만 교토는 일본의 황족과 귀족(공가)들이 모여 사는 수도였기에 그나마 강항과 말이 통하는 점잖은 지식인들이 많았다. 교토에서 강항은 여러 일본인들과 교류했는데 대표적 인물이 요시다 소준(吉田宗恂, 1558 ~ 1610)[2]과 그의 제자 리안, 그리고 강항이 순수좌라 칭한 후지와라 세이카 등이 있었다. 특히 후지와라 세이카는 본래 선종 승려였으나 유학에 관심이 많았고 강항에게서 조선 유학을 전수받게 된다.
당시 일본에 유교 문화가 전해지긴 하였으나, 전문적인 유학자들이 없어서 해석에는 난항을 겪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유학이라면 닳고 닳은 조선의 문관이 넘어온 것이었다. 후지와라는 한동안 중국에 건너가 유학할 생각까지 했으나 강항과의 접촉을 통해 조선유학 뿐만 아니라 유가 의례 제도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된다.[3] 한편으로 강항은 교토에서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얻은 정보를 은밀히 조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당시 후지와라가 가깝게 지내던 강항에게 여러모로 편의를 봐 준 듯하다.
강항은 후지와라의 도움으로 마침내 조선으로 돌아갔고, 난중의 견문을 기술한 간양록(看羊錄)을 집필했다.
4. 귀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난 후 후지와라 세이카와 세이카의 주군인 다지마 성주 아카마츠 히로미츠의 도움으로 1600년 강항은 가족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4]귀국 후 강항은 고향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만 주력하다가 1618년에 51세로 사망했다. 자신이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정리한 책이 바로 간양록이다. 단순히 견문록 수준이 아니라 전문 정보 요원의 정보 수집 수준으로 일본의 속사정을 정리하여, 일본이 다시 침략해 오는 것을 방지하는데 집필 목적이 있다. 심지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원래 육손이었다는 정보까지 실렸을 정도. 강항 자신이 일본에게 너무 크게 당한 탓에 너무 필사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중요한 정보부터 여담까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수집할 수 있는 정보는 총망라급으로 수집했다. 한마디로 거의 목숨걸고 집필한 셈이다.
5. 영향
그와 교류했던 후지와라 세이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대학을 강의하게 되는데 이전까지 일본의 유학은 당나라까지의 훈고학의 영역에 그쳐있었다가 강항을 통해서 주자와 정자의 사서삼경 주해가 일본에 전해지게 되었고 이는 에도 막부에 성리학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초가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마루야마 마사오, 와타나베 히로시 등 일본 사상사학자들에게 따르면 에도시대 이전까지 일본인들은 덴노는 덴노지만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건 쇼군이라는 일본 특유의 기묘한 이중 권력 체제에 딱히 체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의심을 품지 않았다. 전국 시대 말기만 되더라도 덴노는 가끔가다 실권자한테 명목상 감투 하나 씌워주는게 역할이고,[5] 실제 나라를 다스리는건 사무라이들의 수장이자 실제 군사력을 확보한 쇼군인게 당연하게 여겨졌다.[6]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고, 강항이나 후지와라 세이카 같은 일부 유학자 출신 포로들과 개인적인 학구열에서 성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들 사이 연결점이 생기고, 이를 이제 군사적 역할이 필요 없어진 사무라이들을 어찌 무장해제하고 평화기의 문신으로 탈바꿈할 필요가 있었던 도쿠가와 정권이 유용하게 보아 관학으로 추대하면서 일본에도 알음알음 성리학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신유한의 해유록이나 조명채의 봉사일본시견문록 같은 조선통신사 문학을 보면 17세기 후반쯤 되면 퇴계 이황, 율곡 이이의 책들이 일본에도 번역되어 널리 팔리며 사무라이들의 애독서로 대접 받았다는걸 알수 있다. 이렇게 성리학적 명분론이 들어오면서 지금까진 힘 쌘놈이 실권자인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풍조가 중국식 정통론의 영향을 받으면서 남조정통론 같은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해석도 한층 더 퍼지고, 아메노모리 호슈 같은 유학자들 중심으로 은밀한 지하 사상 수준이지만 존왕양이론의 사상적 토대도 깔리게 되었다.
18세기 중후반쯤 되면 아무래도 같은 일본인보다 이런 면에선 더 눈치 안보고 얘기할수 있는 조선통신사들과의 대화에선 아예 노골적으로 막부를 망탁조의에 비교하며 남옥, 성대중, 이익 같은 통신사 경험이 있거나 국제적 통찰력이 각별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벌써부터 "언젠간 저 뜻있는 일본 선비들이 충의를 품고 옮은 대의를 위해[7][8] 들고 일어나면 덕천씨 조정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예언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시기 민간과 막부의 유학자들이 이론화 하기 시작한 대정위임론이니, 훗날의 공무합체 운동이니, 어떻게든 덴노와 쇼군간 이중 권력 체계를 정당화할 이론을 어찌 짜보기 시작한 것도, 뒤집어 말하면 이전 시대에는 그딴 고찰 할 필요도 없이 걍 칼자루 쥔 쇼군이 다스리는게 당연한거였는데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도 더 넓은 세계의 성리학이란 동아시아 보편적 정치 윤리 체계를 접하게 되면서 어떻게든 이를 정당화할 명분이 갑자기 필요해졌던 것이다.[9]
그리고 이런식으로 조선인 유학자 포로들을 통해 전파되어, 막부가 추켜세우고, 권력에서 배제된 불만이 많은 평화시대의 하급 사무라이들 중심으로 전파된 일본 성리학은 19세기 쯤 들어선 존황양이론이란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낳고, 이런 유교적 국가주의로 신정부를 설립한 웅번 출신 유신지사들은 자국 내의 사회적, 국제 열강간 지정학적 불안함을 표출하기 위해 다시 조선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강항의 이런 인생 역정에 따라 강항의 고향인 영광군과 강항이 포로 생활을 했던 일본 오즈시는 2001년부터 자매 결연해 교류하고 있다고 하고, 오즈시 중심가에는 홍유 강항 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세워져 있다. 현창비 옆의 안내문에는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이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고평가 받는 강항이지만 애초에 본인은 일본을 혐오하던 인물로 이양반 의병장으로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다가 죽을뻔했으며 아들, 서녀, 조카가 왜군에게 죽었고 애초에 간양록이라는 기록물 자체가 일본을 견제하기위해서 서술한것이다.
6. 미디어
MBC 사극 간양록에서 이정길이 연기했다. 조선왕조 5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도 주요 등장 인물로 등장했고, 임채무가 연기했다.[10]7. 여담
1600년대 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편액이 1950년대에 일본으로 유출된 후 한동안 일본의 강항 연구가들에게 보관되다가 2024년 7월 이낙연 전 국무총리[11]를 통해 고향인 영광군으로 반환되기도 했다.#[1] 강항의 아들 강용과 서녀 강애생이 사망했다.[2] 의사이자 학자였다.[3] 이후 후지와라 세이카는 유교에 감명을 받고 환속해서 유학자가 된다.[4] 사족으로 강항이 일본을 떠난 것은 4월 2일이고 부산에 도착한 것은 5월 19일로, 강항이 귀국하고 4개월 뒤에 일본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다.[5] 그나마도 오다 노부나가가 세를 불리면서 가능해졌지 그 전에는 덴노 자신이 먹고 살 길을 찾고 궁녀들이 몸을 팔아가며 생계를 꾸릴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했다. 심지어 일상 생활은 커녕 장례식이나 즉위식에 쓸 자금조차 구하지 못해 유력 다이묘들이 성금을 모아서 치르게 해주고 그 보답으로 관위를 하사받은 일도 있었을 정도로 덴노의 위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6] 이걸로도 모자라 가신은 주군을 옮겨다니거나 배반하는게 잦았고 심지어 배신까지 용납된건 아니지만 옮겨다니는건 용인되었다. 도도 다카토라는 아예 일생동안 모신 주군이 4가문 10명이다. 아얘 본인도 진정한 무사라면 주군을 7번은 바꿔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7] 훗날 한일합방과 경술국치로 치닫는 조일관계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이만한 아이러니도 없지만, 어찌 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당시 이 주제에 관해 아는바가 있던 통신사 출신이나 국제적 식견을 수양한 조선 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존황론에 공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존황론 자체의 성리학적 배경도 그렇고, 실제 사회적으로도 유학자들은 아무리 성리학이 부분적으로 전파되었다 한들 여전히 근본적으로 직업이 무조건 세습되며 칼에 의한 통치에 기반한 일본 특유의 사무라이 중심 사회 체제를 미개하다고 보았다. 물론 존황론의 성리학적 논리따윈 필요 없고, 어쨋든 제대로 된 선비라면 당장 녹을 주는 조정한테 충성해야되는게 마땅한데 이놈들은 딴마음 품고 있으니 노답이다라고 본 신유한 같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보다 많은 유학자들은 일본 존황론자들을 언급할때 "의기", "충의" 같은 긍정적인 수식어를 더 많이 썼다.[8] 신유한의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닌게 일단 어떤 상대를 섬기며 녹을 받는다는 것은 곧 그 상대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무오사화에서 연산군이 조의제문을 보고 광분한것도 세조 시절 관료로 일하고 녹을 먹은 김종직이 뒤에서는 세조 욕을 하는, 전혀 충을 다하지 않은 모습 때문이었다. 즉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르면, 만약 '막부는 역적이다' 라고 여길 경우 그 자리에서 충의와 대의를 위해 일어나 막부에 맞서는 것이 가장 옳고, 설령 당장 직접 맞서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막부를 섬기지는 말고 물러나서 절치부심하든 초야에 묻히든 해야지, 막부를 섬겨 녹을 받는 동시에 딴 마음을 품는 것은 그 역시 의기와 충의가 없는 비겁한 행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 노골적으로 비유하자면, '역적을 상대로 역적질을 하는 것'은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식으로 '역적의 역적이니 충신이다'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1+1 더블 역적질에 불과하다는 것. 이 역시 세조 시절 사육신의 이야기를 다룬 육신전을 보면 성삼문이나 박팽년등의 일화에서 세조(수양대군)에게 받은 녹봉은 하나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창고에 쌓아뒀다느니, 공문에도 신(臣)자를 쓰지 않고 거(巨)자를 썼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이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의미없고 유치한 말장난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당대의 성리학적 윤리로 보면 상대의 녹봉을 받으면서 자신을 신(臣)이라고 칭한 이상 그 상대에게 충성하지 않고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불의불충에 해당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육신을 성리학적 충신으로 이상화한 소설인 육신전에서는 사육신이 한동안 신하를 자처하며 세조를 섬겼다는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든 정당화하기 위해 무리하고 작위적인 설정이라도 가져다 붙일 수 밖에 없었던 것.[9] 후대에서 윤색하고 세간에서 생각하는 맹목적인 이미지의 무사도가 실제로 무사들의 전성기였던 전국시대 사무라이 계급이 종종하곤 했던 통수치기, 전직, 이직 같은 지극히 실리적인 행동 패턴과 크게 차이났던 이유가 이것이다. 추신구라 같은 에도시대와 그 이후 무사도 문학은 사실 성리학, 유교는 지이이인짜 가끔가다 특출나게 학식이 높은 불교 스님들이나 가끔 알던 본격적인 유학 전파 이전 사무라이들의 철학이나 관습보다 이미 어느정도 성리학 테이스트가 가미된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가치관에 어필하던 것이기 때문.[10] 극의 대단원이,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강항이 반색하며 조선 쪽 바다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장면일 정도. 또한 조선 복식을 갖춰입은 후지와라가 조선 복귀 소식을 들은 강항에게 "가르침을 받은 주자학을 전파하겠습니다"라고 하기도 한다.[11] 영광 출신 정치인으로 한때 대선 주자로까지 거론되던 인물이다. 다만 반환 시점에서는 그가 공동 대표를 맡은 새로운미래가 22대 총선에서 대패하고 본인도 광산구 을에서 광산구청장을 지낸 민형배 의원한테 대패하여 대권주자 반열에서 사실상 탈락한 상황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