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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5 10:52:29

후지와라 세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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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가 총명하여 고문(古文)을 익히 다룰 줄 아는 사람으로 어느 책이나 모르는 것이 없고 성품은 아주 꿋꿋해서 그들 측에서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 (강항의 간양록)
藤原惺窩[1]
1561년~1619년

1. 개요2. 생애3. 창작물에서

1. 개요

센고쿠 시대 후반기에서 에도 시대 초반기의 성리학자. 일본 최초의 성리학자라고 할수 있다.

2. 생애

1561년(오기마치 덴노 4년), 시조로부터 27세손이고 구게(公家)에서 4등급인 우림가(羽林家)인 레이제이 다메즈미(冷泉爲純, 1530 ~ 1578)의 셋째 아들로서 하리마노쿠니(播磨國) 미키노코오리(三木郡) 이사카와 장원(지금의 효고현 미키시)에서 태어났다.[2]

그는 일찍이 교토로 가서 쇼토쿠지(相國寺)[3] 에 들어가 선승(禪僧)이 되어 유교(儒敎)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유학가려고 시도했지만 갑자기 병을 얻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그 뒤 임진왜란 때 포로로 붙잡혀온 조선의 유학자 강항과의 교류를 통해, 그때까지 교토의 승려들 사이에서 교양의 일부이기도 했던 유학을 체계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학풍은 성리학을 기조로 하면서도 양명학(陽明學)도 수용하는 등 포용 분야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성리학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기 전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나[4] 일본인이 중국의 고전 문어인 한문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고, 애초에 성리학 자체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측면이 강한 학문이었기 때문에 그는 강항을 만나기 전까지 성리학의 해석에 굉장한 집착을 보였다. 1590년에 조선 통신사로 온 황윤길, 김성일 등과 교토에서 교류하며 주자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고 159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초청되어 에도에서 정관정요를 강의했다고 한다.

묘주인(妙壽院)의 승려로 있을 때 강항을 만났고, 그래서 그는 강항을 만나자 유학자로서 궁금했던 질문을 쏟아내는데 간양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에게 우리 나라의 과거 보는 절차 및 춘추 석전(釋奠)과 경연, 조정 등의 절목을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초야의 사람이라 미처 참석하여 듣지 못했다' 라고 하였고, 단지 과거, 석전 등의 대개를 알려주었더니, 중은 매양 실심하여 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내가 중국에서 나지 못하고 또 조선에서 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이런 시대에 태어났단 말인가'[5]
이런 상황으로만 보더라도 성리학에 대한 그의 집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강항의 존재는 세이카에게 거의 구세주 급. 이 때, 강항의 나이 32세였고, 세이카는 38세였다. 그가 유학자가 되면서 승적을 벗고 이름을 슈쿠(肅), 자는 렌부(斂夫), 호를 세이카(惺窩)[6]로 바꾸었다.

또한 강항과 조선 선비 포로들에게 주자학을 이해할 수 있게 육경를 써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은전(銀錢)을 주어 객지의 생활비에 보조하게 하였다. 이들이 저서한 것은 주자의 주석에 따라 일본식의 해석본을 표시한 사서오경 일본어판이었다.

세이카는 강항의 가르침에 보답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강항을 끌고온 다이묘를 설득하여 훗날 강항이 조선 귀국 허락을 받아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세이카는 강항과 헤어진 뒤에도 홀로 성리학을 연구하여 후학을 양성하는데 이는 일본 주자학에 큰 기틀을 마련한다. 그의 제자 중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년 ~ 1657년)이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강(侍講)이 된 후 도쿠가와 이에츠나에 이르기까지 도쿠가와 막부의 시강이 되었다.[7]

3. 창작물에서

효게모노에서 등장한다. 조선 양반풍의 심의에 복건을 착용한 유자의 모습으로 이에야스를 수종하며, 주인공 후루타 시게나리의 일본을 재밌고 즐거운 나라로 만들자는 인본적, 전위적 예술 사상에 강한 반감을 드러내며, 엄근진으로 요약할 수 있는 유교 중심의 전체주의적, 강압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하려는 야심을 가진 냉철한 인물로 등장하며 일본은 결국 그의 사상에 부합한 길을 걷게 된다. 등장은 짧지만 에도 막부의 지배사상을 구축한 인물인만큼 포스가 대단하다.


[1] 제목에는 후지와라 세이카라고 하였지만 후지와라우지기 때문에 를 빼서 부르는 건 격하나 다름없으므로 사실 오류다. 굳이 얘기하자면 후지와라노 세이카라고 해야 맞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그의 우지를 묘지처럼 부르는 것을 보면 어떤 착오가 굳어진 것 같다.[2] 후지와라 분가 중 가장 격이 높은 섭관가는 코노에, 이치죠, 니죠, 쿠죠, 타카츠카사 가문이다.[3] 현재의 도시샤대학 북쪽에 있는 선종 사찰[4] 전국시대 임제종 승려 닌조슈교(仁如集堯, 1483-1574) 등의 승려를 통해 주자학을 처음 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5] 問臣以我國科擧節次及春秋釋奠經筵朝著等節目 臣答以草茅之人 未及豫聞 但告以科擧釋奠等大槩 惜乎吾不能生大唐 又不得生朝鮮 而生日本此時也[6] 이 이름도 강항이 그의 서재 편액 내력을 적은 '성재기(惺齋記)'와 '시상와기(時尙窩記)'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7] 오사카 전투의 발단이자 도요토미 가문 몰락의 신호탄이 된 호코지 종명 사건을 뒷받침한 어용문인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