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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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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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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 ||||||
1월 정약종 | 2월 김환기 | 3월 이상재 | 4월 박두성 | 5월 박수근 | 6월 조지훈 | |
7월 성삼문 | 8월 박효관 | 9월 김병연 | 10월 신숙주 | 11월 김승호 | 12월 손진태 | |
200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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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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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 ||||||
1월 정정열 | 2월 이예 | 3월 강경애 | 4월 신동엽 | 5월 임윤지당 | 6월 김종직 | |
7월 강정일당 | 8월 이규보 | 9월 나철 | 10월 이승휴 | 11월 효명세자 | 12월 최북 | |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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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명 石宙明 | |
<colbgcolor=#808080><colcolor=#fff> 출생 | 1908년 10월 17일[1] |
평안남도 평양부 융덕면 이문리 (現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 |
사망 | 1950년 10월 6일[2] (향년 41세) |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 |
묘소 |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골 |
본관 | 광주 석씨[3] |
호 | 호접선(蝴蝶仙)[4] |
부모 | 아버지 석승서, 어머니 김의식 |
형제자매 | 3남 1녀 중 2남 (누이동생 석주선) |
학력 |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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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나비 연구자, 박물학자[5], 언어학자[6], 역사학자[7]이다. 한국의 생물분류와 제주어 연구를 주도한 한국 박물학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나비 사랑에 한평생을 바친 인물로 가장 유명하며, 후술하겠지만 과거 일본 학자들이 대략적으로 연구한 대한민국 나비에 대한 일부 오류도 바로잡았다. 현재 대한민국에 서식하는 나비들의 한국 명칭은 모두 석주명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2. 생애
1908년 10월 17일[8] 평안남도 평양부 이문리(里門里)에서 태어났으며 광주 (廣州) 석씨 평양파의 30대손인 석승서(石承瑞)와 전주 김씨 김의식(金毅植)의 3남 1녀 중 2남으로 자라났다.송도고등보통학교,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鹿児島高等農林学校)[9]를 졸업하였다. 집이 평양부에서 대단히 큰 요릿집을 한 터라[10] 어려서는 매우 유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치하라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연극을 한 게 독립운동을 부추겼다며 관공서에 불려가 혼이 나거나, 아버지가 요릿집을 하면서 독립군에게 자금을 보태다 들켜서 문초를 당한지라 애국심이 커졌다. 이후 고등학교에서 덴마크를 비옥하게 만든 엔리코 달가스에 대해 배우자 역시 농업을 연구하여 조선의 농토를 개선하려고 했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는 농업에 흥미를 잃었다가 (아마도 농작물의 병충해에 관해) 곤충에 관심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어 곤충학으로 넘어간다.
그는 총 13년 동안이나 중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처음에는 함흥부의 영생고보 생물교사로 부임하여 2년간 재직하였다가 나중에는 그의 스승인 원홍구[11]를 따라서 개성 송도고보에 재직하면서 전국 각지로 나비 채집여행을 떠났다. 나중에 그는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의 의뢰를 받아서 한국의 나비들의 동종이명 총 목록을 작성한 조선산 접류 목록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을 1940년에 출간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나비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곤충학자들이 게으르게 분류하며 종류만 921종으로 늘려놓은 나비를 독자적으로 연구하여[12] 정확하게 248종으로 분류하였다. 특이한 나비를 보면 그걸 잡으러 몇 시간이나 쫓아 산과 들을 헤매기도 했다고 한다. 배추흰나비를 16만 마리나 사육하며 개체변이를 연구하기도 했고, 국내 대부분의 나비 이름은 그가 지어주었다. 특히 지리산을 헤매며 지리산팔랑나비를 발견한 사례는 유명하다. 동시대에 교류한 학자로는 조복성 선생이 있으며, 그가 발견한 나비의 종류와 이름은 '조선산 나비목록' 등에 저술되어 있다.
또한 그는 '조선적인 생물학'을 주창하면서 당대의 여러 분야의 학자들과 함께 국학 운동을 전개하여 펼쳤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면서 학문적인 성과물은 세계의 학자들로부터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국제주의자이기도 하였다.
2.1. 인간 관계
석주명의 여동생 석주선(石宙善 1911~1996)도 유명한 인물로, 한복 등 한국의 전통의상 및 장신구 연구의 선구자였다. 1.4 후퇴 때 피난을 가면서 자신의 자료들과 함께 석주명의 나비 표본 및 연구 문서들을 함께 챙기려 했는데, 석주선의 자료는 옷이란 특성상 부피가 너무 커서 모두 가져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석주명의 나비 자료만 챙기고 자신이 연구한 복식 자료는 보따리에 싸서 편지를 써놓고 기둥에 매달아 놨는데, 안타깝게도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단 한 벌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석주선은 처음부터 다시 옷들을 모아야 했고, 이렇게 모은 옷들은 단국대부속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기증자의 이름을 따 석주선기념박물관을 세웠다.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긴 것과 별도로 인간관계는 집안에서나 집밖에서나 엉망이었다.
부인 김윤옥[13]과 사이가 매우 나쁘기로 유명해서, 이런 가정사가 당시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석주명 본인의 성격이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외골수인데다[14] 부인은 정반대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심한 가정불화 끝에 딸 하나만 남긴 채[15] 1년에 걸친 재판 끝에 결혼 4년 만에 이혼했다.[16] 당시 신문에서는 '꽃을 모르는 나비학자'라며 그의 사생활을 가십거리로 다뤘다. 훗날 딸의 증언으로는 '자세한 것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고모 석주선이 오빠를 감싸주는 것 때문에 둘 사이를 악화시켰다'고 한다. 특히 부인 김윤옥과 시누이 석주선 간 관계는 매우 나빴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석주명이 고지식하면서 가정에 무관심한 것이지만[17].
특히 석주명은 완벽주의자에다 고집이 너무 강해서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대인관계도 영 좋지 않았다. 제자들에게도 잘 해주는가 하면 질책을 많이 하다 보니 역시 관계가 좋지 않았다. 휘하의 실습생들에게도 갑질을 하여 그들이 석주명의 갑질에 빡친 나머지 사과하라고 시위까지 했는데, 석주명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오히려 더 심하게 질책했다. 결국 휘하 실습생들이 화가 치밀어 집단으로 그만 둔 탓에 석주명은 휘하에 실습생이 한 명도 없어 혼자서 연구해야 할 정도였다. 지금보다 상하관계가 훨씬 엄격하던 시절이라 요즘 같으면 갑질이라고 비난받을 만한 행동도 당연하게 넘어가곤 했는데도, 아랫사람들이 스승에게 집단으로 항의할 정도였으니 석주명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2.2. 일화
학창 시절 공부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점심 시간에도 땅콩을 먹고 걸어다니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는 교사가 되고 나서도 연구에 열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8]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의 오류를 바로 잡을 정도로 학문적 성취를 이룬 터라 생전에 학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다. 게다가 신분이 일반 교사라 주변에서는 '기껏 교사 주제에 잘난 척은...' 이러면서 냉소를 보냈지만, 어느 날 도쿄에서 온 고생물학자가 그를 찾아 온 뒤로는 주변의 평이 확 달라졌다고 한다. 일설로는 도쿄에서 다른 곳으로 가던 외국인 교수였는데, 길을 헷갈린 김에 학자로서 관광을 나왔다가 석주명이 연구하던 개성의 연구소를 소개받아서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석주명 본인은 누추하고 그렇게 전문기구 없이 누추한 나비연구소라고 생각해 소개했는데, 그 교수는 참으로 과학적이고 이렇게 전문적으로 나비를 연구하는 곳은 처음 봤다며 극찬했다고 한다.[19]
지독한 일 중독자였다. 학교에서는 연구실과 교실 사이의 왕복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교 측에 요청해 자신이 맡은 학급을 연구실이 있던 박물관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집에서도 방문한 손님을 10분 이상 만나지 않았고, 연구에 방해되지 않도록 서재의 문을 걸어 잠그고 서재와 안방을 연결하는 벨을 달아 볼일이 있으면 그걸로 부인을 불렀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다 보니 부인이 벨 호출을 정말 싫어하였고 부부관계가 크게 벌어졌다는 것. 게다가 부인이 아파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도 간호는커녕 나비 채집을 하러 가버렸다고 하니 남편으로서는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일제강점기 말에 이혼했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나비 표본을 확보한 비결은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때 200마리나 되는 나비 채집 숙제를 내는 것. 이것이 초딩 곤충채집 여름방학 숙제의 시초가 됐다고 한다. 석주명이야 온갖 지방에서 사는 학생들 덕분에 채집여행을 다닐 수고는 굉장히 줄였겠지만 학생들은 곤충 채집한다고 고생해서 이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20]
"긴지부전나비 — 학명(學名)과 일본명(日本名)에 일치(一致)시켜서 긴지를 땄다. 긴지는 岡島銀次氏의 이름이요 필자(筆者)가 씨(氏)에게 헌(獻)하여 명명(命名)했던 것이다. 씨(氏)는 필자(筆者)의 은사(恩師)이고 일본 곤충학회(日本昆蟲學會) 회장(會長)이었었다."
- 석주명 저, 『조선(朝鮮) 나비이름의 유래기』, 서울, 백양당, 1947, p.9.
- 석주명 저, 『조선(朝鮮) 나비이름의 유래기』, 서울, 백양당, 1947, p.9.
석주명의 저서 『조선 나비이름의 유래기』에 따르면 부전나비과 중 '긴지 부전나비'[21]가 있는데, 이 나비는 자신의 두 번째 스승이었던 오카지마 긴지(岡島銀次)교수를 존경하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석주명이 조선의 나비를 연구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을 정도로 교육자로서 인품이 훌륭하였다. 계몽사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석주명(계몽사)과 사계절에서 사계절 아동문고로 펴낸 석주명 위인전에 의하면, 여름방학에 오카지마 긴지 교수는 대만에 곤충채집 여행을 갔다. 비오는 날 제자들에게 다 좋으니 곤충을 채집하고 오라고 하자 다른 학생들은 다 못 잡았는데 석주명만이 하루살이들을 잡아왔다고 한다. 비를 피해 나무 그늘에 날아온 하루살이들을 삼각지(삼각형 기름종이)에 일일이 담아서 보여주자 오카지마 교수는 감명받아 끈기 있는 석주명 학생을 눈여겨 보았다. 학업을 마치는 4학년이 되자 석주명을 집에 초대하여 "다른 사람의 손이 닿기 전에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나비 연구에 착수해야만 하네. 10년만 필사적으로 해보게."라고 조언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전해진다.[22]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23](현 서귀포시 영천동 소재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의 연구소장을 맡았다. 이 시기에 제주도 곳곳을 답사하며 나비뿐만 아니라 자연, 방언, 인문 분야를 아우르는 학문적 연구로 제주도 방언집 등 제주도 총서 6권을 남겨 제주학 연구의 기초를 세웠다.[24] 현재 서귀포시는 옛 생약연구소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여 2020년 6월 24일 국가등록 문화재 제785호로 등록을 완료하였으며, 2025년에 리모델링 및 석주명선생 관련 유물자료 수집과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한다. 2023년 5월 4일 시점에서는 2006년부터 추진했지만 아직도 결실을 맺지 못했다며 건립추진위원회가 학계의 여러 인물들과 함께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
2.3. 사망
광복 이후에도 나비 연구에 최선을 다했지만 6.25 전쟁의 참상을 피해가진 못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불려가서 조사받기도 했고[25], 타자기로 연구기록을 정리할 때는 간첩질로 의심받을까봐 삼복 더위에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게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국립과학관이 전소되며 그가 평생 동안 채집한 나비 표본 75만 점도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버렸다.[26]1950년 10월 6일, 국립과학관의 재건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친구가 "고구마를 삶았으니 먹고 가라"고 붙잡는 통에 시간을 지체해서 허겁지겁 뛰어가다가 대낮에 술을 마시던 국군들 중 1명과 부딪혔는데 그들은 "저기 조선인민군 소좌가 간다."라며 석주명을 붙잡아 총으로 쏴 죽이고 "빨갱이 두목을 잡아 죽였다."라고 낄낄대며 시신을 가마니로 싸서 개천에 던졌다고 한다.
행인들 중에는 석주명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술에 취한 채 총을 들고 설치는 자들의 기세에 눌려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 석주명은 "나는 공산당이 아니오. 나는 석주명이라 하는 나비 학자요!"라고 외쳤지만 술 취한 사내는 "평안도 사투리를 쓰니 북한군 장교다!", "나비나 인민군이나 다 같은 버러지들이지."라고 했다. 석주명의 시신은 군인들이 가마니에 싸서 강물에 던져 버렸으나 이후 회의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그를 찾던 가족과 친구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이 사건은 외신 보도까지 되었음에도 석주명을 살해한 군인들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강경한 반공 성향을 가진 서북청년단 출신들로 구성된 국군 부대였을 것이라고 한다. 평안도 사투리를 단번에 맞혔다는 것도 심증으로 볼 수 있다.
20세기에는 석주명 박사를 다룬 어린이 위인전이나 동화책에서 북한군이 살해했다, 전쟁통에 나비 연구만 한다고 암살당했다, 폭격이나 사고로 사망했다 등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석주명 이야기는 그의 사인을 사실대로 알려주면 어린 학생들이 충격을 받을까 봐 그냥 일생을 나비 연구에 바쳤다고만 쓰기도 한다.
2001년 웅진출판사에서 출간한 '만화로 만나는 20세기 큰 인물'이라는 위인전에서는 제대로 다뤘다. 국군이 석주명 박사를 사살한 후 시체에 침까지 뱉고 거적때기로 대충 덮어둔 걸로 나온다.
3. 저서
- 조선나비이름의 유래기
국립생물자원관 정보마당 생물다양성 E-Book에서 스캔본 열람 가능. - 조선산 나비총목록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Korea)
한국산 나비에 대한 잘못된 명명을 바로잡는 책이 바로 이 책. - 한국산접류분포도
- 한국산접류의 연구
- 제주도방언집
- 제주도의 생명 조사서
4. 제주시 석주명 동백나무 벌목 사건
나비문화센터 앞 영천동 주민센터 방면에 있는 영천동 재활용도움센터에 있던 1944년에 석주명이 심었던 동백나무를 벌목한 사건.
벌목된 동백나무는 태풍 피해 우려 및 해충 유발에 관련된 민원으로 인해 베어졌고 법적으로 가로수가 아니기 때문에[27]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5. 여담
- 흔히 '나비 박사'라고 불리지만, 석주명은 대학교수로 임용된 적도 없고 박사 학위도 없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차별 때문에 일정한 수준 이상의 학력을 쌓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박사는 해당 분야에 박식한 전문가를 의미하는 관용어이다. 동아사이언스 기사를 참고하면 좋다. 비록 실제 학력은 학사 학위로 끝이지만, 곤충학 박사의 오류를 바로잡는 업적을 남겼고, 한반도의 나비 연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서 어쨌든 '나비 박사'라는 별명이 너무 적절해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도 '나비 박사'라는 이름으로 석주명 박사의 일화가 나온다.
- 송도고교를 그만두고 나올 때 보관하고 있던 표본 60만 점은 나비들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화장하라는 어느 스님의 조언에 따라 중요하거나 품질이 좋은 것은 제외하고 화장했다고 한다. 사실 관리할 사람이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 평안도 출신이라 자신의 이름을 석두명이라고 발음했다. 조선산 나비총목록의 영문판에도 자신의 이름을 'D. M. SEOK'이라고 표기했다.
- 한국어판 위키백과에 의하면, 당시 유행하던 에스페란토 운동에 관심이 많아서, 독학으로 에스페란토를 익혔다고 한다. 당시에는 시인 임화가 가입한 것으로 유명한 카프(KAPF)[28]가 공식명칭인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에스페란토식 명칭의 약자에서 온 것이었을 정도로 에스페란토 열풍이 불던 시기였는데, 석주명도 그 영향을 깊게 받은 것이다.
- 1964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으며 1998년에는 문화관광부의 4월의 문화인물에 선정되었고 2003년에는 서귀포시 토평동 네거리에 석주명 기념흉상이 건립되었다. 2005년에는 서귀포시에서 석주명 기념사업회를 창립하였고 2009년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1] 음력 9월 23일.[2] 42번째 생일을 불과 11일 앞두고 사망했다.[3] 평양파 30대손.[4] 호접은 나비, 선은 신선 선이기에 종합하면 나비의 신선이란 뜻이다. 그의 나비 연구 업적을 잘 반영하는 이름이다.[5] 곤충 등 생물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소실된 국립박물관 재건을 돕기도 하였다.[6] 에스페란토로 논문을 내고 교과서를 저술하는 한편, 제주도 연구소 재직 시절에 제주 방언을 연구하기도 하였다.[7] 제주어 연구과정에서 제주도 향토사를 같이 연구하였다.[8] 예전에는 1908년 11월 13일이라고 적혀있었지만 출생일에 오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누이동생이었던 석주선이 1968년 11월에 발간한 석주명의 유고집 '제주도 수필'을 발간하면서 발문에 오빠는 음(陰) 9월 23일(1968년 11월 13일)이 바로 오빠의 회갑이어요.라고 서술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다른 작가들이 그의 생년월일을 1908년 11월 13일로 오해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석주명의 회갑일인 196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 11월 13일이지만 그가 태어난 190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 10월 17일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왔던 석주명의 생년월일은 1908년 10월 17일로 정정되었다.[9] 현재 가고시마대학(鹿児島大学) 농학부[10] 종업원이 100명에 달했다.[11] (1888~1970) 평안북도 삭주 출신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식물학자 겸 조류학자로 석주명이 송도고보에 재학중이던 당시에 그의 스승이기도 하였으며 나중에 석주명이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하면서 선후배 관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석주명은 원홍구를 선배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막내아들은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겸 한국조수 보호협회 회장, 국제 환경과학 연구소 이사장, 국제 조류학회 (IOC) 이사이기도 한 원병오 교수로, 2020년 4월 9일 사망했다.[12] 전국을 돌아다니며 나비 75만여 마리를 수집하여 비교하였다. 당시 학계는 신종 만들기에 급급해 약간 특징이 다르면 무턱대고 새로운 종으로 분류하곤 했는데 석주명이 바로잡은 것. 식물학 쪽에서도 나카이 다케노신이 속, 종, 아종을 대책없이 늘리는 짓을 하다가 학계에서 엄청나게 두들겨맞았다. 식물분류학쪽은 좀 더 심한게, 전세계의 식물학자들이 공명심에 눈이 멀어 조금만 다른 점이 포착되면 여지없이 신종으로 발표하는 짓을 했다. 현재는 DNA분석에 힘입어 대거 정리되고 있는 추세.[13] 김윤옥은 두 번째 부인으로, 남편에게 복종만을 강요하던 당시의 여성관을 거부하는 신여성이었다. 사실 석주명은 첫 번째 부인이 자식도 없이 요절한 후 재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보다 못한 부모가 김윤옥과 중매를 서 주며 압박해서 마지 못해서 재혼했다. 즉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으니 처음부터 금슬 좋게 지내기가 힘든 관계였다.[14] 얼마나 고지식했는지 돈이 있는데도 가방이 다 떨어질 때까지 썼다. 보다못한 부모와 부인이 바꾸라고 해도 절대 안 바꾸었다. 게다가 신혼여행 가서도 부인이 식당에 가서 사먹자는 것을 거부하고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이러니 부부관계가 초반부터 틀어졌다. 게다가 연구에 몰두한다고 집에도 오지 않고 연구실에만 있었고, 급여도 연구비로 대부분을 써버리고 부인에게 생활비를 적게 주니, 생활고에 시달린 부인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당시 교사가 안정적인 봉급을 받고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 1등 신랑감으로 꼽혔는데 현실이 이랬으니...[15] 딸 이름은 석윤희인데, 아내가 데려가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나중에 석윤희는 미국으로 이주했고 북일리노이 주립대 교수로 재직중이다.[16] 게다가 자신이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부인을 돈타령만 하는 속물이라고 몰아붙이며, 끝까지 부인과 화해하거나 가정에 신경쓰지 않았다. 나중에 그와 인터뷰한 기자가 이혼에 대한 소감을 묻자 "오히려 편하다."라고 했다. 한 마디로 애초부터 가정에 신경 쓸 생각 자체가 없었던 셈. 워커홀릭 중에서도 상 워커홀릭.[17] 물론 집안의 강요로 인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한 탓에 결혼 생활에 무심했던 것도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뒷날 대통령이 된 박정희도 자신과 똑같이 정규교육을 받은 여성과의 연애결혼을 원했는데도 불구하고, 집안에서 김호남이라는 여성과 강제로 결혼을 시킨 바 있었는데, 결국 원치 않는 결혼인데다 본인의 이상형과는 정반대로 일자무식이었던 김호남에 정을 붙이지 못한 그는, 부모가 모두 사망한 뒤에 훗날 영부인이 된 육영수와 교제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가차없이 쫓아내 버린 바 있다. 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정략결혼을 실시하는 일이 흔한 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양상인데, 이런 이유로 인해 타인과 불륜을 저지르거나 배우자를 무시하거나 내쳐버린 경우라면, 결혼을 강요받은 쪽이 어느 정도 동정을 받기도 한다. 이 때문에 박정희의 독재자로서의 잔인한 면모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의 연애사만큼은 절대 비난하지 않는다. 물론 육 여사와 결혼한 후에도 계속 여색을 밝혀댄 것은 비난을 못 피하지만.[18] 그리고 두부도 좋아했었는데 이유는 먹는데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또한 이런 일화를 반영했는지 웅진출판사의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에서는 석주명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생선이라고 나온다. 그 이유가 가시를 발라낼 시간이 없어서라고(...). 이건 실화가 아니라 창작이니 유의.[19] 웅진출판사의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에서는 좀 더 살이 붙었는데 운전사가 경성(오늘날의 서울)으로 가려던 걸 개성으로 헷갈려서 개성에 도착했고, 나비의 보존 및 전시 방법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외국 학자들과의 표본 교환은 물론 연구비 지원까지 약속했다.[20] 현재는 곤충채집 숙제가 폐지되었다.[21] 지금은 깊은산부전나비로 정정되었다.[22] 훗날 석주명이 학자로 성공하여 조선산 나비총목록을 완성했을 때 석주명의 모교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의 명예교수로서 책을 추천하기도 했다.[23] 약초를 재배,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0년대에 건립된 시설이다.[24]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생물학과 문화인류학, 민속학 및 비교언어학이 박물학에서 갈라져나온 지가 얼마 안됐던 시점이라서, 생물학자가 생물학 연구를 하다말고 현지의 언어나 문화, 풍속에 대해 연구하는 일이 잦았다. 찰스 다윈과 함께 현대 진화론의 근간을 세운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도 생물학 연구를 위해 남아메리카를 탐험했을 때, 현지 원주민들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례도 있다. 생물학이 박물학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유명한) 물리학자인 에르빈 슈뢰딩거가 저서인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물리학적 관점에서 생물학을 재정립한 뒤의 일이었다.[25] 그 전에 상술했듯이 부인이랑 이혼했는데 오히려 이것이 '나비에 미친 사람'이라는 좋은 증거가 돼서 딱히 의심받지 않고 풀려났다고 한다.[26]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에서는 "과학관 지붕에 하얀색으로 십자를 그려놓으면 병원인 줄 알고 폭격을 안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미군의 폭격에 의해 국립과학관이 전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석주명이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기보단 작가가 아쉬워서 넣은 장면으로 보인다.[27] 로드뷰를 확인하면 이전부터 여기에 쓰레기를 버려왔었고 지적편집도를 확인하면 나비문화센터 소유땅에 있는 나무다[28] 에스페란토식 명칭이므로 정확히는 '코아뽀포'라고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