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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1:52:20

김현감호

1. 개요2. 내용3. 해석4.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의 대표적인 사원연기(寺院緣起) 설화이자, 설화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이다. 김현감호(金現感虎)는 "김현을 사랑한 호랑이" 또는 "김현이 호랑이를 사랑하다"라는 뜻인데, "김현과 호랑이가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다"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삼국유사》 5권 <효선>편(孝善篇) -김현감호-와 《대동운부군옥》 15권에 수록되어 있다. 《대동운부군옥》에선 《수이전》에서 인용한 것이라며 -호원-(虎願)이라는 항목 아래 줄거리가 간략하게 요약되어 실려 있는데 원래는 -노옹화구-나 -죽통미녀-와 함께 신라시대의 《수이전》에 실린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2. 내용

옛날 통일신라의 도읍인 경주에 흥륜사[1]라는 큰 절이 있었다. 매년 음력 2월이 되면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아름다운 연등불을 달았고, 남녀들은 흥륜사 전탑에서 복을 빌며 탑돌이를 했다. 다만 모두가 경건한 마음으로 온 것은 아니었고, 당연히 법회를 빙자해 남녀가 서로 만남을 갖는 장이 되기도 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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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대 열조 원성왕의 치세(785~798 재위)때 김현(金現)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도 사람들 틈에 끼어 탑돌이를 하며 탑을 돌기 시작했는데, 밤이 깊어 사람들이 없어져도 그는 탑돌이를 계속했다.[3] 하늘에서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던 중 김현은 뒤에서 탑을 돌고 있던 처녀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처녀는 고개를 숙였고, 김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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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돌이가 끝난 후 김현은 처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노라고 고백했다. 처녀는 부끄러워 했지만 손을 빼지도 달아나지도 않은채 살며시 미소만 지었다. 이에 김현은 기쁨에 차서 처녀를 끌어안았고 처녀도 고운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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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처녀가 이제 가야 한다고 입을 열었다. 김현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노라 말했으나 처녀는 한사코 사양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처녀의 뒤를 따라갔는데 서쪽 산기슭에 있는 조그만 초가집에 들자 안에 있었던 할머니가 누구냐고 물었고, 처녀가 답하자 할머니는
"좋은 일이기는 한데 차라리 없는 일인 것만 못하구나"
라며[4] 처녀의 오빠들이 나쁜 짓을 할 것을 우려해 김현을 숨기라고 말했다.

처녀가 김현을 숨기자 커다란 호랑이 세 마리가 집에 들어왔다. 호랑이들은 사람 냄새가 난다며 그를 잡아먹을 것이니 당장 내놓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호랑이들을 꾸짖었지만 호랑이들도 지지 않으며 사람을 내놓으라고 계속 윽박질렀다. 그러자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함부로 사람을 죽인 죄로 너희들 중 하나를 죽이겠다."
라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호랑이들이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을 때 처녀가 앞으로 오라비들이 못된 짓을 하지 못하게 약속할테니 자신이 대신 벌을 받겠다고 말했다. 호랑이들은 안도하면서 도망쳤고 처녀는 김현에게 자신이 둔갑한 호랑이임을 밝혔다. 그러면서 김현 같은 이를 낭군으로 만나 너무나 행복했다고, 하지만 자신은 이제 천벌을 대신 받아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처녀는 날이 밝으면 자신이 호랑이가 되어 사람들을 해칠 것이니 그가 호랑이를 잡아 없애서 벼슬을 받으라고 이른다. 김현은 기겁하며 거절하지만 처녀는 자신은 이미 죽기로 한 몸이니 낭군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그리고 자신이 호랑이 일족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고 죽을 수 있다면 오히려 잘된 것이라며, 만약 자신을 불쌍히 여긴다면 자신을 위해 사찰을 지어달라고 이른다.

다음날 사납고 덩치 큰 호랑이가 사람들을 해치며 돌아다녔고, 아무도 호랑이를 막을 수 없었다. 원성왕이 그 소식을 듣고 호랑이를 잡는 이에게 높은 벼슬[5]을 주겠다고 선포했는데, 김현이 대궐로 가서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하자 먼저 관작을 주고서 그를 격려했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 속으로 들어가 호랑이를 마주하자 호랑이는 처녀로 변해 김현을 맞이한 다음 자신의 말대로 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자신으로 인해 상처입은 사람들은 흥륜사의 간장을 상처에 바르고 절의 나발 소리를 들으면[6], 깨끗이 나을 것이라 이르며
"죽더라도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
는 말을 남기고 김현이 가지고 있었던 칼을 뽑아 자기 목을 찌른 뒤 호랑이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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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은 호랑이를 감싸안고 슬피 운 뒤 피 묻은 칼을 들고 숲을 나와
"내가 호랑이를 잡았다."
고 사람들에게 외쳤는데,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었다. 김현은 처녀의 말대로 사람들을 치료한 후 높은 벼슬에 올라 서쪽 시냇가에 호원사(虎願寺)[7]라는 절을 지었다. 이후 그는 틈이 나는 대로 승려를 호원사에 초청해 《범망경》을 강독하는 법회를 열어 호랑이 처녀의 명복을 빌었으며, 호랑이 처녀에 대한 이야기는 죽기 직전에서야 《논호림》(論虎林)이라는 제목의 글로 지어서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3. 해석

김현과 호랑이 처녀는 탑돌이를 하다가 눈이 맞아서 성관계를 하게 된다.[8]

사람과 동물(호랑이)이 서로 사랑했다는 점에서 이물교구설화로 분류되는 설화이다.

한국 설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둔갑하는 호랑이' 이야기이지만, 러브 스토리라는 파격적이면서[9] 감성적인 내용이 특징이다. 죽은 호랑이 처녀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김현이 호원사를 지어주었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적인 색채를 엿볼 수 있고, 새드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에서 진심으로 인간이 되고 싶어 탑을 돌며 인간이 되길 빌었고,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졌던 호랑이 처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연은 중국의 《태평광기》에 나오는 <신도징> 설화[10]를 함께 싣고, 김현과 신도징 모두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사람과 맺어졌지만 신도징의 아내는 끝내 짐승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사람이기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김현과 만난 호랑이 처녀가 훨씬 낫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하에 탑돌이에 온 김현이나 자기 일족의 죄를 대신 속죄할 방법을 찾고자 탑돌이에 온 호랑이 처녀나, 어떤 것이든 간절하게 염원하고 비는 마음을 모두 부처가 감응하고 이루어준 결과가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니었겠느냐고 평가했다.

고려 후기의 사람인 최자의 저서 《보한집》에서도 비슷한 얼개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주인공이 김현과 호랑이 처녀가 아닌 노승과 소년으로 등장하며, 죽은 뒤에 승려로 환생해서 다시 만났다는 결말로 끝나는 등 불교적인 색채가 더 진해졌다.#

만화가 함형숙이 김현감호의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그린 단편이 단편집 《파사》에 실려 있다.

4. 관련 문서



[1] 제23대 법흥왕불교를 도입하면서 기존 토속신앙의 중심지였던 천경림에 지은 절이었다.[2] 지금도 법회나 예배를 빙자해서 친교를 쌓거나, 애정행위를 하려는 경우가 있다. 과거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불교를 비판한 것 중 하나가 "법회랍시고 혈기왕성한 젊은 것들이 모여서 온갖 추문을 만든다."는 것이었다.[3] 김현이 밤늦게까지 탑돌이에 남아서 빌 정도로 간절했던 소원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추측이나 해석에 따라, 김현감호 설화의 해석도 달라질 수 있는데, 자신의 짝을 만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을 수도 있고, 자신의 입신출세를 기원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이야기의 결말을 통해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마저도 허상'이라는 불교적 인생무상의 쓸쓸함이, 후자 같은 경우에는 '출세하고 싶다는 소원은 이루었지만 대신 사랑은 잃은' 김현의 공허함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읽고 난 뒤에는 긴 여운이 남게 된다는 점이 '김현감호'라는 이야기가 1,000년의 세월을 넘어 사람들 사이에 오랫동안 살아남게 해준 한 요소일 것이다.[4] 그도 그럴 것이, 처녀의 정체는 호랑이였기 때문이다.[5] 정확하게는 2급의 관작을 주겠다고 했다.(원문: "戡虎者爵二級.")[6] 일연에 따르면 그가 살고 있었던 고려시대까지도 들짐승에게 다친 상처에 이 치료법을 사용했다고 한다.[7] 호랑이의 소원을 담은 절이라는 뜻으로, 절은 지금의 경주 황성공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8] 이렇게 부부가 아닌 남녀가 관계하는 걸 야합이라고 하는데, 신라의 개방적인 성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장 삼국통일의 두 주역인 김유신문무왕도 이렇게 혼전임신으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만명공주가 부모인 숙흘종만호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관가야의 마지막 군주였던 구형왕의 손자인 김서현과 사랑의 도피를 해서 김유신을 낳았고, 태종 무열왕은 김유신의 꾀로 문명왕후와 혼전관계를 하여 문무왕을 낳았다. 대를 이은 속도위반 결혼[9] 특히 탑돌이를 하다가 두 사람이 만나 정을 통하는 장면이 파격적인데 원문에는 '탑돌이를 끝내자 으슥한 곳으로 가서 정을 통했다고 나온다.[10] 당나라 제9대 덕종의 치세때 한주 십방현의 현위였던 신도징이라는 사람이 부임지로 가는 길에 만난 마을에서 만난 여성에게 반해 구애해서 아내로 삼고 부임지로 함께 데려가 1남 1녀의 자식을 낳고 살았으나, 아내는 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두고 본가로 돌아가는 길에 처음 만난 마을에 들러 예전에 자신이 살던 집에 가서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 쓰고 호랑이로 변해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