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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7:59:49

금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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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있으나 고고학적 실체는 불분명한 6가야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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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국[1] | 소나라[2]
金官國[3] | 素奈羅[4]
파일:gukjungbak_24.jpg
국립중앙박물관의 지도
<colbgcolor=#3d428b> 존속 기간 42년 ~ 532년 (약 490년)
멸망 이후 신라
위치 경상남도 김해시, 부산광역시 일대[5]
수도 김해 신답평(新畓平)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 원수 왕(王)
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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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
구형왕
종교 무속신앙, 불교, 도교
국성 김(金)

1. 소개2. 국명3. 역사
3.1. 건국 신화3.2. 기원전~1세기(건국)3.3. 2세기~4세기 (전성기)3.4.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 (위기)
3.4.1. 신라 · 가야의 문화상을 바꾸어 놓았다3.4.2. 신라 · 가야의 문화상마저 바꾸어 놓지는 않았다
3.5. 5세기~6세기 (쇠퇴기)
4. 고고학으로 본 가야의 흥망성쇠
4.1. 기원전 2세기~1세기: 금관국의 모태가 될 김해 지역에서의 '국(國)'의 출현4.2. 기원후 2세기 후엽~3세기 중후엽: 금관국의 대두4.3. 3세기 후엽~4세기 중엽: 삼국 시대 '가야'로서의 금관국의 출현과 그 전성 시기4.4. 4세기 중후엽: 사로국의 대두, 그리고 경자년의 전쟁으로 인한 금관가야의 몰락4.5. 5세기 이후~532년: 금관국의 잔존과 멸망
5. 금관가야의 국력 수준6. 후대의 전래7. 미디어에서의 등장8. 주요 유적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clearfix]

1. 소개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를 중심으로 했던 가야계 고대국가. '금관가야(金官伽倻)', '가락국(駕洛國)' 등의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따르면 개국 군주는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구형왕 대에 이르기까지 490년(~ 532년) 동안 유지되었으며 10대[6]의 왕이 있었다. 대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10대 구형왕까지를 왕조로 보나, 김해 김씨 족보에는 11대 말왕이 마지막 왕으로 기재되어 있다.[7]

4세기 중반까지 김해 바깥 여러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 강국이자, 가야연맹설에 따르면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국이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동쪽으로는 황산강(黃山江, 낙동강), 서남쪽은 바다(蒼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금관국 전성기의 이른바 금관국 중심의 가야 연맹체의 영역으로 추정된다. 이런 금관국의 위세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방 정벌이 이루어진 이시품왕 대에 이르러 쇠퇴한 것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고구려 침입 이후인 5세기 초반까지는 국가의 위세가 기울지 않았다는 수정론도 있다.[8]

현재 정설은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멸망까지는 아니지만 큰 피해를 입었고 가야 지역의 주도권을 내륙에 있는 반파국에 빼앗겼으며 작은 나라로 존속하다가 신라의 국력이 오른 6세기경에 항복,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금관 가야와 관련된 주요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부산 복천동 고분군이다.[9]

2. 국명

일반적으로 '금관 가야'라고 불리고 있으나, XX 가야란 이름은 훗날 태조 왕건이 통일 이후 행정 제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가야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정착한 것으로 가야가 존속했을 당시 불리던 정식 국명이 아니다. 이는 모든 가야제국에 해당된다.

그러나 금관국의 경우는 기록에서 앞뒤 수식어 없이 그냥 '가야'(혹은 같은 계통의 다른 표기로 보이는 가라, 구야 등)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이 그냥 '가야'라고 불리는 대상은 시기마다 달라지는데, 대체로 그 일대에서 전성기인 나라를 대표격으로 가야라고 부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일본서기 등에서 가야 후기에는 대가야를 주로 그냥 가야라고 불렀다. 원래 '가야'라는 말이 이 김해 금관국의 이름 중 하나, 즉 가야라는 이름의 원조가 여기였는데[10] 나중에 고령 대가야가 가야권의 대표적 지위를 대신 가져가면서 고령 대가야 혹은 가야권 전체를 가야라고 부르게 의미가 변화하고, 원조 가야였던 금관국이 가야라는 이름을 못 쓰고 남가라,[11] 금관 같은 다른 이름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사서에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한조) · 구야한국(狗邪韓國, 왜인조)이란 이름으로써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국(金官國), 일본서기와 일본서기에서 인용한 백제기에서는 수나라(須那羅), 남가라(南伽羅) 등으로 등장한다.

특히 일본서기에는 가라(加羅) · 남가라(南加羅, ありひしからのくに, 아리히시카라노쿠니)[12] · 남만(南蠻) · 수내라(須奈羅) · 소내라(素奈羅) 등의 여러 가지 이칭으로 등장하는데, 이 중 수내라(須奈羅) · 소내라(素奈羅)와 같은 이름은 금관(金官)이란 국명과도 연관이 있는데, 즉 '나라'라는 뜻이며, 이것은 구야국이 당시 의 주산지였음에 기인한다.

한편으로 임나(任那)라고 불렸을 가능성도 큰데,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임나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나빠졌지만 일본 쪽 기록에만 나오는 명칭은 아니다. 삼국사기 강수 열전에서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고 했고, 최치원이 지은 진경 대사 탑비(924년)에 '임나왕족(任那王族)'이 있다.[13] 그리고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임나가라(任那加羅)가 나온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대체적으로 임나는 변한(가야)의 여러국가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며,[14] 임나일본부설로 인해 이 표현에 대해서는 현대의 거부감이 심해졌다.

책자마다 다르지만 전기 가야 시대의 국명은 가락국으로, 후기 가야 시대에는 금관국으로 통일해서 표기하는 책도 있다. #

현재 학계에서 '구야국'이라는 표현은 보통 초기 금관국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으며, 일본서기의 기록은 일관적이지 않고 또 '남가라', '남만' 등의 표현은 전자는 굳이 자신을 그냥 가라도 아닌 '남쪽'으로 표현한 점에서, 후자는 명백히 비하용어란 점에서 스스로 자칭했을 가능성이 낮다. '임나'는 현재로서는 임나일본부설 문제로 인해 껄끄러운 표현이며, '가라' 등의 표현도 일대의 통칭인 '가야'와 통하므로 특별히 김해 가야를 가리키는 표현이 되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현재 한국 고대 사학계의 주요 논거인 삼국사기의 '금관국'을 문서 이름으로 한다.

3. 역사

3.1. 건국 신화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네.
비록 인륜(人倫)은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국(東國)은 서울이 갈렸네.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랴.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봐 주었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내셨네.
산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네.
속은 오히려 아득하고, 겉도 역시 컴컴했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나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치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텅 비었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 오리 자줏빛 끈이 드리웠네.
낯선 이상한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네.
구경하는 사람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리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네.
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네.
왕위(王位)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맑아지려 했네.
궁전 구조는 옛법을 따랐고, 토계(土階)는 오히려 평평했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시행했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했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했네.
사방은 모두 안정해지고, 만백성은 태평을 맞이했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했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했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일세.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사당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네.
세월은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네.
元胎肇啓, 利眼初明.
人倫雖誕, 君位未成.
中朝累世, 東國分京.
雞林先定, 駕洛後營.
自無銓宰, 誰察民氓.
遂兹玄造, 顧彼蒼生.
用授符命, 特遣精靈.
山中降卵, 霧裏藏刑.
内猶漠漠, 外亦冥冥.
望如無象, 聞乃有聲.
羣歌而奏, 衆舞而呈.
七日而後, 一時所寧.
風吹雲卷, 空碧天青.
下六圎卵, 垂一紫纓.
殊方異土, 比屋連甍.
觀者如堵, 覩者如羹.
五歸各邑, 一在兹城.
同時同迹, 如弟如兄.
實天生徳, 爲世作程.
寳位初陟, 寰區欲清.
華構徴古, 土階尚平.
万機始勉, 庻政施行.
無偏無儻, 惟一惟精.
行者譲路, 農者讓耕.
四方奠枕, 萬姓迓衡.
俄晞薤露, 靡保椿㱓.
乾坤変氣, 朝野痛情.
金相其躅, 玉振其聲.
來苖不絶, 薦藻惟馨.
日月雖逝, 䂓儀不傾.
삼국유사》 가락국기
사서에는 크게 두 가지 건국신화가 전하고 있는데 하나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구지가와 얽힌 6개의 알 신화다. 대략적인 그 내용은 서기 42년, 김해는 본래 9명의 간(干)이 추장으로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구지봉에서 사람들이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알 6개가 내려왔고, 그 알 중 가장 먼저 깨어난 이가 수로왕이며 나머지 5개의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각자 나머지 5개 가야소국의 왕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다른 출생 신화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최치원이 썼다는 《석이정전》을 인용한 기록에서 나오는데 여기서는 천신 이비가지와 가야산정견모주 사이에서 반파국의 초대 국왕인 이진아시(뇌질주일), 금관국의 수로왕(뇌질청예) 형제를 얻었다는 것이다.

전자가 철저히 김해 금관국 중심적인 서사로 김해 가야계 후손 측의 전승으로 보이며 기존 세력(9간)을 바탕으로 이주민 세력(수로왕)이 추대를 받았고, 6가야연맹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보여 통일신라고려시대에 원형을 일부 잃은 것으로 보인다. 후자는 가야산신 정견모주로 표현된 고령의 토착 재지세력이 중시되고 있고, 옛 강국 김해의 역사성은 형제라는 설정으로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고령 반파국을 형으로 설정하는 등 반파국이 강국으로 오른 후기 가야의 판도를 반영한 계열 신화의 전승으로 추정된다.

3.2. 기원전~1세기(건국)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 낙동강 유역은 지석묘와 민무늬 토기로 대표되는 농경 문화가 발달했지만 한반도 다른 지역에 비해 금속기 제조 능력이나 사회조직 수준은 낙후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중국 전한고조선을 침공해 기원전 108년 멸망(왕검성 전투)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많은 유이민이 발생했는데, 김해를 비롯한 낙동강 유역에도 유이민 집단의 규모를 알 수는 없지만 기존의 지석묘나 석관묘와 다른 목관묘가 여기저기 조성되고 부장품도 기존의 민무늬 토기 등과 고조선 계열 철기류, 세형 동검, 철제 무기 등이 나타나기 시작해 선주민과 남하한 유이민이 상호 협력해 발전하는 정황이 보이며 구지봉 수로신화의 줄거리는 이런 상황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는 훗날 금관국의 왕릉급 고분군이 되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 이전에, 3세기까지는 김해 주촌면에 있는 양동리 고분군이 더 우세했던 시절이 존재한다. 수장묘로 추정되는 양동리 162호 고분, 235호 고분은 이전의 다른 고분과 차원이 다른, 중국제 구리거울과 유리구슬 목걸이 등 질 높은 위세품과 대량의 철제 무기 등을 부장하고 있다. 전성기 금관가야의 고분군인 대성동과 거리가 가깝고 쇠퇴와 성장이 맞물리는 양동리가 이 구야국(=금관국)의 전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부산대 백승충 교수는 창원 다호리 고분군[15]의 쇠퇴와 양동리 고분군의 성장 시기가 비슷하기 때문에 창원 다호리의 정치체가 양동리로 이동했다는 견해를 내기도 했다. 김해 양동리에서 대성동으로 옮긴 건 5km밖에 안 떨어져있고 정황증거가 많아 인정하는 학자도 꽤 있지만 창원 다호리는 좀 멀기도 하고 소수설에 머물고 있다.

만약 창원 다호리까지 구야국의 전신으로 본다면 구야국의 건국시기는 앞에서 소개한 건국신화보다 더 이전인 기원전 1세기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중심지 이동설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고대사학자도 매우 많다.

3.3. 2세기~4세기 (전성기)

《삼국지》 동이전에서 '구야국(拘邪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적어도 2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해서 4세기까지는 변한(가야) 영역에서도 독보적인 지역이었다. 《삼국지》 동이전의 내용 가운데 일부 신지에게 특별히 우대하는 칭호인 '우호(優呼)'가 주어진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에 따르면, 한반도의 마한 55국과 진·변한 24국을 통틀어서 '우호'를 가진 신지는 4명 뿐으로, 목지국진왕(辰王)과 함께 삼한 연맹체를 주도하던 지역 맹주로 여겨진다. 이를 통해 구야국의 신지에게는 우호가 주어져 '진지렴(秦支廉)' 신지로 불렸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영남지역에서는 함안의 안야국과 함께 둘뿐인 사례다.

고고학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전까지 국제 교역을 담당하면서 위세를 떨쳤던 사천시 늑도와 창원시 다호리가 쇠퇴하는 가운데 초기에는 김해 양동리, 3세기부터는 김해 대성동을 중심으로 일국을 이루고 점점 커져, 4세기까지 김해 지역은 낙동강 유역 전체에서 가장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나온다. 양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로만 글라스까지 나오고, 순장제도도 시작돼 고대사회에서 소중했던 인력을 이런 식으로 낭비해도 별 문제 없을 만큼 국력이 성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해 지역은 다른 가야 소국들에 비해 초기에 성장하는 데 지리적으로 유리했다. 삼국지 위지에서는 변한이 나라에서 철을 생산해 한반도 각지, 한사군, 왜국에 팔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중국 군현 같이 선진적이고 규모가 큰 외부 세력과 교역하는 경우 지금의 시군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수십개의 소국체들이 각자 교역하기보단 하나의 대표자가 등장해 일원적으로 교역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이익이다. 그리고 당시는 도로가 잘 깔려있지 않았으므로 낙동강 유역의 물자를 외부로 운송하려면 육로가 아니라 강과 연안 바닷길을 통하는 게 더 쉬웠다. 낙동강은 한강 같은 한반도의 다른 큰 강보다도 물길의 경사도가 매우 완만해서[16] 상류로 항해하는 것도 쉬워서 고대부터 특히 수운이 발달했다. 그 중에서도 김해는 낙동강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입구로 낙동강 유역의 물산이 모두 모여 지나가는 통로이자,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서 왜로 가는 경로를 김해(구야한국)를 기준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부터 일본에 이르는 연안항로와의 교차로이기도 한 김해 지역은 어차피 누가 어디를 가도 근처를 지나가는 지역으로서 지리적인 이점이 컸다. 왜와의 교역이 활발했다는 것은 왜계 하지키 토기도 김해와 부산지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역으로 김해 가야토기의 영향을 받은 스에키토기가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다수 출토되므로 확실하다.

삼국사기는 어디까지나 고신백 3개국 위주의 역사를 서술하므로 초기 신라(경주)가 주변 진한 소국을 정복하며 팽창하는 과정은 비록 편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일단 이래저래 써 있는 데 비해, 김해 금관국이 변진 소국 사이에서 독보적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찾을 수 없다. 일단 고조선 영역을 비파형 동검 분포도로 파악하듯이 매장 유물로 세력권을 추정해보면[17] 김해 주변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외절구연고배를 통해 전성기 금관국의 영역은 지금의 '김해+부산+통합전창원' 정도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히 교역의 결과라는 말도 많고, 4세기 부산(거칠산국)이 가야권이냐 신라권이냐는 특히 논란이 많은 떡밥 중 하나라[18] 장담은 못한다.

다만 멀리 떨어진 경주의 신라와 가야가 여러 차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을 통해 경주의 신라와 김해의 가야가 각자 그 주변 소국을 통솔하는 중심 세력이었다고 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정도다. 문헌기록에서는 건국 초기 수로왕의 집권 시절엔 근방 국가의 조율자 역할을 했고 신라의 침략을 번번히 격퇴했다. 기록상에는 당시 신라군이 1만 명이나 되었다는데 격퇴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강력했던 시기.[19] 4세기에는 낙동강을 건너 부산을 아우르면서 낙동강 하구 유역을 장악해 막대한 교역 이익을 바탕으로 급성장했다. 실제로 4세기 무렵까지 김해 지역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의 질과 양은 장난이 아니어서 경주(사로국) 지방과 함께 진변한의 양대 중심세력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도 마한에서 '구야진지염(狗邪秦支廉)'이라고 부르며 특별 대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변한에서 났다는 철을 한 군현과 왜에 팔기에도 용이한 지역이고(낙동강 하구), 삼국지 위서 왜인전에서는 한반도 북서쪽의 대방군에서 왜국까지 가는 지리를 설명할 때 대마국 등과 함께 금관국(구야한국)을 중간 기착지로 설명하는데, 한반도에 존재했던 수많은 성읍 국가들 중 굳이 왜인조에 기준점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왜와의 교역 루트에서도 주요 중계 지점이었다고 예상할 수 있다.[20]

김해의 금관가야가 어느 정도 가야를 대표하는 위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기록은 여럿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에는 편년상의 문제점은 있다 해도 진한권 바깥의 낙동강 유역의 세력으로 가야만을 언급하고 파사 이사금 23년조에는 가야의 수로왕이 신라왕의 초대를 받아 사로국 주변의 음즙벌국실직곡국의 분쟁을 중재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신지들 가운데 우호(優呼)를 받은 변한계 국가로는 안야국과 구야국이 언급되므로 구야국(금관국)이 대외적 중요성이 있었다고 볼 근거가 된다.

다만 현대 학설에 따르면 교과서에 실려있는 가야 연맹설의 논리대로 구체적인 연맹체 등을 형성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인근인 부산의 거칠산국과는 워낙 가까운 지역이다보니 확실히 유착된 관계인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걸로 끝. 타 가야 소국에 중국제 사치품이나 철을 팔아치운 흔적은 보이긴 한다. 다만 신라 사서나 다른 기록상에서도 맹주국은 아니더라도 주도 또는 중재를 했으므로 근방에서 나름의 위상과 영향력이 있었음은 사실이다.[21]

이렇게 잘 나가다가 삼국사기상으로 3세기 초(209)[22] 포상팔국의 난에 의해 소국 연합의 다굴을 맞아 신라에 헬프를 치는 상황에 몰리게 되고,[23] 신라에서 석우로, 물계자(勿稽子) 등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 한숨 돌리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이후 가야세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이리저리 외교적으로 끌려다녔다고 추정한다.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 子于老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14년(209년) 가을 7월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가라(加羅)를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十七年 春三月 加耶送 王子爲質
17년(212년) 봄 3월에 가야(加耶)에서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본기, 내해 이사금

하지만 최근 대성동 고분군에서 모용선비가 중국에 세운 삼연(전연, 후연, 북연) 계통의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삼연 - 금관국 - 왜를 잇는 해상 루트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보여서 그렇게 끌려다니는 위치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된 대성동 88호, 91호의 시기는 4세기 중반이며, 대성동의 주부곽식 대형 목곽묘인 1호가 최후로 축조된 5세기 초까지 금관국은 가야 연맹체 중 가장 규모가 컸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료는 위의 삼국사기 기사와 배치되는 면이 있어 주의를 요한다.

또한 최근 들어 삼국사기 물계자전의 기록을 분석하면서 여기 써 있는 '아라(阿羅)'가 '가라'의 오기가 아닌 안라국이었을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어, 이때 금관국이 포상팔국 연합의 공격을 받았는지조차 의문점이 찍히는 상황에 돌입하고 있다. 사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모든 가야국이 금관국인 것처럼 여러 차례 착각해 서술되고 있다는 중요한 지적이 있다. 그래서 532년 가야가 신라에 항복했다고 나오는데, 562년 (대)가야가 또 망하니까 신라본기의 편찬자는 '아, 가야가 항복했는데, 반란을 일으켰다가 또 멸망당했구나.' 생각하고 "가야가 반란을 일으켜서 멸망시켰다."라고 기록한 것이 대표적이다.[24] 그러나 열전과 지리지에는 그렇지 않고 해당 소국의 이름을 분명히 전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이 포상팔국 전쟁에서 활약한 물계자를 다루는 열전 물계자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포상 8국의 공격받은 주체를 '안라'라고 적었다.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捺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 (중략) … 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그때(209년?)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아라국(阿羅國)을 치기로 함께 꾀하자 아라국에서 사신을 보내와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날음(捺音)으로 하여금 이웃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게 하여 드디어 8국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 (중략) … 그 후 3년이 지나(212년?)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의 세 나라 사람이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하여오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여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패시켰다. - 《삼국사기》, 물계자전

즉,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편찬자는 다른 가야 소국의 활동을 모두 '가야'로 치환하였다는 지적에서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을 참고하면 포상팔국이 공격한 주체는 '안라', 즉 함안의 '아라가야' 임을 알 수 있다.[25] 그러니까 대성동 88호분, 91호분의 존재에서 알다시피 금관 가야가 4세기 무렵에는 시종일관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으므로 4세기 중반에 포상팔국의 공격으로 타격을 받은 정황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이후 고구려군에 의해 패퇴함으로써 금관 가야는 다른 가야 국가들과는 달리 고총이 등장하지 않고, 토기 양식의 특색도 많이 쇠퇴하여 신라 토기의 영향이 강력해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위세가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를 전후하여 금관 가야의 강력한 축이었던 부산 동래 지역의 고분군인 복천동 고분군에서 급작스러운 신라화가 진행된 것도 이를 방증한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몰아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 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일본서기》 진구 황후

한편 일본서기 신공기의 위 기사를 한국 학계에서는 '이주갑인상'+'주체교체론'으로 해석해 백제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권을 평정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 나라 중 금관국의 다른 이름인 '남가라'도 등장한다. 이 부분은 사실 《일본서기》에서 진구황후의 업적으로 쓰여 있는 것으로, 특히 '5읍(내지는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는 기록은 그동안 줄곧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 그런데 근래 천관우를 시작으로 이도학, 이희진, 김현구 등 한국 측 사학자의 분석에 의해 이 정벌의 주도권자를 근초고왕으로 보는 시각이 크게 대두되어 신빙성을 얻었다. 즉 근초고왕의 업적이 진구 황후의 업적으로 바꿔치기되었다는 것. 예를 들면 야마토보다 북쪽에 있는 침미다례가 '남만', 즉 남쪽의 오랑캐라고 나온다.

여기서 일본서기의 과장된 표현에 따르면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라와 더불어 가야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일곱 나라를 모아 실질적으로 백제 중심의 패권을 형성했다고 추정된다. 가야권도 직접적으로 정복된 것이 아니라[26] 백제의 명목상의 패권 아래 들었다는 것. 이후 만들어진 중국의 양직공도에도 가야의 소국들이 백제의 부용국이라는 기록이 있다.# 물론 서해안에 항구가 없는 가야는 중국 본토와 원활하게 왔다갔다하지 못했으므로 어느 정도 백제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볼 여지가 있다. 훗날 성왕은 이를 두고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父兄子弟)의 관계가 되었다.'고 말했다. 아래 설명될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야가 백제, 왜군과 협력해 신라를 친 것도 이 시기 백제의 패권에 가야가 동참한 연장.

사실 백제가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한 이후 가야를 대상으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의 실상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마한의 잔여세력에 '도륙'이라는 표현을 쓴 것과 달리 가야에는 '평정(平定)'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단순히 손아귀에 넣었다는 정도 의미일 뿐 그들의 기반 자체를 완전히 해체했다거나 지배세력의 교체를 단행하는 등 극단적 강경조치를 취한 것으로 풀이되지는 않고 이후 전개되는 기록이나 고고학을 봐도 가야 세력의 기반은 거의 그대로 온존했고 이후 오랫동안 연합군사작전을 펼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한다. 사실 당시 백제에게 필요했던 것은 북방 고구려와의 결전과 거기 앞서 필요한 후방의 안정이었으므로[27] 남부지방에 지나치게 진을 뺄 이유도 없었다. 다만 이 낙동강 평정 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백제의 장수가 목라근자인데, 목라근자는 이 때 신라 여인 사이에서 목만치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일본서기에서 목만치는 아버지의 군공을 바탕으로 임나(가야)에서 벼슬을 하다가 백제로 돌아갔다고 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백제가 일을 벌였고 이후로도 최소한 2대에 걸쳐 목씨 집안이 가야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두었음은 맞는 듯.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382년 백제와 협력관계에 있던 왜인 사지비궤의 가라 공격 사건에서 거의 금관국이 잠깐 멸망하다시피했다가 백제 장수 목라근자의 구원으로 다시 살아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금관국의 왕실을 흔들어 놓은 사건으로 보는 의견도 많다. 이에 따르면 일본서기 상 262년(이주갑인상으로 382년으로 본다면) 사지비궤가 신라미인계에 넘어가 뜬금없이 금관국 왕실을 몰아내 백제의 목라근자가 복권 시켜주는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아들 목협만치(=목만치?)가 개로왕 시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목라근자의 활동시기를 382년이 아니라 442년으로 보게 된다면 이 시기 일이라고 볼 수 없다.(이근우[2012], <고대의 낙동강 하구와 왜>)

3.4.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 (위기)

399년에는 신라가 국경에 왜군이 들어차 있다고 하여 광개토대왕의 5만 원군을 불러 왔는데, 이때 도주하는 왜군이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이르렀다'고 하였고 400년 광개토 대왕이 이를 쓸어버리면서 전쟁터가 된 '임나가라', 즉 금관국이 휘청거리고 결국 반파국(대가야)에 맹주 지위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다. 고고학적으로도 김해 지방 무덤의 부장품이 물론 고고학 특성상 400년 시점이라고 집어서 특정할 수는 없지만 대략 이쯤 20년을 전후한 시기에 크게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사실이라[28] 이런 통설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김해 금관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세력이 일시적이지만 오히려 김해보다 위세가 더 커질 정도였다.[29] 그러나 최근에는 이 남정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들이 대립 중이다.

부산대학교 신경철과 경북대학교 주보돈이 이 부분에서 이설을 세우고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위시한 금관가야의 성장과정 및 남한 지역 삼국시대의 물질문화 전개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 마구(馬具)라는 기승용 마구 문화의 등장을 주요하게 다루면서 그러한 전개 과정의 주요한 획기적 사건으로 광개토대왕의 400년 남정이 거론되었던 탓에 아래와 같은 논쟁이 촉발되기도 하였다. 마구의 사용이라던지 4~5세기 금관가야의 성장과 신라와의 대립과 우열 등의 문제는 분명 주요한 현상이지만 부산대 쪽의 주장에서 마구의 시작이 광개토대왕의 400년 남정에 의해서 촉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대부분의 마구들이 400년 즉, 5세기 1/4분기에 맞춰지게됨에 따라 다른 유물, 유적들의 시간들도 조정되게 되었고 이에 거센 반론을 받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가야사, 초기 신라사의 관점에서도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를 중시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400년의 사건을 유의미하다/그렇게까지는 아니다로 구분하는 것이 그에 맞물린 유물들의 변화, 편년관의 변화 등으로 인해 역사, 고고학적 해석 전반이 갈리게 된다. 가야 문서에서 서술된 주보돈과 신경철의 대립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부산대의 연대관이나 특히 동북아시아의 거국적인 교차 편년 등의 연구 등은 학계를 분명히 건강한 토론으로 활발하게 한 것은 맞지만 저 400년의 획기, 즉 광개토대왕의 남정을 지나치게 고수하기 때문에 이와 결부된 유물의 연구자나 다른 삼국시대 국가를 주제로한 고고학 연구자들에게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관한 역사고고학적인 논쟁을 다루는 아래의 광개토 대왕의 남정의 영향력 여부 문단에서는 부산대 측의 견해와 소위 '경북' 지역의 연대관, 즉 경북대나 영남대 측의 견해[33]로 나뉘어져 있다.

경북 쪽 연대를 취하면 신라 - 가야는 물론 백제 지역과도 자연스럽게 연대가 서로 합치되며, 대국적으로는 한국, 중국, 일본의 연대관이 서로 부합되는 결과가 산출된다. 그런데 부산 쪽 연구를 취신하면 유물 간의 교차 연대에서 '유독 한국만' 50년 ~ 60년 뒤쳐지는 결과가 도출된다. 이러한 점을 유의하고 아래 내용을 읽어나가도록 하자.

3.4.1. 신라 · 가야의 문화상을 바꾸어 놓았다

이 쪽은 주로 부산대를 중심으로 한 주장이다.
경북대 및 경북권 학계의 주장에서 서술되었듯 부산대 편년안은 김해 대성동과 연동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편년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것은 다시 경주, 울산 등 낙동강 이동 지역 편년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대성동 편년은 어떻게 성립된 것인지를 먼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연구사를 다 찾아서 올라가면 결국 1970년대 후반의 김해 예안리 고분군 보고서 고찰까지 올라간다. 이 보고서의 고찰의 신경철 교수의 편년안은 당대 최고의 고고학자였던 신경철 교수의 탁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예안리 고분 편년의 핵심 근거는 당시 우리나라 자료가 엉성했던 한계상 고분에서 출토된 일본 야요이 시대 석제품의 일본 고분 교차 연대를 취했다[34]. 즉, 일본 고분의 역연대를 교차 연대로 취했으며, 이것에 기반해서 양동리, 복천동, 대성동 고분군 등이 편년되었던 것이다.[반론]
스에키(須惠器)[36] 연대 문제이다. 일본 스에키 연대는 현재 이 문서의 도질 토기 연대 문제처럼 수십 년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1990년대 중후반에 첨단 목륜연대[37], 화산재강하연대[38] 등의 자료가 확보되고, 한중일 교차 연대 자료가 누적되면서 완전히 정설화되었다. 빈번했던 영남 지역과 일본과의 교류 때문에 일본에서 출토된 한국산 도질 토기의 연대도 알게 되었는데, 이렇게 산출된 연대는 부산대 쪽 연대보다 격상된다.[반론]
위의 경북대를 중심으로한 주장, 연대론으로는 연대가 격상된 스에키 연대를 취해서 영남 지역 고분을 편년할 때 출토되는 마구와 백제 지역 마구 연대가 서로 상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 지역 고분 연대는 기년묘 자료가 풍부한 중국 자기에 기반하고 있다. 즉 일본 스에키로 산출된 영남 지역 고분 연대와 기년명 자료가 풍부한 중국 자기로 편년된 백제 지역 자료가 서로 합치된다는 주장을 다른 근거로 세운다.

이에 대해서 김일규의 반론이 있다. 즉 중국 자기는 50년 ~ 60년간 전세되어 백제 고분에 부장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일본의 목륜 연대는 모조리 정황을 믿을 수 없으며, 중국 자기들은 모두 전세 되었다고 보는 셈이된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일본 스에키처럼 백제 고분에서 출토되는 중국 도자가 전세되었다면 각 고분 간의 상대 서열을 무시하는 중국 자기의 돌출된 역전 현상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스에키, 중국자기의 관계를 통해보면 몽촌토성 85-3호 수혈의 토기가 TK23 형식[40]임이 밝혀졌고, 여기에 공반된 중국 자기 연대가 5세기 중엽으로 서로 합치된다. 몽촌 토성이 475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백제가 물러섰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유물들은 475년 이전에 반입된 것이 분명해진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반론A]
한편 황남대총 남분 출토의 유기물의 C14 연대 측정치의 공표로 황남대총이 내물왕릉이라는 설은 거의 입지를 상실했기에 황남대총은 눌지왕 혹은 자비왕의 무덤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황남대총을 눌지왕릉으로 볼 때 적석 목곽묘의 출현은 4세기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으며 최초의 적석 목곽묘라 할 수 있는 황남동 109호 3곽, 4곽은 5세기 2/4분기에 위치하는 것이, 복천동 10호 / 11호 및 21호 / 22호의 토기와의 비교로 볼 때 적합하다. 월성로 가 13호의 토기는 황남동 109호 3곽, 4곽보다 도저히 올려볼 수 없는 것이 상대적인 편년관이다. 월성로 가 13호와 남분의 시간차가 1분기에 불과한 게 말이 되느냐는 강변은 이러한 토기 편년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말이다. 3세기 말의 대성동 29호로부터 시작하여 4세기 2/4분기의 91호, 3/4분기의 88호와 70호, 4/4분기의 2호, 5세기 1/4분기의 1호로 이어지는 대성동의 편년관과, 이것과 연동되어 확립된 복천동의 편년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토기에 대한 관찰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편년만 끌어올리는 것이 최근의 경북 쪽의 연구 현실이다.[반론A에][43]
삼국시대 마구를 언급하는 데 있어 중국 요령성 안양 효민둔 154호(352~370년)[44]중국 요령성 조양 원대자 벽화묘(354, 366년)[45]는 그 근원이나 마찬가지인 자료이다. 이 두 무덤의 삼연마구와 같은 금동제 마구가 대성동 91호에서 출토되어 절대편년의 자료가 되고 있고, 이러한 대성동의 편년에 연계되어 다른 편년이 움직이는데 월성로를 끌어올리는 것과 마구에 대한 언급은 외려 최근 보고된(2015년) 대성동 7차 발굴 보고서를 읽지 못했다는 것이고, 최신 연구 반영의 부재를 뜻할 뿐이다.[46]

3.4.2. 신라 · 가야의 문화상마저 바꾸어 놓지는 않았다

이쪽은 주로 경북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주장이다.

* 고구려 남정(400년)의 기록과 물질 자료의 관계
우선 전쟁을 한 것과 유물이 출토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과거의 매장유구에 매납되는 유물들은 그 사회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쟁 후에 전쟁 대상국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광개토대왕의 전쟁 수행 방식은 '지배' 아니라 '공격'에 방점이 찍혀있었으므로 고구려계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고 해서 고구려의 공격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군의 남정 이후 가야 지역의 마구, 토기 등 수많은 변화 양상을 볼 때 전쟁을 통해 크나큰 사회적 충격이 야기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인다.

물론 남정 이후 전쟁을 통한 사회적 충격은 당연히 대단했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부산대 주장의 항목의 서술은 전쟁 = 선진 문물 수용 혹은 전쟁 = 멸망이라는 전제가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몇 십 년 동안 학계의 지지를 받은 학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볼 때, 금관 가야는 낙랑 대방 멸망 이후 고구려 남정 이전까지 선진 문물을 수용하지 못하고 정체된 상태로 있다가 고구려 남정을 통해 선진 문물을 수용하게 된 것으로 해석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대성동 1호분을 고구려 남정 이후인 5세기1/4분기로 편년하는데 주지하다시피 대성동 1호분은 금관 가야의 왕묘로 판단되는 고분이다. 이러한 대형 고분의 축조가 고구려 남정 이후의 산물이라면 후자의 고구려 남정으로 인해 금관 가야가 멸망하였다고 하는 해석과 모순된다.

즉,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그 힘을 상실해야되는 금관 가야가 대성동 1호와 같은 초대형의 고분을 축조 할 여력이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새로이 금관 가야 세력이 분열에 가야 각국 및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새로운 세력을 만들었다는 학설도 있는데 이 또한 이주 - 전파설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해석이다. 부산대 주장 항목에 서술된 해석의 문제점은 금관 가야와 나머지 제 가야의 세력을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데 있으며 문화의 전파와 수용이 선진 집단과 후진 집단의 상호 간에 교류와 관계에 의한 형성과 다양한 조건에서의 수용 채택을 생각하지 않고 선진 집단이 하위집단에 대한 일방적인 영향보는 협소한 선입관을 가지는 해석이라 볼 수있다.
최근의 발굴 조사 성과 등으로 보면 4세기 대부터 이미 삼연계 말띠드리개, 장식구 등과 심지어 오키나와산 청자 고둥 조개로 만든 운주 등 장식 마구 문화가 등장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4세기 대 영남 지역에서 마구류 등은 이제 차고 넘친다. 게다가 4세기 말로 편년되는 월성로 가 13호분 출토 금동 장식 재갈부터 이미 고구려 남정 이후 마구 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설은 논파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월성로 가 13호가 4세기 대 고분이라는 건 90년대 초부터 나왔다. 이미 이 학설은 30년 전에 논파됐다는 소리.

또 삼연계 마구와 관련하여 최근 발굴된 대성동 91호 출토 금동제 삼연제 마구에 대한 부산대 측의 주장도 절대편년은 건드리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고 있는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대성동 91호 출토 금동입령은 조양원태자묘와 안양 효민둔 154호 출토 금동입령과 직접적 비교가 가능하며, 안양 효민둔 154호는 전연이 업성을 함락시킨 352년에서 전연이 멸망한 370년을 하한으로 함은 부정할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대성동 91호를 4세기 2/4분기에 고정시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며, 그에 따른 상대편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되었지만 스에키와 공반된 목제품의 경우 아마 SD302와 SD6030 출토품을 언급하는 것일 터인데, 이 목제품들은 구(당시의 하천유로)에서 출토된 것으로써 스에키와 목제품이 동시에 폐기되었다고 확언할 수 없는 자료임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신경철, 김두철 등 부산대 교수들은 월성로 가 13호를 5세기 2/4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남정 이후에 장식 마구등이 본격화됐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월성로 가 13호 고배와 5세기 중엽 황남대총 남분의 고배가 단 1분기 차이라는 말이 된다. 일본 스에키나 백제 마구 나아가 중국 기년명묘와의 교차 연대는 차치하더라도 월성로 가 13호랑 황남대총 남분 고배의 형식적(Type)인 차이가 엄청난데 그게 1분기라는 게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된다.

특히 과거에는 고구려 남정으로 장식 마구 등의 본격적인 마구 문화가 '시작'되었다더니, 이제는 주요 고분들의 연대를 5세기로 다 밀어버리고 그래도 4세기 마구들이 많이 나오니까 이제는 "고구려 남정으로 마구 문화가 본격화되었다[부연1][부연2]"라고 말을 바꾸고 있다.

3.5. 5세기~6세기 (쇠퇴기)

아무튼 5세기경이 되면 반파국 쪽 고령계 토기의 확산 등으로 미루어보아 금관국이 멸망까지 하진 않았지만 여러 가야소국 중 하나 정도의 위상으로 쇠퇴하고 그 대신 경북 고령에 기반한 반파국을 중심으로 합천, 거창, 함양 등 내륙 지역이 크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반파국은 호남 동부 섬진강 유역과 대부분의 가야 소국을 포괄하는 맹주격으로 올라서며, 백제 측 기록을 다수 인용한 일본서기에서도 5세기 ~ 6세기 가야권은 반파국안라국이 주도하고 금관국은 그리 돋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그런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신라가 경주에 가까운 대구 같은 옛 진한 지역들과 과거 가야의 세력권이었던 창녕, 부산 같은 지역까지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내실을 다지면서 더 이상 금관국이 낙동강 하구 수로를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파국 등 낙동강 상류 국가들은 과거 수상교통의 중심지였던 김해를 우회해서 섬진강 같은 대체루트를 찾아 독자적으로 중국 남제와 교류하면서 활로를 찾았고 그럴수록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김해 지역은 가야의 변방으로 몰렸다.

게다가 5세기부턴 반파국산 금동관이 일본 후쿠이현 니혼마츠야마(二本松山) 고분에서 출토되고 기타 대가야계 위신재는 일본열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등, 원래 김해가 일본과 가깝다는 위치상 당연하게 금관가야가 맡아왔던 왜국 방향 교섭마저 반파국이 주도권을 빼앗은 정황도 나타난다.

결국 김해 금관국은 532년 신라 법흥왕에 항복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앞서 529년에 신라의 이사부가 이끄는 3천 군대가 왜국의 오우미노오미 케나(近江臣 毛野)를 쫓아내고[49] 돌아가는 길에 금관(김해)를 초략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금관국의 항복 과정에 대해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기록별로 소소한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특별히 군사 충돌 없이 순순히 신라에 항복한 것처럼 나오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신라가 쳐들어오자 군을 이끌고 맞섰는데 병력 차이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으로 나오고,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습격에 당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금관국과 탁순국, 탁기탄은 6세기 가야권에서 가장 먼저 멸망한 나라고 이것이 아직 남아있는 나머지 가야권 국가들에게는 신라의 확장이 큰 안보적 위협으로 다가와, 이 때부터 신라의 잠재적국인 백제왜국에 외교적으로 기울어서 그들을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겨우 정세를 유지한다. 그러다 20여년 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크게 패배, 위축되면서 힘의 균형이 깨져, 이후 약 10여년간의 기간 동안 나머지 가야 소국들도 하나하나 신라가 흡수하게 된다.

4. 고고학으로 본 가야의 흥망성쇠

위와 같이 고고학적인 고분 편년과 문화 현상에 대한 해석에는 현재 치열한 대립 관계가 있으므로 아무래도 부족한 사료로써 금관국의 역사상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한다.

그렇지만 가야사를 논하는 데 있어 고고학의 역할을 부인할 수는 없다. 지난 20년간 고고학 자료의 폭발적인 증가로 금관국과 그 주변 제국(단순히 안라국, 거칠산국[50], 사로국 등 인접국만이 아닌, 백제, 고구려, 등)의 역사상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까지 밝혀진 고고 자료의 양상을 바탕으로 고고학적으로 금관국의 역사를 복원하자면 다음과 같다.

4.1. 기원전 2세기~1세기: 금관국의 모태가 될 김해 지역에서의 '국(國)'의 출현

기원 전후 시기 현재의 김해시 인근과 진영읍 부근, 창원시 일대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성장한 지역 집단 정치체가 산재해 있었다. 이 정치체들은 늦어도 한사군이 설치된 BC 108년 이후[51]에 맞물려 고고학적으로 기존의 문화 유형에 덧대어 목관묘 및 한경 및 방제경과 같은 외래계 유물이 부장되며, 선진 지역의 토기 제도 기술을 본받아 회전 성형과 환원소성이 필요한 부장 전용 토기인 '와질 토기'가 출현한다. 이러한 현상은 보통 고고학에서는 평등 사회였던 청동기 시대 사회에서 본격적인 특권 및 주도 계층인 엘리트 계층이 출현의 징후로 해석한다. 선진 정치체였던 위만조선의 등장과 팽창, 혹은 한사군의 등장으로 상대적으로 사회 발달이 정체되어 있던 한반도 남부의 정치체에 경제권망 및 정치 질서가 형성되면서 기존의 명목적인 평등 사회에서 불평등 심화가 가속화되어 엘리트 계층이라는 특권층이 나타났으며 이를 본격적인 지역 기반 정치체인 '국'의 출현으로 본다.

4.2. 기원후 2세기 후엽~3세기 중후엽: 금관국의 대두

이후 기원후 2세기 말, 격상된 연대론에 의하면 2세기 중엽 이러한 엘리트 계층이 본격적으로 분화된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목곽묘라는 무덤의 출현과 대량 부장 현상으로 나타난다. 목곽묘는 기존의 목관묘보다 비교도 안 되게 큰 매장 공간을 가지며, 이전 시기에 비하면 엄청난 양의 철기 및 청동기가 대량 부장되며, 기존 와질 토기에서 변형되고 소성도가 강화된 '신식 와질 토기'가 부장된다. 이는 기존 지역 엘리트 계층 내에서도 특권 엘리트 계층의 출현으로 해석된다. 이때부터 김해창원, 진영 일대의 여러 정치체들이 통합되어 '금관국'을 형성했던 것으로 본다. 아마 설화 속의 김수로왕은 이러한 여러 정치체들이 연합하여 추대한, 혹은 그들 중 가장 우세한 세력의 대표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그 인물의 실제 인물이 김수로인지는 미지수이다.

이러한 금관국은 영남 지역의 수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낙동강 교통로의 기점이자 관문, 그리고 바다를 통해 낙랑마한, 왜국과의 교통할 수 있는 압도적인 교통로의 우위에 힘입어 다른 영남 지역의 소국보다 우세를 점하게 된다. 특히 당시 국의 생산력과 군사력의 밑바탕되는 자원인 ''을 생산하거나 영남 각지에서 생산되는 철기의 유통을 통제하여 왜국과 낙랑에 수출하는 역할을 하면서 영남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정치체로 떠오른다. 이러한 상황은 3세기 중엽의 한반도 남부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잘 나타나있으며, 삼국사기 신라 본기 초기 기록에서 나타나는 금관국의 위상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52]

3세기를 기점으로 금관국 내에서도 기존 예안리, 양동리 고분군 축조 세력보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축조 세력이 결정적인 우위를 차지한다.[53][54] 이때부터 4세기 말 ~ 5세기 초까지 풍부하게 출토되는 일본계 유물, 즉 야요이 시대 석제 화살촉, 방패에 붙이는 파형 동기, 장창의 아랫 부분에 장착하는 통형 동기 등이 당시 왜국, 금관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준다.

4.3. 3세기 후엽~4세기 중엽: 삼국 시대 '가야'로서의 금관국의 출현과 그 전성 시기

격상된 연대론에 의하면 3세기 중후엽, 신경철 교수를 위시한 부산대 쪽 편년에 의하면 3세기 중후엽에는 김해 세력에 도질 토기가 초현하며,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기존 목곽묘보다 압도적인 크기와 엄청난 양의 도질 토기, 철기, 동기들이 부장된 대성동 29호분이 축조된다. 이는 3세기 이래 여러 김해 지역 집단 가운데서 대성동 고분군 세력이 우위를 점한 가운데, 결국 이들이 다른 고분군 축조 세력보다 격절된 존재, 즉 왕권의 출현한 것으로 본다.

당대 최신 기술의 총아인 도질 토기가 제작됐다는 건 유의미한 현상이다. 도질 토기는 표면에 유리질이 형성되어 토기의 방습성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이전 시기 토기보다 기벽에서 습기가 현저하게 낮아졌으므로 훨씬 가벼우며, 손가락으로 퉁겼을 때 맑은 소리가 나는 것이 특징인 토기이다. 이 도질 토기를 소성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정성된 태토를 구해야하며, 고화도를 견딜 수 있고 표면에 유리질을 형성할 수 있는 섞음 광물들의 위치와 정선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가마를 섭씨 1100도 이상의 고온으로 수십 시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고도의 밀페 기술과 소성 기술과 그 화력을 내는 데 있어 막대한 목재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력과 자원(나무 등)이 소모되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이러한 당대의 사치재인 도질 토기를 소모할 수 있는 경제력이나 계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처럼 금관 가야에서 도질 토기의 출현은 당대의 가장 선진적인 첨단 제작 기술과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계층과 경제력의 존재를 상정한다. 거기다가 다른 영남 지역과는 구분되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그것을 자신들만 부장하는 것도 큰 특징이다. 이러한 점에서 금관국은 적어도 영남 지역 내에서는 고고학적 지표로는 가장 선진적인 단계에 도달했다. 따라서 이전 단계와는 격절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학술적 용어로 이 시기부터 '금관 가야' 혹은 '금관국'으로 보기도 한다(이전 시기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변진 구야국으로 호칭, 어디까지나 획기와 변화를 중시하는 학술적 용어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획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북방 기마 민족이 남하하여 기존 집단을 멸망시키고 선진 문물로서 금관 가야를 건설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북방계 요소인 게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모두 합친 것들이며, 북방 청동솥 같은 유물은 평양에도 출토될 정도로 해상 교역을 통해서 얼마든지 입수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전 시기 분묘의 파괴 현상은 오히려 묘역을 중시여겼기 때문에 나타는 현상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전 시기 분묘의 파괴 현상은 대성동 고분 전시기에 거쳐서 고르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성동 고분군이라는 묘역을 아주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는 현상으로 봄이 타당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질 토기는 일시에 성립한 것이 아니며, 액체를 주로 담는 용기인 단경호부터 다른 기종까지 서서히 도질화되기 때문에 일시적인 남하로 인해 금관국이 성립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해상 및 낙동강 유역 교역망에 힘입어 힘과 기술 수준을 키운 금관국이 빠르게 성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4세기를 전후한 시기가 되면 강 건너 동래 세력(변진 거칠산국으로 비정)의 복천동 고분군에도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금관국 양식의 토기를 공유하며 왜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인 통형 동기, 파형 동기 등의 위신재를 공유한다. 그러나 고분에서의 양상은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보기 힘들 만큼 엇비슷하기 때문에 동래 지역의 거칠산국김해 지역의 금관국이 동맹, 혹은 연맹 상태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 금관국 양식의 토기는 김해 지역에서는 북쪽으로는 진영 분지, 서쪽으로는 장유, 마산 일대까지 출토되며, 부산 쪽에서는 북쪽으로는 지금의 양산 신시가지 바로 턱밑인 북구 금곡동, 율리패총 일대, 동쪽으로는 철마면 일대까지 출토된다. 그러나 현재의 연구 성과로 보아서는 금관 가야의 정치체의 형태라든지 영역 범위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위의 내용 또한 논리적 모순을 지니고 있는데 금관가야와 거칠산국이 동맹 혹은 연맹으로 보는 근거는 위신재의 공유 현상에 기인한다. 즉 통형 동기의 공유가 그 근거인데 이를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통형 동기가 대성동 집단이 복천동 집단에게 사여 혹은 분배 한 것으로 보고 있다.[55] 그러나 실제로는 분배의 주체인 대성동 고분군보다 받는 입장의 복천동 고분군에서 오히려 통형 동기가 많이 출토되는 양상이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통형 동기 자체도 금관 가야의 독자적인 유물이 아니라 일본에서 수입해 오는 왜계 유물이라는 점에서 이들 두 집단이 경쟁적으로 왜계세 력과의 교역을 통해 입수 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특정 정치체의 유물의 분포 범위 = 특정 정치체의 영역이라는 공식 또한 일반론적인 주장인데 유물의 분포와 확산은 단순히 정치적 움직임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 교환 등 인간의 교류 행위 자체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특정 유물이 그 지역 내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그것을 영역화 혹은 정치권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56]

따라서 금관 가야는 낙동강 하류역의 정치 경제권을 권력을 쥔 세력으로 볼 수있다. 신경철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이 시기 금관국은 경쟁국인 안라국, 사로국을 누르고 '영남 지방의 패자'라 할 정도로 발전한 면모를 보여준다.

금관국이 이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낙랑과의 교역이 큰 동인으로 보고, 313년, 314년 낙랑 대방군의 멸망으로 금관국이 쇠락했다고 보고, 신라가 되는 사로국이 본격적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보기도 했다. 실제로 지금 경북대 주보돈 교수는 313년, 314년의 낙랑 - 대방 멸망으로 금관국의 대외 교류 기반이 붕괴되고 변한 각국 내에서 리더십이 도전받는 가운데 훗날 대가야가 되는 반파국이 부상했다고 보았다. 한 발 나아가 후술한 400년 경자년 전쟁도 실은 금관국이 아닌 반파국의 연합작전으로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4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대성동 88호분, 91호분에서는 북중국의 삼연계 문물(북연, 전연, 후연을 합쳐 이르는 말)인 삼연계 대장식구와 함께 로만글라스, 장식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학설은 재고되어야 한다. 금관국이 이러한 문물을 입수한 경로가 해로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낙랑군대방 지역의 한(漢)족계 세력은 4세기 중후엽까지도 그 세력을 유지했다. 최신 학설에 의하면 이들이 완전히 몰락하는 것은 370년대 근초고왕낙랑, 대방군 공격으로 본다.

그리고 대성동 88호분과 91호분에서의 이는 현재까지 신라 최초의 금공품 및 로만글라스, 장식마구류와 함께 신라 양식 토기가 출토된 월성로 가 13호의 연대인 4세기 말보다(부산대 편년에 의하면 5세기 2/4분기) 최소 50년에서 최대 100년 정도 빠른 것이다.

물론 경주 분지 일대에서 4세기 대로 소급되는 고분의 조사가 거의 아주 빈약하기 때문에 속단은 금물이지만[57], 현재까지의 고고학 자료의 양상이나 문헌 사료의 양상으로 볼 때 4세기 중엽 시점까지 금관국이 사로국에 우위를 차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난데없이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 나타나 당시 금관가야의 중계 무역의 핵심 역할을 하던 낙랑을 멸망시키고 이곳을 독점하자 금관가야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는다.[58] 한편 고구려에 계속
패배하던 백제는 형제국이나 다름없었던 왜와 연합하는 동시에 가야에게 동맹 제의를 하게 되고, 가야는 이를 수락하여 고구려가 아닌 백제를 파트너로 택하고 고구려의 우방이었던 신라를 쳤다. 인접국인 신라를 멸망시키면 가야는 자동적으로 반사 이익을 누리게 되고, 행여나 백제와 왜를 도와 더도 덜도 말고 낙랑지역을 탈환하는 것을 도운다면 경제적인 회복도 기대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북쪽에서 철천지 원수인 후연과 치열히 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59] 때문에 백제는 칼끝을 후연으로 돌린 고구려가 남쪽의 일까지는 큰 신경을 쓰지 못할 곳으로 생각했을 것이며, 가야도 이에 공감하여 이득을 보려 백제 편을 들어 신라를 침공했다.

4.4. 4세기 중후엽: 사로국의 대두, 그리고 경자년의 전쟁으로 인한 금관가야의 몰락

한편, 금관국의 라이벌로 부상하던 사로국의 경우 4세기 말로 편년되는 월성로 가 13호에서 로만글라스와 같은 대외 무역품과 함께 완성된 형태의 장식 마구류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토기 양식이 완성된 형태로 반출되고 있기 때문에 늦어도 1분기 ~ 2분기 정도 빠른 4세기 중후엽 정도에는 신라의 모체가 되는 사로국도 금관국과 비슷한 단계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전진 황제 부견과 신라 사신 위두의 대화도 370년대에 이루어진 것이다.[60]

그래서 삼국사기에서 지금의 양산신도시, 물금읍 일대인 황산진을 두고 금관국과 사로국이 충돌하는 기사, 거칠산국[61] 정복 기사 등은 사로국과 금관국이 대치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지역들은 고고학적으로 나타나는 금관 가야의 최대 강역이거나, 거기에 인접한 외곽 지역(황산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로국이 부상하는 데에는 올려잡자면 313년, 314년 낙랑 - 대방군의 멸망과 그 파급 효과, 그리고 직접적인 타격은 근초고왕의 낙랑, 대방 지역 평정으로 인하여 동북아 교역에 종사하던 해상 집단의 소멸로 금관국의 대외 교섭 능력이 위협받는 것과 관련있다. 거기다가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의 주체 교체론적 입장에서 받아들이자면 근초고왕이 직접 가야를 평정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이 시기 전통적으로 기능하던 해상 교역로가 기능이 정지되고, 백제의 평정으로 금관국의 관문 역할과 주변 소국에 대한 리더십은 도전받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영남 지역이면서도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지 않아 전통적으로 금관국의 교역로 영향력에 벗어나 있던 사로국은 이러한 국제 정세 변화에 대응하여 고구려와 연합 전선을 펼친다. 특히 영남 지역에서 경주를 포함한 울진, 영덕, 포항, 울산 등은 낙동강 유역에서 벗어난 곳이기 때문에 낙동강 유역과는 다른 교역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 끝은 북방의 옥저동예, 그리고 고구려로 연결되는 관계망이었다. 그중에서도 경주는 낙동강 유역인 양산, 영천과 바로 인접해있기 때문에 영남 지역 내에서도 동해안 관계망과 낙동강 관계망의 결절지인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낙동강, 중국, 왜 관계망이 흔들리자, 경주의 사로국이 고구려 - 동해안 - 사로로 이어지는 관계망을 통해서 빠르게 영남 지역에 영향력을 넓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사로는 앞서 말한 낙랑 대방군의 소멸, 그리고 완전한 한인 해상 교역 집단의 소멸, 근초고왕의 가야 평정과 무관한 상태로 힘을 보존하고 있었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증대되는 동해안 관계망의 중요성과 고구려의 부상으로 신라가 힘을 얻고 있었다.

고구려 또한 경쟁국인 백제가 장악한 낙동강 서안의 가야 관계망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동해안 교역로로 연결되면서 금관국 못지 않게 힘을 키우고 있던 사로국이 적절한 파트너였다.

즉, 4세기 중후엽이 되면 금관가야의 영향력이 내외부적 요인으로 축소되고, 오히려 신라의 힘은 증대되고 있었으며 그 세력이 서로 교차하는 와중에 황산진과 거칠산국 등지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4세기 중후엽 어느 시점부터 출현한 신라 양식 토기, 그리고 고총 고분의 등장은 3세기 후엽 '금관 가야'의 출현처럼 '사로국'과 격절된 '신라'의 출현으로 상정된다. 신라는 빠르게 안강, 울산, 영천, 경산 등의 주변 여러 지역을 장악해 단순히 경주의 성읍국가가 아니라 광범위한 영역을 가진 나라로 성장했으며 그 후로 금관국의 낙동강 동안 최대 배후지인 거칠산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4세기 중후엽으로 편년되는 동래 복천동 고분군의 수장묘에는 신라 양식으로 흔히 이해되는 出자형 입식이 달린 금동관과 신라토기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이단교호투창고배'의 초현형식 등이 부장된다. 그러나 여전히 금관국의 토기와 문물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데, 점차적으로 동래 지역에 가해지는 신라의 압박을 느낄 수 있다.[62] 그런 반면 김해 금관국은 앞마당인 부산 정도를 제외하면 김해 세력 혹은 문화의 확장을 유추할 증거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정도다. 김해 + 부산 정도에 그 부산마저도 신라색이 점점 침투해 빼앗기면서 신라와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김해 지역이 알짜배기라 해도 커버하기 힘들 정도의 상황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4세기 말엽이 되면 신라는 서쪽으로는 대구광역시를 지나 현풍창녕(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심지어 6세기까지 창녕의 비화 가야가 존속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까지 진출하여 금관국이 쥐고 있던 낙동강 관계망에 근본적인 위협을 가하는 형세가 된다. 삼국사기 기록에 일시적으로 낙동강 서안인 초팔국(지금의 합천군 초계면, 다라리 일대)까지 정복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나마 낙동강 서안까지 진출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63]. 거기다가 북쪽으로는 대구광역시 칠곡지구 분지를 지나 경북 북부 지역의 요충지인 의성 조문국을 복속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했고, 동쪽으로는 강원도 삼척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처럼 신라는 금관국의 관계망을 심대하게 위협하면서 경북 북부 지역, 동해안 지역마저 장악하였고, 최후의 요충지이자 금관국의 최대 배후지인 동래 지역을 쟁탈하기 위해 압박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금관국은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대응하게 된다. 신라의 낙동강 하구 진출로인 황산진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4세기 말엽의 금관국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장악했던 국제 관계망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금관국의 리더십은 추락했기 때문에 금관국으로서는 이미 덩치가 커질 대로 커져버린 사로국에 홀로 대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금관국의 최대 파트너였던 거칠산국의 중심 고분군인 복천동 고분군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이 확대되는 신라계 문물로서 확인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금관국은 단독으로 신라와 결전을 치르기 보다는 전통적인 파트너인 와의 연합군을 편성하고, 백제의 협조까지 받았다. 그것이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신묘년 왜의 도해와 경자년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신라성 포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선 금관가야와 왜는 앞서 말한대로 3세기 ~ 4세기 내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통형 동기, 파형 동기 같은 위신재를 공유하고 있었다[64]. 왜는 의 제련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고대 국가로서의 중요한 자원인 철을 금관국의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왜에 출토되는 아래위 대칭의 개뼉다구 모양의 철정은 기실은 모두 대성동 고분군과, 복천동 고분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한편, 정권도 전통적으로 철을 제공받던 파트너인 금관국의 영향력 약화를 좌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철의 공급이 자신들의 정권의 기반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라는 전통적으로 왜와 자주 충돌하는 국가였으므로 신라의 확장은 더더욱 좌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양자의 합의가 맞아 떨어져 391년 신라 침공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신묘년 기사이다. 그리고 경자년인 서기 400년에는 대규모 침공이 이어져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성이 함락되고 신라매금(동이매금)이 도망쳐서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빌고 빌 정도로 전황이 악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낙랑, 대방을 무찌르고 백제와 경쟁하고 있던 고구려로서는 자신의 배후 세력인 신라의 위험, 그리고 백제의 배후 세력인 가야의 공격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직접 보기 5만 명을 몰고가서 월성에 주둔해있던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하면서, 금관국의 왕성으로 여겨지는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밀어붙여 연합군을 분쇄시켰던 것이다. 4년 뒤 금관가야는 다시 백제, 왜와 힘을 합쳐 광개토대왕이 후연과 싸우는 틈을 타 고구려의 대방과 평양을 공격하는 등 광개토대왕에 맞서지만 대패한다. 고구려군에게 밀리고 밀려서 당시 동맹국이었던 왜의 군사가 본국으로 퇴각을 결정할 정도로 전황이 참담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전쟁으로 금관가야는 큰 타격을 입고 가야 연맹의 주도권은 대가야로 넘어가게 된다.

4.5. 5세기 이후~532년: 금관국의 잔존과 멸망

경자년 고구려와의 전쟁 등을 거치고 5세기에 이르러, 고고 자료로 보면 이후 금관 가야 양식이라 할만한 토기는 거의 사라지며, 신라 토기의 변방 양식으로서 김해 양식만 준별될 뿐이다. 그리고 그 뚜렷하지 않은 토기양식 역시 고 김해만 일대로 한정되어 영향력 약화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심지어 현재 김해 대동면에 있는 예안리 고분군 같이 낙동강 서안 지금의 김해시 땅인 곳에도 4세기 말 이후로 신라 토기가 침투해, 이를 신라가 낙동강 서안의 요충지까지 확보한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5세기부터 김해에서는 왕묘라 할 만한 무덤의 축조가 중단된다. 소형 석곽분은 계속 축조되지만 이전 전성기 왕묘급 탁월한 대형 고분군은 실종된다. 그리고 금관 가야계 문화를 유지하던 성주, 창녕이나 부산 동래 복천동 고분군은 거의 완벽한 신라 스타일의 고분군으로 전환되며, 이후 연산군 고분군의 축조로 이어져 고총화[65]된다.

이를 보고 아예 금관국이 고구려와의 전쟁 이후 멸망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는데 그렇게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약해진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대형묘가 축조되고는 있고, 결정적으로 사서에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5세기 초반 이후 가야 세계의 주도권은 백제의 혼란을 틈타 호남 동부 등 섬진강 유역을 확보한 고령군반파국에게로 넘어갔으며, 이곳이 가야, 가라, 대가야 등으로 불리며 가야를 대표하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반면 5세기 ~ 6세기에 이르러서 금관국은 '남가야', '남가라' 등으로 표기된다. 그만큼 북쪽의 대가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진 모습을 호칭에서부터 반영하는 것이다[66]. 5세기부턴 대가야산 금동관이 일본 후쿠이현 니혼마츠야마(二本松山) 고분에서 출토되고 기타 대가야 위신재는 일본열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등, 원래 금관가야가 위치상 당연하게 맡아왔던 일본 방향 교섭마저 대가야에 주도권을 빼앗긴 정황도 나타난다.

부산대 신경철 교수는 금관국이 일시에 멸망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는 당치도 않다. 대성동 고분군에는 5세기 이후의 고분이 조사되었으며[67], 왕성인 봉황 토성[68]을 방어하기 위한 북쪽 감제 고지에 나전리 보루가 축조되었고 여기서 나온 토기가 6세기 전반 토기라는 점에서 금관 가야가 계속 봉황 토성을 중심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신라에게 밀려 532년 11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고 멸망하였다. 다른 가야 국가들은 백제가 살려 보려고 애쓴 것과 달리 금관국은 백제가 그럴 틈도 없이 멸망했는데, 5세기 이후 이미 낙동강 서안에 신라의 교두보가 존재해 온 (백제 입장의) 원격지인 데다가 사비 천도 등으로 인해 백제가 정신이 없었던 탓이 큰 듯. 그러나 금관국의 멸망은 백제에 지리산 ~ 낙동강 동안 일대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공식적으로 한국사 최초로 불교를 들인 국가이다.[69] 단, 공식적인 기록으로만 따져도 늦게 잡아도 고구려, 백제 다음으로 불교를 정식으로 수용한 3번째 국가다.[70]

5. 금관가야의 국력 수준



금관가야의 국력을 따지기는 사실 매우 어렵다. 금관가야가 거느린 다른 가야들까지 포함해야 하는지 아닌지부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서는 금관가야의 국력을 그 휘하의 다른 가야들까지 포함해서 서술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금관가야가 가지는 국제적 위상은 적어도 광개토대왕의 남벌[71]이 실행되기 전까지는 엄청나게 높았다. 고구려에게 낙랑이 정복되기 전에는 낙랑으로부터 들여온 중국의 고도문화를 받아들였으며, 고구려를 강하게 압박하고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근초고왕대 백제가 왜-중국-백제 교역로를 얻기 위해 가야에 손을 뻗었다. 백제가 작정하고 목라근자를 동원하여 가야에게 군사적 압박을 가한 것도 남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가야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가 목라근자 등을 데리고 대군으로 가야를 압박했다는 것은, 바꿔말해 당시 한반도 최강의 맹주이자 동아시아의 강국 백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압박해야 할 정도로 금관가야의 국력이 상당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후 금관가야가 저지르는 일을 보면 더더욱 혀를 내두르게 될 수밖에 없다. 왜와 연합하여 백제의 요구를 받고 출병, 신라를 셋이서 침공해 위태롭게 하는 지경까지 밀어붙였다. 당시 왜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사실상 가야가 다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서 광개토대왕이 정미대출병을 강행하지 않았으면 신라가 가야와 왜의 손에 넘어갔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광개토대왕이 금관가야까지 밀고 들어와 대대적으로 남벌을 하여 금관가야는 크게 위축되었고, 이후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6. 후대의 전래

7. 미디어에서의 등장

8. 주요 유적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파일:가야의상징이라고칩시다심볼할게없네.png 가야의 중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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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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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독[2] 순우리말[3] 한자[4] 순우리말 발음 음독 소내라(素奈羅)[5] 강서구 지역 중 그 당시 바다였던 대저도 일대는 논외로 하고 망산도가 있는 부산광역시의 서낙동강 서쪽 지역은 확실한 금관국 영토로 비정되며, 화명동 고분군의 특징, 구포 일대에 전해지는 가야 관련 설화#, 부산으로 비정되기도 하는 종발성 등을 미루어 볼때 부산 북구 등 낙동강 동쪽 부산 도심 지역까지 영향권이었을것으로 추정한다. 금관국 관련 유물은 복천동 고분군보다 동쪽인 기장군 일대에서도 발굴되고 있다.#[6] 혹은 11대이지만 같은 시기에 건국된 대가야는 16대인데다가 490년에 11대라고 해도 1대 평균 44년이라서, 대수를 비교해보면 상당히 이상하다. 따라서 여러 명의 금관국 왕이 어떠한 사유로 수로왕의 재위 기간에 포함된 가능성이 있다.[7] 학계에서는 족보는 가문의 위상을 위해 조작될수 있다는 점 때문에 연구자료로써의 가치는 거의 없다고 본다.[8]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 조사 성과에 따르면 4세기 말 대성동 1호에 필적하는 고분군은 아니지만 대성동 73호, 대성동 85호 고분의 발굴 조사를 통해서 어느 정도 세력이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금관 가야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봉황 토성의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 결과 6세기까지 토성이 유지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는 금관 가야가 532년 즉 5세기 2/4분기쯤에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로 볼 때 400년 광개토대왕 남정 이후에 금관가야가 사실상 멸망하였다는 의견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9] 김해에서 낙동강 건너편인 부산 복천동 고분군 세력이 금관 가야와 관련되는지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으로 이견이 있다. 먼저 복천동 고분군 세력을 금관 가야 문화권으로 보는 경우는 토기나 위신재와 같은 특정 유물의 공유 현상에 입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금관 가야의 특징적인 유물로 판단되는 외절구연고배와 통형동기의 공유 현상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 등을 통해서 대성동 고분군과 복천동 고분군이 공통 된 요소가 있지만 묘제나 유물 부장 등에서 이질적인 요소가 확인되는데 특히 4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복천동 57호분에서는 신라적 요소가 가미된 판갑이나 유자이기 판상철모 등의 출토 예를 통해서 복천동 고분군의 금관 가야 연맹설에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외절구연고배와 통형동기의 분포의 경우 동일 유물 분포권 = 동일 정치 문화권으로 해석 할 수 있는 적절한 논증 또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성동과 복천동 고분군 두 세력이 금관 가야 연맹체를 성립했다는 근거에 재고의 여지가 있다.김대환 2003 「부산지역 금관 가야설의 검토」 『영남고고학』33 홍보식 2000 「고고학으로 본 금관가야」 『고고학을 통해 본 가야』 그외에도 이희준 2007년 「 3. 4세기 신라의 지방 지배」 『신라 고고학 연구』 pp.221 ~ 235 김영민 2008년 『金官加耶의 考古學的 硏究』 부산 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등을 참고하길 바란다.[10] 그래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인 삼국지에서는 김해만이 구야(=가야)란 이름을 쓰고, 훗날 가야권으로 취급받는 나머지 변진지역 나라들은 그냥 안야국, 반로국 등 각자의 이름을 쓰고 있다.[11] 본인들이 스스로 남쪽을 자처했다기보단 후기가야의 영향력 실추로 '남쪽의 가야' 취급을 당했다는 것.[12] 한자 韓을 고대 일본에서는 '가라'라고 읽었다.[13]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14] 간간히 임나의 위치를 설명하는 대목 등에서 임나를 금관가야로 칭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15] 기원전 1세기까지 올라가는 고분군으로, 문자 사용의 증거인 이 출토된 것으로 유명하다.[16] 강원도 태백시에서 발원하는 최상류 지역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조금만 내려가면 물길의 경사도는 대부분 1만분의 3 이하로 떨어진다. 특히 하류 160km 구간의 경사도는 거의 0에 가깝다. 이 때문에 현대 이전에는 강이 제대로 흐르지 않고 역류하는 현상도 한반도의 다른 큰 강보다 심했다. 괜히 낙동강하굿둑이 세워진게 아니다. 을숙도에 가면 하구둑 체험관이 있는데, 여기에 하구둑 건설 이전의 역사가 나온다. 하구둑을 짓기 전까지는 현대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바닷물이 부산광역시에서 무려 130km 떨어진 대구광역시까지 역류하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17] 물론 이런 식으로 매장유물 분포도로 영역을 추정하하기는 요즘 사학계에서 비판을 매우 많이 받는다. 교과서의 고조선이야 워낙 답이 없으니 그냥 그렇게 퉁친 거다.[18] 간단히 말하면 이 시기 부산 지역은 김해권 유물과 경주-울산권 유물이 함께 나온다. 이를 두고 학자에 따라 교역을 해서라고도 하고 속국이라서라고도 하는 등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19]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금관 가야 건국 전 100호에 약 75,0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군 10,000명의 침략이면 자그마치 국민 인구의 1/7 ~ 1/8 이나 되는 대군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 늘었을지 모르지만 그걸 건국 초기에 격퇴하고 동시에 근방 모든 국가의 준동을 중재할 정도면 건국 후 아주 급속한 성장을 이뤘다는 증거이다.[20] 즉, 경제, 기술, 국제적 위상 등에서 매우 수준 높은 나라였다는 것이다. 가야의 최전성기까지만 해도 신라는 인구만 많았을 뿐 소백산맥에게 깔려서 적극적인 교류를 하지 못해, 실질적 영향력이 가야보다 약세였다.[21] 애초에 이런 기록들 때문에 연맹설이 주장된 거다.[22] 연대는 4세기 중반의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23] 포상팔국이 공격한 '가라'가 금관국이 아니라 함안 안라국이라는 설도 있다. 나무위키의 포상팔국의 난 문서도 공격당한 대상을 안라국으로 본 시점에서 서술되었다. 애초에 기록 자체가 모호해서 정설이랄 게 없고 저명한 고대사 학자들도 각자 주장하는 바가 갈린다.[24] 가라반叛이 반파국의 멸망이 562년 이전에 일어났고 그 반란을 진압한 것인지, 후대 기록 정리 과정에서 그렇게 정리된 것인지는 기록 그 자체만 놓고서는 알 수 없다. 일본서기 역시 560년 멸망설과 562년 멸망설을 동시에 적시하므로 도움이 안 된다.[25] 포상팔국과 관련한 논문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일어난 시기와 피해 국가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설들이 제시되고 있으므로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고고학의 양상과 기록의 괴리가 매우 심하기 때문이다.[26] 실질적으로 제압한 경우는 위와 같이 같은 기록의 다른 부분에서 '도륙'이라는 강한 어조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27] 훗날 비슷한 이유로 발생한 사건으로는 병자호란이 있다.[28] 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보면 이쯤부터 초대형급 무덤과 별도의 딸린덧널이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최대규모가 줄어들며 부장품도 전성기의 금동제장식마구와 왜계 위세품이 더이상 부장되지 않는다.[29] 김해보다 부산지역 세력이 더 커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금관국의 주체가 부산 복천동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었지만 내부 부장품이 김해계에서 신라계로 빠르게 바뀌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잠깐 반짝했을 수는 있지만 금방 신라화되고 이후 부산권역 안에서 인근 연산동으로 묘역이 옮겨간 뒤 고분의 크기가 작아지고 쇠퇴한다.[30] 일본으로 금관국 유민이 퍼져나갔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이 시기부터 가야토기의 영향을 받은 스에키토키가 생산되기 시작하며(단 최근 견해는 스에키 토키가 4세기 말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다른 경남 지역의 발전이 가속화된다는 것이다.[31]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금관국이 이 때 잠깐 멸망하거나 멸망에 가깝게 몰락했다던 설도 있었는데, 5세기 이후에도 대성동 고분군에서 수장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굴이 되기도 해서## 일단 국체는 보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성동 거대 목곽묘 축조만 중단됐을 뿐 그 외의 고분군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32]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고구려 계열의 유물이 김해에 전혀 침투하지 않았다는 점, 김해의 특이적 묘제와 토기문화가 그대로 유지되는 점 등이 있다.[33] 사실 부산대냐 아니냐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34] 사실 이 자료를 식별하고 일본 쪽 연구 성과를 반영할 수 있는 수준의 연구자가 당시 한국에는 신경철 교수밖에 없었다[반론] 그런데 이 연구 이후 30년 동안 일본의 고분 시대는 물론 야요이 시대 연대까지 50년 정도 상승되어 버렸다. 즉, 예안리 고분군 편년부터 재검토되어야 하며, 신경철 교수 본인도 보고서 고찰에 분명히 명기 '일본 측의 연대에 따라 변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므로 이에 기반한 대성동 29호분 연대도 격상될 여지가 있고 기타 복천동 고분군 연대도 수정될 여지가 허다하다.[36] 일본의 고분시대 토기. 한국이 도질토기라면 일본은 스에키가 대응한다. 같은 시간대를 갖고 있으며 또 한국, 일본 각지에서 서로의 토기가 확인되기 때문에 서로 공반(共搬)되는 점을 통해서 교차 편년이 가능하다. 즉 서로가 서로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셈.[37] 유적에서 출토된 목재의 나이테(木輪)를 통한 연대 추론 방법이다.[38] 일본은 층위학적으로 조사를 할 경우 장점 아닌 장점이 있는데 바로 주기적으로 화산이 폭발했기 때문에 그 화산재가 층위 형성과정에서 쌓여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화산 폭발의 시점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연대를 도출하면 그 폭발 당시 화산재 아래의 층위에 놓인 토기들은 화산재의 연대보다는 먼저 묻혔다는 "하한연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반론] 위의 "신라 토기와 김해 대성동, 부산 복천동 출토 토기와의 관계"와도 결부된 문제인데, 애초에 부산대 쪽 연대는 일본 고분 시대의 고전 연대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고, 스에키 교차 연대는 격상된 신 연대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산, 경남 쪽 연구자들은 일부 스에키와 공반된 목제품의 출토 정황을 의심하면서 그를 믿을 수 없다는 타당성 있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는 절대연대자료도 고고학적 정황이 확실해야 한다는 아주 타당성 높은 비판이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목륜 연대로 산출된 스에키의 연대가 만약 잘못된 것이라면, 상대 서열과 목륜 연대와의 역전현상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그러한 사례가 전혀 없다.[40] 일본 목륜 연대라면 449년 + @ 즉, 5세기 3/4분기[반론A] 중국 자기와 관련된 김일규의 주장에서도 일부 문제점은 산견되고 있다. 복천동의 굳건하고 불가역적인 연대관 아래에서 유적의 하한연대를 말해주는 복천동 65호에 대한 문제가 그것이다. 복천동 65호는 횡구식 석실묘이고, 거기에서 출토된 중국 청자를 근거로 대략 7세기 1/4분기를 하한으로 설정하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 청자 완의 연대 근거로 무려 1959년에 중국에서 보고된 간보에 매벽요 출토품을 근간에 두고 있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 청자는 북조의 청자 완(宛) 속성과 오히려 더 가까우며, 그들의 굳건한 불가역적의 연대관의 근거로 신성시되었던 "1959"년 간보의 내용에는 지표에서 채집되었다고 아주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출토라는 명확한 서술이 없음에도 왜 2011년까지도 이것이 출토품으로 전승되었는지, 아울러 1970년대에 중국에서 이미 매벽요 "채집"품에 대한 수정된 견해가 제시되었는데도 반영되지 아니한 점은 곱씹어 볼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반론A에] 이어서 따라서 연대관의 최 하한은 소급의 여지가 다분하다. 이를 염두에 두고 토기에 대한 관찰을 병행할 때, 무조건적으로 편년만 끌어올린다는 경북쪽 연구의 현실이라는 비하는 외려 반대 측의 틀에 갇힌 프레임이 빚어낸 참극이며, 학문의 교조화와 무엇이 다를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편년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료와 비교적 관점에서 좀 더 건설적인 그림을 그려보자는 학문적 제의를 이처럼 평가 절하하는 것에 대해 경계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급변하고 급성장하는 중국의 고고학적 연구와 넘쳐나는 중국의 자료를 분석적이고 체계적으로 유념해야 한다는 점만을 덧붙여 둔다.[43] 내물왕릉론을 주장하는 연구자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다. 특히 'ㅇㅇ대학 = 특정 연대관 사용'이라는 연구관점의 교조적 인식은 큰 문제점이다.[44] 안양 효민둔 154호. 전연(前燕)과의 관련되어 있어 업성 천도부터 멸망까지(352~370)의 시간을 갖는다.[45] 조양 원대자 벽화묘. 벽화의 묵서명이 '永和十年二月己卯朔' 또는 '太和元年二月己巳朔'으로 판독되므로 영화 7년인 354년 또는 태화 원년인 366년의 시점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46] 보다시피 TK와 PK의 편년 대립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 최병현 (2013년), '신라 전기 양식 토기의 성립'에서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그 이면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결국 박천수의 편년은 합천 옥전 고분과 고령 지산동 고분을 비롯한 가야 고분의 연대는 올리고 경주의 신라 고분 연대는 내리려는 의도인 것이다. TG232 형식의 연대를 김두철(2006년)과 홍보식(2012년)은 5세기 2/4분기로, 신경철(2009년)은 5세기 3/4분기 이후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신라 • 가야 고분 연대관을 고수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따라 이제는 일본에서 어떤 새로운 자료가 나오거나 어떤 새로운 해석이 나와도 광개토대왕 남정과 대성동 고분군 축조 중단에 부합되지 않으면 부정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부연1] 앞서 언급 했듯이 400년 경자년의 광개토대왕 남정은 영남 지역 일대에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킨 중요한 사건이며 간과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이 사건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다. 고구려 남정 = 마구 문화의 시작은 금관 가야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대성동 29호분의 출현에 대한 설명과 동일한 논지인다. 위에서 문단에서 언급 했듯이 즉 선진 문물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내려와서 토착 세력을 정벌하고 선진 문물을 전파했다고 설명하는 소위 이주 - 전파설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부연2] 최근 대성동 91호분에서 출토된 삼연계 재갈로 인하여 마구의 수용 시기가 남정 전 시기인 4세기 전반에서 중엽 사이에 올라가며 마구의 수용이 고구려 남정의 영향이 아니라는 것을 추정 할 수 있다. 자체적인 교역을 통해서 입수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4세기 백제 근초고왕 때 중국 - 백제 - 가야 - 왜를 잇는 교역망이 형성 되고 있다는 점이며 단순히 신라나 고구려를 거치는 루트가 아니더라도 백제를 통해서도 충분히 간접적으로나마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루트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단순히 고구려 남정의 영향을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된다.[49] 창원으로 추정되는 탁순국아리사등이 백제와 신라를 두려워해 왜국에 요청해 불러온 지원세력이다. 그러나 이사부가 다대포에 진을 치고 무력시위하자 겁을 먹어 싸우지도 않고 퇴각해버렸다.[50] 현재 정설은 독로국이 거제지역에 위치한 국가이며 부산의 경우 거칠산국(또는 장산국)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모두 거칠산국으로 고친다.[51] 격상된 연대를 주장하는 신학설에 의하면 BC 2세기 중엽 이후, 즉 위만 조선 시기[52] 한편 함안 분지의 안라국도 이러한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라국의 경우 함안 지역 내에서의 2세기 ~ 4세기 목곽묘가 충실히 조사되지 않아 알기 어렵지만, 우거리 가마요지나 황사리 고분군 등지에서 발견되는 소위 함안 양식 토기들이 영남 지역에 전방위적으로 반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서에서도 금관국과 함께 마한 왕의 우대를 받은 존재로 기록되고 있어 안라국과 금관국은 일종의 경쟁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안라는 고고학 자료의 편차로 인해 과소 평가 받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안라국은 함안 분지와 구조곡으로 연결되는 진동만 일대를 통해서 단독 대외 교섭을 실시할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술할 금관국의 낙동강 유역 관계망에 대항하여 경남 서부와 남강, 황강 교통망을 토대로 나름의 세력을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53] 이렇게 청동기 시대부터 성장한 여러 지역 집단이, 인접 집단과 연합하여 국을 이루면서도 그 흥망성쇠에 따라 주도권을 내어주거나 번갈아가면서 행사하는 경우는 초기 소국 형성 과정 및 초기 국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고학의 형제 학문인 인류학에서는 이러한 현재의 사례들을 여러 차례 밝혀놓았다.[54] 우리나라 사서에도 이러한 흔적들이 나오는데, 신라의 경우 박, 석, 김이 교대로 왕을 차히자다가 김씨가 독점하게 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특히 금석문에서 6세기까지 여러 명의 왕이 교를 내리는 것도 이러한 흔적일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관찰되는데, 특히 일본 고고학에서 같은 토기와 묘형, 제례를 공유하는 지역 집단 가운데 수장묘라 할 수 있는 대형 전방후원분이 시기에 따라 여러 지역으로 옮겨다니며 축조되는 현상이 관찰되거나, 이동하는 현상이 관찰된다. 이에 착안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창녕 분지 내에서 대형 수장묘가 영산 고분군에서 북쪽의 송현동, 교동 고분군 이동하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하였다.[55] 홍보식 2000년 「고고학으로 본 금관 가야」 『고고학으로 본 가야』 한국 고고학회 김영민 2008년 「금관 가야의 고고학적 연구」 부산 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56] 정치체의 영역화 과정은 단순히 특정 토기 양식의 분포 범위를 가지고 설명 할 수 없다. 최근에 신라 영역화 과정에 대한 연구나 대가야의 중앙 집권 단계 과정의 연구 등을 살펴보면 토기 양식의 유입뿐만 아니라 위신재의 분배 그리고 매장 주체부의 형성 등 다양한 단계를 걸쳐 진행된다. 아직까지는 금관 가야는 이러한 현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부족하다.[57] 최병현 교수의 경우 4세기 대 사로국의 고분이 존재 할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현재 조사 중인 쪽샘 일대를 지목하고 있다.[58] 금관가야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고순사국 등 가야 연맹의 일부 국가들이 연합하여 금관가야를 공격했다. 금관가야는 겨우 이를 진압했지만, 가야 연맹은 크게 흔들렸었던 것이다.[59] 고구려는 위로는 중국의 왕조 및 북방민족들과 접환 특성상, 고구려 입장에서는 한반도 남쪽 나라들보다 훨씬 강력한 중국의 왕조 및 북방민족들이 가장 위험한 주적이었다.[60] 정확히는 382년이다. 대화내용은 부견이 해동(한반도)의 정세가 바뀌었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위두가 시대가 바뀌었으니 정세도 바뀌는 게 당연하다고 대답하는 내용.[61] 일설에 의하면 독로국과 같다고 보기도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독로국을 거제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 추정하고 있다.[62] 애초에 동래 지역은 단층대로 경주 분지와 바로 연결된다. 신라로서는 낙동강 관계망을 틀어진 금관국의 견제를 위해, 또 고질적인 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로서 동래지역 장악이 절실했다.[63] 물론 일시적 진출로 본다. 고고학적 자료는 5세기 대 합천 지역의 세력이 가야임을 보여주기 때문, 물론 고령반파국 문물과 창녕 토기 및 신라 출자형 금동관 등 신라 문물이 서로 경쟁한다. 이 지역이 낙동강 중류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아웅다웅했던 것의 흔적으로 본다[64] 이미 그전부터 해상 교류로 맺어진 사이라 아주 밀접한 관계였다. 예안리 고분군 출토 야요이 시대 석제품도 그 예[65] 고총이란 20m 이상의 고분을 이르는 것으로, 고총화했다는 것은 거대 고분들이 등장한다는 뜻. 자세한 것은 고분 문화 문서를 참조.[66] 이 시기부터 금관 가야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토기는 사라지며, 창녕계나 소가야계 토기, 그리고 이동양화된 지역 토기들이 등장한다.[67] 대표적으로 대성동 73호분은 5세기 2/4분기에 해당하는 대형 석곽묘이다. 함안과 대가야에 비하면 중형급 고분인 점에서 5세기 중엽 금관국이 계속 이어지고 있으면서도 반파국이나 안라국보다 열세인 점을 알 수 있다.[68] 봉황대와는 다르다. 현재의 봉황대는 봉황 토성 안의 내성이거나, 구릉으로 보인다.[69] 인도 아유타(아요디아) 국에서 함께 온 허황옥의 오빠가 불교를 함께 들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관련 이야기도 있다.단, 허황옥의 인도 출신 자체부터 논란이 있고 이후 불교를 부각시키기 위해 각색했다는 주장도 많으니 공식적으로 받기는 힘들다.[70] 질지왕 시절 허황옥의 명복을 빌고자 김해시 응달동 일대에 왕후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기록한다. 이 당시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가 일어나기 전이다. 왕후사를 세웠다는 기록이기 때문에 수용한 건 최소 그 이전이다.[71] 일명 정미대출병[72] 무예를 흥하게 한 대왕, 흥무대왕(興武大王).[73] 생활유적으로, 금관국 왕궁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74] 유네스코 세계유산 가야고분군[75]김해군 가락면. 지명을 금관국의 이칭인 가락국에서 따온 것이다.[76] 도로를 내던 중 금관국 유적이 다수 출토되었다. 금관국의 수도 혹은 가야 연맹국의 연합 항구일 가능성이 높아서 공사가 터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