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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 문서 : 가야
가야 연맹의 변천. |
1. 역사성 및 명칭
- 가야가 자리한 경상도 서남부 지역 여러 나라에 대한 최초 기록은《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전에 등장하는 변한이다. 변한과 가야가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지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크게 봐서 변한이 가야의 전신이라는 정도는 합의가 되어있다. 시대가 흘러 4세기쯤 되면 몇몇 나라는 신라, 백제, 왜 등의 주변국에서는 이들 나라를 통틀어 가야(加耶) 혹은 가라(加羅)라고 불렀던 듯 하나, 가야는 본래 가락국(駕洛國), 즉 금관국(金官國: 지금의 김해)의 이름이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김해의 가야국이 오랫동안 맹주격인 나라로 있으면서 영향권 전체를 가야라고 부르게 된 것이고, 나중에 고령이 맹주 역할을 가져가면서 가야라는 대표적인 이름마저 가져가고 후기가야 시기 김해에 남은 나라는 금관국 등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는 것. 참고로 일본어에는 조선이나 한국 등의 한반도 국가를 의미하는 한자인 한(韓)을 から(카라)로 부르는 독법이 있다. 금관가야를 중국에서도 구야한국이라고 불렀다. 한자의 뜻을 떠나 발음으로만 따진다면, 이를 통해 고대 일본인들이 가야와 한(韓)을 동일시했거나 적어도 연관이 깊은 것으로 간주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즉, 이 가설이 맞다면 일본에서 처음으로 외국으로 인식한 나라는 가야인 셈이다. 고로 가야는 나라나 나라 국자에 대응하는 한국 고대어의 일반명사라는 추론도 있다. 당나라 할때 당(唐) 또한 ‘가라’라고 훈독하는데, 외국이라는 뜻도 있다. 혹자들은 이것을 근거로 외국이라는 관념이 당(唐) 시기에 생긴게 아니냐는 추론도 있지만, 많은 이가 알다시피 가야가 훨씬 선대의 국가 였으므로 전자의 추론이 더 합당하다고 볼 수 있으며, 후대에 와전되어 唐 = Kara, 외국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을수도 있다. 와전된 이유로서 고대 일본이 7세기 초부터 파견하기 시작한 견당사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한반도라는 중계지를 거치지 않고 당나라로부터 직접 대륙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기존에 외국을 뜻하던 kara가 당나라를 뜻하는 용어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다.
- 명칭의 유래에 대한 주보돈의 해석은 임(任)은 맡길 임(任)이며 ‘나’는 땅에 대응하는 고대 한국어이며, 해석하자면 백제가 맡긴 땅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백제삼서등 백제계 사료에 대거 사용 되었고 일본서기가 차용 하면서 와전 되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일본서기에서도 성왕이 가야 지도층과 만난 사비회의에서 가야와 백제는 근초고왕 시절 이래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또 다른 해석은 ‘님의 나라’ 혹은 ‘님의 나(고대어로 땅)’을 뜻한다는 추론이 있다. 이것이 음운 법칙에 의해 ‘님나’가 ‘임나’로 변형 되었다고 한다. 주로 가야의 구성국들이 가야의 맹주 임나가야 (금관국), 대가야를 지칭 할때 쓰였다고 한다.
- 일본에서는 이 지역을 통틀어 미마나(任那, 임나)라 부르기도 했다.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임나란 말도 한국에서는 금기시 되는 것 같지만, 임나 자체는 단순한 지역 명으로 추정된다. 관련되어, 임나가 대마도 등이었다는 설도 있다.
2. 경제 및 제철
- 천년 전 가야의 주요 세력권이었던 김해 평야는 당시 바다와 많은 섬으로 된 다도해였다.[1] 그리고 배후의 산지에서 철광석이 채굴되어 제철기술을 발전시킬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가야의 유적 중에서 제철 공정이 이루어졌던 유적이 있다. 이것은 동북아에서 가장 오래된 모든 제철 과정이 포함된 유적이다. 철광석이 산출되는 산과 바다에 인접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가야인들은 손쉽게 철을 중국 군현부터 일본 열도까지 각지로 수출할 수 있었다.[2] 이때 철이 화폐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낙동강에 인접한 물금읍 지역이 그 당시의 대표적인 철 산출지였다. 가야의 주요 세력 중 하나가 물금 부근에 위치했었는데 가야시대 철제 유물들의 원소 성분은 물금 철광과 거의 유사하다. 물금 철광은 1980년대 채산성 악화로 폐광되기 전 까지는 현대에도 활발하게 채굴이 이루어졌다.
* 철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자국 수요를 넘어 해외 수출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군사력과 경제력이 모두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철을 왜와 낙랑군에 팔아 경제력과 군사력을 유지하고 중국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철을 사가던 낙랑군이 멸망하자[3] 가야의 철 수출이 막힘과 더불어 가야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도 없어져 결국 이 이후로 계속 쇠락하게 되었다.
3. 풍습 및 고분유적
- 풍습으로는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 [4] 편두 항목 참조. 또한 왜와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인지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삼국지).
4. 기타
- 비공식적으로 한국사 최초로 불교를 받아 들인 나라이다.[5] 공식적인 기록으로만 논하면 고구려, 백제 다음 세 번째로 수용했다. 질지왕 시절이던 452년에 허황옥의 명복을 빌고자 왕후사라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당시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가 일어나기 전이다. 그리고 왕후사를 건설했다는 기록이기 때문에 불교를 수용한 건 최소 그 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부족한 절대적인 사료나 기록에 비해, 유물과 고고학적 사료는 고대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서 전해졌던 구지가를 역사절 사실로 입증 해주는 거북이 형상의 방울도 발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잊혀진 제국이라고 떠올리는 막연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경상도에는 가야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는 많다. 사족으로 퇴임 후 김해로 귀향한 노무현 대통령도 가야사를 연구하기도 했다.기사를 찾아보면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수 있는 유물을 발굴했다고 나오기도 한다. 그정도로 연구도 활발하며, 고고학계를 중심으로 아마추어들도 많다.
- 임나가야 (금관국)의 경우 현재의 강역과 사뭇 다르다. 그도 그럴것이 금관국에 대한 일본서기의 서술을 보면, 금관국의 북쪽에는 거친 바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신라가 있다고 서술 되어있다. 현재 남해, 특히 김해와 부산의 해안선은 소빙하기를 거치며 바닷물이 얼어붙어 해수면이 낮아진 관계로 생긴 지형이 꽤 많다고 한다. 이후에는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토사의 영향으로 지속적으로 퇴적되면서 육지가 점차 넓어지는 과정을 거쳐 현재의 지형이 된 것이다. 일본서기가 작성된 무렵엔 김해평야의 상당 부분이 일본서기 서술대로 바다 였을 것이다.
[1] 즉 지금의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해당하는 낙동강 삼각주 지역은 대부분 바다에, 지금의 김해 시가지 근처까지 바다가 들어왔고 김해는 남해 바다와 접한 항구도시였다.[2] 가야 이전의 고대국가인 변한역시 이 특성상 철 생산이 주력이었다고 한다.[3] 당시 중국을 통일한 서진이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이 겹쳐 매우 혼란스러워지고 낙랑군과의 관계가 끊어지다시피 하자 그 때를 틈타 고구려의 미천왕은 낙랑군을 공격하여 313년에 낙랑군을, 314년에 대방군을 정복했다.[4] 진한에도 같은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에 대해 청나라 건륭제는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訂謬)>라는 글을 직접 집필하여 "그 말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궤변을 늘어놓아 세상을 미혹하게 한 것으로 의심이 된다. 무릇 돌로 머리를 누르면 어른도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 갓 태어난 아기를 돌로 눌러놓는다는 것은 실로 인정상 마땅치 않은 것이다.", "우리 나라의 옛 풍속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수일이 되면 요람에 두는데 반듯하게 오래 눕혀두면 뇌골이 저절로 평평하게 되어 머리 형태가 편두(扁頭)처럼 되었다."고 하며 만주족의 옛 풍속을 들어 반박했다. 첨언하자면 편두 항목에서 치누크 족이 편두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돌이나 널빤지로 아기의 머리를 누른다기보다는 아이를 반듯하게 눕혀서 고정시키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5] 인도 아유타(아요디아) 국에서 함께 온 허황옥의 오빠가 불교를 함께 들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관련 이야기도 있다.단, 허황옥의 인도 출신 자체부터 논란이 있고 이후 불교를 부각시키기 위해 각색했다는 주장도 많으니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기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