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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지도의 가야 세력 범위
1. 개요
541년 4월과 544년 11월, 2차례에 걸쳐 열린 백제와 가야의 국가회담으로 안라회의 이후 1차 사비회의, 2차 사비회의 순으로 백제 - 가야 - 신라의 신경전이 펼쳐졌다. 국내 사서인 《삼국사기》 등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며 《일본서기》 〈흠명기〉 2년(541년) 4월조와 5년(544년) 11월조에만 아래의 내용이 적혀져 있다. 다만 이 기록에서도 《일본서기》 특유의 윤색과 은유가 어느 정도 적용되었다는 점은 유의하여야 한다.이를 두고 '임나 부흥회의'나 '임나 재건회의' 또는 '임나 복건회의' 등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가치중립적으로 '사비회의'라고 적는 경우가 많다.[1]
'임나(任那)'는 가야 일대를 부르는 말로, 현재 우리가 쓰는 '가야 연맹'이라는 용어와 비슷한 용도로 쓰였으며 그 중 지도국인 안라국을 지칭하기도 했다. 이하에 쓰이는 가야 연맹은 임나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다.
2. 1차 사비회의
2.1. 배경
2.1.1. 5세기 말~520년대 반파국의 몰락, 나제 동맹 악화
삼국시대 중반부에 들어서 백제와 신라가 점점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성장하면서, 그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사이에 낀 가야 지역의 작은 국가들은 백제와 신라에 치이는 신세가 되었다.그래도 5세기에는 대가야 반파국 주도로 잘 나갔던 적도 있었지만, 6세기에는 가야 소국들에 비해 너무 크고 강해진 신라와 백제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6세기 중반쯤 되면 백제나 신라는 가야 소국들 정도는 국력으로만 따지면 단독으로 가볍게 밀어버릴 수 있을만큼 성장한다. 이 시기에는 한때 가야 지역의 맹주로 활약하던 금관국조차 일개 소국으로 전락한 상태였고, 신라와 백제에 독자적으로 버틸 수 있는 가야는 후기 가야 연맹 22개국 중 반파국과 안라국 정도뿐이었다.
허나 백제와 신라는 서로 힘을 합쳐야 강력한 고구려에 겨우 대항할 수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관계는 나제동맹으로 결속되어 있었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후방에 있는 가야를 가지고 서로 싸울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가야를 통째로 먹고 한쪽은 뒤처지는 것을 가만 두고 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두 나라는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결국 두 대국의 미묘한 균형 사이에 낀 가야가 위태롭게 완충 지대로서 독립을 겨우 유지하는 구도가 되었다.
《일본서기》에는 당시 영향력이 센 세력의 병력이 가야의 성 내부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백제 성왕은 531년 3월 안라국 지역에 걸탁성(乞乇城)을 쌓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훗날 대한제국이 러일전쟁 직전까지 러시아와 일본의 힘의 균형 사이에서 유지되던 것이나, 태국이 프랑스와 영국 사이 힘의 균형으로 겨우 독립을 유지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제는 512년 12월 가야 소국들 중 상다리, 하다리, 사타국과 모루국을 병합하고[2] 이듬해 11월 5일에는 장군 저미문귀(姐彌文貴)와 주리즉이(州利卽爾)를 보내 당시 반파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기문국과 대사국까지 병합하였다. 이로 인해 나제동맹의 운명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2.1.2. 530년대 신라의 선공, 안라의 선방
그렇게 백제와 신라가 대치하던 중 신라와 가까운 쪽의 탁기탄이 529년에, 금관국이 532년에, 탁순국이 538년에 연이어 신라에 편입되었다. 변한과 진한 시절부터 400년 간 그럭저럭 나뉘어 유지되었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고, 이 세 나라 외 나머지 가야권 국가들에게 신라의 노골적 팽창은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다가왔다. 앞서 백제에게 멸망한 사타국과 모루국 등은 일개 소국이었기에 큰 위기로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금관국과 탁순국은 후기 가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나라였기에 그 피해는 더 컸다고 볼 수 있다.신라가 가야에 있는 구례산성에 주둔한 백제군을 쫒아내자 가야 일대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가야 중 함안 안라국은 그 기회를 살려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전에 백제가 설치했던 왜신관의 인원을 친안라 왜인 관료들로 재편성했다. 현대 사학자들은 이를 안라왜신관(安羅倭臣官)이라고 부른다.[3] 540년경 설치된 안라왜신관의 관료들은 안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왜신 이쿠하노 오미(的臣)[4], 키비노 오미(吉備臣), 카와치노 아타히(河內直)와 안라 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야계 왜인 이나사(移那斯), 마도(麻都) 등이었다.
안라국은 안라왜신관을 이용해 신라와 왜국의 연락선 역할을 하여 가야 소국들이 신라와 백제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고, 그 결과 안라국은 후기 가야 연맹의 지도국이 되었다. 진정한 줄타기 외교의 성공이었다. 이후 안라는 연맹 지도국으로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커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시기 가야 연맹은 반파국과 안라국, 두 국가가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순수 국력은 반파국이 가야에서 가장 강했던 듯하지만, 529년 이뇌왕이 신라 공주와 혼인하여 동맹을 맺으려다 큰 외교적 실패를 저질렀기 때문에 일단 자숙하면서 안라국이 주도하는 외교에 순순히 따라가는 상태였다.
2.1.3. 540년대 백제의 중흥, 가야의 위기
신라에서는 진흥왕이 540년에 즉위하여 급격한 영토 확장을 주도하고 있었고, 백제에서는 성왕이 538년 봄에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의 부흥을 꿈꾸었다. 그러나 아직 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 지방을 차지한 채 북쪽에서 버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제동맹이 서로 중요한 상태라 양국은 후방의 가야 지역을 두고 무력 동원을 자제했다.성왕의 진정한 목표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었으므로 신라와 협력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무력으로 가야를 차지하여 신라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541년 신라에 화친을 요청해 소강 상태에 들어선다.
한편, 신라와 백제의 팽창 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반파국과 안라국은 신라에 2~3차례에 걸쳐서 멸망한 옛 3개국[5] 부활을 목적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하자 방향을 바꿔 백제에 요청했고, 백제가 이를 받아들여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비슷한 목적으로 열렸지만 수포로 돌아갔던 먼젓번의 안라회의에서는 안라국이 가야권의 대표로 참여하고 나머지 가야 국가들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이름이 알려진 대부분의 가야 소국들이 제각기 대표를 뽑아 모여서 백제까지 갔다.
2.2. 회의 개막
- 백제[6]: 성왕 외 다수.
- 안라국[7]: 하한기(下旱岐)[8]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외 다수.
- 반파국[9]: 상수위(上首位)[10] 고전해(古殿奚) 외 다수.
- 졸마국[11]: 한기(旱岐) 외 다수.
- 산반하국[12]: 한기(旱岐)의 아들 외 다수.
- 다라국[13]: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 외 다수.
- 사이기국[14]: 한기(旱岐)의 아들 외 다수.
- 자타국[15]: 한기(旱岐) 외 다수.
- 안라왜신관[16]: 키비노 오미(吉備臣) 외 다수.
541년 4월, 가야 지역 7개 국가들의 한기(旱岐)와 왕실 일원 및 재상들이 안라왜신관 관료들과 함께 백제 사비성에 모였다. 《일본서기》 〈흠명기〉에 기록된 회의 내용에는 일본 측에서 황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갖가지 왜곡을 가한 흔적이 있는데, 대표적인 왜곡은 "이번 회의의 목적은 일본 천황을 편안케 함"이라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을 배제하면 백제와 가야 7개국 간의 대화 내용을 엿볼 수 있다.
夫建任那者, 爰在大王之意. 祇承敎旨. 誰敢間言. 然任那境接新羅. 恐致卓淳等禍. 【等謂㖨己呑·加羅. 言卓淳等國, 有敗亡之禍.】
무릇 임나를 재건하는 것은 대왕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교지를 받드는 것에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지만 임나의 국경이 신라와 접해 있기 때문에 탁순국 등의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등이라는 것은 탁기탄과 가라를 말한다. 탁순 등의 나라처럼 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서기》 〈흠명기〉 2년(541년) 4월 #
가야 소국들의 안건을 요약하면 이러하다.무릇 임나를 재건하는 것은 대왕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교지를 받드는 것에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지만 임나의 국경이 신라와 접해 있기 때문에 탁순국 등의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등이라는 것은 탁기탄과 가라를 말한다. 탁순 등의 나라처럼 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서기》 〈흠명기〉 2년(541년) 4월 #
- 가야 3개국의 재건은 백제 성왕의 뜻에 달려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 그러나 우리와 맞닿아 있는 신라는 탁순국과 금관국, 탁기탄을 멸망시켰다.
- 백제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향한 야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백제의 답은 이러했다.
-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대부터 안라국, 금관국, 탁순국 등 가야 소국들은 백제와 통교하는 친밀한 관계였다.
- 백제는 신라의 공격에 대해 하부 중좌평 마로(麻鹵)와 성방(城方) 갑배매노를 금관국에 보내 상황을 파악했다.
- 가야의 국경에 신라를 불러 가야 3개국 재건에 동의하는지 물어볼 예정이며, 만일 신라가 가야를 공격한다면 반드시 방어해줄 것이다.
- 탁순국과 금관국, 탁기탄이 망한 이유는 신라의 탓이 아니라 각자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남은 가야 소국들도 방비를 잘하고 조심해야 한다.
- 탁기탄은 가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망한 것이다.
- 금관국은 땅이 협소하여 기습에 대비할 수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기에 망한 것이다.
- 탁순국은 나라가 혼란스럽고 왕이 귀부하려는 생각으로 신라에 내통한 까닭에 망한 것이다.
- 신라는 옛날 고구려에게 부탁해 가야와 백제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는데, 어떻게 혼자서 가야 연맹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 백제가 가야 연맹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면 가야 3개국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왕의 답변은 가야 소국들의 기대에는 영 미치지 못했다. 들여다보면 그저 근초고왕 시절 전성기 백제의 패권 중심으로 가야 지역권을 아우르던 국제 관계로 돌아가자는 주장 뿐이었고, 이미 멸망한 가야 3개국(금관국, 탁순국, 탁기탄)은 신라가 강성해서가 아니라 자체적인 내부 분열로 신라에 내응해서 망했다며 "가야 너네들이 신라에 붙으려 해서 각개 격파당하고 이 꼴 났다"는 투로 은근히 비난했다.
因斯而觀, 三國之敗, 良有以也. 昔新羅請援於高麗, 而攻擊任那與百濟, 尙不剋之. 新羅安獨滅任那乎.
이렇게 보면 삼국이 패망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 옛날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신라가 어찌 홀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일본서기》 〈흠명기〉 2년(541년) 4월 #
그리고 이미 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만약 신라가 쳐들어 오면 도와주겠다는 말만 남기고, 하사품을 주며 이들을 돌려 보낸 것이다.이렇게 보면 삼국이 패망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 옛날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신라가 어찌 홀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일본서기》 〈흠명기〉 2년(541년) 4월 #
백제 성왕이 이런 식으로 나온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백제는 신라를 크게 자극하지 않고 북벌 준비를 하며 차차 가야를 흡수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면 한반도 남부의 강국인 신라의 군사력을 포함한 협공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던 터라, 가야 소국들이 원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신라와 충돌하고 멸망한 가야 3개국을 직접 복구하는 데에는 무관심했다.
3. 1차 사비회의 이후
3.1. 안라의 신라 접근 시도
541년 7월, 가야 연맹과 지도국 안라는 백제와 회의를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말을 듣지 못하자 다시 신라와 접촉했다. 백제와의 회의가 끝난 지 3개월 만에 바로 신라를 찾아갈 정도였으니 가야 연맹이 미래를 매우 불안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이들이 신라에 접촉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은 성왕은 매우 분노했다. 1차 사비회의에서 백제가 내놓은 말을 싹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백제는 곧바로 전부 나솔 비리막고(鼻利莫古)와 나솔 선문(宣文), 중부 나솔 목리미순(木刕眯淳) 및 기신 나솔 미마사(彌麻沙)를 안라국으로 보내 신라로 간 가야 연맹의 집사를 소환하려고 했다. 또한 안라왜신관의 관료 카와치노 아타히[17]와 아현 이나사, 좌로 마도를 심하게 꾸짖었다.
가을 7월에 백제는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와 신라가 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前部) 나솔(奈率) 비리막고(鼻利莫古), 나솔 선문(宣文), 중부(中部) 나솔 목리미순(木刕眯淳), 기신(紀臣) 나솔 미마사(彌麻沙)【기신 나솔은 아마 기신(紀臣)이 한(韓)의 부인을 얻어 낳았을 것이다. 백제에 머물러 나솔이 된 사람이며, 그 아버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른 경우도 모두 이에 준한다.】 등을 안라국에 보내 신라에 간 임나 집사(執事)를 소환하여 임나를 세우는 것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따로 안라일본부의 카와치노 아타히(河內直)가 신라와 통모하고 있는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백제본기》에서는 "카후치노 아타히(加不至費直), 아현(阿賢) 이나사(移那斯), 좌로(佐魯) 마도(麻都) 등이다."라고 말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일본서기》 〈흠명기〉 2년(541년) 7월 #
이러한 안라국의 행동으로 결국 1차 사비회의는 실패였음이 증명되었다.《일본서기》 〈흠명기〉 2년(541년) 7월 #
3.2. 백제의 분노
같은 달 성왕은 가야 연맹에게 선언문을 전달했다. 《일본서기》 특유의 과장과 윤색을 배제한 채 선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옛 내 선조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한기들과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나는 너희를 자제로 삼고 너희는 나를 부형으로 모셨다.
- 그리하여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요새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가 않다. 이것은 나의 과오이니 고치고 깊이 반성하고자 한다.
- 선대에 화친했던 우호를 존중하여 신라가 멸망시킨 탁순국과 금관국, 탁기탄 3개국을 다시 복구해 가야 연맹에 돌려주겠다.[18]
- 신라가 감언으로 주위를 속인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다. 너희가 신라의 계략에 빠져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될 것이 걱정된다.
- 요즘 들어 벌과 뱀의 괴이한 징조가 나타난다던데, 이 또한 신라와 계략을 꾸미는 너희에게 하늘이 경계하는 것이다.
- 멸망한 후 뒤늦게 후회해도 어림없는 일이니, 땅을 보존하고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내 말을 들어라.
보다시피 협박과 달래기를 동시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가야 연맹이 우호 관계로 지내온 역사를 강조하고 신라가 간악하다고 주장하며, 가야 연맹이 백제를 따른다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안라왜신관의 관리에게도 선언문을 보내 신라를 믿지 말라고 맹비난했다.[19] # 요약하자면 "신라는 예전부터 가야 연맹을 위협해 왔으나, 강대국 백제를 두려워하여 가야를 공략하기 전 잠시 거짓으로 화친한 것이다. 너희들이 감언을 쉽게 믿어 가야를 멸망케 할까 두려우니, 부디 경계하여 속지 말고 신라가 화친하는 틈을 타 공격하라." 정도의 내용이다.
3.3. 가야 연맹 부활 선포
백제가 기신(紀臣) 나솔(奈率) 미마사(彌麻沙)와 중부(中部) 나솔(奈率) 기련(己連)을 보내서 하한(下韓)과 임나의 정사를 아뢰고 아울러 표를 올렸다.
《일본서기》 〈흠명기〉 3년(542년) 7월 #
542년 7월, 1차 사비회의로부터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백제는 황급히 "가야 연맹이 백제의 도움으로 회복되었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신라가 먹은 탁순국과 금관국, 탁기탄 3개국이 실제로 부활한 것은 아니니 허울뿐인 선언이었고, 신라보다 먼저 가야 연맹을 차지하겠다는 흑심이 너무 티가 났기에 복잡한 정치 상황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일본서기》 〈흠명기〉 3년(542년) 7월 #
3.4. 안라의 왜국 포섭
543년 11월 8일, 왜국은 안라왜신관의 츠모리노 무라지(津守連)를 통해 임나 및 가야 연맹 내에 주둔한 백제의 군령과 성주들을 내보내라고 전언한다. 《일본서기》는 긴메이 덴노가 명령하여 백제의 군령과 성주가 있는 지역을 임나일본부에 소속시키라 했다고 전하지만, 실제로는 가야 연맹 및 안라가 안라왜신관을 매수해 자주성을 지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백제의 가야 연맹 부활 선포는 너무 섣부르고 부실하여 가야 연맹이 크게 반발했으나, 성왕은 이런 소식을 듣고도 무시했다.이때부터 안라왜신관을 두고 백제와 가야 연맹 간의 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안라왜신관은 백제가 가야 연맹을 지배하기 편하도록 만든 바지사장격 기구였다. 백제는 자신이 지배하는 가야 연맹 지역에도 왜국을 연결해 백제 - 왜국 - 가야 구도의 삼국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즉, 신라의 눈치가 보여 대놓고 백제의 거수기를 만들기는 어려우니 친왜파를 심어놓아 내부로부터 장악을 시도하여 백제가 유리한 지분을 형성하게 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려와 신라였다. 두 국가가 강해지면서 가야가 슬슬 삼국동맹 구도에서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였고, 결국 안라왜신관까지 역으로 장악해버린 것이다.[20] 백제는 분노하여 왜국에게 안라왜신관을 교체하라 했으나 왜국 또한 고구려와 신라를 의식하기 시작했기에 예전과 같이 고분고분 백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3.5. 백제의 임나 재소환
가야 연맹은 비록 백제에 한 번 반항했으나 계속 백제를 거부할 만한 국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543년 12월, 성왕은 가야 연맹의 반항을 누르기 위한 안건을 주제로 상좌평 사택기루(沙宅己婁), 중좌평 목리마나(木刕麻那), 하좌평 목윤귀(木尹貴), 덕솔 비리막고, 덕솔 동성도천(東城道天), 덕솔 목리미순, 덕솔 국수다(國雖多), 나솔 연비선나(燕比善那) 등을 불러 회의를 주재했다. 의논 끝에 나온 결론은 가야의 집사와 각국의 한기들을 소집하여 다시 국가 회의를 열자는 것이었다. 가야 연맹의 군주들을 소집해 완전히 백제 쪽으로 넘어오게 하려는 의도였다. 백제는 결국 시덕 고분옥(高分屋)을 보내 가야 연맹을 재소환했다.
3.5.1. 쩔쩔매는 가야연맹
《일본서기》는 백제가 재소환한 주체가 임나일본부라고 해놓았지만 이는 당연히도 거짓이고, 실제로는 가야 연맹이 주체였으며 안라왜신관은 곁다리였을 것이다.- 543년 12월, 백제가 처음 소환을 시작했다. 가야 연맹은 이듬해 1월에 보자고 미뤘다.
- 544년 1월, 다시 부르자 제사를 지낼 날짜라며 미뤘다.
- 544년 1월, 백제는 결국 가야와 안라왜신관을 강제로 불러냈지만 다들 집사보다 지위가 낮은 관리만 보내 제대로 논의할 수가 없었다.
- 544년 2월, 화난 백제는 시덕 마무(馬武), 고분옥, 사나노차주(斯那奴次酒)를 보내 "가야 3개국의 재건을 위해 필요한 병력과 군량을 같이 의논하고자 자주 소집했던 것인데, 너희가 좀처럼 오지 않아 협의할 수 없었다"며 성냈다.
- 544년 2월, 백제는 내쫓기로 결정한 카와치노 아타히, 이나사, 마도 등의 안라왜신관 관료들을 소환해 가야 3개국 멸망의 책임을 물으며 온갖 비난을 퍼부은 뒤 왜국으로 보냈다.[21]
- 544년 2월, 안라왜신관은 결국 "그동안 왜왕이 우리를 붙잡아 놓았다가 사신 이카노 오미(印哥臣)와 함께 신라로 가라고 명령했기에 어쩔 수 없이 가지 못했다"며 항복하고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 544년 3월, 백제는 우선 급한 대로 나솔 아탁득문(阿乇得文), 기마(奇麻), 모노노베노 카히(物部哥非) 등을 보내 왜국과 합의를 시도했다. 백제는 우선 왜신관의 이나사와 마도가 회의 진행을 방해하였고, 이쿠하노 오미, 키비노 오미, 카와치노 아타히 등은 신라로 가기 위해 왜왕에게 허위 보고[22]를 했다며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 다음 해당 왜신들이 계속 안라에 머무르면 가야 3개국의 재건은 어려울 것[23]이라 주장하며 그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키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왜국은 백제와 안라 사이에 끼여 별다른 답을 해주지 못했다. 안라는 끝까지 자립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544년 10월, 백제의 외교관들이 왜국에서 돌아왔다. 결국 안라의 승리였다.
4. 2차 사비회의
- 백제[24]: 성왕 외 다수.
- 안라국[25]: 하한기(下旱岐)[26]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외 다수.[27]
- 반파국[28]: 상수위(上首位)[29] 고전해(古殿奚) 외 다수.
- 졸마국[30]: 군(君)[31] 외 다수.
- 산반하국[32]: 군(君)의 아들 외 다수.
- 다라국[33]: 이수위(二首位)[34] 흘건지(訖乾智) 외 다수.
- 사이기국[35]: 군(君) 외 다수.
- 자타국[36]: 한기(旱岐) 외 다수.
- 고자국[37]: 한기(旱岐) 외 다수.
- 안라왜신관[38]: 키비노 오미(吉備臣) 외 다수.
544년 11월, 가야 8개국과 안라왜신관이 백제 수도 사비성에 다시 모였다. 고자국이 새롭게 참가하고 졸마국과 사이기국의 군주가 직접 참가하는 등, 1차 회의 때와는 구성원에 조금씩 차이가 생겼다. 한편 지도국 안라는 급이 낮은 하한기(下旱岐) 두 명만 보내 반감을 표시했다.
백제는 점차 친신라 노선으로 갈아타려 하던 가야 연맹에게 다른 선택지를 제안했다. 성왕의 발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가야 소국들은 예로부터 우리 백제와 서로 자제처럼 지내기로 약속하였다.
- 안라왜신관의 이키미(印岐彌)가 신라의 거짓말을 믿고 백제를 치려고 하는데, 이는 내가 명령한 것이 아니다.[39]
- 신라는 예로부터 탁순국을 멸망시키는 등 믿을 수 없는 무도한 나라였으니, 다시 예전처럼 백제와 형제가 되기를 바란다.
- 듣자하니 신라와 안라 사이에는 큰 강이 있어 적을 방비하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 낙동강을 군사적인 거점으로 삼고 성 6개를 쌓아 신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다.
- 왜국 군사 3,000명과 백제의 군사, 군령 및 성주를 주둔하게 하여 신라가 차지한 구례산의 성 5개[40]를 항복시킬 것이다.
- 탁순국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성에 주둔하는 병사들의 의복과 식량은 백제 측에서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다.
- 안라왜신관에 있는 키비노 오미, 카와치노 아타히, 이나사, 마도 등 가야계 왜신들은 모두 왜국으로 내보내야 한다.
백제 성왕은 이 회의에서 가야 연맹을 보호하기 위해 "신라와 안라의 국경 지역인 낙동강 변에 6개의 성을 쌓고, 왜인 병사 3,000명과 백제군을 주둔시키는 대신 비용도 백제가 대겠다"고 제안하였다. 또한 백제의 군령과 성주를 내보낼 수 없는 것은 가야와 왜국의 교류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며,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하여 가야 연맹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었다. 그리고 일부 왜신관을 왜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가야 3개국 재건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가야 연맹에 압박을 가했다. 결국 백제는 가야를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아예 먹어치우려는 속셈이었다.
가야 연맹은 이런 공격적인 제안에 아무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고, 지도국인 안라국과 반파국의 군주에게 보고하겠다고 한 뒤 해산했다. 1년 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소집한 회의였지만, 결국 서로 간의 불화만 드러내고 끝나버린 것이었다.
5. 2차 사비회의 이후
5.1. 소강 상태에 들어서다
545년 3월 왜국이 백제에 사신 카시하데노 오미 하스히(膳臣巴提便)를 보냈고, 5월에는 백제가 왜국에 사신으로 나솔 기련(己連)과 용가다(用哥多), 시덕 사나노차주(斯那奴次酒)를 보내 화답했다. 545년 9월, 백제는 가야 연맹에 중부 고덕 보제(菩提) 등을 보내 중국 양나라의 보물을 차등있게 하사했다.[41]546년 1월 3일에는 앞서 백제가 왜국에 보냈던 기련(己連) 등의 사신들이 귀국했는데, 왜국은 그들에게 말 70필과 배 10척을 선물했다. 이후 6월 12일에도 백제는 중부 나솔 약엽례(掠葉禮)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냈다.[42]
5.2. 안라의 고구려 접근 시도
백제는 고구려와 계속 전쟁을 벌였다. 547년 4월 백제는 왜로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왜는 상당히 고민한 듯하다. 앞서 말했듯 왜는 더이상 고구려와 신라를 무시하고 백제만 따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백제는 왜 뿐만 아니라 신라, 가야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548년 1월에 고구려-예(濊) 연합군에게 공격을 받았다. 신라가 군사 3,000명을 지원했고 결국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독성산성 전투 문서 참조.
백제가 연합군에게 공격을 받은 그달에 왜는 결국 백제 사신을 돌려 보내며 군사를 보내겠다고 동의했다. 근데 여기서 뜻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백제가 고구려와 싸우며 포로를 잡아 추궁했더니 '안라와 왜신관이 고구려에 백제 정벌을 권했다.'고 한 것이다.
마진성(馬津城) 전투[43]【정월 신축에 고구려가 군사를 이끌고 마진성을 포위하였다.】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안라국과 일본부가 (고구려를) 불러들여 (백제를) 정벌하기를 권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일본서기》 〈흠명기〉 9년(548년) 4월 3일 #
백제는 사실 확인을 위해 3번이나 안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로 오게 했으나 모두 거부했다.《일본서기》 〈흠명기〉 9년(548년) 4월 3일 #
548년 4월 3일, 백제는 왜국에도 사신 약엽례[44]를 보내 추궁했다. 왜국은 자국이 시킨 일이 아니며 자신들도 몰랐다고 강조했다. 백제는 왜국을 믿지 못하겠으니 군사를 보내지 말라고 요구했고 왜는 받아들였다.
이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5.3. 백제, 목적을 달성하다
是歲, 百濟聖明王, 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이 해에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중병(衆兵)과 두 나라의 병사【두 나라는 신라와 임나를 말한다.】를 직접 통솔하여 고려(高麗)를 토벌하니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했다. 또 진군하여 평양(平壤)[45]을 치니 무릇 6군(郡)의 땅이다. 그리하여 고지(故地)를 수복했다.
《일본서기》 〈흠명기〉 12년(551년)
이 해에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중병(衆兵)과 두 나라의 병사【두 나라는 신라와 임나를 말한다.】를 직접 통솔하여 고려(高麗)를 토벌하니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했다. 또 진군하여 평양(平壤)[45]을 치니 무릇 6군(郡)의 땅이다. 그리하여 고지(故地)를 수복했다.
《일본서기》 〈흠명기〉 12년(551년)
성왕은 한강 유역 수복전쟁을 시작하면서, 백제군뿐만 아니라 신라와 임나의 군사들도 이끌었다. 둘 중 신라야 북벌해서 얻는 영토라는 보상이 있으니까 자발적으로 참여한 거지만 가야는 자신들과 아무 상관없는 북방의 전쟁에 반강제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는 결국 가야가 백제의 무리한 요구도 들어야 할 수밖에 없는, 종속국으로 전락해버린 정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백제의 짧은 성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구려를 물리친 이후 백제와 신라가 사이가 벌어졌고, 결국 두 나라 간에 벌어진 역사적인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가 백제에 대승을 거두면서, 백제라는 후원자가 사라진[46] 가야 소국들은 완전히 무방비하게 신라 앞마당의 한 끼 식사로 전락했다. 결국 관산성 전투 이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562년 이사부와 사다함이 이끄는 신라군이 대가야를 정복하면서 모든 가야는 신라에 합병당했다.
6. 관련 문서
[1] 참고자료: 《미완의 문명 700년 가야사》 권1, p221[2]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백제가 왜국에게 임나 4현을 청하자 칙을 선포하고 4현을 백제에게 주었다"는 뉘앙스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현재 폐기된 학설인 임나일본부가 실존했어야만 성립하는 일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일본 측의 왜곡으로 받아들여진다.[3] 안라왜신관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일본이라는 국명은 670년에 들어서야 사용되기 시작했으므로 당대의 명칭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임나일본부설에서 주장하는 바와 달리, 안라왜신관은 가끔씩 왜왕의 의도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여 왜왕을 당황시키는 등 왜국의 통제를 받는 기관과는 거리가 멀었다.[4] 우고하노 오미(烏胡跛臣)라고도 불렸다.[5] 금관국, 탁순국, 탁기탄[6] 신라와 함께 양대 강국 중 하나이자 주최국이다.[7] 오늘날의 함안군.[8] 중국식으로는 부왕(副王)에 해당하는 작위로,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차한기(次旱岐)라는 다른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9] 오늘날의 고령군.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가라(加羅)'라고 기록하고 있다.[10] 중국식으로는 재상(宰相)에 해당하는 작위이다.[11] 오늘날의 함양군.[12] 오늘날의 합천군 초계.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산반해(散半奚)'라고 기록하고 있다.[13] 오늘날의 합천군.[14] 오늘날의 부림.[15] 오늘날의 진주시.[16] 안라국에 설치된 왜국 출신 사신들로 이루어진 기관이다.[17] 가렵직기 갑배(加臘直岐甲背)의 후손으로, 《백제본기》에서 언급된 카후치노 아타히(加不至費直)와 동일 인물이다.[18] 백제도 가야 소국들이 신라에 붙는 쪽으로 진행될까봐 다급했음을 알 수 있다. 가야 연맹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는 것이다.[19] 《일본서기》에서 실제 문서 내용을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고쳐 놓는 바람에, 원문의 내용은 대강 파악할 수 있지만 본래의 어조는 알 수 없다.[20] 당시 안라왜신관의 고위 관료 중 한 명은 가야 출신 왜인이었으며, 다른 관료는 가야 여인과 결혼하여 가야에 정착하는 등 가야와 왜의 결착이 매우 강했다.[21] 《일본서기》 원문을 보면 백제가 정말 화가 났음을 알 수 있는데, 왜곡을 배제한 원문은 다음과 같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직 너의 악평만 들어 왔다. 너의 선조 나기타 갑배(那奇他甲背)와 가렵직기 갑배(加臘直岐甲背)도 다같이 간계를 품고 거짓을 말하였다. 이카카노 키미(爲哥可君)가 그 말을 믿고 국난을 걱정하지 않고 내 뜻에 반하여 방자하게 포악한 짓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쫓겨났으니 전적으로 너희의 책임이다. 너희들은 임나에 머물면서 항상 나쁜 짓을 하였고, 임나가 나날이 쇠퇴해 간 것은 오로지 너희들 때문이다. 너희들은 비록 하찮을지라도 작은 불이 산야를 태우고 마을로 번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너희의 악행 때문에 임나가 패망한 것이다. 이제 너희들의 본거지로 돌아가도록 하라."[22] 백제 측 주장에 따르면, 탁순국이 신라에게 멸망한 뒤 안라와 신라는 그 부근인 구례산(久禮山)을 경계로 서로의 땅을 침범하지 않은 채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백제는 신라가 열병 행사를 통해 안라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군사를 여러 차례 보내 방어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쿠하노 오미 등 왜신들은 왜왕에게 "예전에는 안라가 신라에게 핍박당해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백제도 멀리 있어 도와줄 수 없었는데, 우리가 신라에 다녀오고 나서야 마음 놓고 논밭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허위 보고를 한 것이었다.[23] 특히 좌로 마도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였는데, 마도가 신라의 관등인 나마의 예관을 쓰고 밤낮으로 신라의 영토에 거리낌 없이 드나드는 등 친신라 활동을 계속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탁기탄의 함파한기와 탁순국의 마지막 군주도 신라와 내통하여 나라를 망하게 했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가야 연맹이 전부 멸망해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24] 신라와 함께 양대 강국 중 하나이자 주최국이다.[25] 오늘날의 함안군.[26] 중국식으로는 부왕(副王)에 해당하는 작위이다.[27] 2차 사비회의에서는 이탄해가 참석하지 않았다.[28] 오늘날의 고령군.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가라(加羅)'라고 기록하고 있다.[29] 중국식으로는 재상(宰相)에 해당하는 작위이다.[30] 오늘날의 함양군.[31] 훈은 키시(キシ)이다. 몇몇 소국의 군주들은 3년 사이에 호칭을 한기(旱岐)에서 군(君)으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32] 오늘날의 합천군 초계.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산반해(散半奚)'라고 기록하고 있다.[33] 오늘날의 합천군.[34] 안라국의 하한기나 반파국의 상수위에 비해서는 다소 낮은 작위일 가능성이 높다.[35] 오늘날의 부림.[36] 오늘날의 진주시.[37] 오늘날의 고성군.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구차(久嵯)'라고 기록하고 있다.[38] 안라국에 설치된 왜국 출신 사신들로 이루어진 기관이다.[39] 안라국이 신라에 붙으려 했음을 왜국의 탓으로 돌렸는데, 곧 안라국을 탓하지 않겠다는 뜻이다.[40] 《일본서기》 계체 24년(530년) 9월 기사에서 백제가 쌓은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주변의 5개 성으로 등장하는 등리지모라(騰利枳牟羅), 포나모라(布那牟羅), 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 아부라(阿夫羅), 구지파다지(久知波多枳)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41] 《일본서기》에는 덤으로 같은 달 백제가 장육불상을 지었다고 했고, 12월 20일에는 고구려에서 추군과 세군 세력 간에 내전이 일어나 4일 뒤 안원왕이 사망했다고 했다.[42] 한편 고구려에서는 546년 1월에 내전이 겨우 끝나고 추군 세력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패배한 세군 세력에서는 2,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양원왕 문서 참조.[43] 독산성으로 추정.[44] 이때의 관등은 한솔이다.[45]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산 일대를 일컫는 '남평양'을 의미한다.[46] 관산성 전투 이후에도 가야 쪽으로 약간의 지원군을 보내기는 했지만, 이미 관산성에서 워낙 큰 피해를 입어서인지 규모도 작았고, 결국 신라군에 버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