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도성 및 궁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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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a] 어떤 성곽이 위례성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
[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
||<tablewidth=100%><tablebgcolor=#008080> 백제의 왕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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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도성. 다른 말로 한성으로, 위례성을 도읍으로 하던 시절의 백제를 한성백제(漢城百濟)라고도 한다.위례성(慰禮城)은 하남, 하북 두 성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8년 백제 시조 온조왕이 최초로 하북위례성을 쌓았고, 이후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백제 초기 기년은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 현재로서는 정설이므로 축조 시기는 고고학적 근거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하남위례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둘을 토대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지만, 하북위례성은 여전히 아직 설이 분분하다. 하남위례성은 475년 문주왕이 웅진성(공주)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백제의 수도였고, 한산이라고도 하는데 어째선지 근초고왕 때도 한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조선 때는 충남 직산 일대(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가 위례성으로 추측되었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모두 지금의 직산의 옛 이름이 위례성(위례산의 위례산성지와 인접한 성거산에 성거산성지가 있다)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한강 이남 백제가 수도로 두었던 곳은 별개로 한성으로 인식하였다.
2. 건립에서 파괴까지
삼국사기에서는 졸본에 위치한 고구려에서 이탈한 소서노와 비류, 온조 세력 등이 남부로 내려와 한사군 및 마한의 땅에 거점을 차린 것으로 되어 있다. 어머니 소서노가 죽자 온조왕이 천도를 결심하여, 재위 13년차인 기원전 6년에 한강 이남으로 위례성을 옮긴 걸로 되어 있다. 이 때 새로 쌓은 위례를 하남위례성, 기존의 위례를 하북위례성이라고 구분한다.이 하남 위례성은 이후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붙잡혀 처형되는 475년까지 백제의 수도로서 존재하였다. 100여 년 뒤 백제가 중흥하고 고구려가 혼란한 틈을 노려서 성왕 시대 551년에 잠깐 고토회복에 성공했지만 곧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기나 훗날 고구려가 다시 회복했고 곧 신라에게 빼앗겼다.
2022년 잠실진주아파트 부지에서 한성백제와 6세기 신라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곳이 위례성으로 유력하게 꼽히는 몽촌토성, 풍납토성 근처라는 점에서 위례성과 관련된 유적일 가능성이 크고, 한편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도 구 위례성을 계속 활용했다는 추가적 증거가 되었다. [단독] 하반기 분양 앞둔 잠실진주서 '문화재 발견'…분양 밀리나
3. 어원에 대하여
표기 | 현대 한국어 발음 | 중고한어 발음 |
慰禮城 | 위례성 | 'jw+jH lejX dzyeng |
漢城 | 한성 | xanH dzyeng |
위례성의 이름은 '위로할 위'(慰) 자에 '예절 례'(禮) 자이므로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예를(禮) 다하는(慰) 성(城)' 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본디 예(禮)의 고자(古字)가 '豊(풍성할 풍)'이었으므로 '풍요롭고 아늑함'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위(慰)의 본자는 '尉' 였는데, 본뜻은 '누르다', '지지다'는 의미로 달군 다리미로 옷감을 지지는 형상이었다.
위례성의 어원을 두고 여러 가지 학설이 나왔다.
- 한자 뜻을 그대로 풀어 '예를 다하는 성'이라는 설
온조 등 고구려에서 탈출한 난민[1]들의 정착을 도와준 마한의 왕에게 보내는 성의의 표시라는 해석이다. 사서에는 마한 왕이 처음 백제 유민이 건너왔을 당시 정착할 땅을 제공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초창기에도 그들의 도성을 위례성으로 칭했던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의견이다.
- 울(울타리)이라는 고유표현을 음차해 위례라고 썼다는 설
이것은 몽촌토성에서 목책 흔적이 나온 이후에 본격적으로 힘을 얻은 의견이다. 정약용도 이 설을 지지했지만, 현대에 풍납토성이 등장한 후 이 의견도 상당히 모순점이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원래 울은 꼭 목재로만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학적 결함이라면 '울'의 원래 형태는 '욿'인데 '위례성'의 중고음에는 'h' 음이 없다는 점이 있다.
- 한강을 뜻하는 고어에서 유래했다는 설
한강과 관련된 어휘인 '욱리(郁里: 욱리하)', '아리(阿利: 아리수)'가 변하여 '위례'가 되었다는 설, 또는 적어도 양자간에 관련이 있다는 설이다. 사실이라면 위례성의 이칭이 '한성'인 이유도 설명이 된다.
- 큰 성, 또는 왕성(王城)의 의미라는 설
백제 귀족들은 자신들의 임금을 어라하라고 불렀는데(백성들은 건길지), 어라하의 음차를 위례로 파악하는 식이다. 다만 어떻게 어라하의 음차가 위례로 변했는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만약 '어라'가 '큰'이란 뜻이라면 위의 설과 마찬가지로 위례성이 '한성'인 이유도 설명된다.
4. 하남위례성 위치 문제
초창기 10여 년 잠깐 자리해 흔적을 찾기도, 별로 중요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은 하북위례성은 둘째치더라도, 오랫동안 도읍이었던 하남위례성조차 그 위치가 불명확해 이를 알아내는 것이 백제 멸망 이후 한국 고대사의 큰 이슈였다. 현대는 물론이고 고려나 조선 때도 위례성이 어디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후보지도 여러 군데가 꼽힌다. 후백제의 시조 견훤은 익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2]
《삼국사기》에 따르면 하남위례성은 북으로는 강, 동쪽으로는 높은 산, 서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비옥한 농토가 있었다. 근데 문제는 한국 서해안에 이같은 입지가 수두룩하다는 것.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삼국사기》 권37 〈잡지〉 6 지리 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위례성을 수록했다.
4.1. 가설 1: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전통적으로 충남 직산은 위례성이 있었던 것으로 인식이 되었다. 《삼국사기》,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등의 지리지는[3] 물론이고, 《삼국유사》의 저자인 승려 일연은 위례성의 위치를 충청남도 직산으로 생각하여 그렇게 기록했다. 물론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발굴 결과, 후보지에서 제외되었지만 충청도 지역에서는 꾸준히 미는 주장이다.2011년 12월에 천안 지역 향토사학자들이 오랜만에 천안-직산 백제 초도설을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기원전 6)에 마한과 웅천을 경계로 했다는 기록이 있고, 24년조(기원후 6)에 웅천에 목책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음을 근거로 들어, 웅천이 현대의 공주이므로 천안, 직산이 백제 초기 도읍이라는 예전 정설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정약용 이전 고문헌들을 참고해야 마땅하고, 정약용의 오판 때문에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고 잘못 해석되었다는 주장이다. 참고로 조선 초까지만 해도 직산에 온조왕 사당이 있었고, 직산에서 성곽 흔적 따위가 출토되기는 한다.# 이로 보아 직산은 '위례성'은 아니라도 백제와 어느 정도 연고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기존 주장의 되풀이인 데다가 향토색이 강한 주장이라 얼마나 받아들여야 될지는 미지수. 아직은 학문적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향토 차원의 주장이라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게다가 마한과 웅천을 경계로 했다는 기록은 온조왕 때가 아니라 백제가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서는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 영역을 온조왕 때로 소급한 것'이란 해석이 있기 때문에, 천안-직산 초도설은 무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백제가 그렇게 빨리 남쪽으로는 공주 일대, 동쪽으로는 춘천까지 영역을 확장하기는 무리며 고고학적으로는 근초고왕 때 사실로 봐야 기년이 맞아 떨어진다.
백제의 힘이 공주까지 미친 것은 백제가 3세기 후반~4세기 초반에 천안 청당동 목지국을 완전히 굴복시킨 이후에야 가능해졌던 4세기 초중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춘천, 화천 일대까지 확장한 건 약간 빨라서 3세기 후반이고 대체로 고이왕~책계왕 때 일이며 목지국을 타도하기 직전 혹은 타도한 직후 연대로 해석되는 데 이 또한 절대 결코 온조왕 때로는 볼 수가 없는 사실이다. 직산은 바로 지척에 있는 천안 목지국의 판도인데 목지국이 미치지 않은 이상 하루도 안 걸려 대군이 진격할 수 있는 바로 근처를 백제 땅으로 인정해줬을 개연성은 0에 수렴한다.
4.2. 가설 2: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풍납토성 다음으로 과거부터 가장 주목받아 온 학설이다. 조선시대부터 광주 춘궁리(현 하남시 춘궁동)를 백제 위례성으로 보고 있었다. 고을의 중심지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경우가 많은데 광주 춘궁리는 당시 광주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 이래 정설이 되었으며, 근현대 한국사학계의 대부인 이병도도 춘궁리를 위례성으로 밀었다. 특히 춘궁리의 이성산성이 위례성으로 유력했다. 일단 5km 거리에 있는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인근 미사리에는 백제시대 마을 유적도 있기 때문에 이성산성 역시 백제 성곽으로 추정했었다.하지만 발굴 조사 결과 백제 유물보다는 신라 유물들만이 수두록하게 발견되어 이성산성 위례성설은 점차 힘을 잃었다. 물론 백제 다음에 신라가 진흥왕 때 이 땅을 차지하므로 신라 유물이 나온다는 것 자체는 여기가 위례성이라도 가능한 일이지만, 30년을 넘게 발굴했는데도 신라 계통 유물만 계속 나오고 백제 계통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성산성의 양식도 흙으로 쌓은 토성 위주의 초기 백제 산성과 달리 전형적인 신라식 석성이다. 수직으로 쌓은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삼각형 단면의 석축을 성벽 하단에 덧대는 보축이 발견된 것도 이성산성은 신라 산성임을 보여주는 근거다. 즉 신라 진흥왕 때 있었던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직후에 신라가 처음 새로 쌓은 성일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서는 "명확히 백제의 것임이 분명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은근슬쩍 '삼국 전기 토기'라고 묻어간다." 하는 식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곡면을 이룬 이성산성의 성문지와 옥수수알처럼 다듬은 성벽이 백제 성곽의 특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설 6을 주장하는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도 이성산성을 백제 것으로 본다.
참고로 8차 발굴조사 때 고구려 관직 '욕살'이 적힌 목간이 발견되어 고구려가 처음 쌓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다만 근거가 이것뿐이고 신라계 유물이 훨씬 많아서 크게 우세한 설은 아니다. 또한 몇몇 역사학자는 광주 춘궁리 지역에 대형사찰 유적 등이 있다는 점을 들어 춘궁리가 위례성이고 풍납토성은 위례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풍납토성 보존 때문에 부동산 재산권 행사에 많은 제약을 받는 풍납동 주민 단체가 열렬히 지지한다. 그러나 풍납토성이 위례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도 풍납토성이 보존할 가치가 부족한 유적이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풍납토성에 대한 관심이 적었을 당시 서울특별시 중랑천 근처, 오늘날의 중랑구 일대로 비정하기도 했다. 실제로 개발되기 전 중랑천 일대에 무덤과 성곽 일부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외에 세검정 근방 혹은 북한산 기슭이 아니냐는 추측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 여기도 문제가 되는게 3기 신도시 중 한곳인 교산신도시 한복판이다.
2020년 1월, 하남 이성산성의 초축(初築)은 백제 시대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 성곽고고학 전문가이면서 문화재위원회 매장문화재분과 위원장을 역임했던 심정보 교수(한밭대학교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성산성은 한성백제 시기 축성한 것으로 알려진 양천고성, 설봉산성, 설성산성 등의 산성들과 유사점을 보이고 있으며, 앞서 2017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 진행한 이성산성 서문지에 대한 발굴결과를 분석한 결과 이성산성 서문지 개구부 1차 문지와 2차 성벽의 평면 형태가 고구려의 환도산성과 비슷한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남문 저수지에서 한성백제 시기 토기편이 출토되고 그 상부에서 고구려 유물과 신라(통일신라 포함)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음을 들어, 하남 이성산성은 백제가 초축한 '백제산성'이자 근초고왕이 일시 천도했던 한성이며 고구려 광개토대왕-장수왕 부자가 남침해 점령한 뒤에 고구려식으로 2차 성벽을 개축해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고, 최종적으로 553년에 신라의 진흥왕에게 점령되어 신라식으로 개축했다는 것이다.[4]##
오늘날 하남시가 하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이 위례성 춘궁동 가설에 기인한 것이다.
4.3. 가설 3: 몽촌토성 - 풍납토성 이원설
1980년대에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유력한 다크 호스로 떠올랐다. 《삼국사기》의 기술과도 맞는 데다, 발굴 결과 2~3세기 백제 유물품이 나왔기 때문. 그 이후 몽촌토성이 위례성이라는 가설이 거의 정설로 굳혀지나 했다. 국사책에서도 몽촌토성을 위례성이라 했으니..그런데 1997년 풍납토성을 발굴하면서 무게추가 확 뒤바뀌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부합하는 데다 몽촌토성에서 나온 양보다 훨씬 많은 유물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한국 고고학계는 이 결과에 턱이 툭 하고 빠졌고, 고대사학계는 부랴부랴 위례성을 풍납토성으로 바꾸는 논문을 발표하느라 진을 빼야 했다. 자세한 내용은 풍납토성 참고.
현재로서는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고 거의 결정난 상황. 대체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이원적 도성제로 운영했을 거라 보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고고학계의 대세는 평상시에는 풍납토성, 위기시에는 몽촌토성에 머물렀다는 의견이다. 고구려에서도 안학궁 - 대성산성이나, 국내성 - 환도산성 등을 이처럼 평시 성과 위기시 성으로 구분하여 사용했다. 학교의 역사 수업시간에도 위례성은 지금의 서울이라고 배우는 편이다.
현대에 서울의 시역이 넓어지다보니 풍납토성, 몽촌토성을 포함하는 위례성 지역까지 '서울'로 들어왔고, 훗날 조선의 수도 한성과 위례성이 둘 다 지금의 서울이라고 하니까 위례성과 한성이 역사가 이어지는 같은 도시라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위례성'과 '한성'은 한강을 끼었다는 점만 빼고는 완전히 다른 도시이다. 전근대시대에는 한강 같은 큰 강 건너편이면 생판 딴 동네나 마찬가지였고,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강남 지역 대부분은 서울이 아니라 광주군의 변두리였다. 이 부분은 서울특별시/역사 문서를 참고할 것. 그러나 같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도시인것은 사실이고, 조선시대에도 백제의 위례성이 서울을 수도로 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연속성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다.[5]
이희진, 강찬석 공저 《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에서, 풍납토성 발굴 유물의 고고학적 절대연대가 기원전후까지 올라가는 것과 관련해 저자들은 《삼국사기》에서 처음 온조왕이 고구려에서 망명해 왔을 때 '마한이 동북쪽 100리의 땅을 할양해주어서 그 토대 위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한 기록을 풍납토성이 실제 사실로서 증명해줄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6] 그러나 이 주장은 근본적 사실을 도외시하고 있다. 풍납토성 자리에서 발굴되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게 물론 그 정도 연대로 올려잡을 수 있으나, 고구려와 연관을 맺을 수 있는 유물들은 상한선이 3세기 중반이며 그마저도 이 상한선에 대해서는 그보다 늦춰 4세기 정도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아직까지 만만찮음이다.[7] 엄연히 한성백제 초기 지배층이 고구려 계통인데 과연 고구려와 전혀 무관했던 기원전후 낙랑계 사람들이 온조를 비롯한 백제 건국자로 비정될 수 있는지는 답변이 대단히 어려운 내용이겠다.
물론 존재가 드러나는 기원전후 낙랑계 사람들은 3세기 중후반 고구려계 지배층이 등장한 후에는 그 이후 한성백제를 이루는 기층민이 되었으니 백제 건국과 관련은 있으나, 엄연히 지배층은 아니었고 비류-온조 설화로는 아예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사항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비류계 사화와 온조계 사화가 기록상 내용이 어느 정도 충돌하지만 양쪽 모두 지배층이 졸본 부여 혹은 고구려에서 왔음은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이상, 내용에 혼란이 있다고 여러 가지 오류가 있는 삼국사기상 초기 연대를 맹신해야 할 이유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초기 백제의 시작을 피지배민인 낙랑인으로 굳이 잡아 기년을 고수한다면, 우리는 엄연히 주민 대부분이 고조선인이었던 기원전 1세기 초기 고구려의 시작을 그보다 훨씬 전인 고조선 시대까지 잡을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진 않음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례성의 고고학적 성과로 미루어봤을 때 백제의 출발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년이 기원후 3세기 중후반 이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 백제가 낙랑과 연관이 있고 없고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 백제 건국 집단이 남하했을 루트가 물론 지금의 평안도와 황해도, 즉 낙랑과 대방이라는 중국 군현이 존재하던 지역을 거칠 수밖에 없긴 하지만, 등장이 분명히 기원후 3세기 중후반이므로 일단 현재까지 드러난 위례성 관련 고고학 성과로는 비류-온조 집단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기원전후 낙랑계 사람들과 접촉하여 이들 가운데 일부가 남하에 합류해 백제 개창에 참여했을 개연성은 전혀 없다.
풍납토성에서 소수지만 중국의 서차구와 노하심 같은 부여계 유물들도 함께 발굴#되었다는 2008년 신문 기사는 초기 백제 수립에 부여계가 관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묘제나 다른 유물을 비롯한 증명이 이뤄지지 못해, 적어도 정말로 기원전 1세기에 부여와 연관이 있는 건국 집단이 백제를 건국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것은 한성백제박물관에서 2012년 발간된 '백제초기고분의 기원과 계통' 저서와 2020년 발간된 '백제는 부여를 계승하였나' 저서에서 확인되었다.
심지어 소위 '부여계 유물들'은 한강 유역뿐 아니라 더 남쪽으로 충청도 청주에서도 확인되고 있는데, 부여라기보다는 주로 옥저 계통 주민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현재로서는 우세하다. 그러므로 기원전 1세기나 부여와 유관하다는 사항만 부각하여 삼국사기상 연대와 부여 관련 기사만 부각하는 것이야말로 삼국사기를 맹신하는 위험한 태도일 수 있는 것이다.
위례성의 고고학적 결과로 볼 때 고구려계의 흔적은 3세기 중후반이므로 우리가 아는 백제의 시작은 그 시기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백제의 왕사 및 정치사의 시작은 3세기 중후반부터로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는 삼국사기상 백제 건국 연대인 기원전 1세기 위례성에 살았던 주민 집단의 후손이나 낙랑 계열이 백제의 건국에 기여한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사실인 것이며, 이는 초기 백제가 낙랑, 대방 등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개연성 및 사실과 충돌하지 않는다.
백제의 건국이 온조 한 사람에게만 귀속되는 것은 삼국사기상 내러티브일 뿐이고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는 건 맞고, 백제의 건국은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국가'로서의 백제가 서울 일대에서 출발한 기년은 3세기 중후반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역사 해석에 가깝다. 게다가 낙랑계 주민들은 백번양보해서 백제 건국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해도 적어도 한성백제 초기에는 고구려계 지배층이 일정 부분 타협할 수 밖에 없었던 또 다른 연정 파트너인 토돈분구묘계 세력[8]에게도 치여서 기층민이 되어 있는 상황인데 이들이 그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크게 한성백제의 국정 운영에 영향을 미쳤을지는 상당히 미지수다. 위례성에서 출발한 한성백제를 고구려에게만 귀속할 수 없다는 주장은 물론 옳지만, 그렇다면 가야 할 포커스는 백제 초기 왕비들까지 주로 배출한 걸로 추정되는, 현재까지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9] 토돈분구묘계 세력이지, 그저 삼국사기상 기년을 절대시하여 기원후 3세기까지도 내내 기층민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낙랑인들이 아니다. 이는 묘제의 변천이나 채용 양상을 볼 때 지배계층에도 참여한 게 분명한 초기 고구려의 고조선계 실력자들, 등장하자마자 상당히 짧은 시간 내에 기층 사회 구조를 바꾸고 지배층이 된 가야 및 신라 일대 그리고 목지국 일대의 낙랑인들과는 엄연히 다른 양상이다.
4.4. 가설 4: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이 위례성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 근거로 성환읍에 위례산이 있고 백제 고성 터가 있음을 든다. 이 주장이 맞다면, 한수는 한강이 아니라 안성천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가장 가능성이 떨어지는 설이다.물론 이 설이 맞다고 쳐도 천안까지 백제의 수도가 내려온거면 삼국이 미치도록 차지하려고 하였던 한강은 위치가 애매해지기 때문에 논쟁이 될 것이다.
4.5. 가설 5: 왕성 이동설
최몽룡 서울대학교 석좌교수의 학설이다. 온조왕이 하북위례성에서 한강 이남으로 천도한 뒤 한 곳에만 왕성을 둔 것이 아니라, 풍납토성(하남위례성, 1∼2세기) → 몽촌토성(3∼4세기) → 이성산성(한산성, 4∼5세기) → 춘궁동(한성) 순으로 옮겨가며 왕성 등으로 사용했다는 절충안스러운 주장이다.온조왕 시기에는 하남위례성이 한산성으로 불렸지만 근초고왕 시기에는 다른 한산성이 등장한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성 백제 시절 서울에 있는 백제 왕궁만 무려 5곳이나 있었단 소리이다.
5. 그렇다면 하북위례성의 위치는?
하북 위례성의 위치 문제도 꽤 어려운 얘기다. 다산 정약용은 북한산, 삼양동 일대를, 이병도는 세검정 일대로 보았다. 한 역사학자는 광진구 일대로 비정하여, 건국대 일감호가 궁남지 같은 궁지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파주 육계토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나마 의견이 모아지는 하남위례성과는 달리, 이쪽은 그저 의견만이 분분하여 백가쟁명이다. 여러 설들이 있지만 아무튼 서울 강북 지역 어딘가일 가능성이 높은 편이었는데, 일단 온조왕 시기부터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유의미한 유물이 있을 가능성은 낮은 데다 하북은 개발이 될 대로 됐고, 이미 땅 속은 콘크리트로 유린 당할 대로 당한 상태라서 유적이 있다고 해도 훼손되어 영영 못 찾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다만 2022년 현 시점에서는 하북 위례성의 위치를 서울 강북이 아닌 임진강 유역에서 찾는 경향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하북에서 하남으로 이동했다는 게 꼭 하나의 강을 건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3세기 초 무렵 북쪽 어딘가에서 서울 강남 일대로 이동한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 계열 주민들의 유적이 임진강 일대에서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안보상의 문제로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했던 것인데 고작 강북에서 지척인 강남으로 천도하는 것보다 황해도의 대방군과 가까웠던 임진강 일대에서 아예 서울 강남 일대로 천도했다는 쪽이 설득력이 높기도 하다. 무엇보다 문헌 사학에 따르면 백제 건국은 늦어도 2세기 즈음에는 발생했을 것이 분명한데, 하남 위례성이 위치한 서울 송파구나 하남시, 광주시 일대의 유적은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연한이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으며, 임진강 일대를 바라볼 경우 이런 문제가 해소되는 편이다. 이러한 연유로 과거 사장되었던 임진강 일대가 다시금 하북 위례성의 후보로 떠올랐다.
하북 위례성의 후보 중 하나였던 파주 육계토성이 백제 초기에 축조되었다는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발표가 2022년 7월 26일에 있었다. 다만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에서는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에 축조된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여기서 하북위례성 위치를 임진강 유역으로 비정하는 게 세종실록지리지 양주도호부 기록을 무시하는 거란 이의 제기가 나오지만, 문헌 기록이 영성하고 기년 자체가 교차 검증이 불가한 백제 초기사 현재 상황에서는 고고학적 근거가 더욱 우선시되어야 한다. 속보성 측면에서는 무려 천여 년이나 차이가 나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이 고고학적 근거보다 참고 순위가 높을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근초고왕이 한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은 하북위례성과 무관한 것으로 보고 있다.[10]
한편 고구려의 한성이 황해도 재령이란 얘기가 있는데 그건 나제동맹 이후의 얘기지 고구려 한성인 남평양성의 위치는 백제 하북위례성이 맞다는 얘기도 있다.
6. 위례신도시와의 연관점?
위례신도시의 위치는 하남시 춘궁동과도, 송파구 몽촌토성, 풍납토성과도 엄청 멀리 떨어져 있다. 송파구, 성남시 수정구, 하남시가 만나는 지점에 세 지자체가 모두 걸쳤는데, 세 지자체에서 모두 위례동이란 이름을 제각기 붙였다. 하남시 춘궁동은 위례신도시와는 산으로 완전히 막혔고,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같은 송파구라도 위례신도시보다는 훨씬 북쪽에 있다.[11]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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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 건국자 온조, 그리고 그와 힘을 합친 고구려계 지배층들.[2] 전북 익산 지역과 연관이 있는 왕으로는 두 인물이 있는데, 첫째는 남하하여 익산지역에 자리잡은것으로 보이는 고조선 준왕이다. 두번째는 현 익산시 금마면 출신으로 보이는 서동왕자, 훗날의 백제 무왕이다. 북쪽에서 남하해 새 나라를 세웠다고 전하는 준왕과 실제 익산을 도읍삼아 통치하였던 백제 무왕의 설화가 뒤엉켜서 생긴 인식으로 보인다.[3] 고려사에서는 양주도 후보지로 보았다.[4] 심정보 교수의 논문은 하남역사박물관이 펴낸 《하남 역사 총서》에 실렸음, 《하남 역사 총서》에는 심 교수의 논문 이외에도 2018년에 한국성곽학회에서 실시한 이성산성에 대한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전문학자들의 논문 7편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5] 중국사에서도 서안, 낙양 등 고도들은 위치가 시대에 따라 여러곳이 있지만 다 한 도시의 역사로 간주된다. 서안의 역사를 얘기할 때 현대에도 다른 도시인 셴양시가 수도였던 진나라 시절도 포함한다.[6] 이병도가 처음 위례성이라고 지적했던 하남은 풍납토성이 있는 서울에서 보면 동북쪽 방향이었다. 참고로 남한산성에는 온조 사당이 존재한다.[7]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작심하고 한국사를 비하하려고 엉터리 서술들을 논문으로 대량 쏟아낼 때는 삼국사기가 일본서기보다 신뢰도가 앞설 수 없다는 괴이한 혐한 감정에 쩔어 있었기에, 아예 백제 건국 연도를 5세기로 보는 정신나간 행태를 저질렀었다. 국내 사학자들이 이병도부터 시작하여 이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무진 많은 애를 썼으나, 그렇다고 삼국사기 초기 연대를 맹신하여 고고학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을 한 것 또한 흑역사다. 그런 노력을 반세기 넘게 기울였음에도 고구려 유민이 한강 유역에 등장한 최대 상한 연도가 3세기 중반임은 받아들여야 하는 학문적 사실이다.[8]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서해안 일대에서 유력한 묘제로서 마한 거수들 다수가 채택했던 묘제였다. 건마국, 목지국, 사로국 등 삼한 내륙의 주요 고조선계 지배층들이 채용했던 묘제와는 계통이 달랐다.[9] 어떤 연구자들은 월나라 멸망 후 서한 시대까지 서서히 산동성으로 북상한 분구묘제 세력이 뿌리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어떤 연구자들은 한반도 토돈분구묘의 묘제 구조가 서한 시대 토돈분구묘가 아닌 그보다 수백 년 전 월나라 멸망기 구조를 띠고 있는 이상 토착 한반도인들의 독자적 아이디어로 인한 묘제 변화거나 무역으로 인한 단순 아이디어 채용으로 주장하고 있다. 어느 쪽인지는 현재로서는 확답하기 어렵다.[10]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한성백제사 시리즈 참조[11]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송파구의 북쪽 끝, 위례신도시는 송파구의 남쪽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