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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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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안학궁/19.jpg
안학궁지의 현재 모습
파일:attachment/c0022562_12114862.jpg
안학궁의 추정복원도

1. 개요2. 설명
2.1. 고려 왕궁 설 논란
3. 디지털 복원도4. 안학궁 치미 발굴5. 평양민속공원 내 안학궁 재현6. 둘러보기 틀

1. 개요

安鶴宮

고구려 왕조의 3번째 수도이자 3번째 이중수도이다. 안학궁은 평지성 수도였으며, 짝으로 산성 수도인 대성산성이 있었다.

한편으론 고구려 시대 궁궐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자세한 건 동북아역사넷 참조

2. 설명

고구려궁궐.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양시 대성구역에 속한다. 제20대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건축한 궁궐이다. 고구려의 수도답게 전시 수도인 대성산성(大城山城)과 하나의 세트를 이룬다. 건물 하나하나가 굉장한 규모를 자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면적 380,000㎡ 정도로 추정된다.[1][2]

궁성 전체의 한 변은 622m, 전체 둘레는 2,488m이다. 상당히 큰 크기. 전체적인 궁궐지의 형상은 마름모꼴에 가까운 모양이다.

남은 터를 이용해 측정을 해봤을 때, 안학궁의 중궁 1호 궁전은 전면 길이가 87m.(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은 34m.) 측면 길이가 27m이다. 이는 당나라(唐)대의 황궁인 대명궁의 정전 함원전(含元殿)의 전면과 측면 길이 각 75.9m, 41.3m에 뒤지지 않는 규모이다.

다만 삼국시대 건축이 그렇듯이 세부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기단과 주춧돌의 모양으로 봐서 면적이나 대략적인 구조를 알 수는 있지만, 건물의 층은 몇 층이었는지, 세부적인 장식은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것은 동시대의 다른 건축물이나 다른 예술품, 고분 벽화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점은 보통 안학궁이 5세기 초반 평양 천도 즈음 완공되었다고 인식되나 정작 고고학적 기년은 6세기 중엽 위로 올라가질 않는다. 6세기경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안학궁 보수나 대대적인 개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2.1. 고려 왕궁 설 논란

소수설로 고려 시대 서경에 세워진 여러 왕궁 중 하나였다는 설이 있으며, 고고학적ㆍ역사학적 근거를 보강하면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주된 근거는 안학궁 건물지 하층에서 발견된 고구려 횡혈식석실분과 출토되는 기와의 형식이다.

첫째, 안학궁 유적 궁전 건축물 아래 토층에서 3기의 석실분이 확인되었다는 사실이다.[3] 북한 학계는 고구려 석실분의 연대를 2~3세기까지 끌어올리지만, 2020년대 최신 연구 성과에 따르면 이 석실분들은 5세기 말~6세기 초에 해당하는 것들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층서학적으로 안학궁에 선행하여 있는 이 유구의 연대가 5세기 말~6세기 초에 해당하므로 안학궁은 그 이후에나 축조된 것이 된다. 즉, 최소한 평양 천도 직후, 즉, 층서학적으로는 5세기 초의 궁성 유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학궁에서 발견되는 외연에 연주문이 돌아가는 형식의 와당이 통일신라 시대 후기부터 고려 시대까지 유행한 형식이며, 암막새 기와 역시 통일신라 시기부터 등장한다. 즉, 층서학적으로 보면 안학궁 유적은 최소한 6세기 전엽 이후에 축조되었고, 출토 유물로 보면 아무리 빨라도 통일신라 시대 후기의 유적이 된다.

공교롭게도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의하면 고구려 안학궁의 완공년도는 552년(고구려 양원왕 8년)인데 이 해에 고구려 장안성(후기 평양성)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인데 안학궁이 고구려 궁궐이 아니라 고려의 좌궁이 맞다면 실제 안학궁은 고구려 장안성 내성 구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안학궁 자체는 실제 고구려의 궁궐이 맞는데 지금의 안학궁으로 알려진 궁궐터가 아니라 다른 장소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

일본에서는 1980년대부터 기와 연구자를 중심으로 고려 시대 왕궁설이 제기된 바 있다.[4] 한국 연구자 중에서도 안학궁에서 출토된 기와들이 11~12세기 고려 기와에 해당한다는 의견이 개진된 바 있다.[5] 이런 연구를 토대로 한국과 일본학계에서는 고려 좌궁궐설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있으나, 서경 궁궐의 규모가 개경의 본궁보다 더 커진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비롯해 몇 가지의 반론의 여지가 여전히 남아있다.

가령 기와의 편년을 고려 시기로 보는 설은 그 근거로 여러 가지를 들고 있지만, 이들 기와가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은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성립한 극히 지역색이 강한 와당문이기 때문이라 하면서, 이 지역이 고구려의 수도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6] 하지만 이는 안학궁 출토 청회색기와가 고구려 궁성용으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보다 정황 근거에 있어서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7]

이처럼 안학궁에서 출토 혹은 수집된 것으로 공개된 기와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안학궁 기와의 편년은 학자에 따라 각각 4~5세기설(채희국, 전제헌), 7세기설(관야정, 천전강도, 전촌황일, 민덕식), 10세기설(영도휘신신, 천전강도), 그리고 12~13세기설(박은경)로 크게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안학궁의 정확한 축조 연대도 획정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참조 그리고 장소의 특수성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고구려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는 것도 아니기에, 대다수의 남북학계는 아직 이론의 여지가 남아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있다. 그렇기에 기존 고구려 궁궐설이 받고 있는 여러 의혹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고려 궁궐설은 학계에 도전하는 소수설의 위치에 놓여있는 상황이다.

그외 고구려사 연구자 기경량은 서경천도를 위해 고려 정종이 지으려다 그의 사망과 함께 중단한 것으로 보이는 궁궐[8]에 주목한 '안학궁, 고려정종 폐궁설'을 2023년 중순에 학계에 발제할 것을 예고했다. 천도를 위한 것이라면 궁궐의 거대한 규모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며 또한 기존 가설인 고려 좌궁설이 안고있는 여러 논리적 결함들도 정종시기의 궁궐이라면 폐궁이라는 특수성을 통해 설명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다.[9]

3. 디지털 복원도

파일:external/ncache.ilbe.com/181aa891b09634cd71995214eaaadd38.jpg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안학궁 중궁의 비교.
파일:external/ncache.ilbe.com/cac35ae8a6a3b63eb6d5155c290ad9d7.jpg
안학궁의 정전인 중궁의 디지털 복원 사진.

4. 안학궁 치미 발굴

파일:021000158018.jpg
발굴된 안학궁의 치미. (높이 210cm) 출처
파일:/pds/200901/25/70/a0107670_497bf40c85664.jpg
신라 황룡사 금당 치미. (높이 186cm) 출처
파일:chimi-001.jpg
안학궁 치미와 다른 치미들과의 크기 비교. 출처

치미는 기둥의 상단의 양쪽에 붙는 장식기와를 말한다. 황룡사 금당 치미가 186cm로 2m를 넘지 않는 것과 대비되게, 안학궁에서 발굴된 치미의 높이는 무려 2m를 넘는다. 당연하지만 치미는 건물의 크기에 비례하여 커진다.

5. 평양민속공원 내 안학궁 재현

2000년경부터 북한이 안학궁을 복원하려 한다는 떡밥이 돌았다.

구글 어스에서 확인된 바로는 안학궁 터 바로 옆에 뭔가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반도 모양의 지형물이 있다든지, 부지 정중앙에 높은 탑이 있다든지 등의 이유로 테마파크 소리를 듣고 있다. #

공사 부지 우측을 보면 건축물들이 여러 개 지어지고 있는데, 실제 안학궁 터와 비교했을 때 그 규모는 작지만, 그 배치 형태가 일반적인 궁궐의 건물 배치와 유사하게 지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위에서 언급된 안학궁의 '복원'이 아닐까 추정된다. 만약 적당히 안학궁의 분위기만 내는 테마파크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그 자체에 대해서는 딱히 뭐라고 할 것은 아니다. 다만 장소가 문제다.

상식적으로, 궁궐 주위에는 수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문화재 보존의 측면에선 상당히 우려될 수밖에 없다. 특히, 북한이 그 실제 모습을 고증해낼 만한 세부적인 연구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고 의심되는 상황에서 역사상의 안학궁 복원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상당한 비난을 받고도 남을 문제가 된다. 이미 북한이 고구려 시대의 사찰인 정릉사(定陵寺)를 복원한 적이 있다. 정릉사도 터만 남은 상황에서 가람배치 형태를 추측, 상상하여 새롭게 지어진 것으로, 북한식 표현대로라면 '개건(改建)'에 가깝다. 그런데 사찰과 궁궐은 규모나 장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결국 그 문제가 현실이 되었다.

참고로 북한은 2010년대를 전후하여 인력, 자재난에 시달려서 류경호텔이나 평양 시내의 아파트 단지도 완공하지 못하는 상황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생까지 반강제적으로 건축공사에 동원되는 상황. 소문에는 부모가 건축재료를 납부하면 공사에서 빼준다고 한다. 북한의 경제적 상황을 보면 저 대규모의 공사를 제대로 마무리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고 봤으나, 결국 2012년 4월 완공되었다.

그 정체는 '평양민속공원'. 역사종합교양구, 역사유적전시구, 현대구, 민속촌구, 민속놀이구, 백두산, 금강산공원구역 등으로 구성된 민속촌 형식의 테마파크였다. 한국사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적 창조물 700여 개를 1:1의 크기로 재현해 놓았다는데, 위에서 언급된 '규모는 작은데 왠지 배치가 궁궐 같은' 건물들은 안학궁을 비롯해 만월대, 개성 성균관, 발해 궁전 등의 재현물이라고. 다만, 역시나 북한답게 '현대구'에는 만경대 생가와 백두산 밀영, 주체사상탑과 개선문 등이 있다.

거기다, 공사 도중 고구려 첨성대와 벽화가 그려진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그 이후 위 유적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소식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특히 첨성대의 경우 경주시에 있는 신라첨성대보다 200여 년 이상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등 역사적 가치가 상당한 것으로 확인되어 학계의 걱정을 사고 있다.
해당 사업은 2008년 김정일이 '2012년 강성국가 건설을 위한 국가적 사업'의 하나로 제시하여 이루어졌고, 공원 개장일로 정해놓은 날이 다른 날도 아니고 김일성의 100회 생일이었기 때문에 그냥 속도전으로 진행되었다. 군인들이 토목공사를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단청도 군인들이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콘크리트 복원일지언정, 기존의 정릉사 개건에 비해 고증면에서 상당히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초라한 석탑으로 대체했던 정릉사와는 달리, 청암리사지 목탑은 실제 규모로 복원되었다. 그 외에도 건물의 구조나 기와, 단청 등도 발굴자료와 벽화무덤을 참고하여 재현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김정은이 이 테마파크를 볼 때마다 자신이 죽인 고모부 생각이 난다고 해체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2016년 6월 이미 해체 작업 중이라는 듯.기사 2017년에 모두 해체되었다.

여담으로, 경기도 구리시에서는 안학궁 등을 모티브로한 테마파크를 추진하고 있다. 2005년까지 만든다고 했다가 2011년까지 만든다고 연기했지만 결국 착공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후를 기약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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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한국사상 최대 규모의 궁궐이라느니 자금성에 맞먹는다느니 하는 국뽕성 멘트는 조금 거를 필요가 있다. 안학궁의 규모 자체는 경복궁 하나에게도 압도당한다. 경복궁의 면적은 430,000㎡에 육박한다.[2] 여담으로 현재 학계에서 추정하는 한국사 상 최대 규모의 궁궐은 통일신라서라벌경주 월성-동궁과 월지-남궁-황룡사로 이어지는 궁궐 연합체 였다는 것을 정설로 보는 추세다.[3]김일성종합대학 고고민속학강좌》, 1973, <대성산의 고구려유적>, 평양:김일성종합대학출판부 279~286; 전제헌-손랑구, 1985, <고구려력사연구-안학궁 유적과 일본에 있는 고구려 관계 유적, 유물>, 평양: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92[4] 關口廣次, 1987, <瓦當文樣雜考—高句麗の瓦當文樣を中心として>, 《考古學ジャ—ナル》285.[5] 朴銀卿, 1988, <高麗瓦當文樣의 編年硏究>, 《考古歷史學志》4, 107~164.[6] 千田剛道, 1996, 「高句麗·高麗の瓦」, 『朝鮮の古瓦を考える』(帝塚山考古學硏究所), 22~23쪽.[7] 채희국, 1964,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유적에 관한 연구』, 56~58쪽.[8] 고려사 정종(定宗) 4년 3월 기사[9] 기경량, 2023, <평양 안학궁 유적의 축조 시기와 성격 문제 재론>,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 68》 267-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