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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6:12:00

현릉(고려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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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kyeongin.com/484693_117623_2513.jpg
현릉의 현재 모습.
파일:태조 현릉.jpg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1916년의 모습.
지도
1. 개요2. 위치3. 능호4. 역사5. 구성
5.1. 내부
6. 근황

1. 개요

顯陵 / Hyeon Rung

500년 고려 왕조의 건국군주 태조 왕건왕릉.

태조 왕건과 즉위 전부터 아내였던 신혜왕후 유씨의 합장릉으로, 실제 즉위했던 고려국왕의 왕릉 중 최초로 지어진 고려왕릉이다. 북한의 국보 제179호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 등재돼있다.

2. 위치

송악(松嶽)의 서쪽 산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현릉(顯陵)이라고 하였다.
- 권2, 고려사 세가 권제2 태조(太祖) 26년(943) 5월
고려사 태조 세가 기록엔 송악(松嶽)의 서쪽 언덕(西麓)에 능을 조성했다고 한다. 현재 현릉이 있는 주소는 북한개성시 해선리. 예전 주소는 경기도 개풍군 토성면 여릉리였다. 개성 시가지의 서쪽에 있으며 먼 후손 공민왕이 묻힌 현정릉과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https://goo.gl/maps/ma8inNCgN6t
현릉 구글 스트리트 뷰 보기

3. 능호

능호 '顯'은 한자론 '나타나다'란 뜻이고 시법으로는 '명성이 내외로 떨쳐지다'란 뜻이다.[1] 혼란스러웠던 후삼국시대 중, 두각을 드러내 수많은 호족들을 포섭하고 제압해 결국 백제신라를 흡수하고 발해의 유민까지 받아들여 고려에서 시작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통일왕조 시대를 연 태조에게 걸맞는 능호이다.

4. 역사

태조는 음력 943년 5월 29일 본궐 신덕전에서 붕어했다. 신혜왕후의 사망일은 미상이다. 정윤 혜종이 즉위하고 태조는 같은 해 943년 6월 26일에 왕릉 현릉에 묻혔다. 고려사 기록으로 송악산 서쪽에 왕릉이 만들어졌고 태조와 신혜왕후의 합장이 이루어졌다.

5. 구성

파일:CS_201312_66-1024x677.jpg
현재 개건된 현릉의 모습

지형이나 구성을 보면 조선 왕릉과 유사성이 있다. 완만한 구릉에 봉분이 있고 석물의 구성은 조금 다르지만 앞에는 정자각과 비석이 있다.

태조 왕건의 현릉은 당연히 태조가 죽은 뒤에 조성됐지만 이후 거란이나 몽골 제국의 침략 때문에 왕건의 유골은 강화도 등지로 여러 번 옮겨다녀야 했고 조선 후기인 1867년도에도 대대적으로 보수했으므로 나중에 손을 보는 과정에서 조선 왕릉과 비슷해진 것으로 보인다.

봉분이 마치 신라 왕릉처럼, 다른 고려 왕릉들에 비해 매우 큰 편인데 태조로서 특별하게 예우를 받은 듯 하다.

5.1. 내부

파일:NISI20200115_0015981037_web.jpg
무덤 내부 사진

현릉은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연도가 남향으로 나있다. 이 연도를 따라 들어가면 재궁(梓宮)[2], 부장품을 안치한 현실(玄室)에 도착한다.

이 현실은 화강암을 깎아 만들었다. 현실 내부 중앙엔 재궁을 올려둘 석판이 있고, 동, 서, 북벽엔 부장품을 올려둘 돌 선반이 있다. 세 벽과 천장엔 전 왕조 고구려 무덤처럼 벽화를 그렸다.

동벽엔 대나무매화나무, 청룡을 그렸다.[3] 서벽엔 소나무매화나무, 백호를 그렸다.[4] 북벽은 그림이 크게 훼손돼 그림 흔적만 약간 남았을 뿐이라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지만, 북방의 상징인 현무도가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천장엔 매화나무와 별자리를 그렸다.

남쪽은 연도가 있어 연도의 벽에 주작 그림이 있었을 수도 있다. 현릉의 북쪽에서 공사하던 중, 태조 왕건의 140 cm 크기인 청동상을 발견했다.[5] 나체인 청동상이 쓴 통천관[6]엔 도금된 흔적이 있으며 신체 주위엔 천 조각, 옥 조각이 나왔다.

청동상은 고대 삼국에서 전래된 전통숭배신앙이며 나체에 실제 옷을 입히는 것은 고구려의 전통신앙이다. 왕릉의 벽화도 그렇고 청동상도 그렇고 태조의 능은 고구려 문화를 이어받은 흔적이 많다.

6. 근황

북한에 있는 고려 왕릉들의 관리 상태가 심히 열악한 가운데서도 넷상에 퍼진 사진들로 보나 위성지도로 보나 상당히 관리가 잘 되고 있는 편인 것 같다. 실제 위성지도로 확인해보면 개성 주변의 산들은 북한 다른 곳들도 대부분 그렇듯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인 경우가 많다. 여러 개성 고려왕릉들도 사진을 확인해 보면 나무 하나 없는 황량한 산중턱에 외롭게 서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유독 여기와 현정릉은 왕릉 주변에만 조금 있는 것이긴 하지만 왕릉 근처로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위의 사진을 자세히 봐도 딱 왕릉 근처에만 나무가 있고 먼 곳은 텅 빈 민둥산이다. 구글 등 위성지도로도 확인 가능. 그럭저럭 잘 정비된 모양새도 갖추고 있다. 북한 정권이 그나마 신경쓰는 문화재 중 하나인 듯 하다. 다만 최근 사진을 보면 단군릉이나 동명왕릉만큼 심각하게는 아니지만 제멋대로 '복원'한 정황이 보이기는 한다.

2000년대에 시행됐던 개성관광 코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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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의 중흥군주 현종의 묘호도 나타날 현(顯) 자이다.[2] 임금의 은 재궁이라고 높여 부른다.[3] 청룡 그림은 꼬리만 남아있다.[4] 백호 그림은 흐릿하게 남아있다.[5] 세종대왕이 원래 다른 곳에 있던 왕건상을 처리하고자 했는데 전 태조 상을 부수긴 좀 뭐하니까 현릉 옆에다 묻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6] 천자만이 쓸 수 있는 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