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0-02-16 20:41:48

선죽교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24FA2 17%, #FFFFFF 17%, #FFFFFF 19%, #ED1C27 19%, #ED1C27 81%, #FFFFFF 81%, #FFFFFF 83%, #024FA2 83%, #024FA2)"
{{{#!wiki style="margin: 0 -10px; color:#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1D1D1D; margin: -6px -1px"
체육시설 김일성경기장 · 류경정주영체육관 · 릉라도5월1일경기장 · 마식령 스키장 · 빙상관 · 서산축구경기장 · 양각도축구경기장 · 태권도전당 · 평양보링관 · 평양체육관 · 미림 승마구락부
식사 · 숙박시설 신흥관 · 옥류관 · 류경 호텔 · 고려호텔 · 양각도국제호텔 · 평양호텔 · 서산호텔 · 해당화관 · 목란관 · 대동강 수산물 식당
유희시설 문수 물놀이장 · 릉라인민유원지 · 조선중앙동물원 · 만경대 유희장 · 대성산 유희장 · 개선청년공원 · 창광원
의료시설 평양의과대학 · 평양산원
정치시설 만수대 의사당
남북한 공동사용시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 이산가족면회소
군사시설 상원동 미사일 기지 · 판문점 ·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도로고속도로 · 대동강의 교량 · 압록강의 교량 · 두만강의 교량 · 려명거리 · 미래과학자거리
철도 북한의 철도 환경 · 철도 노선 정보/북한 · 평양 지하철 · 평양 궤도전차 ·평양 무궤도전차
항구 서해갑문 · 남포항 · 원산항 · 청진항 · 해주항 · 흥남항 · 라선항
공항 평양순안국제공항 · 원산국제공항 · 청진공항 · 삼지연공항· 해주공항· 선덕비행장 · 의주비행장 · 과일공항· 방현공항· 미림공항· 리원비행장· 태천공항·강동비행장·강다리비행장·곡산비행장·현리비행장·온천비행장·장진공항·북창공항·순천공항·황수원비행장·묘향산비행장
기념물 평양 개선문 · 주체사상탑 ·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 당창건기념탑 · 북관대첩비 · 영생탑 · 천리마동상 · 해방탑 ·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추모시설 금수산태양궁전 · 대성산혁명렬사릉 · 애국렬사릉 · 조국해방전쟁 참전렬사묘
유적지 개성역사유적지구(개성 성균관 · 선죽교 · 만월대) · 고려왕릉 · 평양·남포 고구려 고분군(동명왕릉) · 정일봉 · 단군릉 · 보통문 · 대동문 · 현무문 · 전금문 · 칠성문 · 최승대 · 모란봉 · 총석정 · 백상루 · 박연폭포 · 부벽루 · 광법사 · 안학궁 · 영변행궁 · 을밀대 · 대성산성 · 평양성 · 함흥본궁
산업체 대동강텔레비전수상기공장 · 아동식료품공장 · 순천구두공장 · 승리자동차연합기업소 · 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 · 흥남비료연합기업소 ·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 승리화학연합기업소 · 2.8비날론련합기업소 · 김책수산사업소 · 김책제철연합기업소 · 황해제철연합기업소 · 운곡목장 · 세포등판 · 수풍발전소 · 희천발전소 · 단천발전소 · 서두수발전소 · 금강산댐 · 평화자동차
교육시설 김일성종합대학 · 김일성군사종합대학 · 김책공업종합대학 · 평성리과대학 · 김정일정치군사대학 · 금성정치대학 · 대외관계대학 · 인민대학습당 · 평양과학기술대학 · 평양외국어대학 ·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 고려성균관 · 김책수산사업소유치원 · 자강도 강계시 동문유치원 · 중앙외국어학원 · 천리마련합제강기업소유치원 · 평양정오1유치원 · 평양관광대학 · 미림군사대학 · 강건종합군관학교(육군 보병) · 김철주포병종합군관학교(육군 포병) · 류경수군관학교(육군 기갑) · 김정숙해군대학 · 김책항공군대학
박물관 과학기술전당 · 3대혁명전시관 · 당창건기념관 ·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 조선민속박물관 · 조선미술박물관 · 조선중앙력사박물관 · 조선혁명박물관 · 청진력사박물관 · 사리원력사박물관 · 해주력사박물관 · 고려박물관 · 조선인민군 무장장비관
종교시설 장충성당 · 정백사원 · 봉수교회 · 칠골교회 · 정릉사 · 금강사
}}}}}}}}}}}} ||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57377_STD.jpg
파일:external/www.kseattle.com/c7699b17bc59a146230d7cf231210e01.jpg
선죽교


善竹橋 / Sonjuk Bridge

1. 개요2. 상세

개성 송악산에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있는 논개의 이름은 못 씻습니다.
- 만해 한용운[1]

1. 개요

개성특별시 선죽동에 있는 돌다리이다.

2. 상세

북한의 국보 15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도 등재됐다. 정몽주와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옛 주소는 경기도 개성시 선죽동 262번지. 관련 일화는 정몽주 항목 참조.

원래는 고려시대에는 난간이 없는 다리였으나 조선시대에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여 통행을 막고 옆에 새로운 돌다리를 설치했다.기사

본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2](善地橋)라고 불리었는데 말 그대로 '착한 땅의 다리'라는 뜻.[3] 우왕 14년(1388년) 위화도 회군 때에 숭인문으로 들어온 이성계가 이 다리를 지나서 황룡대기를 날리며 개성 자남산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리가 유명해진 이유는 정몽주가 죽임을 당한 곳이라서다. 정몽주가 이 곳에서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조영규에게 살해당한 후 다리 옆에서 참대나무 가지가 솟구쳐 나오게 되었다고 하여 선죽(善竹)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정몽주의 혈흔은 일제강점기 때까지 남아 있었으며 현재는 희미한 무늬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그런데 얼룩의 범위가 60년 전과 현재의 모습이 좀 다른 듯. 다만 이 때 찍은 사진은 혈흔으로 추정되는 것에 물을 부은 직후의 모습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2차 왕자의 난 때에 전투가 일어난 곳도 이곳 선죽교 부근이었다고.

다만 정몽주가 죽기 4년 전에 있었던 사건인 위화도 회군 관련 기사에서 선죽교라는 이름이 이미 나온다는 점을 들어서 정몽주가 죽은 뒤에 대나무가 솟아서 이름을 선죽교로 바꿨다느니 하는 말은 사실은 틀린 것이고 용비어천가, 송경록 등의 기록을 볼 때 정몽주는 실은 개성 시내인 태묘동에서 그것도 철퇴가 아닌 칼로 목이 베여 죽음을 맞은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기사 이미 선죽교의 혈흔에 대해서 조선 후기 정동유가 지은 백과사전인 <주영편>에서도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 문인들의 기록에서는 왜 선죽교 혈흔이나 혈죽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후대의 설화나 이야기를 배제하면, 당대 기록에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언급이 없다.[4]

선죽교 서쪽에는 정몽주를 제향(祭香)하기 위해 세웠다는 숭양서원(崇禳書院)[5]이 있으며,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와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지금은 선죽교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지만 원래는 물이 흐르지 않았었다는 증언도 있는데 김일성이 "다리 밑인데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며 지금과 같은 형태로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게 했다고 한다.[6]

참고로 경상북도 영천시에 가설 선죽교가 하나 더 있다. 영천이 다름아닌 정몽주의 고향이기 때문.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임고서원 옆에 있다.


[1] 1921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열린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철장철학’을 주제로 강연할 때 강연 말미에 덧붙인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도 등장했다.[2] 이것으로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3] 고려사에서는 무신집권자 최이가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 선지교(地橋)였다는 언급이 있는데 선지교와는 한자 하나만 다르고 발음이 같아서 사실은 서로 같은 곳을 가리킨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4] 하지만 이것도 반론이 가능한 게, 일단 기사 자체가 40년 전 기사이고 후속편이 없으며, '송경록' 이라는 책은 육신전이라는 소설을 쓴 남효온이 지었다는 책인데 육신전 자체의 허구가 드러난 이상 송경록도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의문이며, 용비어천가도 본문에 없고 부록에 있다. 용비어천가와 고려사가 편집되던 시점에 계유정난등 정치적 혼란이 많았음을 감안하면 이 사건에 대한 견해도 오락가락 했을 것이니 선죽교 전설을 뒤집기에는 불충분하다 하겠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1차사료에 관련 기록이 없다는 것은 중요한 지적으로, 전설이 사실이라고 확증할 근거 역시 부족한게 사실이다.[5] 무려 정몽주 자신이 살던 집 자리라는 전승이 있다. 흥선대원군서원철폐 이후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6] 출처: <개경의 생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