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25 10:41:28

개성 남대문


{{{#!wiki style="margin:-12px -0px"<tablebordercolor=#221e1f,#fff>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svg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svg
}}}
{{{#!wiki style="color:#fff; margin:-0px -10px -5px; min-height:26px" dark-style="color:#221e1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ff,#1c1d1f><colcolor=#373a3c,#ddd> 만월대개성 첨성대 <colbgcolor=#fff,#1c1d1f><colcolor=#373a3c,#ddd> 개성 성벽 <colbgcolor=#fff,#1c1d1f><colcolor=#373a3c,#ddd> 개성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비
현릉, 칠릉군 및 명릉군 현정릉
}}}}}}}}}

{{{#!wiki style="color:black,white; 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tablebgcolor=#FFF,#1f2023><colbgcolor=#777777,#555555> 평양시 평양성 (대동문 / 보통문 / 연광정 / 전금문) · 숭령전
고구려 고분군 (호남리 사신총) · 광법사 · 안학궁 · 대성산성 · 청암리 사지 & 청암리 토성
고구려 고분군 (동명왕릉 / 진파리 고분군) · 정릉사
법운암
룡화사 · 평양성 (부벽루 / 을밀대 / 최승대 / 칠성문 / 현무문)
단군릉
개성시 개성역사유적지구 (개성 성균관 / 개성 남대문 & 개성성 / 숭양서원 / 선죽교 / 만월대 / 현릉 / 현정릉) · 해선리 고려왕릉 · 관음사 · 영통사 · 흥국사 · 목청전
남포시 고구려 고분군 (강서삼묘 (강서대묘) / 덕흥리 벽화분 / 룡강대총 / 수산리 벽화분 / 쌍영총 / 약수리 벽화분)
강원도 보덕암 · 총석정 · 표훈사 · 신계사 · 장안사 · 유점사 · 석왕사 · 정양사 · 고성행궁
자강도 인풍루 · 보현사 · 상원암
평안남도 강선루 · 고구려 고분군 (덕화리 고분군) · 백상루 · 법흥사
평안북도 약산동대 · 영변행궁 · 통군정 · 귀주성 · 의주 남문
함경남도 함흥본궁 · 황초령비 · 마운령비 · 귀주사 · 함흥읍성
함경북도 개심사 · 북관대첩비
황해남도 고구려 고분군 (안악 1호분 / 안악 2호분 / 안악 3호분) · 패엽사
황해북도 성불사
공통 천리장성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am_Gate_in_Kaesong.jpg
▲ 문루 오른쪽에 걸려있는 것이 연복사 종이다.

파일:external/photos.wikimapia.org/78_big.jpg
개성남대문

1. 개요2. 상세3. 남북통일 이후

1. 개요

북한 개성시 북안동에 위치한 성문.

2. 상세

북한의 국보 제124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도 등재됐다. 경기도 개성시 북안동에 위치한 개성 내성(內城)의 남문. 내성의 문으로는 남대문 외에 6개가 더 있으나 서쪽의 눌리문, 북창문은 축대만 불완전하게 남았고, 나머지 문들은 터만 남았다.

개성남대문은 개성시내의 한복판에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개성의 랜드마크이다. 숭례문이라는 원래 이름이 있는 서울의 남대문과는 달리 개성의 남대문은 남대문이 정식 이름이다.

파일:전쟁중개성남대문.jpg

6.25 전쟁 당시 파괴된 남대문 문루와 연복사 종.

조선 태조 3년인 1394년에 처음 건립되었다. 안타깝게도 6.25 전쟁 중 문루가 불탔으나 1954년 재건하였다.

문루에는 연복사 종(演福寺 鐘)이 걸려 있다. 고려에서 만들어진 종이나 원나라 사람에 의해 주조되어 전통종과는 사뭇 다른 특징을 가진다. 1563년 화재로 연복사가 소실되자 남대문으로 옮겨와 달았다. 조선 말까지는 종을 울려 개성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참고로 원래의 성벽 높이는 8M 정도 되었는데 여러차례 땅을 높여서 현재는 약 6M 정도 이다.



3. 남북통일 이후

개성시의 대표적인 건축물답게 필수 답사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5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5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