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왕립 사찰 |
1. 개요
廣通普濟寺고려시대에 세워진 개성시의 도심사찰. 다른 지역의 보제사와 구별하기 위해 풀네임인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충목왕 ~ 조선시대엔 연복사(演福寺)라고 불렸다.
거대한 5층 목탑이 있었던 사실로도 유명하며 흥왕사와 함께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규모가 매우 큰 절이었지만 현재는 사라져 터만 남아있다. 흥왕사가 개경 나성 밖에 있는 절이었다면, 보제사는 개경 안에 있는 절이었다.
유명한 절이지만 북한에 있어 남한에선 연구는 커녕 발굴조차 못 하는 상황이다.[1] 그래서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북한은 단독으로 보제사에 대해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으나,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남북 학술 교류가 모두 끊겼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최근 동향을 접할 수 없는 상황이다.
2. 명칭
가장 널리 알려진 사찰명은 보제사(普濟寺)로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를 줄인 것이다. 조선시대엔 연복사(演福寺)로 이름이 바뀌어 연복사로도 유명한 편이다.이 외에도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보제사는 천선원(天禪院)으로도 불린다고 기록했고, 고려도경은 보제사가 당사(唐寺)와 대사(大寺)로도 불린다고 기록했다. 쉽게 말해 큰 절이라고 말하면 개경 사람들이 알아들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는 뜻.
오랜 역사와 큰 규모를 가진 절이기에 그 명칭과 별칭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3. 역사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919년 태조가 개경으로 천도하며 지은 10개의 사찰 중 하나라고 한다. 정종 3년(1037)에 왕이 이 절에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종이 친동생 대령후를 내쫓을 때 자신을 막아설지도 모르는 어머니 공예태후를 이 사찰에 잠시 모셔 놓았다. 명종 대인 만적의 난 때는 노비군의 집결지로 지정되기도 했다.이후에도 공민왕, 공양왕 등이 관심을 기울여 문수회(文殊會)나 담선회(談禪會) 등을 참관하기 위해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1391년에는 공양왕의 명으로 보제사 중창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많은 유학자들이 공사비가 엄청나다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단청 공사만 남기고 중단되었다.[2]
조선이 개국한 이듬해인 태조 2년(1393)에는 단청공사를 마치게 하고 목탑 위층에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중간에는 대장경을 보관하게 하였다.[3] 그러나 태조 이후로 점점 숭유억불이 강화된 조선시대에는 결국 억압을 받았을 터. 16세기 무렵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화재 등을 겪고 결국 폐사지가 된 듯하다.
4. 사찰 구성
4.1. 규모
규모가 매우 커서 당사(唐寺) 혹은 대사(大寺)로 불리었다. 건물이 1천여채나 되었으며[4] 절 안에는 세개의 연못과 아홉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당장 승당과 법당만 해도 100명의 인원을 수용하는 규모였다.4.2. 가람
보제사의 가람 배치에서 특기할 점은 금당과 탑을 일직선 위에 건립하는 일반적인 평지 가람배치가 아니라 동쪽에 금당(나한보전)을, 서쪽에 탑을 나란히 배치하는 동전서탑(東殿西塔)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배치는 일본의 호류지 등[5]에서만 볼 수 있었으나, 보제사 발굴 덕분에 한반도 사찰에도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사실 호류지 자체가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절이었기에 한국에 이러한 양식이 있음은 예상된 바였다.5. 사찰 건축물
5.1. 신통지문
북송 승려 서긍이 개경 개성부에 파견된 뒤 쓴 기행문인 고려도경에 따르면 보제사의 중문(中門)은 신통지문이라고 한다.5.2. 나한보전
고려도경에 따르면 사찰의 정전은 나한보전이라고 한다. 묘사에 따르면 나한보전은 왕궁[6]보다 더 웅장하였다 하며, 그 안에는 삼존불[7]을 중심에 두고 주위에 나한상 500 좌를 배치하였다고 한다.한남군 후작 최사위 묘지명엔 최사위가 보제사의 금당과 나한전 수축에 참여했다고 한다.
5.3. 선명전
宣明殿제31대 공민왕이 30대 충정왕을 위해 만든 혼전이다. 재위 원년(1352년) 7월에 만들어졌다.
5.4. 도서관과 병원
부속건물인 2층짜리 건물 장경전에는 당대 1만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당대 지식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지혜가 보제사에 모여있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도서관 역할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8]의료기관인 자비전[9]도 있어 단순 사찰이 아닌 다양한 용도의 건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5.5. 5층 목탑
나한전 서쪽에는 높이 200척(약 60m)이 넘는 5층 목탑이 있었고 뒤에는 법당을 배치하였다고 한다.[10] 유호인의 기록 등을 보면 목탑 내부는 누각 구조라 사람이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5.6. 연복사 종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36호.
보제사(연복사)에 걸려있던 종이다. 성덕대왕신종, 옛 보신각 동종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종이고 북한에 있는 종과 고려 시대에 주조된 종들 중에서는 가장 큰 종이다.[11] 종의 형태나 장식의 수법이 상당히 낯선데, 원나라 기술로 만들어서 그렇다. 용, 봉황, 거북 등이 파도를 넘는 웅건한 모습을 조각하였다.
범종 겉면에는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원나라 종장(鐘匠)이 금강산 장안사에 와서 범종을 만들고 돌아가다가 충목왕과 덕녕공주에게 요청받아 주조하였다는 명문이 있다. 보제사의 물건 중 운좋게 살아남은 케이스로, 조선 명종 18년(1563)에 연복사의 화재 때문에 개성 남대문루에 옮겨 걸어 1910년까지 개성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용도로 사용했다.
5.7. 중창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3가 40-1010 소재.1394년에 권근이 이 절의 중창을 기록한 비석이다. 중창비의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12]만 남아 있는데, 네 마리 용이 쌍으로 어우러져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졌다는 간략한 사실만 파악되었을 뿐 정확한 소재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가, 2012년 한 시민의 제보로 소재지가 파악되었다. 2013년 5월 2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울 한강로3가 소재 철도회관 화단에 있다.
6. 관련 기록
광통보제사는 왕부의 남쪽 태안문(泰安門) 안에서 곧장 북쪽으로 백여 보의 지점에 있다.
절의 액자는 관도(官道)에 남향으로 걸려 있고, 중문의 편액은 ‘신통지문(神通之門)’이다.
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榜)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ㆍ문수(文殊)ㆍ보현(普賢) 세 상이 놓여 있고, 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뒤는 법당이고 곁은 승방인데 1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맞은편에 거대한 종이 있는데 소리는 가라앉아 시원하지 못하다.
전례에 따라 예물의 나머지 말과 고려에서 정사와 부사에게 준 것 도합 2필에 백금 2근을 더해 향화(香花)와 과속[13]의 비용으로 주고, 불사(佛事)를 하고 불승을 공양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몸소 가지 않고 다만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이하 삼절을 보내어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 서긍의 고려도경 17권 '광통보제사'.
절의 액자는 관도(官道)에 남향으로 걸려 있고, 중문의 편액은 ‘신통지문(神通之門)’이다.
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榜)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ㆍ문수(文殊)ㆍ보현(普賢) 세 상이 놓여 있고, 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뒤는 법당이고 곁은 승방인데 1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맞은편에 거대한 종이 있는데 소리는 가라앉아 시원하지 못하다.
전례에 따라 예물의 나머지 말과 고려에서 정사와 부사에게 준 것 도합 2필에 백금 2근을 더해 향화(香花)와 과속[13]의 비용으로 주고, 불사(佛事)를 하고 불승을 공양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몸소 가지 않고 다만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이하 삼절을 보내어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 서긍의 고려도경 17권 '광통보제사'.
십천교를 지나 곧바로 가서 연복사에 이르렀다.
한 중앙에 우뚝 솟은 5층 누각이 온 성중을 압도하고 서 있는데,
창문과 기왓장에 저녁놀이 비친다.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다.
- 유호인[14]의 명산답사기 중 '송도기행'
한 중앙에 우뚝 솟은 5층 누각이 온 성중을 압도하고 서 있는데,
창문과 기왓장에 저녁놀이 비친다.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다.
- 유호인[14]의 명산답사기 중 '송도기행'
사원과 사묘의 건설이 우뚝우뚝 높이 솟아 서로 바라다 보이는 것이 천하에 가득하다. 우리나라는 신라 말부터 부처를 섬김이 정성스러웠다. 성안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 중에도 전각이 크고 웅장하면서, 높고 특출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있으니 그 당시의 숭봉함이 지극하였음을 잘 알겠다.
- 권근의 '연복사중창기'.
- 권근의 '연복사중창기'.
7. 외부 링크
8. 같이보기
[1]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진 연복사탑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만 자유롭게 확인해볼 수 있는 상황인데, 그나마 이 비의 정확한 소재지도 2013년에서야 파악됐다.[2] 고려 말기 신진사대부들은 사치스럽고 타락한 불교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물론 나중에 가서는 본인들 스스로가 불교보다 더한 적폐로 타락하긴 하지만.[3] 회암사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성계는 불자였다.[4] 경복궁이 대략 500여채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근대 이전까지의 백,천,만 같은 수는 어림잡아서 크다의 뜻이였지 정확히 1천여채에 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5] 법기사(法起寺), 법한사(法翰寺)도 있다고 한다.[6] 아마도 본궐 정전인 회경전(會慶殿)을 가리키는 듯 하다.[7]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8] 당대 불교 사찰은 왕족들도 출가하여 드나들 정도였기 때문에, 식자층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는 장소로 쓰여도 이상할 건 없다. 불교뿐 아니라 세계의 대부분 국가에서 사찰이나 교회는 종교뿐 아니라 지식의 창고 역할을 수행했다.[9] 조선시대의 혜민국과 유사한 기관.[10] 참고로 현존 가장 높고 오래된 목탑인 중국의 불궁사 석가탑(응현목탑) 높이가 약 67m다.[11] 종입 지름 1.9 m, 높이 3.12 m, 두께 0.23 m, 무게는 약 14톤이며, 동합금.[12]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13] 果蔌 과일과 채소.[14] 조선 초 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