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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05 03:08:08

동명왕릉

{{{#!wiki style="margin: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padding:0px"<tablewidth=420px><tablebordercolor=#000000><tablebgcolor=#FFFFFF>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
이름 한국어 고구려 고분군
영어 The Complex of the Koguryo Tombs
프랑스어 Ensemble des tombes de Koguryo
국가·위치 북한 평안남도·평양시·황해남도·남포특별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4년
등재기준 (ⅰ)[1], (ⅱ)[2], (ⅲ), (ⅳ)[3] }}} {{{#!wiki style="margin: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padding:0px"

{{{#!wiki style="margin:0px;margin-top:-52.5px;margin-bottom:0px;padding:0px"
지정번호 제 36호
이름 조선어 동명왕릉
한자 東明王陵
위치 평양직할시 력포구역 룡산리
규모사항 지름 34m, 높이 11.5m
시대 고구려 5세기
지정연도 1994년[4] }}}
파일:Tomb of King Dongmyeong.jpg
파일:동명왕릉 전경.jpg

1.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주몽)의 무덤2. 평양의 동명왕릉
2.1. 개요2.2. 동명왕의 무덤인가?
3. 같이보기

1.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주몽)의 무덤

삼국사기》에는 동명성왕이 재위 19년만인 기원전 19년 가을 9월에 사망하여 용산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는데, 고구려인들이 남긴 광개토대왕비나 고려 시대 이규보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서 인용된 《구삼국사》는 재위 19년만에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자 태자 유리와 신하들이 왕이 남긴 옥채찍을 왕 대신 장사지냈다고 한다. 이 옥채찍은 비류국의 왕 송양을 굴복시킬 때 사용한 물건 같다.

2. 평양의 동명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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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요


북한수도 평양직할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한 고구려 시조 동명왕무덤으로 전해지는 무덤.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36호. 하지만 이 무덤이 정말 동명성왕의 무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는 않았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전(傳)동명왕릉이다. 무덤 앞에는 신분이 높은 자라도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고려시대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둘레의 산 언덕 진파리무덤떼(고분군)에도 수십여기의 고구려 무덤이 산재해 있는데 북한에선 이를 국내성 위치에서 평양으로 동명왕릉을 이장하면서 같이 데려곤 개국공신들의 딸린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무덤 자체는 단군릉과 마찬가지로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른 이름을 진주묘(珍珠墓)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1번 항목에서 북한 당국이 1974년에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내부에서 고구려 고분 특유의 벽화 등을 발견하였다. 이후 1993년 5월 14일[5]에는 크게 개건을 하였다. 작은 고구려식 무덤을 거대 피라미드로 개조한 단군릉 수준의 막장은 아니지만 이 쪽도 여러 무리한 추정을 덧붙여서 상당히 큰 규모로 바꿔놓은 편이다.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338227093.jpg
▲ 동명왕릉의 전경. 당연히 원래있던 석조물들은 아니고 깔끔한 대리석으로 정비하면서 세운 것들이다.

현재 봉분의 높이는 11m로, 유홍준의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북한측 설명에 따르면 이 무덤의 봉분 높이는 원래 9m 정도였는데, 김일성이 "1,500년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서 지금의 높이가 된 것이니 원래 높이는 얼마나 더 컸겠느냐"며 비바람에 깎이기 전의 원래의 높이를 계산해 그만큼 더 높이라고 교시를 내린 바람에 과학자들이 1,400년 동안의 기후 변화 같은 것을 계산해서 지금의 높이를 계산해 냈다고.뭔 뻘짓이냐 하지만 동아일보 등 당시 기사에는 동명왕릉 개건 2년 전인 1992년 당시 남쪽을 방문했던 북한의 부총리 김달현이 포스코(당시 포항제철)에 이어 경주시를 방문해 천마총을 보고는 "이 무덤을 보니 동명왕릉의 높이를 높여야겠다"고 발언했다는 것으로 보아[6] 그냥 당시 김일성이나 북한 정권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비바람에 깎이기 전의 원래 높이를 계산해 그만큼 천마총의 높이를 더 높여라

2.2. 동명왕의 무덤인가?

북한이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 무덤의 구조가 밑에 퉁거우의 고구려 고분처럼 3단으로 정방형 돌축대를 쌓고 내부에 석실을 만들어 벽화[7]까지 그리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을 덮은, 평양 천도 이전 국내성 시절의 고구려에서 무덤을 지을 때 주로 썼던 적석총(돌각담무덤) 양식과 평양 천도 이후에 주로 나타나는 석실분(돌간흙무덤)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8] 그리고 동명왕릉의 무덤 옆에 위치한 절터 우물에서 '정릉(定陵)', '능사(陵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절이 지어진 목적이 애초에 능(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 '능'이란 왕의 무덤을 의미한다는 것,[9]

졸본에서 사망해 졸본에서 묻혔을 동명성왕의 무덤이 왜 평양에 있는 거냐는 점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장수왕 때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같이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 추정이 따라붙는다. 외적의 침입 때마다 선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다보니[10] 수도를 옮기면서 동명성왕릉 같은 중요한 무덤은 평양으로 옮겨서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11]

사실 이 무덤이 동명성왕의 무덤이라는 것은 북한이 뜬금없이 한 주장은 아니고 이미 조선 시대에도 그러한 주장이 존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이라고 기록했고, 대표적으로 순암 안정복 역시 현재 북한의 주장과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동명(東明) 때 평양은 낙랑군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동명이 어떻게 이곳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응제시주(應製詩註)》에,
“주몽이 졸본(卒本)에 도읍하였는데 그 소재는 알 수 없으나 당(唐)의 이적(李勣)이 아뢴 말에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까지 17역(驛)이다.’ 하였으니 거리가 서로 너무 멀다. 아마 일찍이 구제궁(九梯宮)을 짓고 와서 놀다가 죽어 이곳에 장례한 것이리라.”
하니, 이 말 역시 잘못이다. 대개 고구려가 관구(毌丘)ㆍ모용(慕容)의 난을 만나 도읍이 잔파(殘破)되고 선왕의 능묘가 헐려 나라를 옮길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왕의 능침도 따라 남쪽으로 옮겨서 동명묘를 지금 중화(中和)의 용산(龍山)에 장례하였으므로 이르는 말일 것이다. 고려 고종이 몽고(蒙古)의 난을 만나 강화(江華)로 천도하고 태조 이하 모든 능묘를 죄다 이장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상고하건대 《광여기(廣輿記)》에,
“요동(遼東) 복주(復州)에 명왕산(明王山)이 있는데 고구려의 왕자 동명을 이곳에 장례하였다.”
하였으니, 혹시 처음 이곳에 장례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고이(考異) 中 '동명을 용산에 장사지내다'

다만 그럼에도 이 무덤이 정말 동명성왕의 무덤일 거라고 섣불리 믿기 어려운 까닭은 우선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뒤에도 고구려의 왕들은 졸본까지 가서 동명왕을 참배했다는 것. 북한에서는 이에 대해 평양에 있는 것이 무덤(墓)이고 졸본에 있는 것은 사당(廟)이라고 해석하지만, 장군총 위에서 사당의 흔적으로 보이는 건물터가 발견된 데다 《삼국유사》에서도 수로왕의 무덤(墓)을 두고 버젓이 수릉왕묘(首陵王)라고 부른 것이 확인되어 무덤과 사당이 구분되었다고 보기에는 희박하다고. 거기다 이 무덤이 정말 동명성왕의 무덤이라면, 실제 유해를 모신 무덤을 평양 코앞에 두고선 고작(?) 사당에 가서 제사를 지내려 졸본까지 산 넘고 물 건너 갔다는 건데 영 부자연스럽다.

학계에서는 동명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는 거의 없으며 되려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후보들은 본 동명왕릉을 포함하여 길림성 집안시 소재 장군총, 평양 동쪽의 광대산 자락의 토포리 대총, 그리고 한왕묘(경신리 1호)가 있다.

토포리 대총이야 장수왕릉 후보에서 많이 뒤쳐진 편이지만 와당이 출토된 '동명왕릉', 한왕묘, 장군총은 여전히 각 연구자마다의 와당의 변천을 기준으로 장수왕릉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그 밖에도 묘실의 구조에 따른 판단도 있지만 고구려 석실이 장수왕 시절까지도 통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널리 인정받는 무덤으로 딱 하나를 꼬집기는 어렵다. 거기다가 고구려 왕릉이 왕릉급 고분과 실제 왕들이 딱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정에 난점이 있으며, 일부 논자들은 장군총을 일종의 허묘로 축조하고 동명왕릉 또는 한왕묘를 실제 무덤으로 축조했으리라 보는 견해도 있다.

3.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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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구려 문화의 걸작이며, 고분의 구조는 정교한 건축 공법을 보여 준다.[2] 고구려 문화의 독특한 매장 풍습은 일본을 포함한 인근의 다른 지역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3] 고구려 고분은 고대 매장 양식의 중요한 사례이다.[4] 1993년 12월 북한최고인민회의의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발전 시키기 위한 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을 통해 1994년 문화유물보호법을 제정·공포하였으며 기존에 사용되던 국보, 보물 등의 지정번호를 일괄적으로 갱신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5] 이 날이 기록상 동명왕의 생일인 당시 음력 4월 1일을 거슬러올라가 양력으로 환산해 2,295회 생신날이라서 이 날을 개건일로 잡았다고 한다.[6] 출처 동아일보 1992년 7월 23일자 보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7] 1970년대 무덤을 재조사하면서 벽면의 석회를 씻어내렸는데 그때 보라색 바탕에 붉은 자색을 칠한 지름 12센티미터의 연꽃무늬가 4.2센티미터 간격으로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당시 남아있었던 연꽃 무늬가 모두 641개였다고.[8] 이런 구조의 무덤은 북한에서는 용강큰무덤밖에 없다고.[9] 설령 이 무덤이 실제 동명성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해도 정릉사 곁에 있는 이 무덤이 왕릉급 무덤임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10] 봉상왕전연모용외가 쳐들어와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쳤고, 고국원왕 때엔 모용황환도성을 불태우고 퇴각하면서 또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아예 그 시신까지 가져가버렸다.[11] 이건 고려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다. 고려는 고려궁지로 천도할 때 세조, 태조의 시신을 가져 갔고 조선은 선조가 종묘의 신위를 들고 도망쳤다. 조상 숭배가 이루어진 한국사에선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