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3-13 22:32:56

동명성왕/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동명성왕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000> 파일:고구려 군기.svg동명성왕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000000,#2d2f34><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생애
관련 문서 동명왕릉 · 숭령전
매체 대중매체
}}}}}}}}} ||

1. 개요2. 탄생 설화3. 건국4. 비류국 병합5. 소국 토벌6. 태자 책봉7. 죽음과 승천8. 여담

1. 개요

고구려 창업군주 동명성왕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탄생 설화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신화에 의하면 동명성왕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이며, 어머니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라 전하고 있다.[1][2][3][4]

어느 날 해모수가 동생들과 함께 놀고 있던 유화를 보고는 꾀어내서 함께 하룻밤을 지냈으나 다음 날에 혼자서 승천해 버렸다고 한다.[5] 유화부인은 중매도 없이 다른 남자와 잤다는 이유로, 부친인 하백에게서 쫓겨나 떠돌다가 태백산 우발수까지 밀려났다가 당시 부여의 왕이었던 금와왕과 만나게 되었는데, 유화의 사연을 알게 된 금와가 유화를 거두어서는 궁 안으로 데려와 방안에 두었다. 이후에 햇빛이 방안으로 들어와 유화의 몸을 내리 쬐었는데, 유화가 아무리 이를 피하려 해도 햇빛은 계속 유화의 몸을 비추었다. 그 이후에 유화는 덜컥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괴상하게도 을 낳았다. 알의 크기는 5되였다. 금와왕이 알을 돼지나 짐승에게 주거나 들판에 내버려도 짐승들이 알을 해치지 않고 보호하려고 하였고, 껍질이 단단해서 깨뜨릴 수가 없어 결국 도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윽고 알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동명성왕, 즉 주몽 혹은 추모였다.#

하지만, 그를 시기한 대소를 비롯한 부여의 왕자들의 간계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아내 예씨부인과 모친 유화, 그리고 예씨의 배 속의 아이 유리를 남긴 채 주몽은 떠난다. 이때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아들임을 증명할 부러진 칼 조각을 남기는데, 관련된 내용이 그리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 대한 설화와 거의 같다. 위에 소나무(기둥)가 있는 칠각형 돌(주춧돌) 아래에 부러진 칼의 일부를 묻어뒀으니 찾을 나이가 되거든 그 칼 조각을 가지고 오라는 것. 동명성왕은 떠날 때 오이, 마리, 협보 등의 친구들과 자신을 따르는 여러 무리를 이끌고 도망쳤고, 강에 가로막히자[6] 자신이 하백의 손자이자 하늘의 자식임을 이용해 자라와 물고기로 다리를 만들어 큰 강을 건너 부여를 탈출했다.

부여를 탈출할 때 깜빡하고 곡식을 놓고 왔는데 유화부인이 그걸 알고 비둘기 한 쌍에게 오곡을 전해주게 했다. 동명성왕은 나무 밑에서 쉬다가 비둘기 한 쌍을 보고는 어머니가 보낸걸 알아채고 활로 쏴서 떨어뜨렸고, 오곡을 얻은 후 물을 뿜어 비둘기를 다시 살려서 날려보냈다.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제1, 온조왕 조
이후에 동명성왕의 일행은 졸본부여라는 나라에 도착한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8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8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3. 건국

당시, 졸본 땅은 말갈에게 자주 약탈을 당하고 있었는데, 주몽은 말갈족을 물리쳐서 그들이 다시는 졸본부여를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곧 졸본부여땅 전체에 퍼지게되면서 주몽은 유명인물이 되었으며, 1개의 지역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로 성장한다.

졸본부여의 왕 연타발은 주몽과 여러 번 국정을 논의한 적이 있는데, 이를 계기로 확실하게 신임을 얻게 된다. 게다가 주몽은 체격이 건장하고, 재주도 뛰어났기에 그를 더욱 믿는다.
(졸본)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제1, 온조왕 조
때문에, 당시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왕은 이런 주몽을 사위로 삼고, 자신의 둘째 딸인 소서노와 맺어주었다. 그리고, 본인이 죽을 때가 되자 주몽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왕위를 이어받은 주몽은 졸본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이동한 뒤, 이곳을 도읍삼아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이때, 아내 소서노는 재물이 많았기에 주몽의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나라가 바로 고구려였으며, 더불어 주몽은 자신의 성씨를 고씨로 정하였다. 기원전 37년, 그가 22세 되던 해였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8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8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4. 비류국 병합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날에 궁실과 성을 수축했고 근처에 있던 비류국송양을 굴복시킨 후, 비류국을 다물도로 삼았다.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참고로 이때 비류국왕인 송양과의 일화가 《구삼국사》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5. 소국 토벌

한편 동명성왕은 비류국 이후 행인국북옥저를 병합한다.
冬十月 王命烏伊 扶芬奴 伐太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 爲城邑
겨울 10월, 임금이 오이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게 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으로 삼았다.

十年 秋九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猒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여 멸하게 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6. 태자 책봉

기원전 19년 4월 부여에서 아들 유리가 도망쳐 오자 태자로 삼았고, 동명성왕 사후 유리가 왕이 되자 소서노와 그 두 아들 비류, 온조는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7. 죽음과 승천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9년 9월, 40세 때 승하하여 용산(龍山)에 임금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구삼국사》의 〈동명왕〉 편과 『광개토대왕릉비』에선 왕은 홀본 동쪽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추모왕이) 그러다 세위(世位)를 즐기지 않게 되자, (하늘이) 황룡(黃龍)을 내려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승천(昇天)하셨다(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광개토대왕릉비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편(玉鞭)[9]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고 한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제왕운기》에선 특이하게도 동명성왕이 재위 중에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정치[10]를 배워 내려왔고, 재위 19년 9월 하늘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아 거룩한 아들 유리(聖子 類利)가 보위를 이어 남은 옥편을 무덤에 묻었고 그것이 지금 용산(龍山)의 무덤[11]이라고 한다.[12]

삼국사기》 기록엔 아들 온조왕이 기원전 19년에, 손자 대무신왕이 서기 20년에 각자 동명왕을 기리는 사당을 세운다.
[ruby(昨過永明寺, ruby=작 과 영 명 사)]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ruby(暫登浮碧樓, ruby=잠 등 부 벽 루)] 잠시 부벽루에 올랐는데
[ruby(城空月一片, ruby=성 공 월 일 편)] 성벽 하늘엔 달 한 조각 떠 있고
[ruby(石老雲千秋, ruby=석 로 운 천 추)] 오래된 조천석 위엔 천 년 세월의 구름이 흐르네.
[ruby(麟馬去不返, ruby=인 마 거 불 반)] 기린마는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ruby(天孫何處遊, ruby=천 손 하 처 유)]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시는가?
[ruby(長嘯依風岉, ruby=장 소 의 풍 물)] 돌계단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니
[ruby(山靑江自流, ruby=산 청 강 자 류)]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더라.
이색(李穡), 〈부벽루〉(浮碧樓)
이 외에도, 그가 승천했다는 설화가 굉장히 많다. 어느 날 도성에 구름이 잔뜩 끼더니 왕이 옥편 하나만 남기고 사라져서 옥편을 모셔서 묘를 썼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이 옥편은 비류국왕 송양을 굴복시킬 때 사용한 홍수를 없앨 때 사용한 물건이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화로는 기린을 길들였으며 기린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설화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용을 타고 올라갔다는 내용의 전설이 전해지며 광개토대왕릉비와 문무왕릉비에서는 황룡을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양에는 구제궁 옆에 동명성왕이 기린을 길들였다는 '기린굴'이 남아 있었으며, 고려 말엽에는 민간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또한 동명성왕이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조천석'이라는 유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8. 여담

파일:50_주몽신화.png
1854년 막부 말기우키요에 작가이며 그림책 《조선정벌기》에서 사용한 필명은 '하시모토 교쿠란'(橋本玉蘭)인 우타가와 사다히데(歌川貞秀)의 그림책 《조선정벌기》(絵本 朝鮮征伐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도한 조선정벌과 관련된 내용들을 삽화와 함께 담고 있다. 특이하게 임진왜란뿐 아니라 기자조선의 전설이나 백강 전투삼국시대의 일화들도 삽화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繪本(에혼, 현대 신자체로 絵本)은 한자 뜻 그대로 그림책을 의미. 위의 그림의 내용은 주몽이 부여에서 달아나 강물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했다.


[1] 아마도 국가의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한 일종의 장치로 추정된다. 나라의 시조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하는 일은 고대 국가에서 상당히 흔했기 때문. 또한 해모수의 '하늘'과 유화의 '물'이라는 상징으로 볼 때, 고구려의 뿌리는 농경 사회라는 설이 있다.[2] 사족으로, 《삼국유사》 〈왕력〉 '동명왕' 부분에서는 주몽이 '단군(壇君)의 아들이다'라는 기록도 있다. 백제에서는 고구려의 멸칭으로 박적(狛賊)이라고 칭했는데, 외관에서 알 수 있듯이, '박(狛)=맥(貊)'에서 유래했으며, ''이라는 뜻이다. 고구려도 곰을 숭상했을지 모른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인데, 이는 단군 설화에 나오는 곰과 연관지으면(물론 단군 설화 자체는 기원전 고조선 시절부터 전해지던 기록은 아니다.) 고조선과의 친연성으로 볼 여지도 있다.[3] 이외에도 부여, 고구려, 고조선은 모두 소 뼈를 이용한 우제점을 사용했다. 기사에 따르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인용한 AD 2세기경에 작성된 《위략》에는 당초 알려져 있었던 '무천'이 동예에서 행해지던 풍습이라는 상식과 다르게 고조선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 《삼국지》가 편찬되었을 때 이 내용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우제점 또한 고조선의 풍습이었다고 한다. 또한 21세기 연구에 따르면, 윷놀이는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부여에서 유래한 놀이가 아닌 고조선에서 유래한 놀이라는 학설도 있는데, 두 국가 간의 친연성을 추측해 볼 수도 있는 사례이다. 거리상 제법 가까우니 사실 교류가 없는게 더 이상할지도.[4] 흔히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고구려 = 고려의 훈독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일본어에서는 고려를 'Koma'라고 부르며, 'Kuma'는 곰이라는 뜻이다. '狛'의 경우에도 일본어 훈독은 'koma'라고 한다. 후에 안장왕의 후손이 도일하는데, 그들은 '狛'으로 개칭했으며, 'koma'라고 읽힌다고 한다. 고대 한국어가 일본어로 정착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백제의 경우, 웅진은 《일본서기》에서 '고마나리'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고마'는 백제어로 '웅(熊)'에 해당하는 단어로, 마찬가지로 곰을 뜻한다.[5] 신화적 이야기 걷어내고 보면 걍 야반도주(...) 했다고 볼 수 있다.[6] 현재의 송화강[7] “국가의 기업이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沸流)의 사자가 왕래함에 내가 왕의 예로 맞고 보내지 못하니 그 까닭으로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고각'은 뿔피리를 말하며, '위의'는 위엄 있는 몸가짐이나 차림새를 말한다.[8] 이전 문서에는 채찍이라고 적혀있었지만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몽둥이다.[9] 한자 사전을 뜻하는 옥편과는 다른 단어로, 옥 채찍을 의미한다.[10] 올바른 정치[11]삼국사기》의 무덤을 의미하는듯 하다.[12] 출저:《제왕운기》 하권, 고구려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655
, 3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655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