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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3:50:25

세종실록지리지

1. 개요2. 역사3. 내용4. 의의

1. 개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혹은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世宗莊憲大王實錄地理志)는 조선 초기의 지리서이자 한국 역사상 세번째로 만들어진 지리지.[1] 이름 그대로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전국지리지로 실록 안에 실려있긴 하나 부록이 아니라 독자적인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2. 역사

세종 6년, 1424년에 세종이 변계량(卞季良)에게 조선의 지리지를 편찬할 것을 명한 것이 최초다. 이에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를 시작으로 1432년에 이르면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완성된다.

세종이 사망한 후 1452년 세종실록이 편찬되는데 세종의 업적이 고르고 골라도 너무 많아 도저히 실록 안에만 다 담을 수가 없어서 그냥 칠정산정간보, 국조오례의의 전신, 지리서를 따로 수록해 버렸다. 이 때의 지리서는 신찬팔도지리지를 기본으로 하여 1419년과 1432년에 다시 확인한 지리적 변화를 추가하고, 4군 6진 개척 이후 편입된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지리 상황을 추가한 것이다.

3. 내용

이 부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항목을 참조하였습니다. 번역

경기도 41 고을, 충청도 55 고을, 전라도 56 고을, 경상도 66 고을, 강원도 24 고을, 황해도 24 고을, 평안도 47 고을, 함길도 21 고을에 대한 기록이다.

각 고을에 파견된 지방관의 등급과 인원, 연혁, 각 고을 별호, 속현···부곡 등과 그 연혁, 진산과 명산대천, 고을 사방 경계와 맞붙붙은 고을까지 거리, 호구(속현도 따로 기재)와 군정 수, 성씨(속현도 따로 기재), 토질과 전결(田結), 토의(土宜), 토공(土貢)-공납품-, 약재, 토산, 누대, , 봉수, 산성, 제언(堤堰), 사찰 순서로 기록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달리 각 고을의 공물, 조세, 군역 등 국가가 징발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총 정리해 놓았다.

서문
계수관 관할 , , ,
경도 한성부#
구도 개성유후사#
경기# 광주목 관할 1목 1군 7현 광주목(廣州牧)#, 여흥도호부#, 양근군#, 음죽현#, 이천현(利川縣)#, 과천현#, 천녕현, 지평현#, 금천현#
양주도호부 관할 2도호부 7현 양주도호부, 원평도호부, 고양현,
교하현
임진현
적성현
포천현
가평현
수원도호부 관할 수원도호부
남양도호부
안산군
안성군
진위현
용인현
양성현
양지현
철원도호부 관할 1도호부 1군 현 철원도호부
삭녕군
영평현
장단현
안협현
임강현
마전현
연천현
부평도호부 관할 부평도호부
강화도호부
인천군
해풍군
금포현
양천현
교동현
통진현
충청도 충주목 관할 충주목
단양군
청풍군
괴산군
음성현
연풍현
제천현
영춘현
청주목 관할 청주목
천안군
옥천군
문의현
목천현
죽산현
청안현
전의현
연기현
직산현
평택현
온수현
신창현
아산현
영동현
황간현
회인현
보은현
청산현
진천현
공주목 관할 공주목
임천군
한산군
서천군
남포현
비인현
정산현
홍산현
은진현
연산현
회덕현
석성현
진잠현
부여현
이산현
홍주목 관할 홍주목
태안군
서산군
면천군
해미현
당진현
덕산현
예산현
청양현
보령현
결성현
대흥현
경상도 경주부 관할 경주부
밀양도호부
양산군
울산군
청도군
흥해군
대구군
경산현
동래현
창녕현
언양현
기장현
장기현
영산현
현풍현
영일현
청하현
안동대도호부 관할 안동대도호부
영해도호부
순흥도호부
예천군
영천군
영천군
청송군
의성현
영덕현
예안현
하양현
기천현
인동현
봉화현
의흥현
신녕현
진보현
비안현
상주목 관할 상주목
성주목
선산도호부
합천군
초계군
김산군
고령현
개령현
함창현
용궁현
문경현
군위현
지례현
진주목 관할 진주목
김해도호부
창원도호부
함안군
함양군
곤남군
고성현
거제현
사천현
거창현
하동현
진성현
칠원현
산음현
안음현
삼가현
의령현
진해현
전라도 전주부 관할 전주부
진산군
금산군
익산군
고부군
김제군
금구현
만경현
임피현
옥구현
함열현
용안현
부안현
정읍현
태인현
고산현
여산현
나주목 관할 나주목
해진군
영암군
영광군
강진현
무장현
함평현
남평현
무안현
고창현
흥덕현
장성현
남원도호부 관할 남원도호부
순창군
용담현
구례현
임실현
운봉현
장수현
무주현
진안현
곡성현
광양현
장흥도호부 관할 장흥도호부
담양도호부
순천도호부
무진군
보성군
낙안군
고흥현
능성현
창평현
화순현
동복현
옥과현
진원현
제주목 관할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황해도 황주목 관할 황주목
서흥도호부
봉산군
안악군
수안군
곡산군
신은현
해주목 관할 해주목
재령군
옹진현
장연현
강령현
신천현
연안도호부 관할 연안도호부
평산도호부
배천군
우봉현
토산현
강음현
풍천군 관할 풍천군
문화현
송화현
은률현
장련현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관할 강릉대도호부
양양도호부
정선군
평창군
원주목 관할 원주목
영월군
횡성현
홍천현
회양도호부 관할 회양도호부
금성현
금화현
평강현
이천현(伊川縣)
삼척도호부 관할 삼척도호부
평해군
울진현
춘천도호부 관할 춘천도호부
낭천현
양구현
인제현
간성군 관할 간성군
고성군
통천군
흡곡현
평안도 평양부 관할 평양부
중화군
상원군
삼등현
강동현
순안현
증산현
함종현
삼화현
강서현
용강현
안주목 관할 안주목
성천도호부
숙천도호부
자산군
순천군
개천군
덕천군
영유현
맹산현
은산현
양덕현
의주목 관할 의주목
정주목
인산군
용천군
철산군
곽산군
수천군
가산군
정년현
삭주도호부 관할 삭주도호부
영변대도호부
창성군
벽동군
운산군
박천군
태천군
강계도호부 관할 강계도호부
이산군
희천군
여연군
자성군
무창군
우예군
위원군
함길도 함흥부 관할 함흥부
정평도호부
북청도호부
영흥대도호부 관할 영흥대도호부
고원군
문천군
예원군
안변도호부 관할 안변도호부
의천군
용진현
길주목 관할 길주목
경원도호부
단천군
갑산군
경성군
경원도호부
회령도호부
종성도호부
온성도호부
경흥도호부
부령도호부
삼수군

4. 의의

첫번째 의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대로 된 형태로 만들어진 지리지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지리지는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지리지(三國史記地理志)이지만 그 체제나 형태가 삼국사기의 부록 수준으로 매우 미숙하고 내용도 거의 없으며 그나마 있는 내용은 통일신라가 차지한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지명의 연혁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2]

그리고 경상도지리지와 함께 세종실록지리지의 프로토타입인, 문종 1년인 1451년[3]세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 또한 역시 부록 수준으로 소략(疎略)하게 기록되어 있고 군현 이하의 행정구역인 향(鄕), 소(所), 부곡(部谷), 장(莊), 처(處)의 지명이 많이 누락되어 있다.

앞의 두 지리지는 기본적으로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후대 왕조가 만든 것으로 그 한계가 뚜렷하고 내용이 정확하지 않으며 분량도 적다. 반면 세종실록지리지는 후대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비교해 보아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으며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제작 목적이 확실하고 실제 나라를 꾸려나가는데 필수적인 내용들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두번째 의의는 조선이 이전 왕조인 고려보다 훨씬 강한 중앙집권국가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자료라는 것이다.

전대 왕조인 고려는 왕권이 가장 강했던 광종 시기에도 행정력이 지방 구석구석에까지 미치지 못했고 지방관 파견도 중앙 5도 지역과 일부 큰 주현에만 한정되었고 기타 속현에는 파견할 수 없었다. 상황 자체가 고려에게 더럽게 흘러갔던 점이 큰데, 고려 자체가 호족 연합체격으로 시작한 나라라 지방세력 통제 실적이 오히려 전 왕조 통일신라보다도 부실했다.[4] 초기에는 호족들이 날뛰었고 중기에는 무신정권이 들어서며 개판이 났기 때문. 그 후인 원간섭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정동행성다루가치가 미쳐 날뛰는 한편, 영토적으로는 고려 제2의 수도였던 서경과 그 이북 지역은 동녕부(東寧府)란 이름으로 30여년간 뺏기고, 함경남도는 98년간 쌍성총관부라는 괴뢰국이 세워지고, 탐라국이 있었던 제주도에 대한 영향력도 완전히 상실하는 등 이른바 헬고려가 탄생하는 바람에 지방 관리는 커녕 자주권을 지키기에도 급급했다. 말기에는 영민한 군주 공민왕이 등극하며 희망이 보였으나 1359년에 홍건적 4만명이 고려 국경을 넘어 침범했고, 1361년 10만명이 몰려와 수도인 개경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이에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을 가면서 상당히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빠졌다. 공민왕도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한 이후로 정치에 대한 의욕과 역량을 잃어버리면서 끝내 고려는 완벽한 중앙집권을 이룩하지 못했다. 결국 고려는 끝까지 지방 속현에까지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각 지방의 백성들은 나라, 그 지역의 호족, 그 지역을 지나는 다루가치, 타락한 절 등에 따로따로 세금을 내야 했다.

조선의 경우 이때를 기점으로 지리지를 편찬하고 전국 모든 고을의 조세 수취, 군역 징발 등의 제반 사항을 중앙에서 직접 통제했다. 지리지를 통해 모든 고을에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중앙에 바치는 조세와 군역 등을 파악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문화, 백성들의 생활과 처한 상황까지 전부 보고해 올리도록 했다. 각 지역에서 난립하던 호족, 문벌귀족-권문세족 들은 조선시대에 이르면 서리(書吏)와 같은 아전으로 격하되었고 중앙정부에 종속되었다.

마지막 의의는 남·북한의 외국과의 영토 분쟁에 있어서 중요한 사료라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후신인 남·북한이 주요 영토 분쟁 지역인 독도녹둔도 등에 대하여 영유권을 주장할 때 가장 먼저 드는 사료이다. 특히 독도는 독도/역사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역대 한국사의 왕조들 중 독도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기록 문헌이 바로 이 세종실록지리지이고, 일본의 최초 기록인 은주시청합기(1667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자료다.[5] 그리고 고려시대 동북 9성의 공험진 위치 비정을 두만강에서 700리 넘어 송화강 유역이라고 적어놓아서 간도 영유권 문제, 간도회복 떡밥이 돌 때도 한번씩 튀어나온다.

[1] 세종실록지리지의 전신인 경상도지리지를 넣을 경우 네번째.[2] 삼국사기 34권 지리지 1은 신라 상주, 양주, 강주이고 35권 지리지 2는 신라 한주, 삭주, 명주이고 36권 지리지 3은 신라 웅주, 전주, 무주이고 37권 지리지 4는 고구려, 백제, 기타 지역의 내용이다.[3] 세종실록지리지가 제작되기 3년 전[4] 신라는 지방세력의 반란 통제에 실패하거나 휘둘린 적이 멸망할 때 빼고는 없었지만 고려는 지방 연고지를 백으로 둔 권신이나 변경의 군인에게 중앙정부가 털리는 게 거의 연례행사 수준이었다.[5] 세종실록지리지와 함께 태정관 지령,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SCAPIN 제677호(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는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권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근거로 자주 제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