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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0 19:43:40

재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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載寧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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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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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pk.jpg 최휘 (제339호 재령선거구)
파일:wpk.jpg 리혜숙 (제340호 삼지강선거구)
파일:wpk.jpg 김용애 (제341호 장국선거구)
파일:wpk.jpg 김대성 (제342호 북지선거구)
시당 파일:wpk.jpg 김창수[1]
(재령군당 책임비서)
인민위 파일:wpk.jpg 김효삼[2]
(재령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면적 328.4㎢
시간대 UTC+9
인구 125,631명 (2008년)
인구밀도 383명/km² (2008년)
관청
소재지

재령군 인민위원회
(위치 미상)
재령읍내(2010년 11월)[3]

1. 개요2. 역사3. 지리4. 교통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6. 기타7. 관련 성씨

[clearfix]

1. 개요

황해남도.

황해남도 동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황해북도 은파군, 봉산군, 사리원시, 서쪽으로 신천군, 남쪽으로 신원군, 북쪽으로 안악군과 접해 있는 군이다.

2. 역사

고구려의 삼경 중 하나인 '한성(漢城)'으로 유력한 곳이다. 두번째로 유력한 학설이 현재의 서울이라는 학설이다. 또 원래 서울이었다가 나제동맹에 밀려 서울 지역을 잃으면서 재령으로 한성이 옮겨졌다는 학설도 있다. 고구려 때는 평양, 국내성과 견줄 만한 도시였다.

이 때문인지 과거 ‘한성(漢城)’ 또는 ‘한홀(漢忽)’로 불리던 기록이 있고, 고구려의 도시 유적지가 나온 바 있다.#. 다만 고대의 대도시는 기존의 도시를 바탕으로 확장되었고 과거 재령지역이 한사군 중에 대방군의 영역이었음을 고려해보면 대방군의 중심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안승검모잠은 이 곳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부흥운동을 펼친다.

통일신라 경덕왕이 762년 5월 성을 쌓고 태수를 두어 정식 군현으로 만들었다.

재령(載寧)이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인 1217년에 붙었는데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뜻이다. 장수산성이 있다 하여 성(城)의 옛말인 재로부터 유래하여 재령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고려 공양왕 2년(1390년)부터 경기도에 속했지만 조선 개국 후 새 수도인 한성부로부터 너무 멀다는 이유로 태조 3년(1394년)에 도로 서해도로 복귀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 국토가 분단되면서 북한 땅이 되었다. 농민에게 땅을 주겠다는 말을 하여 농민을 북한 당국이 속이고서는, 그 땅에 현물세 25%를 물리는 쌀 수탈과 이를 외세인 소련에 넘기는 행위가 심하다고 하여 "의혈청년들이 현물세 창고와 벼 5천 가마에 기름을 붓고 방화했다가 체포돼 주동자가 사형을 당했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1952년에 북한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군의 남부 지역(신원면, 하성면, 상성면, 은룡면 일부)을 분리하여 신원군을 신설하면서 면적이 축소되었다.

3. 지리

재령평야 문서 참조.

4. 교통

도로는 51번 국도54번 국도(대한민국 기준)가 지나간다.

철도는 은률선이 지나가며 금산역, 재령역이 있다.

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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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C51A3><colcolor=#ffffff> 군청 소재지 재령읍 일신리
상위 행정구역 황해도
하위 행정구역 1 10
광복 당시 면적 739㎢

파일:재령군기.png

6. 기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한 송해가 바로 이곳 출신이다.[5] 그는 재령에 대해 "곡창으로 유명한 곳이다. 재령은 물이 흔하고 교육, 교통, 종교의 도시다."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 재령의 좋은 쌀[6]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 총독도 재령군의 쌀을 사 먹었다고. 또한 이곳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열고 싶다는 소원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으나, 본인이 사망함으로써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7]

재령군의 한자 표기 '載寧郡'에서 '寧'의 본음은 '녕'으로 원래대로라면 '재녕군'이라고 읽어야 하지만 활음조 현상에 따라 '재령군'이라고 읽는다. 비슷한 사례로 보령시, 의령군, 부령군, 회령군, 무령왕 같은 사례가 있다.

7. 관련 성씨



[1] 2022년[2] 2022년[3] 썸네일이자 영상 1:03에 나오는 2층 한옥은 "해림상회"라는 곳으로, 1910년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실측할 수는 없으나, 당시 건물이 맞다면 등록문화재급 건물이다. 좌표는 북위 38도23분52초15, 동경 125도37분18초43.[4] 구 재신저수지. 재령군과 신천군에서 각 한 글자씩 딴 이름[5] 공부는 해주에서 했다.[6] 미식가로 유명한 김정일은 생전에 재령의 쌀로 만든 밥만을 먹었을 정도였다.[7] 2003년 평양에서 전국노래자랑 특집편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이 때도 고향에는 끝내 가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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