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관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안성천과 진위천을 기준으로 3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현재의 평택 시가지(시내 동지역)는 원래 평택이 아니라 진위의 영역이었다. 이는 경부선 철도가 이 팽성읍이 아닌 이 일대를 통과했고, 이후 평택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고 군청이 이 일대로 옮기면서 지금처럼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성천과 진위천이 감조하천이라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사실상 바다였다. 당시의 인프라 수준으로는 충분히 큰 자연 경계였고 행정구역도 다르게 되었다. 팽성 밑에 있는 아산시 둔포에도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바로 동네 앞까지 바닷배가 들락날락 하던 곳이라 포(浦)라는 이름이 붙었고, 평택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지금의 군문교(옛 군물포) 근처까지 바닷배들이 들락날락했다. 하천을 비롯한 지형의 영향으로 지금도 3개의 권역으로 알게 모르게 서로 나뉘어져 있다.
2.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구 진위군 일대는 백제의 금산, 연달부곡, 구 평택군 일대는 백제의 아술현에 속하였다가 하팔현 (또는 고하현)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다가 안성천 이북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 이후 부산현이 되었다.지금의 서평택 지역인 안중읍에는 차성현 또는 거성현(현 청북 안중 일대, 화성양감일대 ) 이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 부산현이 진위현으로, 하팔현이 팽성현으로 개칭되었다.
3. 고려
태조 때 팽성현이 평택현으로 개칭되었다.[1] 양성현[2]의 일부를 떼서 영신현[3]을 만들었다.서평택지역은 차성현에서 용성현(용성리 일대)으로 개칭되었고 현덕면 일대는 광덕현이 되었다
고려 후기에 안성천이북에는 진위현 송장현 영신현 양성현 용성현이 있었고 안성천이남에는 평택현과 경양현이 있었다.
공민왕 대에 진위현, 평택현은 충청도에 속하였다.
4. 조선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태조 때 진위현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세종 때 영신현 송장현이 진위현으로 내속되었다. 그리고 용성현 지역이 수원도호부에 편입되었다.
평택현은 연산군 대에 처음으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그 이유는 금표(왕 전용지, 민간인 출입 금지)의 지나친 확장으로 경기도의 관할구역이 축소되자, 평택·진위 등의 몇몇 군현을 충청도에서 떼어다 붙인 것. 진위군은 중종 대인 1506년 다시 충청도로 복귀했으나[7], 고종 대인 1896년에 이르러 진위군은 경기도로 다시 편입되었다. 그러나 평택군은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 여전히 충청남도 관할로 남아 있었다. 안중면은 충청도 직산현의 월경지였다. 당시의 안중면과 지금의 안중읍(면)은 중심지가 안중리라는 것만 빼면 다 다르지만.
구한말 평택, 진위, 수원의 행정구역 상황. 1906년 양성군과 직산군의 월경지는 주변 군현으로 편입되며 일괄적으로 정리된다.
5. 일제강점기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평택·진위·수원의 일부를 통합하여 출범한 진위군의 행정구역 상황. 자세히 알고 싶으면 여기로
1914년 충청남도 평택군 및 경기도 수원군의 일부를 진위군으로 통합하면서, 현재의 평택시 영역이 확정되었다. 이 당시 진위군청은 북면(현 진위면)에 두었다가, 1926년 병남면으로 이전하였다. 1931년 병남면이 평택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34년 부용면과 서면이 팽성면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938년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칭되고, 동시에 평택면이 평택읍으로 승격되었다.
6. 대한민국
도농복합시 출범 이전의 평택군, 송탄시, 평택시 깃발 | ||
1995년 통합 이후 2020년까지 사용한 평택시 로고 |
- 1995년 평택시·송탄시·평택군 통합 직전 행정구역 상황.
1981년 송탄읍이 송탄시로 승격[8]되어 분리되었다.[9] 1983년 안성군 원곡면 용이리, 죽백리, 청용리, 월곡리, 공도면 소사리가 평택읍으로 편입되었으며, 1986년 평택읍도 평택시로 승격되어 분리되면서 송탄시, 평택시, 평택군의 3개 행정구역이 공존하게 되었다. 1987년엔 화성군 양감면 고렴리가 청북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오성·청북·포승·현덕면의 각 일부를 떼어내어 안중면을 신설하였다. 당시 평택군의 군청은 현 비전동 632-4번지에 있었다.
그러다가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와 함께 송탄시, 평택시, 평택군이 다시 통합되어 오늘날의 도농복합형 평택시가 되었다. 이때, 진위면 갈곶리, 청호리, 고현리의 일부가 오산시에 편입되었다. 이후 2002년 안중면이 안중읍으로, 2006년 포승면이 포승읍으로, 2016년 청북면이 청북읍으로 승격되고, 2021년 송탄시내에 있던 칠원동의 일부가 신설된 행정동 동삭동으로 편입되고 고덕면 일부가 고덕동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른다.
[1] 천안부 소속[2] 현 안성시 양성면, 원곡면, 공도읍[3] 대략 지금의 평택 시가지과 영역이 비슷하다. 중심지는 현재 동삭동 일대.[4] 지금의 진위면, 서탄면, 고덕면 중 두릉천 이남 지역, 송탄, 평택 동지역이다. 고려 시대부터 충청도였다가 조선 초기에 잠시 경기도였고, 1506년부터 1896년 8월까지는 충청도였으나, 그 이후에 잠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역사가 평택현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진위현은 충청도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역사학자들의 견해이고, 평택문화원의 공식 견해이다.[5] 지금의 팽성읍. 역사적으로 평택은 쭉 충청도에 속했다. 1896년까지는 충청도 평택현, 1914년까지는 충청남도 평택군이었다.[6] 지금의 안중읍, 포승읍, 청북읍, 오성면, 현덕면, 고덕면 중 두릉천 이북 지역.[7] 이에 따라 충청 방언권이라는 설이 다수설이며, 평택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들도 충청 방언, 즉 충청남도 방언을 쓴다고 인정한다. 실제로 평택시 전 지역은 충청 방언 중 천안 방언권이다.[8] 읍 승격은 송탄이 평택보다 늦었으나, 시 승격은 오히려 송탄이 더 빨리 이루어졌다(...). 평택은 일반적인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송탄은 오산 공군기지의 배후 상권으로서 조금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9] 이 해에 같은 도의 인천시, 양주군 동두천읍, 시흥군 소하읍도 각각 인천직할시, 동두천시, 광명시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