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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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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제강점기 이전3.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까지4. 현대

1. 개요

김화군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다.

2. 일제강점기 이전

일제강점기 전까지는 김화(당시 독음은 금화), 금성 2개 고을이었다.[1] 금화는 한탄강(임진강), 금성은 북한강 유역으로 수계가 다르다. 두 강줄기는 무려 경기도 파주에 이르러서야 합쳐진다.

금화군은 본래 고구려 부여군(夫如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부평군(富平郡)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지금 이름인 금화로 바꾸었다.

금성군은 본래 고구려 모성군(母城郡), 혹은 야차홀(也次忽)이라고도 했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 익성군(益城郡)으로 고쳤고 후에 금성군으로 바꾸었다. 기성현, 통구현을 속현으로 갖고 있었는데 금성의 속현이었던 지역들은 나중에 북한 치하에서 거의 다 창도군으로 떨어져 나갔다.

1908년 금화군이 금성군에 흡수되었다.

3.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까지

1914년 금성군이 김화군으로 개칭된 이후 6.25 전쟁 전까지는 강원도 김화군에 속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금강산 전철이 지나갔는데 일제가 1940년대에 전쟁 물자 공출로 철도를 뜯어가면서 금강산선 구간이 창도면까지 단축되고, 6.25 전쟁으로 금강산선 운행은 전면 중단되었다. 1941년 김화면이 김화읍으로 승격되었다.

해방 이후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김화군은 북한 땅이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 1950년 10월 국군과 UN군이 38선을 돌파하여 김화를 탈환하였다. 그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했다가, 1951년 6월경 유엔군이 북한강을 건너 캔자스-와이오밍 선까지 올라오면서 공산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김화군 일대에 대거 주둔하면서 UN군의 북진을 저지하고자 했는데 이 때 김화군은 옆의 철원군, 평강군과 함께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렀다.

전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원래의 김화권은 대부분 대한민국 차지, 금성권은 남부 일부가 남한 차지고 중심부와 북부는 북한 차지가 되었다. 원래 남한이 차지한 금성권 남부 지역(금성지구)은 현재 남한이 차지하고 있는 금성권보다 더 넓었는데 철원부터 인제까지 삼팔선과 거의 평행하게 그어진 중부전선에서 금성지구의 전선이 유일하게 북한 방면으로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을 금성 돌출부라고 하는데 이 때의 전선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정하면 금성군 중심부는 북한 영토이긴하나 금성 돌출부로 인해 비무장지대에 갇혀버리는 신세가 될 뻔했으나 이승만의 정전방해 및 반공포로 석방에따른 보복으로 휴전 직전에 벌어진 금성 전투로 인해 UN군이 금성천 북안의 영토를 상실하면서 금성군 중심부는 가까스로 비무장지대 신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북한은 원래 군의 중심지인 김화읍이 남한으로 넘어가자 1952년 12월에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김화군 창도면·원북면·금성면·통구면·임남면(11개리)·근북면(5개리)·원동면(1개리), 그리고 양구군의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 해당하는 수입면(13개리)을 조합하여 창도군이라고 지어 북한의 김화군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가 휴전 이후인 1954년 창도군에서 김화군을 분리, 복군하여 중심지를 옛 금성군 중심부에 두게 되었다.

한편 남한이 수복한 김화군 김화읍, 서면, 근남면과 부분 수복한 근동면, 근북면, 원동면, 원남면, 임남면은 1954년 수복지구의 행정권 이양 이후 발효된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철원군에 통합하기로 했다가 국회 논의과정에서 김화군을 다시 설치하였다. 이 군에 편입되었다고 잘못 기술된 사내면은 분단 이후 소련군정에서 화천군으로 편입되고 유엔군 군정 아래에서 북포천군이 관할하다가 행정권 이양 이후 화천군으로 다시 편입되었다.[2]

4. 현대

김화군
金化郡 / Kimhwa County
국가 대한민국
폐지 당시 면적[3] 490.71㎢
광역시도 강원도
폐지 당시 행정구역[4] 1읍 7면[5]
시간대 UTC+9
대한민국은 중심지인 김화읍을 수복하긴 했으나 온전히 수복한 지역은 1읍 2면, 인구는 1만 5천여 명에 불과해 제대로 된 행정을 실시할 수가 없었고[6], 결국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을 개정한 수복지구와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라 1963년 1월 1일을 기해 서쪽의 철원군에 병합되어 대한민국이 실효지배하는 김화군은 (사실상) 폐지되었다.[7]

북한의 김화군은 대부분 조선시대 금성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8], 조선시대부터 김화군이었던 지역은 거의 대부분이 2001년평강군으로 넘어갔다가 행정개편이 취소되어 다시 김화군으로 복귀되었다.


[1] 참고로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이 금성군의 태수로 있다가 사망했다.[2] 사내면은 사실상 소련군정 시기 설정된 행정구역을 그대로 유지한 셈이다.[3] 1962년 기준[4] 1962년 기준[5] 김화읍, 근북면, 근동면, 원남면, 원동면, 임남면, 서면, 근남면이며, 이중 김화읍, 근남면, 서면이 온전히 수복됐다.[6] 때문에 김화군수를 철원군수가 겸직했으며, 군청 역시 설치되지 않고 철원군청에서 업무를 대행하였다. 김화읍에 있던 구 김화군청은 전쟁으로 박살.[7] 단, 이북 5도 체계 하에서는 김화군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명예군수와 미수복 면의 명예면장이 임명되고 있다.[8] 북한은 1954년에 금성면을 김화읍으로 개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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