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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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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22대 국왕
안장왕 | 安臧王
파일:토포리 대총.jpg
안장왕릉으로 추정되는 토포리 대총 전경.
<colbgcolor=#00000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498년 1월 이전[1]
고구려 평양성
사망
(음력)
531년 5월[2] (향년 33세 이상)
고구려 평양성
능묘 토포리 대총 (추정)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왕태자
498년 1월 ~ 519년 (21년)
고구려 제22대 국왕
519년 ~ 531년 5월[3]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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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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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안장왕의 연애 전쟁
3.1. 《삼국사기》에서의 언급3.2. 《조선상고사》의 해당 내용
4. 평가5. 《삼국사기》 기록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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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22대 태왕. 선대 조상들의 치적에 가려 과소평가받는 측면이 있지만 실제로는 고구려 전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명군이라 부를 만한 군주이다. 부왕백제에게 몇 번이나 쓰라린 패배를 겪으며 전세가 미묘해진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다시 우세를 회복했다. 그러나 안장왕 사후 즉위한 동생 안원왕 시기부터 왕위 계승을 두고, 내분이 벌어져 국력이 약해지고 중앙정부의 혼란이 가속화되었다.[6]

2. 생애

문자명왕 7년인 498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문자명왕이 승하한 519년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후 그는 가뭄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구휼하는 한편 증조부인 장수왕 때부터 유지되었던 중국 남북조에 대한 양면 외교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그 때문인지 북위으로부터 고구려 왕 작위를 책봉받기도 했다. 그러나 옛 후연의 수도였다가 북위의 평주가 된 용성을 습격해 약탈을 한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523년 8월 백제군과 패수 전투를 치름으로써 백제를 상대로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529년에는 혈성 전투, 오곡원 전투[7] 등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그 후에도 추가적인 공격을 감행[8], 전세를 어느 정도 뒤바꾸는데 성공했다.[9]

흔히 고구려의 전성기를 언급할 때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명왕 시기까지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말하면 이전 시기에는 못 미칠지언정 안장왕의 치세까지는 고구려의 전성기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백제를 공격해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10] 북위의 평주 용성[11]을 습격해 약탈하는 과정에서 요서 지역으로도 발을 뻗는 등 정복 전쟁을 계속 단행한 걸 근거로 단지 기록이 부족해 알기 힘든 것일 뿐 실제 고구려의 최대 강역은 문자명왕이 아닌 안장왕 때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물론 추측의 영역일 뿐이라 일각에서는 이 때가 아니라 훗날 고구려-수 전쟁을 치른 영양왕 시기를 고구려 최대의 강역으로 보는 추측도 있는 등 학설은 다양하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승하한 해가 531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서 틀렸다고 지적했던 《양서》에서는 526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왕들의 연혁을 이용하여 계산해보면 평균적으로는 장수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후사가 없었는지 나이 차가 제법 날 것으로 추정되는 동생 안원왕이 뒤를 이었다.
十三年 夏五月 王薨 號爲安藏王【是梁中大通三年 魏普泰元年也 梁書云 安藏王在位第八年 普通七年卒 誤也】
13년 여름 5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안장왕(安藏王)이라 하였다.【이때는 양나라의 중대통(中大通) 3년이요, 위나라의 보태(普泰) 원년이다. 《양서(梁書)》에는 ‘안장왕이 재위 8년, 보통(普通) 7년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안장왕-

(25년) 겨울 12월 병신(丙申) 초하루 경자(庚子) (덴노를) 아이노노미사사키(藍野陵)에 장사(葬事)지냈다.【어떤 책에는 덴노가 28년 갑인(甲寅)년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25년 신해(辛亥)년에 죽었다고 한 것은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취하여 쓴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 "신해년(辛亥年) 3월에 군대가 나아가서 안라(安羅)에 이르러 걸탁성(乞乇城)을 쌓았다. 이 달에 고려(高麗)는 그 왕 안(安)을 죽였다. 또한 일본의 덴노와 태자(太子), 황자(皇子)가 함께 죽었다고 들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말한다면 신해년(辛亥年)은 25년에 해당한다. 뒤에 교감(校勘)하는 자는 알라】.
《일본서기》 <케이타이 덴노> 25년(531년) 12월조.

그런데 《백제본기》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는 안장왕이 시해당한 것으로 나와 있다. 만약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안장왕이 시해당한 게 사실이라면 안원왕 때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혼란상이 쉽게 설명가능한 측면은 있다.[12] 다만 시해를 당한 배경과 이유에 대해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아서 정확한 내막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애초에 《양서》 등 다른 나라의 기록 뿐 아니라 《삼국사기》 등 한반도역사서에는 직접 언급은 커녕 간접 암시조차 일체 없는 내용이라[13] 무조건 진실이라 단정짓기도 어려운 실정이다.[14][15] 어쨌든 전성기를 유지시킨 안장왕의 치세를 끝으로 이후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부터 내려오던 명군의 맥이 끊기고, 을 제외하면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16]

3. 안장왕의 연애 전쟁

유명한 《춘향전》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그에게 어떤 일화가 있는지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1.삼국사기》에서의 언급

왕봉현(王逢縣)【개백(皆伯)이라고도 한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安臧王)을 맞던 곳이라 하여 왕봉으로 불렀다.】 (중략) 달을성현(達乙省縣)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놓고 안장왕을 맞던 곳이라 하여 후에 고봉(高烽)이라고 불렀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정사인 《삼국사기》 <지리지>에 한씨 미녀에 대한 언급이 지나가는 듯이 2번 나온다. 이 외에는 《삼국사기》에서 한씨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다. 달을성현(達乙省縣)은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구일산 지역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백제 아신왕이 시비를 걸자 대대적으로 백제를 침공하면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 지역을 함락시키면서 달을성현을 설치했다. 개백현(皆伯縣)은 백제가 경기도 고양시 능곡역 일대에 설치했던 지명이다. 이 지역은 장수왕이 하남위례성(풍납토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이면서 고구려 땅으로 편입되어 왕봉현(王逢縣)이 된다. 경기도 고양시는 광개토대왕~장수왕 시점에는 구일산 지역과 구능곡 지역으로 분단된 상태였다. 그러나 장수왕이 능곡 지역까지 함락했다가 백제 동성왕나제동맹으로 밀고 올라올 때 개백현(왕봉현)과 달을성현을 도로 빼앗았다. 그러다가 안장왕이 다시 물리치고 경기도 고양시 일산 지역(달을성현)을 수복했다.

3.2.조선상고사》의 해당 내용

근대에 쓰여진 《조선상고사》에서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단재 신채호는 이 내용을 《해상잡록》(海上雜錄)이라는 문헌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해상잡록》은 조선 숙종 시기 쓰여진 야사집 《서곽잡록》(西廓雜錄)에도 인용되는 책인데 다만 현재는 실전되었다.
고구려 안장왕이 태자가 되었을 때에 상인 행장을 하고 개백현(皆伯縣, 지금의 고양시)으로 염탐을 갔다. 당시 그 지방의 장자(長子)인 한(韓)씨의 딸 주(珠)는 절세의 미인이었다. 안장왕이 백제 정찰관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한씨의 집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한주를 보고는 놀라고 기뻐하여, 몰래 서로 정을 통하고 부부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 후 은밀히 한주에게,"나는 고구려의 태자이니, 귀국하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이 땅을 취하고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귀국하였다. 그런데 개백의 태수가 한주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그녀를 첩실로 맞이하려 했으나, 한주는 마음에 둔 남자가 있다면서 죽기를 결심하고 거절하였다. 태수는 한주를 옥에 가두어 사형시키겠다고 위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감언으로 꾀려고 했다. 안장왕은 왕위를 이어받은 후 개백을 점령하고 한주를 구하는 자에게 천금의 금과 만호후(萬戶侯)의 직위를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자 장군 을밀선인(乙密仙人)이 안장왕의 동생인 안학공주(安鶴公主)를 사랑하고 있다고 밝히며 그녀를 달라고 하였고, 안장왕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서 을밀에게 수군 5,000명을 내주어 개백을 치게 한다. 이후 개백에 다다른 을밀은 정예 20명을 뽑아서 성 안으로 들어갔고, 마침 개백 태수가 잔치를 벌이며 한주를 꾀려다가 실패하고, 그녀를 죽이려는 찰나 을밀과 정예병들은 잔치에 난입해서 태수와 빈객들을 죽이고 고구려병 10만이 나타났다고 외쳤다. 성내는 크게 동요했고, 안장왕이 대군을 몰고 남진하니 한강 일대의 각 성읍들이 항복했다.
조선상고사

결국 이렇게 승리한 안장왕이 핍박 받던 한주를 구해주고 그 약속을 지켜낸다는 내용. 이 내용과 《춘향전》을 비교하기 위해 이몽룡을 안장왕, 성춘향백제 한씨 미녀로 바꾸면 《춘향전》과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지는 안장왕의 러브 스토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2016년 1월 31일 방송에서 안장왕의 연애 전쟁과 관련한 내용의 에피소드가 방영되기도 했다.[17]

위의 기록은 을밀 항목과 함께 보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된다.

한편, 신채호는 포은 정몽주가 불렀던 유명한 '<단심가>' 역시 사실 옥중에서 한주가 지은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재로선 가설 정도로 보고 있다.

백제 태수의 이름이 비후(匕侯)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출전이 확실하지 않다.

현재 고양시에서도 이 이야기를 홍보하고 있으며,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인 한주의 러브스토리가 적힌 표지판도 간간히 보이기도 한다.

4. 평가

전성기를 보낸 다른 군주들에 비해 비교적 기록이 적게 남은 임금이지만, 그 행적만을 보더라도 고구려 전성기의 끝을 장식한 명군이라 부를 만하다. 기록이 적어 그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당대에 고구려는 문자명왕 말기부터 시작된 국력의 쇠퇴가 외부로 드러나고 있었다.

문자명왕 말엽부터 무령왕의 웅진 백제와 여러 번 전투를 벌였지만 승리를 거둔 전투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18], 한강 유역을 빼앗겼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고구려-백제 전선이 임진강-예성강 일대로 밀렸다'고 보는 견해와 차령산맥에서 안성천 일대로 밀렸다고 보는 견해로 나뉜다.''[19]는 사료들도 있을만큼 공세에서 수세로 변화되어 있었던, 어떻게 보면 고구려 입장에서 충분히 위기라고 느낄만한 상황이었다. 또한 주변국의 통제력 역시 잃어버리면서 북방 영토까지 줄어들던 대외적 위기까지 가세한 건 덤. 이 증거로, 중국양나라가 서기 520년 고구려 안장왕을 "영동장군", 백제 무령왕을 "영동대장군"으로 책봉하여 백제왕을 고구려왕보다 더 높은 관직에 제수한 것이 있다. 중국에서 백제왕을 고구려왕보다 높은 등급으로 친 사례는 안장왕-무령왕 사례가 유일하다. 그 정도로 안장왕 재위 초기까지 고구려는 백제의 파상공세에 점점 밀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장왕은 가뭄으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며 민생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국력을 재정비한 후 백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연거푸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들을 다시 한강 이남 지역으로 몰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또 옛 후연의 수도이기도 했던 북위의 용성을 공격해 약탈하는 등 주변국과의 정세를 공세로 전환시켜 전성기의 국력을 대부분 지켜내는 데도 성공했다. 그리고 안정적인 남북조간 양팔 외교를 통해 고구려의 대외적 위상까지 유지시킨 건 덤. 이렇게 안장왕이 회복시킨 국력은 안원왕 말엽까지 이어졌다.

다만 이 시기에 고구려의 중앙 조정이 점차 분열되면서 왕권이 조금씩이나마 흔들리고 있던 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안장왕이 시해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 또한 이 의문에 신빙성을 더하는 부분. 그러나 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시기를 다룬 한중 역사서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일본서기》만의 내용인데다 본격적인 쇠퇴기의 시작은 안장왕이 승하한 지 몇 십년 후인 안원왕 말엽부터인지라 확실하다 단정짓기도 무리라는 것이 크나큰 약점이다.

어쨌든 이 《일본서기》 기록을 따르면 안장왕의 승하 이후 집권한 안원왕 말기에 들어 고구려는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나 그야말로 나라가 두 동강나는 지경으로 전락하게 된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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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안장왕 본기>
一年 안장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양에 조공하다
二年春二月 양이 보낸 사신이 북위 군대에 붙잡히다
二年 북위가 왕을 책봉하다
二年秋九月 양에 조공하다
三年夏四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三年夏五月 가난한 자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다
五年 가뭄이 들다
五年秋八月 백제를 침략하다
五年冬十月 기근이 들다
五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八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九年冬十一月 양에 조공하다
十一年春三月 사냥을 하다
十一年冬十月 오곡성 전투에서 백제에 승리하다
十三年夏五月 안장왕이 죽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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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 하백
 
 
해모수
 
유화
 
 
 
부여 왕실 1대
동명성왕
 
 
 
2대
유리명왕
비류 온조
백제 왕실
 
 
 
 
 
 
고도절 고해명 왕녀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고여진
 
 
 
고호동 5대
모본왕
고재사
 
 
고익 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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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
고인고
 
 
 
 
 
 
고추안 9대
고국천왕
고발기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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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예물 고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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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영류왕
평강공주 대양왕
 
 
고환권 28대
보장왕
 
 
 
 
 
고복남 고임무 고덕남 고덕무 공주
 
부흥
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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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98년 1월에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안장왕은 498년 1월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 증조할아버지 장수왕의 연혁을 보면 아버지 문자명왕도 거의 80세 전후까지 장수한 것으로 추정되기에, 안장왕 역시 거의 60이 다 되어서 왕위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점을 감안하면 사망 당시는 7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증조할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단 양호하다. 물론 늦둥이면 이 계산도 틀리긴 하지만 승하 당시 최소 60대 초~중반이었을 것이다.[3]일본서기》에 의하면 3월. 《양서》와 《남사》에는 526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 <한씨 미녀 설화>가 사실일 경우 가정.[5]일본서기》 기록.[6] 허나 이는 안원왕 말기이며, 그 이전 문자명왕의 책임이 크다.[7] 다만 오곡원의 위치 등으로 인해 실제 여부를 의심받고 있다. 하지만 문자명왕 때 백제가 치양(지금의 황해도 배천)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뉘앙스의 기록이 있어 진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8] <한씨 미녀 설화>에 따르면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인 달을성현과 개백현까지 안장왕이 공격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안장왕의 추가적인 정벌을 암시하는 기록인 셈.[9] 기록에는 백제 동성왕 때부터 한강 유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심지어 안장왕과 <한씨 미녀 설화>에서도 그대로 나올 정도. 이에 학계에서는 동성왕~무령왕 시기 웅진백제에 한강 유역을 빼앗겼다가 전열을 재정비한 때인 안장왕 시기에 다시 고구려가 되찾았다는 견해가 꽤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10] 당시 그의 상대는 후에 백제의 중흥을 이끌게 되는 성왕이었다.[11] 과거 후연의 수도였다. 용성은 이미 북연 멸망시 장수왕이 1번 털러가기도 했다.[12] 백제에서 장수했던 위덕왕도 정황과 여러 사료들로 인해 시해당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13] 시해설이 도는 임금들 중 백제의 아신왕이나 비유왕 같은 경우에도 시해의 징조인 듯한 뉘앙스의 기록이 죽기 전에 나와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아신왕, 비유왕 항목 참조.[14] 게다가 고구려의 본격적인 혼란 및 쇠락이 시작된 것이 후대의 안원왕 시기 정확히는 말엽부터인지라 더욱 사실이라고 단정짓기가 어렵다. 실제로 안장왕 사후 보위에 오른 안원왕은 기록 상으로만 보면 왕위 계승 분쟁이 터지기 전까지 나라를 제법 무난히 다스렸다.[15] 다만 학계에서는 안원왕 말엽 벌어진 추군 세력과 세군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 대해선 거의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안장왕 시해기록과는 달리 안원왕 말엽의 권력 다툼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할 뿐더라, 마침 《삼국사기》의 <거칠부 열전>에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난 고구려의 쇠퇴 정황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기도 한다.[16] 물론 고구려 후반기의 경우 중국에서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등장한 통일 중화제국의 대대적이고 연속적인 고구려 원정이 감행되면서 중흥을 하고 싶어도 기본 국력으로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과제가 쏟아졌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영양왕과 영류왕 형제의 경우 충분히 명군의 반열에 들 만큼 전쟁영웅으로서 활약을 했으나 외부로는 중국의 공격, 내부로는 연개소문의 정변 등의 이슈가 연이어 터지며 한반도의 상황에는 크게 신경을 쓰기도 힘들 정도였다.[17] 과거 고구려 관련 만화를 많이 출판하던 2000년대에도 이 이야기가 작가들에게 꽤 마음에 들었는지 안장왕-한주&을밀-안학공주 간의 능글능글한 러브스토리가 나온다. 예를 들어 위 이야기의 후반부로 안장왕과 한주가 드디어 결혼해 왕궁을 걸어다니며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왕궁 구석진 곳에서 을밀과 안학공주가 징그러울 정도로 러브 분위기를 풍기자 "무엄하도다! 너무 대놓고 하는 거 아니냐?!"라고 안장왕이 꾸짖자 을밀이 "마마! 소신, 왕비마마의 목숨을 구해주신 을밀선인이옵니다! 눈감아 주시옵소서!"라며 농담어린 결말로 끝내버리는 전개가 나오기도 한다.[18] 선대 동성왕과 달리 무령왕은 즉위 이후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며 고구려를 몰아붙였다. 나제동맹을 적절히 활용해 연전연승을 거둔 건 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공격은 고구려가 하고 있고 백제와 신라는 수비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고구려 입장에서는 충분히 위기감을 느낄만한 상황이었다.[19] 확실한 건 서울특별시 일대를 넘어서 고양시임진강을 앞둔(임진강은 원래 교하동 일대로 흘렀다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로가 현재처럼 문산읍으로 가게 바뀌었다.) 파주시 운정신도시 영역까지는 이미 동성왕 때 전부 회복하여 백제 태수를 통한 직할 통치가 이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