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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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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49대 국왕
헌강왕 | 憲康王
파일:헌강대왕릉.jpg
헌강왕릉 전경.
출생
(음력)
860년 9월[1] ~ 865년 4월[2] 추정
신라 금성
사망 886년 8월 12일[A] (향년 21~26세 추정)
신라 금성
능묘 헌강왕릉(憲康王陵)
재위기간 신라 왕태자
865년 음력 4월 ~ 875년 8월 16일[4] (10년)
신라 제49대 국왕
875년 음력 7월 ~ 886년 8월 12일[A] (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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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晸)
부모 부왕 경문왕
모후 문의왕후
형제자매 남동생 김황
여동생 김만
황후 의명부인
자녀 서자 김요
왕녀 의성왕후[6], 계아태후[7]
종교 불교
시호 헌강대왕(憲康大王)[8]
골품 진골(眞骨)[9] }}}}}}}}}

1. 개요2. 생애3. 주요 업적4. 가계5. 기타6. 《삼국사기》 기록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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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49대 국왕.

휘는 정(晸). 경문왕의 장자, 정강왕의 형, 진성여왕의 큰오빠로 삼남매 왕위 계승의 첫 번째 인물이기도 하다. 신라 하대에서 드문 적장자 왕이다. 국학불교를 통해 후삼국시대에 접어들기 직전 불꽃을 태운 군주로써 신라의 안정을 이룩하려 했다.

자녀로는 서자인 아들이 1명 있어 훗날 효공왕(제52대)이 되었고, 딸은 둘이 있는데 신덕왕(제53대)의 왕비 의성왕후(義成王后)와 경순왕(제56대)의 어머니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2. 생애

헌안왕(제47대)의 딸이자 경문왕의 왕비인 문의왕후 소생이다. 당나라에서 경문왕을 책봉할 때 원자의 존재를 알고 원자에게 비단 40필, 옷 1벌, 은그릇 1개를 내린 것이 865년 4월인데 태자 책봉은 약 1~2세의 나이에 시행되므로 헌강왕 김정은 864년경에 출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한 번 눈으로 보면 모두 외웠다고 한다.

즉위 직후 김위홍을 상대등으로, 신덕왕의 아버지인 박예겸을 시중으로 삼았다. 박예겸의 박씨 족단이 정치적 힘이 강해지는 전조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상대등으로 임명된 김위홍은 진성여왕기 실권을 잡아 국정을 이끌게 된다.

다음해에는 신라의 왕실 불교 사찰인 황룡사를 방문해 백고좌회(百高座會)에 참석했다. 백고좌회는 불교 경전인 인왕경을 강독하는 법회이지만, 본래 왕실과 상당히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본래 중대에 백고좌회는 전쟁으로 전사한 사졸들을 위로해 국론을 통합하거나 왕이 병에 걸렸을 때 이를 치유하고자 개최되었지만, 중대 이후로는 왕의 왕권강화에 이용된다. 그러나 백고좌회는 혜공왕 대에 왕권강화 차원에서 열은 것 이후로는 개최되지 못했는데, 헌강왕이 정말 오랜만에 개최한 것이다. 헌강왕은 재위 중 백고좌회를 무려 두번이나 열었으며, 또 흥덕왕대부터 이어진 선종 사찰 및 사원 포섭 정책도 지속하여 국가 안의 여러 유명한 승려들을 초빙하거나 교류하고 또 사찰의 탑 조성을 지원해주는 등 기성 교종 불교계를 견제하고 선종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식의 불교계 끌어들이기 정책은 후대 왕인 정강왕이나 진성여왕, 그리고 그 이후로도 지속되어 후삼국시대 신라가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이후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뒤 책봉받았으며, 직후 견당사 파견을 준비하나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포기한다. 이때 일본 사신이 와 조원전에서 접견했다. 학계에서는 그 목적을 신라구의 준동과 신라의 일본 침략 우려가 팽패했던 일본이 사실관계를 알아보려 보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헌강왕이 일본 사신을 정전인 조원전에서 접견했다는 것 역시 일본의 우려를 덜어주고 대내, 대외적 어려움을 불식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채미하, 2018) 이후 일본과의 관계도 나름 활발해진다.

이듬해에 국학에 행차했다. 밑에서 나올 태평성대를 논하는 기사, 삼랑사에 행차해 문신들에 시를 짓게 한 기사와 함께 헌강왕이 유교를 진흥하고 자신을 이상적인 제왕상에 투영하려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배재훈, 2020) 특히 원성왕 이후 신라 국왕들은 상대적으로 한미한 집안의 사람들을 국학에서 공부시킨 뒤 당에 유학을 보낸 뒤 관료로 출사시킴으로서 자신의 친위세력을 만드는 방식을 자주 활용했는데, 헌강왕 역시 같은 방식으로 경문왕계의 친위세력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헌강왕은 귀국한 최치원에게 경연과 외교문서 작성을 맡기는 등 상당히 중용한 바 있다.

또한 헌강왕은 자신이 직접 심묘사(深妙寺) 비문을 짓고 또 신료들과 함께 시나 문장을 교류할 정도로 문예적 자질이 높은 군주였고, 따라서 당대의 사서 및 금석문에는 이런 식으로 헌강왕이 문재를 가진 관료들과 함께 연회나 사찰 방문 등의 경우에 관료들의 문재를 평가하여 뛰어난 이들을 중용하는 식의 문관정치가 형성된다. 이러한 정치방식은 명목상으로는 단지 시 잘짓는 사람을 중용하는 측근정치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유교적 소양을 풍부하게 갖춘 신진 세력을 발굴하려는 의도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재위 중 언제인가 헌강왕은 한화 정책을 다시금 추진하여, 왕명을 문서로 작성하는 역할을 맡은 한림대(翰林臺)라는 관청의 직제를 개편해 한림랑을 한림감사와 한림학사로 쪼갰고, 또 서시원(瑞書院)을 새로 설치한다. '랑'을 감사와 학사로 쪼갠 것은 최치원의 사례로 보아 서시원에도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서시원이라는 관청을 새로 설치한 것에 대해서는 홍문관이나 집현전처럼 국왕의 측근세력으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또 이러한 문관직들 대부분이 국학에 박사직을 맡거나 다른 외교업무도 겸임한 경우가 많았으며, 또 헌강왕 이후부터는 이들이 심지어 병부의 관직을 겸임한 경우까지 보인다. 이를 통해 헌강왕이 철저한 측근정치를 통한 중앙집권화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동궁에 부속된 숭문대를 숭문관으로 격상하여 기존의 동궁 교수 업무에서 문서 찬술 업무까지 맡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직학사'라는 학사보다 낮은 단계의 직위를 신설하였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은 879년 6월 진골귀족인 일길찬 신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한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신라의 여력이 꽤 멀정했음을 알수있다. 이 사건 이후 헌강왕은 활쏘기를 구경하거나 혈성 앞에서 사냥을 하는 등 무예 방면에도 관심을 보였다.

한편 이 사이 <처용가>가 만들어졌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동쪽에서 모르는 네 명이 만나서 춤을 췄는데 산과 호수의 정령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전한다. <처용 전설>의 원형으로 보여지지만 동쪽이라는 말을 통해 울산 지역에서 무역을 하던 아라비아 상인으로 판단해 처용 서역인설도 존재한다. 이는 국제교역이 활발했던 통일신라시대의 모습에서 나온 설이다. 임용한의 대중 역사서 《한국고대전쟁사》에서는 이런 설들을 종합시켜 헌강왕이 아라비아 상인 세력과 교역 협정을 맺으면서 돈이 들어와 수도 서라벌 일대의 경제 상황이 일시적으로 회복된 것이 헌강왕 치세의 짧은 번영을 설명한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다만 아라비아 상인과 교역 협정을 맺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료가 없는 게 문제.

880년 박예겸이 시중에서 물러나고 민공이 시중이 된다. 바로 밑에 나오는 그 사람이다.

삼국사기》 <헌강왕 본기> 에 따르면,
어느날 왕은 월상루에 올라가 민가를 바라보면서 시중 민공에게 묻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연기가 나지 않는)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민공은 "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임금의 어진 덕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왕은 이에 즐거워하며 "이는 여러 신하들의 도움 때문이지, 짐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삼국사기》에 나온 부분에 관해서는 여러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실제로 민간이 사치를 부렸다는 설도 있고[10] 보편적인 해석인 신라 귀족들의 사치를 설명하는 구절이라는 설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숯의 사용을 통한 공기 청정을 고려한 조상들의 지혜라거나 지나친 숯을 만들기 위한 벌목에 따른 산림 파괴가 신라 멸망의 원인이라는 추정도 있다. 이 시기에 신라는 나름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추측된다. 위의 숯이나 기와에 대한 비슷한 묘사 기록이 《삼국유사》에도 나오는데 서라벌의 영화로움을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는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연해 있었다. 또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신라 수도인 서라벌 일대에만 한정되었던 것 아니냐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헌강왕이 승하하고 불과 5년 후인 진성여왕(제51대) 시기 지방에서 세금이 안 걷히기 시작해서 조정이 곤궁해졌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간단히 한 줄로 진압했다고 넘어가지만 재위 11년 기간 중 일길찬 신홍[11] 등의 반란도 있었다. 때문에 헌강왕 시기의 저 기록은 역사적 기록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필요하다는 예시로도 종종 쓰인다. 태평성대 직후 난세라는 점에서 보자면 당현종개원지치와도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다.

882년 다시 일본에서 사신을 보냈다. 이번 일본 사신은 황소의 난으로 인해 당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게 된 일본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 하려는 목적으로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를 계기로 헌강왕은 882년, 883년에 당에 사신을 보냈으며 그 이듬해인 884년과 885년에는 일본으로도 사신을 파견한다. 이는 헌강왕이 확실한 왕위계승권자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후계에 대한 불안감과 연관 있는 것으로 보이며, 혹시나 또다른 계승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조치로 보인다.(채미하, 2018)

헌강왕 재위기인 877년 신라 말 난세에 종지부를 찍는 인물인 왕건송악에서 태어났고, 마찬가지로 헌강왕보다 몇 살 아래인 신라 혈통 호족 자제 견훤이 지금으로 치면 고1 정도 나이에 신라 중앙군 병사로서 서라벌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헌강왕은 같은 장소에 있었던 자신 휘하의 풋풋한 말단 청소년 병사 견훤이 약 20년 후 신라 불구대천의 원수 백제를 부활시키고, 정확히 50년 후에는 서라벌을 초토화시켜 신라의 정상적인 수명을 끝장내면서 한 외손자는 죽이고 다른 외손자는 원치 않던 왕위에 강제로 끌어올릴 걸 예상하고 있었을까?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 견훤, 왕건이 서라벌에서 만났다는 개연성 없진 않은 창작을 했었는데, 실은 헌강왕과 견훤의 있었을법한 만남이 더 극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견훤은 백제 왕이 된 후에도 꽤 오랫동안 신라 대장군의 꿈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었던지라 훗날 스스로가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885년 당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최치원이 헌강왕 치세에 귀국해서 자신이 당나라에서 썼던 《계원필경》을 비롯한 여러 책을 헌강왕에게 바쳤다.

886년 봄에는 지금의 강원도 지역인 북진(北鎭)에서 보고하기를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
고 말하면서 나무 조각을 가져다 바쳤다. 거기에는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
는 열 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북한 안변군 지역에 살던 여진족 계통 부락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라뿐 아니라 북방의 발해 역시 이쯤 되면 내분 및 여러 요인으로 쇠락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에 이 때쯤 한반도 북부 함경도 지방은 발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사실상 말갈-여진 계통의 독립 상태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886년 음력 6월부터 병이 들어 몸이 건강하지 못하자 전국의 죄수들을 석방하고,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기도 했으나 병이 심했던지 886년 음력 7월 5일 승하했다. 아버지 경문왕과 영화부인 김씨가 860년에 혼인했고 영화부인 김씨가 870년에 사망한 점 등으로 보아 많아야 20대에 요절한 것이 명백해 보인다. 아들로 훗날 효공왕에 오르는 김요가 있었지만 서자라 일단 이 때는 왕위 계승에서 배제됐으며 동생 김황이 즉위했으니 정강왕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55에 있는 능을 헌강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경주시 시내버스가 많이 다니고 남산(경주)을 등산할 때도 기점으로 많이 가는 통일전에서 300m~400m 정도 거리에 있어서 찾아가려고 하면 가기는 쉬운데 가는 길에 주차장을 거쳐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거쳐야 한다. 300m 거리에 동생이자 다음 왕인 정강왕릉도 있으며 양식이나 크기는 거의 똑같은데 정강왕릉이 비교적 초라한 편이다. 1993년 왕릉 내부가 조사됐다.

3. 주요 업적

김헌창의 난과 장보고의 난 등을 거치면서 신라 왕실은 서라벌이 지방 반란 세력에게 위태로울 수 있다는 현실을 자각했고, 그 결과 각 5소경의 군사적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서라벌 주변에 군사적 성격이 있는 부(府)들을 설치하여 만약의 경우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 진압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최소한 진흥왕 이전 신라 영역이라도 지키고 서라벌도 방위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 시작했다. 이 부(府)들의 설치가 완료된 것이 바로 이 헌강왕 때다. 이 부들은 차례차례 고려후백제에게 넘어가거나 저항하다 병탄되었지만, 그래도 무려 약 30년 동안은 신라를 위해 최후까지 기능했다.[12]

또한 6두품들에게도 자색 공복을 내려주며, 진골만 역임할 수 있었던 관직을 주기 시작한 게 헌강왕 때부터이다. 사실 헌강왕 이후에는 6두품과 진골 사이의 승진 차별은 거의 허물어졌다고 볼 수 있겠으나, 같은 조건이면 역시 진골한테 밀리는 건 당연했으니, 앞서 부의 설치 완료와 마찬가지로 점점 다가오는 종말을 약간 늦추는 정도의 효과 밖엔 없었다. 굳이 말하면 그 정도 해낸 것도 나름 큰 업적이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한편 헌강왕 때는 유교,불교적 진흥도 상당히 이루어졌다. 헌강왕은 경문왕계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최치원 등 국학 출신이나 당 유학파 출신 관료들을 상당히 중용했으며 그들을 측근으로 삼았다. 또 이에 수반되는 여러 유교적 행위들을 통해[13] 유교적 기반이 튼튼한 나라를 구성하고자 했다. 한편 법고좌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주요 사찰들의 탑 조성을 지원함으로서 불교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적 정책들은 이후 정강왕, 진성여왕 뿐 아니라 신덕왕계 박씨 임금들도 열심히 써먹어 후삼국시대 신라의 버팀목이 돼 주었다.

4. 가계

5. 기타

6.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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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권 「백제 2권 (百濟 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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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권 「백제 3권 (百濟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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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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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헌강왕 본기>
一年秋七月 헌강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위홍을 상대등에, 예겸을 시중으로 삼고 죄수들을 사면하다
二年春二月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치하다
二年秋七月 당에 방물을 바치다
三年春一月 태조가 송악군에서 태어나다
四年夏四月 당 희종이 헌강왕을 책봉하다
四年秋七月 황소의 난으로 견당사 파견을 중지하다
四年秋八月 일본국 사신이 오다
五年春二月 국학에 행차하다
五年春三月 왕이 순행하다
五年夏六月 일길찬 신홍이 반역하다 목이 베이다
五年冬十月 왕이 준례문에서 활쏘는 것을 구경하다
五年冬十一月 왕이 혈성의 들에서 사냥하다
六年春二月 태백성이 달을 침범하다
六年 이찬 민공을 시중으로 삼다
六年秋八月 웅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올리다
六年秋九月九日 월상루에서 왕과 시중 민공이 태평성세를 논하다
七年春三月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다
八年夏四月 일본국 사신이 방물을 진상하다
八年冬十二月 고미현의 여자가 남자 아이 셋을 낳다
九年春二月 삼랑사에 행차하다
十一年春二月 호랑이가 궁궐에 들어오다
十一年春三月 최치원이 당에서 돌아오다
十一年冬十月一日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
十一年 당에 사신을 보내 황소의 난을 진압한 것을 축하하다
十二年 북진에서 적국인이 걸어 놓고 간 나무 조각을 바치다
十二年夏六月 왕이 병이 들자 죄수를 사면하다
十二年秋七月五日 헌강왕이 죽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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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 경문왕문의왕후의 혼인 시점.[2] 당나라에서 경문왕의 왕태자에게 하사품을 준 시점.[A] 음력 7월 5일, 율리우스력 8월 8일[4] 음력 7월 8일, 율리우스력 8월 12일[A] [6] 신덕왕(제53대)의 아내.[7] 경순왕(제56대)의 어머니.[8] 경주 숭복사비 기록[9] 경문왕계 하대 성골설에 따르면 하대 성골(聖骨)이다.[10] 이전 시점이지만 흥덕왕(제42대) 시절에 골품에 따른 복식 구분을 시도한 기록을 보면 '평민 여성'은 '비단 치마 이하를 입어야 한다'고 못을 박아 놓았다. 비단이 예나 지금이나 만만한 소재는 아님을 감안하면 이 조치 이전에는 더 좋은 것을 입는 경우도 있었던 듯 하다.[11] 신덕왕(제53대)의 외할아버지 박순홍과 동일인이 아닌가 추정된다.[12] 다만 얄궂게도, 헌강왕 당시 완료한 이 부들을 훗날 최종적으로 파괴해서 끝장내게 되는 자는, 다름아닌 헌강왕 자신이 신라 중앙군 말단병사로 기용한 견훤이었다. 견훤이 이렇게 힘들여 수고하여 신라의 마지막 방어선까지 죄다 무력화하지 않았다면, 그때도 그렇게 왕건이 신라 왕실을 상대로 당당한 갑질을 시전할 수 있었을진 영 미지수다. 헌강왕과 견훤의 얄궂은 인연의 또 다른 단면이라 하겠다.[13]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하거나, 일부러 태평성대의 옛 제왕처럼 행동하거나[14] 조선 유학자들은 처용무 일화를 두고 처용의 춤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풍자한 것이나 신라 지배층들은 단순히 처용의 춤이 아름답다고만 여기고 그 안에 담긴 뜻을 몰랐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