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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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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46대 국왕
문성왕 | 文聖王
파일:문성왕릉.jpg
문성왕릉 전경.
출생
(음력)
810년대 전후 추정
신라 금성
사망
(음력)
857년 9월[1] (향년 30~40대)
신라 금성
능묘 공작지(孔雀趾)
재위기간
(음력)
신라 왕태자
839년 1월 ~ 839년 7월 23일 (6개월)
신라 제46대 국왕
839년 7월 ~ 857년 9월 (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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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김씨
경응(慶應)
부모 부왕 신무왕
모후 정계부인[2][3]
왕후 왕후 박씨, 왕후 김씨[4]
태자 태자(847 ~ 852)[5]
공주 김인경의 어머니
종교 불교
시호 문성대왕(文聖大王)[6]
별호 국왕(國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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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께선 영원히 사람[人]과 하늘[天]의 주(主)가 되소서.
업보가 다하시는 날엔,
곡식을 나눠오신 그 명성으로,
무상의 지위[无上之位]에 오르소서.
國王永主人天.
會其報盡之日,
捨粟散之名,
齊於无上之位.[7]
탑을 세운 문성왕에게 바치는 기도. <창림사무구정탑지>에서 발췌.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기타5. 《삼국사기》 기록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46대 군주.

제45대 신무왕 김우징의 아들로 신라 하대에서 애장왕(제40대)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적장자 군주이며, 김제륭, 김명, 장보고로 이어진 반란의 시대를 끊어내고, 통일신라의 수명을 늘린 수성 군주이다.

2. 생애

839년 아버지 신무왕이 재위 반년만에 승하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재위 기간 내내 유독 반란이 많이 일어났다. 물론 문성왕 즉위 전, 3대에 걸쳐 반란이 꾸준히 일어났던 것을 감안해보면 오히려 이런 반란의 연쇄를 자신의 대에 끊어낸 것은 문성왕의 업적이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841년 일길찬 홍필(弘弼)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문성왕 치세 반란의 시작이다. 홍필은 반란 준비를 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바다의 섬으로 도망가 잠적했고, 결국 잡지 못했다고 한다.

844년 8월 서해안 방비 거점으로 강화도에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했는데 삼국시대의 대요새 관미성의 후신격으로 근현대까지 천여 년 이상 방어시설로 활용되었다.

846년[8] 청해진 대사이자 진해장군인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9] 이에 염장(閻長)으로 하여금 장보고를 암살하도록 하여 저지시켰으나 이때는 근거지인 청해진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는데, 이후 상황을 보면 청해진이 강대한 사병을 보유한 군벌화된 세력이었기에 당장은 해산시키지 못했다가 맞을 것이다. 일본 측 기록을 참고하면 장보고가 암살당하자 청해진에 소속되어 있었던 장보고 측 인물들이 혼란에 빠진 정황이 나타나며, 장보고 측이 주도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기보다는 신라 중앙에서 먼저 선수를 쳐서 진압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847년 이찬 김양순(金良順)과 파진찬 흥종(興宗)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진압하고 그들의 목을 베었다. 일본 측 기록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847년 일본 승려 엔닌당나라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는 과정에서 신라를 거치며, 여행기에 당시 정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4월 일본 대마도 사람 6명이 낚시를 하다 표류해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의 거차군도로 추정되는 황모도(黃茅嶋)에 와서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무주로 옮겨져 감금되고, 본국으로 송환 대기 중이라 했으며 9월 당나라의 사신단 5백여 명이 수도 서라벌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신라 서남부 다도해의 여러 섬에 왕실과 귀족들이 운영하는 말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입당구법순례행기[10]

849년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대아찬 흔린(昕鄰)도 죄에 연루됐다고 전하는데 김식과 대흔은 처형하고 흔린은 죄가 가벼웠는지 죽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같은 《삼국사기》조차 <김양 열전>에서는 김흔이 달벌대전 패전 이후 산 속에서 은거하던 중 아무 일도 없이 죽었다고 나와 있어 <본기>와는 차이를 보이는데[11] 뉘앙스상 숙청을 강하게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851년 청해진(淸海鎭)에 토벌군을 보내 청해진을 완전히 없앴으며 이후 청해진에 살던 주민들은 벽골군[12]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각종 반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하면서 결국 왕권을 다시금 안정시키는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문성왕 덕분에 이후 진성여왕(제51대) 시기까지 신라는 50여 년 동안 조금이나마 안정적이 되었다.

852년, 문성왕의 태자가 책봉된 지 5년 만에 폐위되었다. 《삼국사기》 본문에는 왕태자졸()하였다고 써져 있는데, 정말로 이때 태자가 죽었다면 별도로 시호가 추증되지 않았음이 이상하다. 卒에 '죽다'라는 뜻만이 아니라 '마치다'라는 뜻도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태자가 이때 사망한 게 아니라 태자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보는 추측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흥덕왕(제42대) 시기 태자였던 김충공도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제41대) 시기인 821년 4월 졸하였다고 적혔지만 이듬해 822년 3월에 각간으로서 김헌창의 난 진압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또한 분명히 문성왕의 남계 후손은 단절되지 않고, 김인경(金仁慶)[13]을 거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으로 이어진다.[14]

857년 9월 병이 들어 유언과 같은 조서를 남기고 7일 후 승하해 시호를 '문성'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라는 땅에 장사지냈다. 문성왕은 열조 원성왕계의 형제 상속 관습 때문인지 결국 죽을 때 유언으로 아들이 아니라 숙부인 김의정(金誼靖)을 후계자로 지정했다. 아들이 아니라 숙부에게 물려주었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아무튼 왕위는 문성왕계가 아닌 숙부에게 넘어갔다.[15]

3. 가족 관계

4. 기타

840년에는 당나라에서 공부는 하는데 빈공과(賓貢科)에 합격은 못한 장수생 105명을 다시 데려왔는데, 문성왕 당시는 당나라 국학에 10년간 유학간 국비 유학생만 수백명에 사비 유학생도 더 있었던 정도로 당나라와의 교류가 제법 이루어진 시대였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장보고와 청해진을 쓸어버림으로써 결정적으로 신라의 몰락을 가져온 임금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청해진이 없어지면서 장보고가 한때 쓸어버렸던 해적들도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고,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청해진이 주도하던 일본 간 무역도 삐걱대는 등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사실 하대 신라는 청해진을 없앤다 해도 이미 국가 막장 테크가 슬슬 진행되고 있었기에 이걸 몰락의 전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사실 무리다.* 혼사야 원칙적으로 문성왕이 먼저 빌미를 제공하긴 했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장보고는 허무하게 암살돼서 그렇지 궁예, 견훤보다도 훨씬 강력한 호족이었다.[18] 장보고에 대한 유의미한 통제력도 그를 등용한 흥덕왕의 붕어로 인해 진작에 말아먹었고, 이후 장보고는 국가의 지존까지 교체시킨 군벌의 경지까지 이른데다 제해권에서 나온 파워까지 고려하면 신라 중앙 정부에 상당한 위협일 수 밖에 없었다. 골품제가 아니더라도 너무 강해진 장보고에게 왕실과의 혼사라는 더 큰 힘을 실어주기엔 충분히 무모했다.[19] 물론 장보고 암살로 인해 신라의 국력은 맨틀을 넘어 내핵까지 추락했지만.* 문성왕의 나이가 생각보다 꽤 어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신라 하대 왕족들의 건강 상태가 족내혼(族內婚) 등으로 인해 양호하지 않았다는 추정이 있고, 거듭된 반란의 경우도 앞서 신무왕이 1년의 재위를 채우지 못해 나타난 이른바 권력 공백에 따른 부작용이라고 보는 게 맞다.[20] 선대 군주들의 연령대가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어도 여러 정황 및 연령 대조로 유추는 가능한데[21], 선대 군주인 신무왕도 사실상 많아봐야 40대에 승하했을 가능성이 높아서 문성왕 역시 많아봐야 30대 초반을 넘기지 못하고 승하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성왕의 생년이 늦다면 그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일들도 사실상 다음 군주가 될 숙부 헌안왕을 비롯한 측근 대신들이 맡았을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성왕의 왕비는 2명으로, 841년에 당나라가 봉한 왕비 박씨와 842년에 들인 위흔(김양)의 딸 왕비 김씨가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문성왕의 왕비로 기록된 소명왕후(炤明王后)가 왕비 박씨와 왕비 김씨 둘 중 누구와 동일인인지 불분명하다. 문성왕의 아들들의 경우, 생모가 누군지, 이름이 뭔지조차 알 수 없다.

5.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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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문성왕 본기>

一年秋七月 문성왕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궁복을 진해장군으로 삼다
二年春一月 예징을 상대등으로, 의종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夏四月 가뭄이 들다
二年 당 문종이 국학생을 추방하다
二年 기근이 들다
三年 전염병이 돌다
三年 일길찬 홍필이 모반하다
三年秋七月 당 무종이 왕과 왕비를 책봉하다
四年春三月 이찬 위흔의 딸을 들여 왕비로 삼다
五年春一月 시중 의종이 면직되고 양순을 시중으로 삼다
五年秋七月 호랑이 5마리가 신궁에 나타나다
六年春二月一日 일식이 나타나다
六年春二月 태백성이 진성을 범하다
六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六年 대아찬 김여를 시중으로 삼다
六年秋八月 혈구진을 설치하다
七年春三月 궁복의 딸로 둘째 부인으로 삼고자 하다
七年冬十一月 우레가 치고 눈이 내리지 않다
七年冬十二月一日 해가 세 개 나란히 나타나다
八年 염장이 궁복을 죽이다
九年春二月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다
九年夏五月 이찬 양순이 모반하다가 발각되다
九年秋八月 왕태자를 책봉하다
九年 이찬 위흔이 시중이 되다
十年 가뭄이 발생하다
十年 파진찬 김계명이 시중이 되다
十年冬十月 벼락이 치다
十一年春一月 이찬 의정이 상대등이 되다
十一年秋九月 이찬 김식과 대흔이 모반하다
十二年春一月 토성에 들어가다
十二年 흙비가 내리다
十二年 사면하다
十三年春二月 청해진을 혁파하다
十三年夏四月 4월에 서리가 내리다
十三年 이찬 원홍이 당에서 불경어금니를 가져오다
十四年春二月 파진찬 진양을 웅진도독으로 삼다
十四年 조부에 불이 나다
十四年秋七月 명학루를 중수하다
十四年冬十一月 왕태자가 죽다
十五年夏六月 홍수가 일어나다
十五年秋八月 황충이 발생하다
十七年春一月 서남쪽 백성을 위로하다
十七年冬十二月 진각성에 불이 나다
十七年冬十二月 토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九年秋九月 문성왕이 조서를 남기고 7일 후에 죽다

문성왕부터 《삼국사기》 11권이 시작된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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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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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제 청평군 박민 세조 알지왕 사요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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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례왕 일지왕 태조 성한왕 사요왕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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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휴왕
김수류 마제왕
 
 
 
 
 
 
아도왕 세신왕 이칠왕 김욱보
 
 
 
 
 
 
 
昔11
조분왕
昔12
첨해왕
昔10
내해왕
술례부인
구도왕
 
 
 
 
 
 
 
 
 
 
 
 
 
 
 
昔14
유례왕
석걸숙 내음왕 석우로 광명부인
金13
미추왕
김말구
 
 
 
 
 
 
昔15
기림왕
昔16
흘해왕
金17
내물왕
김대서지
 
 
 
 
 
 
金19
눌지왕
파호왕
 
 
김미사흔 金18
실성왕
 
 
 
 
金20
자비왕
습보왕
 
 
김내숙
 
 
 
 
 
 
 
 
金21
소지왕
金22
지증왕
 
 
선혜부인 김물력
 
 
 
 
 
 
 
聖23
법흥왕
입종왕
 
 
김거칠부
 
 
 
 
聖24
진흥왕
김숙흘종
 
 
 
 
 
 
 
 
복승왕 동륜왕 만천왕 聖25
진지왕
 
 
김만명
 
 장인
 
 
 
 
 
 
 
 
 
마야부인
김행의
聖26
진평왕
진정왕 진안왕
문흥왕 김마차
 
 
 
 
 
 
 
 
 
 
 
 
 
 
 
聖27
선덕왕
김천명 비담 聖28
진덕왕
김알천 眞29
태종 무열왕
현성왕 흥무왕
 
 
 
 
 
眞30
문무왕
김인문 무열왕의 딸
신영왕
 
 
 
眞31
신문왕
 
흥평왕
 
 
 
 
 
 
眞32
효소왕
眞33
성덕왕
 
명덕왕
 
 
 
 
 
 
 
 
개성왕
김사소 효상태자 眞34
효성왕
眞35
경덕왕
김주원 眞38
열조 원성왕
 
 
 
 
 
 
 
 
 
眞37
선덕왕
眞36
혜공왕
김헌창 혜충왕 헌평태자 혜강왕
 
 
 
 
 
 
眞39
소성왕
眞41
헌덕왕
眞42
흥덕왕
선강왕 익성왕 성덕왕
 
 
 
 
 
 
 
 
 
 
 
 
眞40
애장왕
헌덕왕태자 ? 眞44
민애왕
眞43
희강왕
眞45
신무왕
眞47
헌안왕
 
 
 
 
 
의공왕 眞46
문성왕
궁예(?)
 
 
 
 
 
 
 
성무왕 ? 眞48
경문왕
혜성왕 문성왕태자 문성왕의 딸
 
 
 
 
 
 
 
선성왕 흥렴왕
박정화 眞49
헌강왕
眞50
정강왕
眞51
진성왕
의흥왕
 
양부 
 
 
 
 
 
 
 
朴53
신덕왕
김의성 김계아 眞52
효공왕
김억렴 신흥왕
 
 
 
 
朴54
경명왕
朴55
경애왕
眞56
경순왕
 
 
 
 
박언창 박언침 마의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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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주가 유언을 내린 후 7일 뒤에 사망.[2] 정계(貞繼), 진종(真從), 정종(定宗)이라고도 하는데, 계(繼)의 이체자가 継이고, 종(從)의 이체자가 従이라서 한 쪽이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표기로 定宗이 쓰이는 점을 볼 때 정종(貞從)이 맞는 듯하다.[3]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에 명(明) 자가 들어가는데 이 돌림자는 혜충태자 김인겸의 손자들이 공통적으로 쓰던 항렬자이다. 만약 이 김◯명이 제41대 헌덕왕의 태자와 동일인이라면 정계부인의 어머니는 정교부인이 된다. 이부남매끼리 혼인한 셈.[4] 태종 무열왕의 방계 후손이자 공신인 김양의 딸.[5] 847년 8월 책봉되었으나 852년 11월에 죽었다. 이후 문성왕은 자신의 숙부인 서불한 김의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6]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기록. 참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해석[7] 생전엔 인천(人天)의 주인으로 살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사후에 그 공덕을 감안해 '무상지위'(无上之位), 자신보다 윗사람이 없는 자리, 즉 부처가 되라는 축복문이다.[8]속일본기》(続日本紀)에는 841년 11월의 일로 기록되었으나 한국의 기록을 참고한다.[9] 다만 기록의 주체인 신라 왕실과 귀족 측에서 기록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10] 섬에서 말을 키우는 이유는 한반도 본토와 달리 말을 위협하는 호랑이가 없고, 통제와 관리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제주도절영도에서 말을 키운 것도 같은 이유이다. 백제의 경우도 수도 한성의 하중도인 잠실, 부리 섬에서 목장을 운영했다고 추정된다.[11] 《삼국사기》는 두가지 기록이 상충될 경우 중앙정부 기록은 <본기>에, 가문의 기록이나 야사의 경우에는 <열전> 에 수록했다. 그래서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충돌되는 경우가 있는데, 장보고김양의 기록이 대표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12] 오늘날 전라북도 김제시.[13] 김인경의 두 아들이 바로 태조 왕건의 5번째 왕후인 신성왕태후의 아버지인 김억렴과 경순왕 김부(제56대)의 아버지인 동시에 <효녀 지은 설화>로 유명한 화랑 김효종이다. 문성왕에게는 증손자들이다. 다만 이 기록이 나온 신라경순왕전비 속에 기록된 계보는 사실상 시기적으로 불가능한데다 건립 시기 역시 후대인 18세기이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14] <신라경순왕전비문>(新羅敬順王殿碑文)에 따르면 경순왕의 조상으로, 문성왕의 아들 이름이 ‘김안’이라고 하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안은 헌안왕(제47대) 즉위 직후 상대등에 오른 인물이므로 김안이 문성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등 업무를 볼 정도로 장성한 아들 대신 왕위에 오른 숙부 김의정이 그를 순순히 살려준 것은 물론 그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반란의 빌미를 남긴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므로 이것이 잘못된 사료가 아니냐는 것이다.[15] 이는 제42대 흥덕왕 말년에 있었던 다음 왕위 계승을 위한 다툼의 중앙에 흥덕왕의 동생 김충공의 사위였던 김제륭과 김균정이 있었다는 것에서부터 봐야 한다. 또한 김균정 피살 후 청해진으로 도망쳐 숨어지내던 김우징정통성을 가진 왕이 제거되고 나서야 군대를 이끌고 서라벌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까지 고려해보면, 김충공의 외손이 아닌 김우징은 정통성이 약한 편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신무왕이 즉위한 뒤 얼마 안되어 사망하면서 당시 강한 힘을 가진 신무왕의 직계 세력들의 옹립으로 신무왕의 아들인 경응이 즉위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정통성면에서 취약한 것이었기에 결국 김충공의 외손이었던 헌안왕에게 보위가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흥덕왕 사후 왕위 승계의 혼란을 완전하게 종식시키지 못하였기에, 헌안왕의 두 딸이 희강왕 김제륭의 손자이자 신무왕 김우징의 외손인 김응렴에게 시집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16] 공신 김양의 딸로, 842년에 혼인했다.[17] 왕후 박씨의 소생인지, 김씨의 소생인지는 기록되지 않아서 알 수 없다.[18] 물론 이 둘은 각자 독립국가를 세우긴 했지만 왕위 교체 앞에서는 빛이 바래며, 중앙 통제력 붕괴 정도, 해상 무력까지 고려하면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19]후삼국시대가 아니라 장보고가 주도하는 선양, 혹은 장보고가 건국한 왕조에 의한 멸망으로 신라가 끝장날 수도 있었다.[20] 제36대 혜공왕 치세에 일어난 96각간의 난 이후 중앙 진골 귀족 간의 왕위 다툼은 한층 더 치열해졌다. 이것은 해구, 연신의 난 이후 백제간주리의 난 이후 고구려의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21] 흥덕왕민애왕의 생년이 관련 유물에 나타난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고, 후대의 경문왕의 생년이 둘 중 하나(843년 혹은 846년)로 좁혀지기도 하며, 군주와 왕후의 혼인 연도와 사망한 시기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어 신라 후대의 왕들 생년은 이들을 기준으로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