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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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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릉 전경.
출생 최소 734년 전후 추정[1]
신라 금성
사망 799년 2월 12일[A][B][4] (향년 60대 이상 추정)
신라 금성
능묘 괘릉(掛陵)
재임기간 신라 제25대 상대등
780년 ~ 785년 3월 2일[5][6] (5년)
재위기간 신라 제38대 국왕
785년 음력 1월 ~ 799년 2월 12일[A][B] (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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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 계오부인 박씨[9]
왕후 숙정부인 김씨
자녀 3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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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김인겸, 김의영[10], 김준옹[11]
왕자 김예영
왕녀 대룡부인, 소룡부인
종교 불교
묘호 열조(烈祖)
시호 원성대왕(元聖大王)[12]
존호 경신태왕(敬信太王)[13]
골품 진골(真骨)
관등 이찬(伊飡)
각간(角干)
직위 상대등(上大等) }}}}}}}}}

1. 개요2. 묘호시호3. 생애와 평가
3.1. 즉위 이전3.2. 치세3.3. 인사의 한계3.4. 외왕내제
4. 괘릉(掛陵)5. 가계6. 《삼국사기》 기록7. 여담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38대 군주. 묘호는 열조(烈祖). 왕비는 숙정부인(淑貞夫人).[14]

신라 하대를 시작하는 군주인 데다가 업적도 어느 정도 이룩한 군주인지라 오늘날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제31대 신문왕과 함께 비중있게 다뤄지는 왕이다.

2. 묘호시호


태조 성한왕, 태종 무열왕과 함께 신라 당대의 기록에서 묘호가 확인되는 세 명의 임금 중 하나다. 신라 이후의 기록에서 묘호가 확인되는 것은 추존세조(世祖) 김알지(링크) 등 몇 명이 더 있으나, 신라 당시에 김알지를 세조로 추존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신라 멸망 후 수백년이 지나 작성된 《삼국사기》에서는 이 중 무열왕만이 태종이란 묘호가 기록되었다. 원성왕에게 '열조'의 묘호를 올린 것을 알 수 있는 사료는 신라 당대의 기록인, 최치원이 비문을 작성한 초월산 <숭복사(崇福寺)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링크.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설된 왕실 원찰(原刹)이다.

참고로 고려나 조선은 원칙적으로 모든 군주에게 묘호를 올렸다. 고려의 경우는 원나라내정 간섭을 거치면서 어쩔 수 없이 제후의 법도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면서 묘호를 폐지했고, 조선에서는 폐위된 임금은 묘호를 올리지 않았다. 반면 신라에선 일부 군주에만 묘호를 올렸는데 그 이유는 해당 시대의 묘호 관행이 달랐기 때문이다. 묘호 제도는 본래 중국에서 건너온 것인데, 원래 중국에서도 모든 군주가 아니라 일부 중요한 업적을 남긴 군주에만 묘호를 올렸다. 후한 환제의 경우 앞의 관행 때문에 묘호가 강제 취소당했다.

예를 들어 한나라의 경우도 몇몇 황제는 태조, 세조 등의 묘호가 있었지만 《삼국지》로 유명한 영제헌제 같이 업적이 없었던 황제는 묘호가 없었다. 해당 문서 참조.삼국지》로 한국에도 유명한 조위•촉한•동오나 사마씨의 진나라(서진, 동진)도 마찬가지로 일부 중요한 군주만 묘호를 올렸다. 중국에서 모든 군주에 묘호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였고, 이를 한반도에서는 고려부터 처음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에서 모든 왕이 아닌 일부 중요한 왕에만 묘호를 붙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 생애와 평가

3.1. 즉위 이전

태종 무열왕의 외현손[15]이며 아버지는 일길찬을 지낸 김효양(金孝讓).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이다. 부계로만 따지면《삼국사기》에는 제17대 내물 마립간의 12세손, 《삼국유사》에서는 내물 마립간의 10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성왕의 부계 5대조는 김마질차(金摩叱次)[16]라는 사람으로 세 번째 관등인 잡찬을 지냈다고 한다. 증조부 김의관과 조부 김위문이 두 번째 관등인 이찬을 역임한 고위 진골 귀족이었다.

780년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하면서[17] 김양상을 선덕왕으로 옹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선덕왕 즉위 직후 상대등에 오르게 되었다. 선덕왕이 승하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태종 무열왕의 차남 김인문의 현손이었던 김주원이 태종 무열왕의 사위 김의관의 증손이었던 원성왕보다 왕위에 더 가까웠지만 경주 알천 북쪽에 살던 김주원이 홍수로 인해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귀족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운명으로 여긴 신하들이 김경신을 국왕으로 추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떤 이가 말했다.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동생으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 원년##

이렇게 귀족 회의를 통해 원성왕을 임금으로 추대하자 곧 비는 그치고 나라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런데 기록상의 계절은 정월 13일, 양력 2~3월인데 이 계절은 태풍도 없고,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조한 시기라 홍수가 딱 그때 맞춰 일어나는 것도 무리고 홍수로 귀족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왕위가 왔다 갔다 한다는 그 자체도 뜬금없는 이유라서 이는 김경신과 김주원 사이의 왕위 다툼에서 김주원이 패배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기는 견해도 있다. 훗날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이 여기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 보더라도 그 당시에도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여겨졌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당대에도 원성왕은 김주원을 확실히 제압하지 못하고 그의 후손에게도 높은 관등을 주는 등 그를 달래기 위해 꽤나 애를 쓴 것을 보면 왕위는 차지했어도 김주원을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제압하지는 못한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알천이 홍수로 불어난 내용은 일체 없고, 원성왕이 김주원보다 먼저 입궁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물】신라 김주원은 태종왕의 손자다. 원래 선덕왕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지를 받들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왕족 상대장등(上大長等) 경신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서 왕이 되었다. 주원은 화를 두려워하여 명주로 물러가고 서울에 가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릉대도호부>#

즉위 전 김경신의 이야기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복두(고위 관리들이 쓰는 모자)를 벗고, 소립(삿갓)을 쓴 채 12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래서 점쟁이에게 해몽을 의뢰했는데 점쟁이는 "복두를 벗는 건 벼슬에서 쫓겨날 징조고 가야금은 칼을 쓰게 되는 것이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건 감옥에 들어갈 징조입니다."라는 영 좋지 않은 해몽을 듣게 되어 멘붕에 빠진 채 집안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아찬 벼슬의 '여산'(혹은 '여삼')이라는 사람이 김경신을 만나기를 청했는데 처음에 이를 만나지 않다가 재차 청하자 결국 만났다. 여산이 무엇이 고민이냐고 묻자 김경신은 일전의 꿈과 해몽 이야기를 했고 여산은 "그건 길몽입니다. 만약 한 자리 차지하고도 저를 잊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신다면 해몽을 해 드리지요"라고 말하자 김경신은 주위를 물리치고 해몽을 들었는데 여산의 해몽은 이랬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하는 다른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까지 왕위를 전한다[18]는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징조입니다."

전에 점쟁이에게 들은 해몽과는 정반대였는데 해몽을 들은 김경신은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냐"고 물었고 여산은 은밀히 "북천(알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말하자 그 말을 따랐다. 이후의 이야기는 북천이 넘쳐서 귀족 회의에 김주원이 참석하지 못한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이후 김경신이 왕위에 오를 무렵에 점쟁이 여산에게 답례를 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뒤라 그의 자손에게 벼슬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3.2. 치세

즉위하자마자 장남 김인겸태자로 책봉하였다. 또 제35대 경덕왕과 제37대 선덕왕의 아버지 개성대왕, 외조부인 제33대 성덕왕의 사당을 허물었다. 한편 고조부 김법선부터 아버지 김효양까지 4대를 모두 왕으로 추증한다. 사당을 허문다는 건 역사 부정이나 고인드립 같은 건 아니고 당시 예법상 국가 5묘의 자리가 한정돼 있어서 새로 넣으려면 그만큼 원래 있던 왕을 밀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외는 역사상 중요한 업적을 세운 왕은 불천위로 건들지 못하는 것이고, 당시에는 삼국통일 대업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던 제29대 태종 무열왕과 제30대 문무왕의 위패가 그에 해당했다. 종묘 문서 참조.

대신 불국사에 자신의 아버지 김효양과 조부 김위문을 모시고 시조대왕(제13대 미추 이사금)에 불천위인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 2명, 조부인 흥평대왕(추존)과 부친인 명덕대왕(추존)을 신라 시대의 종묘인 국가 5묘에 지정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열조 원성왕 김경신의 가계는 태종 무열왕 - 의관(義寬)의 아내 - 위문(魏文) - 효양(孝讓)으로 일설에는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묘를 헐지 않은 것을 보아 문무왕의 방계 태생이라는 설도 있다. 태종 무열왕은 원성왕의 증외고조부, 문무왕은 원성왕의 증외종증조부에 해당한다.

하지만 단순히 국가의 중간 시조로서 모셨다는 견해와 충돌한다. 제36대 혜공왕 때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는 삼한일통의 업적 때문에 절대 옮길 수 없는 불천지위라고 천명했는데 아무리 정변을 일으켜 왕통이 원성왕계로 넘어왔다고 해도 아예 다른 나라를 새로 건국한 것도 아니고, 신라라는 나라를 이어가는 이상 이것을 번복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컸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여, 문무왕 대에 확립된 주 총관체제를 혁파하고 주의 장관을 도독으로 개편하였다. 이로서 지방 행정관들의 군사령관으로서의 성격이 완전히 탈피되었다고 본다.

한편 그의 치세에는 각종 재해가 매우 빈번하게 발생했다. 우박, 가뭄, 지진, 기근 등등의 재해가 786년부터 787년까지 2년 동안 지역을 가리지 않고 발생했다. 이외에도 일식이 일어나는 등의 흉조가 빈번했으며, 이후에도 기근이 매우 자주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진휼하는 등의 일이 반복되었다. 791년 10월에는 서라벌에 눈이 3척이나 내리기도 했으며, 또 옛 백제 땅에 도적이 발생하는 등 당시 사회 분위기가 영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많다.

진골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서 능력있는 신진 인재를 시험을 쳐서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인 독서삼품과(788년)를 시행했다. 독서삼품과는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유교 지식에 대한 시험을 치러 그 시험 결과에 따라 관리를 등용한 제도로 훗날 고려 제4대 광종 때 시작한 과거 제도의 전신이 된다. 독서삼품과의 도입 이후로는 진골이라도 독서삼품과를 수료해내지 못하면 대사 직책(오늘날 기준 차관보) 이상을 할 수가 없었으며, 한편 적어도 5두품 이상이라면 능력이 빼어날 경우, 영 직책(오늘날 기준으로는 차관에 해당)까진 해낼 수 있을 확률이 올라갔다.

물론 같은 능력이면 진골이 그 아래 골품보다 훨씬 유리했겠지만, 진골이라 하더라도 어떤 학문적 기준에 미달하면 예외 없이, 승진할 수 있는 관등 자체에 상한을 둔 것은 적어도 신라 역사에 있어선 큰 진보였다. 이 독서삼품과는 국학 출신의 인재들을 중용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국학 출신의 6두품들을 등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제도는 적어도 고려 광종이 과거제 도입을 통해 개혁하기 이전까진 원성왕 이후 신라 임금들은 물론이고 태봉, 후백제, 그리고 고려 초기 세 임금(태조, 혜종, 정종) 등도 답습했기에, 의의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원성왕은 웃기게도 789년 자기가 만든 독서삼품과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당 유학생 출신 자옥이란 자를 양근현, 즉 현재의 경기도 양평의 지방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에 집사부에서 독서삼품과를 거치지 않았으니 임명은 불가하다고 항명하지만 시중 김세강의 옹호를 얻어 강행한다. 이는 국학 출신들을 중용하려는 의도로 만든 독서삼품과를 사실상 반쯤 무력화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최치원의 사례에서 보듯 당 유학생 출신 개혁가들도 있으므로 원성왕이 개혁을 포기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자기와 왕위를 두고 경쟁했던 김주원의 아들 김종기를 790년 시중에 임명했다. 김주원계를 포용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되며, 동시에 후술할 김주원 명주군왕 책봉설을 반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후로도 김주원계는 멀쩡하게 금성에서 관직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한편 백제 시대에 만든 벽골제[19]를 재공사하여 농업 생산량을 늘리려고 시도했다.

원성왕은 김인겸의 아들 김준옹이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오자 곧장 대아찬으로 임명하는 인사 파국에 가까운 행위를 하면서까지 김준옹을 밀어주었다. 이후 파진찬으로 진급하고 재상급으로 대우하였으며, 김준옹의 동생 김언승이 당에서 돌아오자 대아찬으로 임명하였다.[20]

791년에는 태자 김인겸이 죽었고, 이찬 김제공[21]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참수되었다.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김준옹의 둘째 동생 김언승을 소판으로 승진시키는 등 자신의 비속들을 대놓고 팍팍 밀어주었다.

791년 10월 상술한대로 서라벌에 눈이 3척이나 내려 백성들이 얼어죽자 이를 명분으로 김주원의 아들 시중 김중기를 책임지고 물러나게 한뒤 김준옹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792년 8월 차남 김의영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상대등 김충렴이 죽자 전 이찬 김세강을 상대등으로 책봉하였고, 김준옹이 시중에서 병으로 물러나자 이찬 김숭빈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김준옹은 병부령으로 임명한다.

793년 흔치 않게도 나마 김뇌가 흰 꿩을 헌상하는 길조가 일어난다.

794년 2월 지진이 발생하였고, 태자인 차남 김의영이 사망하였다. 시중 김숭빈이 물러나자 김준옹의 동생 잡찬 김언승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7월에는 보은사를 창건하였다. 795년 정월 장손 김준옹을 태자로 임명하였다.

엄밀히 따지면 김준옹은 원성왕의 친손자이니 태손이라 부르는게 정확하나, 《삼국사기》에서는 태자로 기록하고 있다. 아들이 먼저 죽어 손자(소성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1년만에 사망하여 증손자(애장왕)가 13세에 즉위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망 당시 원성왕 의 나이는 대략 최소 60세 이상인 듯하다.#

796년 2월 시중 김언승을 병부령에 임명하였다. 797년 9월 영동지방에 홍수가 나 산이 무너지고 메뚜기 떼에 의해 곡식이 피해를 입자 책임을 지고 시중 김지원이 물러나고 아찬에 불과한 김삼조를 시중으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다.

798년 12월 29일 사망하였다.

3.3. 인사의 한계

장손인 김준옹 같은 경우에는 790년에 시중의 직위에 올랐고, 4년 뒤에는 김준옹의 동생인 김언승도 시중이 되었다. 왕의 손자들이 시중이라는 주요 직책에 임명되었던 것을 비추어보면 원성왕계는 왕과 태자를 중심으로 매우 좁은 왕가의 친척들이 상대등, 병부령, 시중 등의 주요 직책을 독점하며 정국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좁은 범위 안의 왕족이 조기 교육을 잘 받아서 재능이 개화되었다면 괜찮을 법한 방법이지만 그게 아니거나 혹은 너무 어려서 아는 것이 적어 능률은 떨어지고, 직책만 남발되며, 이 탓에 권력이 분산되어 왕족들이 한 줌의 권력이라도 잡으면 그것을 휘두르려고 하게 되는 건 필연이었다. 이게 여러 대에 걸쳐서 진행될 경우, 나라 자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분명했는데 당장은 아니었어도 후대에 나타나게 되는 피비린내나는 왕위 쟁탈전의 모습들은 이미 원성왕 대에 어느 정도 만들어놓은 것이라 봐도 무방한 것이다. 왕이 어리거나, 왕위를 이을 후사가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고위 관직을 역임했던 왕족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왕위 쟁탈전을 펼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는 것.

3.4. 외왕내제

원성왕 때 신라 내부적으로 황제국처럼 행세하는 외왕내제 체제를 한 것이 많이 보인다. 제35대 경덕왕 때 건립되고 제38대 원성왕 때 글이 새겨진 <갈항사 석탑기>(葛項寺 石塔記)에는 원성왕이 '경신태왕'(敬信太王)[22]으로, 그의 어머니가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로 적혀 있다.
두 탑은 천보(天寶) 17년 무술에 세우시니라.
남자형제와 두 여자형제 모두 셋이 업으로 이루시니라.
남자형제는 영묘사(零妙寺)의 언적(言寂) 법사이며
큰누이는 조문황태후님(照文皇太后君)의 유모이며
작은누이는 경신태왕(敬信太王)의 유모이니라.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旀
姉者照文皇太后君妳在旀
妹者敬信太王妳在也.)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제46대 문성왕의 유언에는 헌안왕(제47대)을 '선황(先皇)의 영손'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계이든 부계이든 헌안왕의 조상에서 왕이었던 사람은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모계에 태종 무열왕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선 열조 원성왕이 유일하므로 '선황'은 원성왕이고, 원성왕은 황제로 불렸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재위 기간 중 5묘를 만들고, 왕권 강화를 했던 것으로 보아 황제를 칭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등 신라 당대보다 후대의 몇몇 기록에서는 786년에 원성왕이 자신이 왕위를 뺏은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책봉하고, 그에게 명주 일대를 식읍으로 주어 다스리게 했는데 김주원과 그의 후손은 '명주군국'이라는 국호를 쓰며, 4대 37년간 명주 일대를 다스렸다고 한다. 이는 원성왕이 황제국에서 하는 것처럼 일종의 제후국을 둔 것인데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자 명주군국은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내용들에 대한 관련 논문

4. 괘릉(掛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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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uinsang.jpg
원성왕릉 항목 참조. 아랍, 페르시아 등 서역 출신으로 추정되는 무인상으로 유명하다. 인근에 있는 숭복사는 원성왕의 왕사로 여기에 있는 <숭복사비 비문>[23]을 통해 신라 왕릉의 조성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어 중요한 사료로 꼽힌다.

5. 가계

부계로만 따지면 혜공왕까지가 제29대 태종 무열왕의 직계이고, 선덕왕부터는 무열왕이 아니라 제17대 내물 마립간(내물왕)의 직계 후손이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이다.[24][25] 고로 혜공왕을 끝으로 태종 무열왕계인 신라 중대가 그 끝을 맺고, 선덕왕부터 엄청 먼 방계인 내물왕계로 교체되어 신라 하대가 시작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신라는 여성을 매개로 사위 및 외손 계승이 가능했기에 모계도 같이 따지면 선덕왕과 열조 원성왕도 태종 무열왕계에 속한다. 선덕왕은 제33대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의 소생이라[26] 엄연한 무열왕 아들의 후손이고, 열조 원성왕은 무열왕 딸의 증손이라서 무열왕 딸의 후손이 된다. 부계로만 따지면 선덕왕과 열조 원성왕은 이전 군주들과 엄청나게 먼 방계로 보이지만, 모계도 같이 따질 경우, 선덕왕은 이전 군주들과 매우 가까운 친척이고, 열조 원성왕도 지증왕 이상부터는 부계 계보가 같기에 이전 군주들과 그렇게까지 먼 방계는 아니다.[27]

게다가 열조 원성왕이 부계로는 선덕왕보다 자신이 무열왕계와 더 가깝다는 걸 불필요하게 강조할 경우 선덕왕 지지 세력들은 촌수 자체로만 따지면 선덕왕이 혜공왕과 훨씬 가까웠음을 내세워 이탈할 위험도 있었던 데다, 그런 논리라면 무열왕 직계인 김주원이 어째서 원성왕에게 왕위에서 밀렸는지 설명이 어렵게 되는 곤란함도 있었기에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또 선덕왕은 이전 무열왕 직계 군주들과 모계로는 매우 가까운 친척이지 이후 군주들인 열조 원성왕 및 원성왕의 후손인 군주들과는 촌수가 먼 편이다. 원성왕 이후 즉위하는 모든 군주는 신덕왕 외엔 다들 원성왕의 후손들이라 그는 신라 하대 왕계의 중시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선덕왕은 과도기적 군주이고, 모계도 같이 따져서 원성왕의 즉위를 기점으로 왕계가 무열왕 남계[28]에서 무열왕 여계[29]로 교체된 것이라고 여기는 게 이해하기 훨씬 쉽다.

6.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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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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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원성왕 본기〉
一年春一月 원성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二月 선조를 추봉하다
一年春二月 오묘를 정비하다
一年春二月 관작을 한 계급씩 더하다
一年春二月 충렴을 상대등으로, 세강을 시중으로 삼다
一年春三月 전 왕비를 외궁으로 내보내다
一年春三月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다
一年春三月 총관을 도독으로 고치다
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상하다
二年夏四月 김원전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 방물을 바치다
二年秋七月 가뭄이 들다
二年秋九月 왕도에 기근이 들어 진휼하다
二年冬十月 또 다시 진휼하다
二年冬十月 무오에게 굴압현령 직을 주다
三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春二月 친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二月 대사면을 하다
三年夏五月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
三年秋七月 황충이 곡물을 해치다
三年秋八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四年 독서삼품과를 신설하다
四年 사자를 파견해 가뭄, 황충, 도적 피해를 안무케 하다
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한산주의 기근을 진휼하다
五年秋七月 서리가 내려 곡식이 상하다
五年秋九月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삼다
논하여 말하다
六年春一月 종기를 시중으로 삼다
六年春一月 벽골제를 증축하다
六年春一月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다
六年春三月 백어를 발해에 사신 보내다
六年春三月 크게 가물다
六年夏四月 태백성과 진성이 동정에 모이다
六年夏五月 한산주와 웅천주의 기근을 진휼하다
七年春一月 왕태자가 죽다
七年春一月 제공이 반란을 일으키다
七年春一月 웅천주에서 한 번에 남자아이 셋이 태어나다
七年冬十月 경도에 눈이 내려 동사자가 나다
七年冬十月 시중 종기가 물러나고 준옹이 시중이 되다
七年冬十一月 경도에 지진이 일어나다
七年冬十一月 김언이 삼중아찬이 되다
八年秋七月 당에 미녀 김정란을 바치다
八年秋八月 왕자 의영을 태자로 삼다
八年秋八月 상대등 충렴이 죽어 세강이 상대등이 되다
八年秋八月 시중 준옹이 물러나고 숭빈이 시중이 되다
八年冬十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九年秋八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벼가 쓰러지다
九年秋八月 김뇌가 흰 을 바치다
十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年春二月 태자 의영이 사망하다
十年春二月 시중 숭빈이 물러나고 언승이 시중이 되다
十年秋七月 봉은사를 창건하다
十年秋七月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치다
十年秋七月 망은루를 세우다
十一年春一月 준옹을 태자로 봉하다
十一年夏四月 가물어 죄수를 심사하니 비가 오다
十一年秋八月 서리가 내려 곡물이 상하다
十二年 기근과 역병이 돌아 진휼하다
十二年夏四月 시중 언승을 병부령으로 삼고, 지원을 시중으로 삼다
十三年秋九月 황충으로 곡물이 해를 입다
十三年秋九月 홍수로 산이 무너지다
十三年秋九月 김삼조가 시중이 되다
十四年春三月 궁 남쪽 누교가 불타다
十四年春三月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치다
十四年夏六月 가뭄이 들다
十四年夏六月 석남오의 처가 한 번에 남자 셋, 여자 하나를 낳다
一四年冬十二月二十九日 왕이 붕어하다

열조 원성왕부터 《삼국사기》 10권이 시작된다.

7. 여담

현진건의 소설 《무영탑》에 등장한다. 당학파에 대항할 만한 국선도파의 지지자로 이손 금량상의 아우 경신으로 등장한다.

석공 아사달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겨 버린 여주인공 주만의 정혼자가 되었지만, 주만이 아사달을 사모함을 알고 남자답게 포기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주만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을 알기에, 공개 파혼하지 않고 자신이 신랑 초행길에 신부가 도망가고 없는 망신을 감당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석가탑이 완공된 후 아사녀의 죽음을 알아 버린 아사달이 정신줄을 놓고 영지에 불상을 새기느라고 주만을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되는 바람에 주만이 붙잡혀 화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들어 주만을 구해 주는 것으로 작품이 사실상 끝난다.

현대적 인물구도에 적용한다면 서브 남주 포지션으로, 왕위 계승 순위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후에 쿠데타를 일으킨다거나 왕이 된다거나 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멀리 있는 아내와 가까이 있는 주만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고, 석공 일에 집중하는 주인공 아사달보다 더 주인공 같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온통 빌런들 뿐인 작중에서 몇 안 되는 조력자 포지션이다 보니 인물됨에 있어서도 보정을 많이 받았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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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 증손자인 애장왕이 788년 생이며, 손자인 흥덕왕이 777년생이라면 그 형들인 소성왕과 헌덕왕은 그 보다는 나이가 많다. 아들이 있을 나이를 최소한 10대 중반으로 잡으면 애장왕의 아버지인 소성왕은 770년대 초반생. 열조 원성왕의 아들인 인겸과 의영, 예영을 최소 750년대 중후반으로 추측하고, 원성왕보다 나이가 많았던 선덕왕이 734년 이전 생으로 추정돼서 역산하면 원성왕은 최소한으로 잡아도 734년 전후생이다. 역산하면, 사망 당시 나이는 최소한 60대 전후로 추측됨.#[A] 율리우스력 2월 8일[B] 음력 798년 12월 29일[4]삼국사기》에 각주로 첨가된 기록에 의하면 "《당서》에는 798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었고, 《자치통감》에는 800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면 《자치통감》이 잘못되었다."고 되어 있다.[5] 율리우스력 2월 26일[6] 음력 1월 13일[A] [B] [9] 사후에 추존되었다. <갈항사 석탑기> 중 발췌.[10] 병에 걸려 사망. 시호 헌평태자(憲平太子)[11] 김인겸의 아들로서 엄밀히 말하면 왕태손이다.[12]삼국유사》와 경주 숭복사비의 기록.[13] 이름을 그대로 사용. <갈항사 석탑기> 중 발췌.[14]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 헌덕왕 재위 기간 중 사망했다.[15] 열조 원성왕은 무열왕의 4대손이다. 무열왕→김의관과 결혼한 문무왕의 여동생→김위문→김효양→열조 원성왕 순.[16] 그냥 '마차'(摩次)라고도 한다.[17]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참고한 기록. 최근 들어서는 쿠데타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인물을 김경신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18] 혹은 내물왕 12세손의 상징. 실제로 전자의 예언은 들어맞지 않았다. 효공왕은 그의 7세손이며 경순왕은 원성왕의 남계 후손이 아닐 가능성이 있으므로 논외. 12대손은 아니지만 본인 포함 15대가 이어지긴 했다.[19]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포교리에서 월성리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제방이 남아 있는 저수지대한민국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다.[20] 이 역시 독서삼품과를 무력화시키는 행위이다.[21] 원성왕이 즉위하자마자 시중직을 빼앗긴 인물이다. 이때문에 원성왕에게 원한을 품었던 듯하다.[22] 태왕(太王)이 아니라 대왕(大王)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태왕과 대왕의 호칭은 황제와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23] 비석 자체는 조선시대에 파괴되어 파편만 남았지만 파괴 이전에 비문을 백업해놨기 때문에 지금도 내용이 전한다.[24] 고로 원성왕은 굳이 부계로만 따지면 경덕왕의 17촌 숙부인데 이 촌수는 우연찮게도 조선 문조와 문조의 양자 고종의 촌수와 똑같다. 숙부 항렬인 원성왕이 조카뻘 경덕왕보다 나이가 비슷하거나 어린 건 있을 수 있는 일. 다름아닌 지증왕도 소지 마립간의 6촌형이었으나 나이는 거의 20살 이상 많았다.[25] 《삼국사기》에는 원성왕의 고조부인 법선까지, 《삼국유사》에는 법선의 아버지인 마질차까지 나와 있고, 그 이상은 정식 사서에 나오는 바가 없다. 족보류의 기재에 따르면, 지증왕의 3남 김진종의 아들이 흠운이고, 흠운의 아들이 ‘마차’라고 하나, 이 가계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신뢰하기 어렵다. 첫째, 진종, 흠운, 마차는 경순왕의 후손인 김재명(金再鳴)이 신라가 망하고서 무려 900년이나 지난 1814년 건립한 <신라경순왕전비>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고, 그보다 이전의 문헌에서는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둘째, ‘마차’는 정사에 기록된 이름 ‘마질차(摩叱次)’에서 가운데 글자인 ‘질(叱)’을 삭제한 것이다. 셋째, 흠운은 7세기 중반 삼국통일전쟁 시기에 활약한 인물로서 신문왕의 장인, 즉 문무왕과 같은 세대인 김흠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인물이 지증왕의 손자이자 김의관(무열왕의 사위이자 문무왕의 매형)의 증조부라는 기록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넷째, 진종이라는 인물 역시 실존하긴 했으나 제34대 효성왕의 왕비 혜명왕후의 아버지로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결국, 지증왕 – 진종 – 흠운 – 마차의 가계는 신뢰하기 어렵다.[26] 당장 사소부인은 삼국 통일을 완성한 제30대 문무왕의 증손녀이다.[27] 그가 일부러 선덕왕의 동생으로서 내물 마립간계임을 표방했던 건 과도기격 임금으로 내세운 선덕왕 지지 세력도 포용해야 잔존 무열왕계를 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성왕 김경신은 모계로 따져보면 실제로도 선덕왕의 6촌 동생이긴 했다. 선덕왕의 할아버지 김원훈의 여동생 김씨녀가, 다름아닌 원성왕의 외할머니였기 때문이다.[28] 무열왕의 아들의 후손.[29] 무열왕 딸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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