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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47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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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인물. 선덕여왕 말년 645년 11월 선임 상대등이었던 이찬 수품(水品)의 뒤를 이어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승진하면서 기록에 첫 등장한다. 비담의 가계는 알 수 없지만 성골 남자가 남아있지 않아서 여왕이 즉위했다는 걸 보면 비담도 성골은 아닐테고, 골품제에 의해 진골 이상만이 오를 수 있었던 상대등을 역임한 것을 보면 그 역시 진골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 생애
647년 정월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의 명분을 내걸고 염종 등 여왕의 집권에 반대하는 진골 귀족들과 난을 일으켰다(비담의 난).대체로 비담이 지칭한 '여주'를 선덕여왕으로 보는 경향이 많지만 삼국사기에는 현직 국왕인 선덕여왕과 나중에 왕위에 오를 진덕여왕 중 어느 쪽인지 확실히 나오지 않는다. 비담의 난 도중에 선덕여왕이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선덕여왕이 자신의 후계자로 비담이 아닌 진덕여왕을 추대한 것에 앙심을 품은 게 아니냐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담이 거병하던 시점에 선덕여왕은 이미 사망하기 직전이었고 실제로 난 도중에 사망했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개연성이 높고 비담이 애써 폐위시킬 필요가 없기에 비담이 지적한 여주는 선덕여왕보다는 후계자로 지목되어 새로 등극할 예정이었던 진덕여왕일 가능성이 높다.
경주 중심가 월성을 먼저 점령한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밀려 경주 동쪽의 명활성에 진을 치고 10일간 대치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그 후 비담 및 연루된 자 30명을 죽였다. 김유신 열전에는 구족이 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구족의 첫 번째 정의인 비담의 8촌들까지 몰살시켰다고 보기는 힘들고(까닥했다간 무관한 왕족들까지 죄다 쓸려나갈 테니) 두 번째 정의인 친족, 진외족, 고모의 일족, 자매의 일족, 외족, 외외족, 이모의 일족, 처족, 처외족을 뜻할 가능성이 높다. 대충 비담과 직계 혈통 관련(아내나 며느리 등의 일족)을 잘라내는 정도에서 그쳤을 듯하다. 어찌 되었든 그 정도에 가까운 대규모 숙청이 있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가 하나 나왔는데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하자 하늘에서 유성 하나가 똑 떨어졌다. 그것을 본 비담이 선덕여왕 측이 패배할 것이라고 소문을 내서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에 김유신이 불 붙은 연을 하늘로 띄워 별이 다시 올라간 것처럼 보이게 해서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연놀이의 시작이라는 설이 있다.
반란 당시 김춘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록에 나오지 않고[2] 김유신도 기사마다 갈리지만 압량주(현대의 경산)에 파견되었다는 기사가 사실이라면 김춘추와 김유신 모두 서라벌을 비운 상태라 해볼 만하다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춘추와 달리 김유신은 압량주와 서라벌의 거리 때문에 제때 서라벌로 도착해 반란을 진압했다고 볼 수 있다.
선덕여왕의 총애를 받았던 비담이 굳이 난을 일으킬 이유가 없으니 김춘추를 국왕으로 세우려고 하던 김유신의 음모로 인해 역사에서 반역자로 남았다는 설이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설"일 뿐이고 총애받던 권신이나 2인자가 난을 일으킨 경우가 역사적으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비담의 난 이후로 신라의 정세는 급변하게 된다. 진지왕조차도 폐위시킬 정도로 세력이 강했던 화백회의가 그 수장이자 신권의 정점인 상대등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으로 인해 입지가 좁아지고 구 세력들이 죄다 숙청된 덕분에 더욱 확고한 왕권 중심의 체제로 가기 시작했고 결국 태종 무열왕의 등극 이후 신라 시대는 왕권이 제일 강했던 신라 중대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기록이 적고 결국 반란의 수괴로 남은 인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후대 신라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3. 추측
대한민국의 고대사 중 삼국통일전쟁기나 나당전쟁기를 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 서영교는 선덕여왕 때 알천과 함께 옥문곡에서 백제군을 격퇴했다는 각간 '필탄(弼呑)'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한 적이 있다. 상대 신라인 인명은 음차라서 이표기가 많은데 필탄과 비담이란 이름의 발음도 약간 비슷하기도 하고 필탄도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던 신라의 최고위 관등인 각간이었던 사람이니 상대등을 역임한 최고위 귀족인 비담과 통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만약 필탄이 비담의 다른 표기라면 비담은 백제군과도 싸워본 나름대로 군공과 지휘능력을 갖춘 인물이라 볼 수 있다.[3]이렇듯 비담은 기록이 별로 없는 인물인데, 심지어 위서로 추정되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조차 비담에 대한 기록은 '24대 풍월주 천광공이 비담의 난 때 공을 세웠다.'가 전부이다.
3.1. 용수와의 관계
'비담'은 불교에서 경전을 해석하거나 주석을 단 것을 의미하는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를 줄여서 부르는 호칭이다. 진흥왕 이래 선덕여왕 당대까지 신라 왕실은 불교적인 색채를 띄는 이름이 왕가에서 많이 유행했는데 비담의 이름 역시 이러한 신라 상대 왕실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비담의 정적이자 신라 상대의 종지부를 찍고 신라 중대를 열었던 김춘추나 김유신은 유교적, 한학적 색채를 띄는 이름이라서 흥미로운 부분이다.[4] 비담과 그 지지 세력이 어떤 사상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름을 짓는 기준은 그 가문이나 부모의 사상적 성향을 대변한다는 해석에서 보면 이 두 세력의 대립과 비담의 난은 사상사적 시각에서 해석할 여지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초기 부파 불교의 이명이 아비달마 불교였으며, 저명한 상좌부 불교 교의학자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이는 대승 불교의 창시자 나가르주나의 이름을 딴 용수와 대응되는 이름이다. 또 부파 불교-상좌부가 대승불교보다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점과 김춘추 즉위 과정에서의 여러모로 석연찮은 정황을 감안하면 비담은 용수의 동생이 아니라 형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비담이 용수의 형이라면 원래 동륜계 남성이 단절된 뒤 비담이 최우선 계승권자였지만, 무슨 이유인지 진평왕이 비담이 아니라 동생 용수를 천명공주와 결혼시켜 계승권이 용수와 춘추에게 밀렸고, 이런 상황에서 선덕여왕이 다음 계승권자로 마지막 성골인 진덕여왕을 지명하자 고령의 나이로 인한 초조함까지 합쳐져 반란이라는 태도로 나타났다 볼 수 있다.[5]
진평왕으로 인해 성골이 동륜태자의 직계만으로 축소되면서 일어난 최대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용수는 진지왕의 정처 지도부인의 소생이 아니라 서자가 아니냐는 설이 진지하게 제기되는 인물인데, 신라는 귀천상혼을 한국사에서 가장 엄격하게 적용한 나라라 사서에서 서자로 즉위한 것이 명시되는 인물이 효공왕 단 하나뿐이다.[6] 서녀설이 진지하게 제기되는 천명공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김춘추에게서 밀려났기 때문이다.[7]
용수는 선덕여왕 말기인 645년에도 살아있었음이 확인되며[8] 용수가 태종 무열왕의 즉위 전에 죽은 것만 확인되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진평왕은 매우 오래 살아서 외증손자인 문무왕이 태어나고도(626년) 6년이나 더 살았다(632년 사망).[9] 그리고 알천도 정황상 용수가 천명공주 이전의 전처에게서 가진 춘추의 이복형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진평왕~선덕여왕 시대부터 왕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며 비담, 알천과 경쟁하고 세력을 모으는 과정이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춘추와 달리 용수는 진평왕~선덕여왕 시대 각종 중책을 맡기는 했지만 막상 황룡사 9층 목탑 건조처럼 직접적인 권력다툼에서는 한 발 떨어진 모습을 보이며, 알천도 진덕여왕 대까지는 다소의 긴장관계가 있었지만 진덕여왕이 사후 화백회의에서 연상이라는 이유로 춘추보다 더 지지받았음에도 순순히 왕위를 포기하고 춘추를 지지하였다.
진평왕이 동륜태자계 성골의 왕위계승에 대한 집착이 강했음을 고려하면 진평왕은 애초부터 사망 당시 성인이었던 외손자 춘추를 염두에 두고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왕위계승구도를 짰을 수도 있다. 선덕여왕은 음갈문왕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었으며[10] 진덕여왕은 아예 혼인 기록 자체가 없기 때문에 여왕 둘을 연달아 즉위시켜 봤자 몇십 년 안 가 동륜태자계가 단절되는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진평왕이 부계 계승으로는 비담, 알천보다 뒤지만 자신의 외손자인 춘추를 즉위시키기 위한 '모계 혈통을 강조'하기 위한 안배로서 선덕여왕, 진덕여왕을 먼저 즉위시키게 만들었다면 비담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여왕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것을 넘어 자신의 후손에 대한 왕위계승권의 영구적인 배제를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비담이 고령의 나이에 무리수적인 반란을 일으킨 것도 단순히 자신이 즉위하기 위해서보다는 자신의 후손을 더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4. 대중매체에서
4.1. 삼국기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배우 최병학이 연기했다. 여기서는 무인의 이미지가 제법 강한 아래의 비담들과는 달리 노 정객 혹은 노회한 정치가나 귀족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비담을 시작부터 노신으로 묘사한만큼 비담 자신이 김유신의 라이벌로 나오지 않고 가상 인물인 아들 미오랑이 김유신의 라이벌로 등장하는데 워낙 개성이 없는 인물이라 극이 가면 갈수록 존재감이 없어져 김유신과의 대립은 결국 비담이 주도하고 미오랑은 부장 정도의 비중으로 전락한다. 극 중에서 비담은 화백회의의 수장격 인물로 나오며 진평왕 재위 시절에는 김용춘과 김서현 세력, 선덕여왕이 등극한 이후에는 김유신과 김춘추 세력 등과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운다. 신라를 향한 마음 자체는 크지만 모든 불미스러운 일[11]을 전부 여왕이 다스리기 때문이라며 한탄하고 비난한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고구려-당 전쟁에서 터져 나오는데 신라가 당나라의 편을 들면서 고구려의 수곡성 부근을 공격하던 중 전쟁이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자 신라 조정은 뒤집어져 버린다. 그러던 중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겠다며 연개소문에게 밀서를 보내 내통의 뜻을 밝히고 거사를 하려 하나 김유신이 이를 발견하여 비담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인다. 결국 수세에 몰린 비담은 여왕을 감금하고 양위 조서를 받아내어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고 하나 김유신의 계략에 그의 아들 미오랑의 군대가 패하고 그 역시 왕궁에서 김유신 수하 부장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둔다. 죽어가면서도 옥새를 움켜쥐며 김춘추를 비난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권력을 향한 탐욕에 눈이 어두운 노대신의 모습이다. 드라마상에서는 이후 신라 내부에는 김춘추를 견제하는 세력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데 비담의 난 이전까지는 김유신과 김춘추 세력의 가장 큰 걸림돌로 설정된 인물이다.[12] 어떻게 보면 가장 스탠다드한 반란을 일으킨 권신의 모습을 잘 보여준 것이며 아래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인데 실제 역사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모습이다.4.2. 점프
2005년 EBS 드라마 <점프>[13]에서는 기존 매체에서의 미형 악역 포지션이 아닌 가장 널리 알려진 비담의 모습이다.[14] 역사대로 여왕의 정책에 반발하며 난을 일으키는데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드라마 특성상 실제 내용과 크게 달라졌다. 후반에는 선덕여왕의 무리수[15]에 의해 집에서 아기나 돌보는 신세가 되는데 염종이 찾아오자 아기 깰까봐 당황하는 모습이 웃기다. 결국 난을 일으키나 김유신의 군대에 막히고 떨어진줄 알았던 선덕여왕의 유성이 연 계책으로 도로 올라가자 김유신군의 사기가 올라 결국 패배하고 염종과 함께 사망한다. 아이들 작품답게 전투씬에서 장군급 인물들 간의 일기토가 있었는데 김유신의 칼 1방에 등을 찔려 사망한 염종과 다르게 김유신군 병사 몇 명을 혼자 베고 김유신을 상대로도 호각으로 싸우다가[16] 간발의 차이로 최후의 일격에 배를 찔려 사망한다. 내내 문관 이미지이며 김유신과 호각으로 싸울 정도면 사기캐인데 드라마가 주인공 편 인물 아니면 조명을 안 하는 편이다.4.3. 선덕여왕
4.4. 대왕의 꿈
4.5. 세븐나이츠
5. 같이보기
[1] 이 여주가 당시 재위 중이던 선덕여왕을 지적하며 말하는 것인지, (반란 당시 후계자로 내정돼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승만공주를 지적한 것인지, 둘 다 까는 것인지 각각 해석이 존재한다.[2] 일본서기에서 얼마 뒤 김춘추가 왜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었다는 기술이 있기에 당시 왜로 간다고 서라벌을 비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3]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비담이 주역으로 나온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필탄은 비담파 세력의 중진급 인물로 나온다.[4] '춘추'는 공자가 지은 그 춘추이고 김유신의 이름인 '유신'은 남북조시대의 유학자 이름을 그대로 따서 지은 이름이다.[5] 비담을 진지왕의 아들이라 가정할 경우 570년대생이 되기 때문에 647년 반란 당시 비담의 나이는 적어도 60대, 많이 잡으면 70대까지 올라간다.[6] 효공왕의 즉위는 신라 말기 경문왕계가 후기 성골로 신격화되어 일어난 현상으로 본다.[7] 다만 비담과 용수의 이름이 상좌부 불교-대승불교로 완전히 대응되는 점을 고려하면 비담도 적자가 아니었거나, 반대로 용수의 어머니가 단순한 첩이 아니라 차비였는데 기록이 누락된 것일 수도 있다.[8] 선덕여왕이 죽은 건 647년 2월이다.[9] 김춘추가 603년생이기 때문에 진평왕 사망 당시 29세의 성인이었다.[10] 음갈문왕의 정체가 숙부 백반 또는 국반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근친혼의 지나친 누적의 결과로 인해 일어난 일로 추정된다.[11] 예를 들면 의자왕 등극 이후 40여 개 성을 빼앗은 일이나 대야성 함락, 즉위 직후 일어난 가뭄과 당 태종이 신라 사신에게 모욕을 준 사건 등.[12] 물론 1990년대 사극답게 주인공들은 보정을 심하게 받아서 비담 세력은 찌질하게 나오는 편이고 그렇게 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이 드라마에서 김유신-김춘추 연합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 인물은 백제의 성충-계백이다.[13] 이 드라마에서는 초등학생이 역사 속 인물이 되는게 매 에피소드의 플롯인데 이 학생의 경우에는 남녀평등으로 한창 논쟁을 한 직후 워프가 되었다.[14] 여왕의 정책에 반대하여 난을 일으키는 <선덕여왕> 제작 이전의 모습이다.[15] 실제 역사에서 당연히 이랬을리는 없고 초딩 특유의 마인드가 작용한 것.[16] 스토리상 김유신이 이기는게 당연한데 그러는 것치고는 상당히 김유신이 고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