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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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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6대 국왕
진평왕 | 眞平王
파일:신라 진평왕릉.jpg
진평왕릉 전경.
출생
(음력)
567년?[1][2]
신라 금성
사망
(음력)
632년 1월[3] (향년 65세?)
신라 금성
능묘 한지(漢只)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26대 국왕
579년 7월 ~ 632년 1월 (52년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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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김씨
백정(白淨)[4]
부모 부친 동륜태자
모친 만호부인 김씨
형제자매 김백반, 김국반
왕후 마야부인 김씨, 승만부인 손씨
자녀 왕녀 김덕만선덕여왕, 김천명천명공주, 김선화선화공주[5]
종교 불교
신체 253cm, 150cm(허리 둘레)[6]
시호 진평대왕(眞平大王)[7]
존호 백정왕(白淨王)[8]
연호 홍제(鴻濟, 579년 ~ 584년)
건복(建福, 584년 ~ 632년)
골품 성골(聖骨) }}}}}}}}}
파일:경주 남산신성비1.jpg
경주 남산 신성비
1. 개요2. 생애
2.1. 즉위2.2. 내치2.3. 위기와 극복2.4. 일본과의 전쟁 기록
3. 여담4. 《삼국사기》 기록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26대 국왕. 연호는 홍제(鴻濟) → 건복(建福).

밖으로는 외국의 침략과 안으로는 왕권 약화 및 정치 불안으로 위기에 몰려있던 신라의 상황을 외교를 통해 극복해내고 진흥왕 때 3배 가까이 급격히 확장된 영토와 인구를 기반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했으며, 뛰어난 신하들을 중용해 국가의 기반을 닦아놓은 신라 상대의 중요한 시기를 이끈 명군이다. 재위 기간 내내 고구려백제의 침략에 시달리는 등 바람 잘 날이 없었으나 힘든 시기를 극복해냈기에 신라삼국시대의 최후 승자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체 크기가 매우 큰 것으로 유명하며, 공주들과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해서 인기 있는 왕이기도 하다.

재위 기간이 워낙 길고 당대에 김유신, 김춘추 등을 비롯한 전설적인 화랑들과 정치가 등 우리가 알만한 삼국통일전쟁 시대의 위인들이 대부분 등장하는 시기라서 그들에 가려져 존재감이 적은 편이다.

253cm로 《삼국유사》에 11척이라 나온다. 다른 각주에도 서술하지만 현재의 척은 일본이 개항 이후 피트를 척으로 번역한 것이 넘어온 것이다. 고대사의 1척은 전한의 1척인 23cm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한국 역사상 최장신이자 인류 역사상 최장신 국가원수이며, 일본아카시 시가노스케(251cm ~ 258cm), 베트남의 호반 트 룽(257cm), 방글라데시의 파리말 찬드라 바르만(251cm), 튀르키예술탄 쾨센(251cm) 함께 아시아 역사상 키 250cm을 넘긴 사람이다.

2. 생애

2.1. 즉위

영토 개척을 통해 신라의 전성기 기반을 닦은 진흥왕의 장손으로 아버지는 진흥왕의 장남 김동륜이다.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이고, 왕비로는 마야부인, 승만부인이 있다. 마야부인 같은 경우는 본명이라기보다는 아버지 대부터 작정하고 지은 것이다.(법륜 역시 의미가 전륜성왕이다.) '백정'이라는 이름 자체도 실제 인도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의 이름을 따 온 것이며, 동생에게는 김백반과 김국반이라는 석가모니 삼촌의 이름, 딸 덕만 등에게도 석가모니 누이의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정작 석가모니가 될 왕자가 태어나지 못했다.

전왕이자 숙부인 진지왕이 폐위된 후[9] 10대 초반의 나이로 숙부의 왕위를 이었다. 비록 진지왕이 폐위되고 비정상적인 형태로 왕위를 계승했지만 진평왕은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을 아껴 천명공주혼인시켜 사위로 삼고, 궁궐의 업무를 총괄하는 내성사신으로 임명하는 등 중용하였다.

2.2. 내치

진평왕은 즉위하자마자 진흥왕 시대부터의 전쟁 영웅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고 580년 2월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그리고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김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진지왕의 폐위라는 사건으로 인한 왕권 약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즉위 2년만에 국가의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581년 정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 583년 정월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 584년 2월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고, 3월에는 국가의 공부(貢賦)를 관장하는 조부(調府)와 거승(車乘)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는 등 각종 국가 기관들을 설치하고 연호까지 독자적으로 수립하는 등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진평왕의 정부 부처 설립은 끝이 없어서 586년 정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했고, 591년 2월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2.3. 위기와 극복

파일:무왕 대의 백제와 신라의 충돌 지점.jpg
당시 신라와 백제가 충돌했던 지점들.[10]
5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통치했던 진평왕 시기는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격변하는 시기 속에 있었다. 조부 진흥왕이 백제를 철저히 눌러놓았던 임팩트가 남아서 진평왕의 재위 초기까지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었다. 고구려평원왕진흥왕의 기세에 눌려 죽을 때까지 신라를 침공하지 않았고, 백제위덕왕도 시도는 몇 번 했지만 딱히 신라에 유효타는 넣지 못했다.

590년 고구려의 온건파인 평원왕이 죽은 직후, 그전부터 줄기차게 신라에 대한 보복 공격을 주장해 왔던 강경파 온달이 갓 즉위한 처남 영양왕을 설득하여 진흥왕 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온달이 전사하면서 고구려군은 패배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기록에서 연개소문신라가 고구려가 수나라와 싸울 때 죽령 이북을 빼앗아 갔다고 기록하고 있어, 물론 신라가 당항성 쪽으로 중국과 계속 교통하는 것을 봐선 한강 유역 중부지방을 전부 다 빼앗겼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일부분은 온달 전쟁 때 고구려가 죽령 이북의 일부는 수복했다는 추측도 힘을 얻고 있다.

600년 즉위한 백제 무왕은 602년 40,000명이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거의 40년만에 처음으로 신라 침공을 감행하여 아막산성을 침공했으나, 진평왕은 백제군 40,000명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603년에는 고구려 영양왕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진평왕이 직접 1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에게 동시에 압박을 당하게 되는 중과부적의 상황에 놓인 진평왕은 수양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백제 역시 위덕왕 시절부터 줄기차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간청했었고, 아직 고구려와 사이가 나빴던 백제 무왕 또한 수양제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재차 사신을 보내었다.[11][12] 이러한 백제와 신라의 요청과 후방 지원 약속이 조금은 영향을 미쳤는지[13] 611년 4월 수나라는 고구려 침공을 위한 동원령을 내렸다. 612년 정월 수양제는 고구려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등의 활약으로 살수대전에서 물 말아먹고 끝났다.

한편 백제 무왕신라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촉각을 세우고 있을 때인 611년 10월 얘기치 않게 신라를 기습하여 가잠성을 점령하는 성과를 얻었다(가잠성 전투). 한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614년까지 후속전이 치러졌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잠잠해지자, 616년 무왕이 모란성을 공격해 왔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진평왕은 618년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죽였다(가잠성 전투). 이처럼 620년대초까지 백제와 신라는 치고받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이렇듯 백제, 고구려와의 끊임없는 공방전 속에서 화랑 귀산(602년 사망). 찬덕(612년 사망)과 그의 아들 해론(618년 사망)이 사망하는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지금은 위치가 잊혀졌지만 조선시대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철원군 고석정에 진평왕이 건립한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신라군이 철원 지역까지 북상해 고구려군과 일진일퇴를 벌인 일면이다.

그러나 진평왕은 고령으로 접어들면서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진평왕 말년에는 백제 무왕 쪽으로 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624년 백제 무왕은 신라 침공을 재개하여 3개 성을 함락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무왕은 626년 8월 주재성(왕재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627년 7월에도 신라를 침공하여 2개 성을 차지하면서 점점 신라를 압박해 들어갔다.[14]

말년인 630년에는 서라벌천재지변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지진이 발생해서 궁궐의 땅이 갈라질 정도였고[15], 631년에는 이를 빌미로 이찬 칠숙아찬 석품(石品)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칠숙·석품의 난) 왕은 반란을 미리 알아채고 진압하여 칠숙을 처형하였으며, 석품은 백제로 도망치려 했다가 처자식 보려고 몰래 들어오다가 잡혀 죽었다.

신라는 진평왕 시기에 힘을 축적해 비로소 통일신라로 가기 시작했다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진평왕에 대해 많은 전설과 후대 왕들의 존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평왕은 성골 출신의 마지막 남성 왕이기도 하다.

2.4. 일본과의 전쟁 기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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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삼국사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일본서기》에는 진평왕 시대인 서기 600년, 일본이 신라를 공격해 5개 성을 빼앗았다고 써 있는데 《일본서기》의 다른 대외기록이 으레 그렇듯 신빙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다만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인 <혜성가>에서 《삼국사기》에는 없는 진평왕 시대의 왜구를 말하고 있어[16] 기록 세부 내용이 과장이 된 것 외에 왜군이 공격해왔다는 것 자체는 사실일 수도 있다.

반대로 진평왕 치세에 신라가 일본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역시 《삼국사기》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 《해동기(海東記)》를 인용해
"왜황(倭皇) 민달(敏達) 12년(서기 583년) 계묘(癸卯)에 신라가 (일본의) 서변을 토벌하였다"
는 전승을 실었다. 다만 더 오래된 사서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일화라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서 학계에서 주목하는 기사는 아니다.

3. 여담

4.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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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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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진평왕 본기>
一年秋七月 진평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다
一年 친동생을 갈문왕으로 봉하다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 이찬 후직을 병부령으로 삼다
三年春一月 위화부를 설치하다
五年春一月 선부서를 설치하다
六年春二月 연호를 건복으로 바꾸다
六年春三月 조부와 승부를 설치하다
七年春三月 가뭄이 들다
七年秋七月 지명이 진에 들어가다
八年春一月 예부에 영 2인을 두다
八年夏五月 천둥과 벼락이 치다
九年秋七月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나다
十年冬十二月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다
十一年春三月 원광법사가 진에 들어가다
十一年秋七月 홍수가 나서 진휼하다
十三年春二月 영객부에 영 2인을 두다
十三年秋七月 남산성을 쌓다
十五年秋七月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고쳐 쌓다
十六年 수 황제가 조서를 내리다
十八年春三月 담육이 수에 들어가다
十八年 수에 사신을 보내다
十八年冬十月 영흥사에 불이 나다
十九年 삼랑사가 완성되다
二十二年 원광법사가 돌아오다
二十四年 수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四年秋八月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秋九月 지명이 돌아오다
二十五年秋八月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다
二十六年秋七月 수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六年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다
二十七年春三月 담육이 돌아오다
二十七年秋八月 백제를 침략하다
三十年 원광이 걸사표를 짓다
三十年春二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三十年夏四月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빼앗다
三十一年春一月 모지악 아래의 땅이 불에 타다
三十三年 수에 군사를 청하다
三十三年冬十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三十五年 가뭄이 들다
三十五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三十五年秋七月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다
三十六年春二月 일선주를 설치하다
三十六年 진흥왕비가 사망하다
三十七年春二月 큰 잔치를 베풀다
三十七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八年冬十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다
四十年 해론이 백제와 싸우다 죽다
四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四年春一月 왕이 황룡사에 거둥하다
四十四年春二月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삼다
四十五年春一月 병부에 대감을 두다
四十五年冬十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五年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다
四十六年春一月 시위부에 대감을 두다
四十六年春三月 당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四十六年冬十月 백제가 6성을 포위하다
四十七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八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다
四十八年 고허성을 쌓다
四十九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오다
四十九年夏六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四十九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습격해 함락시키다
四十九年秋八月 서리가 내리다
四十九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年春二月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다
五十年 크게 가물어서 비를 빌었다
五十年 백성들이 굶주리다
五十一年秋八月 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다
五十一年秋九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二年 대궁의 땅이 갈라지다[22]
五十三年春二月 흰 개가 궁궐의 담장에 올라가다
五十三年夏五月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란을 꾀하다
五十三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三年 흰 무지개가 우물 속으로 들어가다
五十四年春一月 왕이 죽다

재위 기간이 긴 만큼 기록도 많다. 고구려, 백제와 싸운 기록,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 각종 자연 재해와 말년엔 반란까지... 《삼국사기》 4권은 지증왕부터 시작하여, 진평왕으로 끝난다.

5. 대중매체에서

이 사람의 키가 253cm이다 보니 이 배역을 연기한 배우들은 모두 실존 인물보다 작다. 진평왕과 키가 비슷한 배우는 인류 역사상 최장신 배우이자 독일 역사상 최장신인 율리우스 코흐(256cm) 뿐이다.파일:attachment/진평왕/72.jpg
여담으로 김하균은 2006년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에서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간신이자 가상인물 부기원을 연기한 적이 있고, 대왕의 꿈에서 태종 무열왕을 연기한 최수종은 대조영에선 주인공 대조영을 연기했는데 거기서 대조영은 부기원을 고구려 유민들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패죽인 적이 있다. 때문에 평행세계에서 자기 외할아버지를 때려죽인 희대의 막장 패륜 외손자라는 배우개그가 나오기도 했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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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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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2d2f34><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생애
관련 문서 진평왕릉 · 천사옥대 · 경주 남산 신성비 · 혜성가
연호 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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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륜태자 김동륜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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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眞平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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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갈문왕(眞正 葛文王),
김백반
,진안 갈문왕(眞安 葛文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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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랑세기》에서는 567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위서의 기록으로 여겨진다.[2] 실제 생년은 할아버지인 진흥왕534년생이다. 아버지 동륜태자와 진평왕 본인 모두 부모의 혼인 이후 처음으로 태어난 자식이었을 경우, 진평왕의 생년은 생물학적으로 562년경까지 올라갈 수 있다. 한편, 진평왕 밑에는 최소 2명의 남동생이 있으므로 최대로 늦춰서 이 3형제가 새쌍둥이 유복자라고 해도 573년 이전에는 출생해야 하며 현실적으로는 571년 이전에는 출생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3] 632년 정월에 죽었는데, 《삼국사기》는 631년 칠숙의 난 직후에 죽었다는 《신당서》의 기록 역시 덧붙이고 있다. 이에 따르면 52년 재위하고 죽은 셈이 된다.[4] 석가모니의 아버지 슈도다나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지은 것이다.[5]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실존여부가 불분명하다. 등장도 야사인 《삼국유사》에 한정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동성왕과 혼인한 이찬 비지의 딸과 동일 인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6] 진평왕이 메고 있었던 천사옥대의 길이가 10위였는데 10위를 미터법으로 계산하면 150cm로 진평왕의 허리 둘레는 150cm 정도로 추측된다.[7] #[8] 이름을 그대로 사용. 《삼국유사》 기록.[9] 음란하다는 이유로 화백회의를 거쳐서 폐위당했다는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이 승하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10] 가장 짙은 색인 남원 운봉은 아막성 전투가 벌어진 지점이다.[11] 여제동맹은 삼국시대 최후반부에나 나타나고, 신라가 공동의 적이었을 뿐 여제동맹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제기되고 있을 정도로 실체가 불확실하다. 원래 고구려백제근초고왕 때부터 수백년간 사이가 나빴다.[12] 수나라가 붕괴한 이후에도 고구려와 신라는 사이가 좋지 않아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길을 막는 등 충돌이 계속되었고 추가로 백제까지 상대적으로 강성해지자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당나라에게 징징대어, 수나라에 이어 중원을 통일한 당 고조 이연이 고구려에게 '너네 사이좋게 지내라'라는 봉서를 보내기에 이른다. 6년간 6회에 걸쳐 사신을 보낸 기록도 있다.[13] 무왕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면 후방에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실제 전쟁 때는 참여하지 않았다.[14] 620년대 백제의 연이은 침공으로 신라 백성들이 삶이 힘들어 자식을 팔았다는 기록이 나왔다.[15] 이 정도면 최소한 건물 몇 채는 붕괴되었다는 얘기도 된다.[16] , <혜성가>의 진평왕대 왜구 침공도 실제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견해(강고운, 《향가신해독연구》, 한국문화사, 2004)와 혜성과 함께 연상된 상징적 부연으로 보는 견해(이승남, <혜성가의 배경적 의미와 문학적 형상화>, 《국어국문학》 123, 1999)가 둘 다 있다.[17] 박혁거세의 재위 기간은 60년에 맞추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설이 많다.[18]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수나라(581년 건국)와 당나라(618년 건국)가 들어섰고 고구려는 최후의 중흥기 왕으로 알려진 평원왕(559년 즉위), 영양왕(590년 즉위), 영류왕(618년 즉위), 백제 역시 위덕왕(554년~598년), 혜왕, 법왕, 무왕(600년)이 들어서는 최대의 난세였다. 이쯤 되면 무난한게 비범한 거란 말이 나온다.[19] 내물 이사금으로 등장하는 《삼국유사》에서는 내물 마립간이 57년 (345년~402년)으로 재위가 좀더 길고 《삼국사기》에는 45년 10개월 (356년~402년) 이다. 그 다음은 흘해 이사금의 45년 10개월 (310년~356년).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38년 (308년~345년)이다. 흘해 이사금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석우로의 아들인데 석우로가 죽은 후 100년이나 더 살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뢰가 떨어져서 재위년이나 계보 중 하나가 잘못 기록된 것이라는 설이 있기는 하다.[20] 옥대의 옥이 하나하나가 다 이어서 그 중 하나를 떼어 에 던지자 용이 승천했다 한다[21] 사실 덕만이 장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22] 엄청난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록인데 땅이 갈라질 정도가 되려면 진도 6.5 규모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23] 진덕여왕의 아버지이다.[24] 이 극의 설정이며 실제 역사와는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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